정강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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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의 변
靖康之變

정강지변
시기
CE 1126년 ~ 1127년
장소
(중원 일대)
원인
송의 에 대한 의무 불이행[1]
교전 세력


(수비군)




(공격군)


주요 인물
지휘관

휘종 (송 태상황)
흠종 (송 황제)
지휘관

태종 (금 황제)

참가자}}}
이강


참가자}}}
완안종망
완안종한
완안종필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송의 영토 상실과 수도 천도
송의 외교적 굴욕[2]
영향
송금전쟁의 지속
개희북벌의 명분[3]
1. 개요
2. 전개
2.1. 발단
2.2. 전개
2.3. 절정
2.4. 결말
3. 휘종흠종의 여생과 최후
4. 나머지 황족과 궁녀들의 운명
5. 기타
6. 매체에서의 등장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126년 북송여진족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흠종을 포함한 황족들이 몽땅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당시 북송의 연호정강이었기 때문에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역사팬덤들에게 영가의 난, 토목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 왕조의 3대 굴욕 사건으로 거론되기도 한다.[4]


2. 전개[편집]



2.1. 발단[편집]


1115년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완안아골타가 통일국가 금을 건국하고, 당시 막장 상태였던 요나라를 말 그대로 개박살내기 시작하자,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에게 바치던 공물을 금에게 바치면서 협공을 제의했다. 물론 금 입장에서도 손해볼 것이 없는 제안이라 금은 이를 수락했다.

이 동맹 소식을 들은 고려 측은 여진족은 거란족과 뿌리가 별반 다르지 않아 그 신뢰성 또한 마찬가지라며 여진족과 손잡아선 안 된다고 조언했으나 송은 이를 무시했다.

당시 휘종과 송나라 조정은 여진을 이용해 거란을 제압하고, 숙원인 연운 16주를 회복하여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송군은 병력만 많았을 뿐 내부적인 여러 문제로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북송의 문치 위주 통치 방식은 내부적으론 호황기를 가져왔으나 외부적으론 군의 지나친 영향력 약화도 가져왔고, 전시 상황에서도 군대가 중앙정부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 북송은 방랍의 난을 간신히 진압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멸망 테크를 타던 요나라조차 이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송은 금나라로부터 협공하기로 약속받은 뒤에도 한창 무너지던 요나라를 상대로도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이때 당시의 요군은 제대로 된 군대도 아니고, 금나라의 침략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수군(瘦軍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는 군대라는 뜻)이라는 임시 군대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런 수천 명의 수군한테 무려 10만 명의 송군이 패배하고 쫓겨났으니, 이 당시 송군의 전투력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협공하자고 해놓고 정작 제대로 된 승전을 하나도 못거둔 송나라의 행태를 본 금은 당연히 분노할 수 밖에 없었고, 송나라가 일부러 진군을 늦추고 금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여, 바로 사신을 보내 송에 항의하였다. 송은 연주 6주(송의 연산부)의 토지만 챙기는 대신, 연주 내의 모든 재물과 금이 공략한 운주(현 다퉁) 10주를 양도하고 공물을 더 바치는 조건을 제시하여 숙이고 들어갔다. 금도 이런 송의 태도에 만족해 화를 풀면서 당장의 갈등은 해소되었다. 그렇게 1125년 요나라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 속에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금나라의 수도로 압송되고, 남은 잔당 세력은 서쪽으로 튀면서 카라 키타이/서요가 된다.


2.2. 전개[편집]


하지만 문제는 요가 멸망하자 북송이 입을 싹 닦아버렸다는 것이었다. 송이 금에게 바친다는 공물은 바치지도 않고, 이미 거덜난 요의 천조제랑 접촉하여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정치공작을 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송나라는 그나마 수나라, 당나라 시절부터 중화의 문물에 감화된 요나라를 비록 이민족이라 할지라도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한 국가라고 인식은 하고 있었으나[5], 금나라의 경우 단순히 벼락출세한 야만족 집합체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실제 같은 북방민족이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하며 거대한 행정국가를 운영해온 거란과, 이제 막 부족연맹체 단위에서 초기 국가로 거듭난 금나라는 상당한 간격이 있었다.[6] 비교적 오래동안 교류한 고려인들 또한 단 한번도 여진족을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라 여겨준 적이 없는 수준이었으니[7] 하물며 동시대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가임을 자부하는 송나라인들의 눈에 여진족들이 어떻게 비춰졌겠는가.

어찌되었든, 송의 배신에 분노한 금은 바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막으러온 북송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인 변경(개봉)을 포위했다. 이때 그 와중에도 정신 못차리고 사치와 도교에 심취하던 휘종이 곽경[8]이라는 도사인 척하는 사기꾼에게 낚여 육갑신병이라는 진법을 세우면 막을 수 있을 거라며 자만심을 드러내다가 가볍게 금에게 박살났다.

상황이 이렇자 원인제공자였던 휘종은 잽싸게 장남 흠종에게 양위하고 남쪽으로 피난가서 책임을 회피했다. 흠종은 얼떨결에 제위를 물려받자 이강이 개봉에서 금군을 막아내고 구원군들이 몰려오는 판세 아래에서 태원부(산시성 타이위안시), 하간부(허베이성 창저우시 허젠시), 중산부(허베이성 바오딩시 딩저우시)의 하북 및 하동 영토 할양과 금 1천만 냥, 은 2천만 냥, 비단 1천만 필의 배상금 지불 조건으로 화의를 맺어 일단 금나라는 철수. 혹떼려다 혹 더 붙인 꼴이 되버린 흠종은 이러한 사태의 주범들인 간신들(동관, 양사성, 채경, 채유, 주면 등)을 유배하거나, 처형한다. 여기까지만 그쳤다면 치욕스럽게 영토는 좀(?) 잃었어도 화북 대부분을 보전할 수는 있었을 것이었지만...


2.3. 절정[편집]


그러나 그나마 아버지 휘종보단 나은 듯한 행동을 보였던 흠종조차 결국 주전파 대신들의 의견에 찬동해 금을 상대로 하는 주전론에 불을 지펴버렸고 금과 한 약속을 또(!) 파기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금은 크게 분노해 바로 군대를 보내 포위만 하던 이전과 달리 변경을 공략하였고, 1126년 11월 결국 변경이 장장 8개월 지속된 공방전 끝에 함락되어버린다.[9]

함락된 수도 변경에서 금나라군은 송조의 재상 장방창을 협박해 괴뢰정권 (위초)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북송의 황족 및 관료 3천 명을 포로로 삼고 대량의 서적, 보화, 재물, 보물, 그림 등과 함께 북방으로 끌고 갔다. 이때 변경에서 붙잡힌 송조의 관료와 황족들은 금나라의 강요로 인해 장방창의 즉위를 지지하는 서명을 하게 강요했다. 이 와중 딱 한 사람만이 '송나라의 황성이 될 수 있는 건 조씨뿐이다.'라며 반대했는데, 이 충신이 바로 훗날 악비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되게 만든 진회이다.

이로 인해 송은 한 차례 멸망하고 수도 변경을 비롯한 화북 지역은 금나라의 점령하에 들어간다.

본래 북송이 군사력이 약하기는 해도 수도가 2번이나 연속으로 함락될 정도로 국력이 약하지 않았고, 오히려 압도적인 경제적으로 북방민족을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송휘종의 실정으로 국가재정은 파탄이 나고 곳곳에 일어난 반란으로 군사력은 분열된 끝에, 북방민족을 회유하지 못하고 적을 방어할 군사도 부족한 상태에서 대책없이 금나라와 전쟁을 선택한 댓가로 수도가 함락되고 두 명의 황제가 포로가 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것. 훗날 애산 전투에서 몽골이 고전할 정도로 남송군민이 저항한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결말이다. 그만큼 송나라에서 송휘종을 위해서 싸워준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


2.4. 결말[편집]


금에 의해 강제로 세워진 장방창의 위초는 괴뢰국가로서 송의 백성들에게 영 인심을 사지 못했다. 이에 금나라로 끌려가지 않았던 철종의 폐후 소자성헌황후 맹씨를 복권시켰다. 장방창은 그녀를 다시 황태후로 복위시켜 이를 통해 정통성과 적법성을 노렸다.

하지만 황태후는 휘종의 9남이자 흠종의 이복동생으로 당시 제주 지방에 있어 유일하게 포로가 되지 않은 강왕 조구에게 '장방창은 적법성, 정통성, 명분이 없으니 어서 빨리 천자 자리에 오르라'는 친필서한을 써서 보냈고, 이 서한을 받은 강왕은 제위를 선양받아 남송의 초대 황제인 고종으로 즉위한다. 송고종은 즉위하면서 소자성헌황후 맹씨의 친필서한을 읽고 이를 하늘에 고했다고 한다.

이렇게 강왕이 고종이 되어, 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는 꼴을 겪지 않고 남쪽에서 명맥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강제로 황제가 되었던 장방창은 이후 탈출하여 남송에 귀순했으나 용서받지 못하고 자살을 명받아 장방창은 자살한다. 아무리 본의가 아니며 강요를 받아 강제로 된 것이지만 고종 입장에서는 감히 제위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큰 죄였던 것이다. 사실 그나마 이것만으로 끝났다면 참작의 여지가 약간이나마 있었고, 실제로 고종 역시 장방창이 귀순한 직후엔 벼슬을 강등하고 멀리 귀양을 보내는 정도로 끝내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장방창이 휘종의 후궁인 화국정공부인(華國靖恭夫人) 이씨와 간통으로 의심되는 짓을 하고 궁중에서 멋대로 술을 마시거나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사면령을 내리는 등의 참람된 행위를 했음이 밝혀지자 결국 고종도 더는 용서하지 않고 자살을 명한 것. 후궁 이씨 역시 장형을 받고 작위를 박탈당하여 군영에서 잡일을 하는 벌을 받았으며 얼마 안 가 죽었다.

이런 송의 움직임에 격노한 금나라는 여세를 몰아 다시 침공하여 송의 고관인 유예를 또다른 괴뢰국가인 (위제)의 황제로 세운다. 고종은 저항했지만 송의 군사력으로는 금에 대항할수가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기에 결국 피난을 결정한다. 금은 장강을 건너 고종을 추격하여 양주, 남경, 임안(현 절강성 항주), 월주(현 절강성 소흥), 명주(현 절강성 영파)를 잇달아 점령하고 일군은 강서성까지 진격하였으며, 도망친 고종을 온주에서 급기야 해상으로 내몰아 전 중국을 정복할 기세였다.

하지만 금은 화북과는 다른 강과 하천이 많은 화중, 화남의 기후, 지리악비, 한세충 등을 주장(主將)으로 한 송군의 반격, 벼락출세한 여진족들이 화북을 점령해 통치하면서 살육과 약탈을 하도 저질러 화북 전체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바람에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 등으로 고전하게 된다.

그래서 금은 관중을 점령하고 사천성 입구까지 침입하는 등 금과 송이 장강을 경계로 에워싸고 일진일퇴를 전개하였지만 불리한 금이 개봉 및 황하 이남을 포기하고 다시 하북으로 퇴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진회를 위시한 송의 화평파가 악비 등의 주전파를 배제시키고 금과 강화를 체결한다. 이로써 회하에서부터 대산관까지를 경계로 삼아 유예의 위제를 폐하고 금나라가 정식으로 화북을 통치하게 되어 중원 대륙은 본격적으로 2차 남북조시대의 형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역사는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나왔다고 평한다.

80몇 년 뒤 남송의 권신 한탁주가 이 치욕스러운 사건을 되갚아 주기 위해 개희북벌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그리고 이 사태는 금애종 때 다시 몽골에 의해 반복된다. 그것도 훨씬 더 끔찍한 양상으로.

결국 금 애종 천흥(天興) 2년인 1234년 애종의 머리는 남송 당대 최고의 명장이자 최후의 명장맹공에 의해 댕강 잘려나갔고 금에 대한 복수를 하는데 100년이 걸려서야 성공을 하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단평의 입락이 일어났고 남송제2의 정강의 변을 당하여 이변에는 마침내 완전한 멸망을 맞이 하게 된다.


3. 휘종흠종의 여생과 최후[편집]


금태종은 끌려온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덕을 망친 공작),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 덕을 따블로(…) 망친 후작)란 작위를 내려 조롱했다.[10] 공과 후는 작위로 보자면 보다도 아래이니, 제왕의 지위도 부정 또는 강등한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였는데 판단 하나 그르쳐서 받는 엄청난 치욕. 특히 흠종은 더 억울할 듯

또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하여 붙잡힌 북송의 포로들은 금의 영토에서도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국성, 즉 현재의 헤이룽장성 하얼빈 이란현 근처에 단체로 모여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곳이 함경북도 회령이라는 설이 있으나 한국측 사서에서만 주장하는 이야기고 중국 학계에서는 오국성이 하얼빈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11]

금나라의 초창기 수도가 오늘날 하얼빈시 아청구에 위치했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였기 때문에 금나라 입장에서도 황족급의 중요한 죄수들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안치시키기보다는 수도 가까운 곳에 수감시켜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휘종은 원래 금나라 영토에 묻혔다가 고종에게 유해가 돌아와 남송의 영우릉에 묻혔다. 그러나 채 200년도 안 지나 원나라 때 영우릉이 라마승이자 강남석교총통 양련진가에게 도굴되었으니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12] 흠종의 무덤은 사서에서는 흠종은 오늘날의 허난 성에 매장됐다고 한다.

거리가 거리다보니 구사일생으로 일부 쇼생크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 금나라 땅에서 생을 마쳤다. 탈출한 사람 가운데선 남송의 재상에 오른 진회악명으로 유명하다. 그동안은 송나라 황족들이 비인격적인 학대를 받았다고 알았지만, 현재는 그래도 최소한의 대우는 해줬다는 쪽으로 설이 바뀌는 추세. 자세한 내용은 후술된 문장 참조.

한편, 뒷날 고종의 노력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돌아오고 아버지 휘종의 유해 등을 비롯하여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 대부분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환했다.

나라를 망친 휘종은 물론 흠종은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계승원칙으로 정통성 문제가 불거질 염려가 있다는 까닭에 고종이 거부하여 아예 송환조차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흠종 같이 불행한 사례가 대다수였고, 선택받은 소수만 유해의 일부가 귀향에 성공했다.

송태종의 자손들은 원래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머물던 대부분의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송 태조의 자손들이 이후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물론 태종의 후손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남송의 재상을 지냈던 조여우로 태종의 8대손이었다.[13] 하지만 조여우도 이 때문에 고종의 적지 않은 견제를 받다가 결국 실각했으며, 조여우 이후 태종의 자손들 중에서 유명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휘종과 흠종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남신기문록(南燼紀聞錄)이라는 책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위작이자 야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책의 내용대로 금나라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기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송선화유사에 수록된 이야기 역시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두 황제를 따라 금나라로 간 채경의 아들 채조가 기록한 북수행록(北狩行錄)과 신음어(呻吟語) 등 다른 서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달리 휘종과 흠종은 심각하게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진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수의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첫 번째 학대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완안아골타의 차남 완안종망(여진명 '알리불')은 오히려 휘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대접을 했다.[14]

휘종이 금나라에 도착할 때 금나라로부터 비단과 생견을 하사받았으며 금태종의 명령으로 휘종 부자가 견양례등 굴욕적인 의식에 참가하고 폐서인되어 평민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의 베이징 근처인 연산부에서 머무를 때 상당히 편하게 머물렀다고 한다.

후에 남송에서 북진 움직임을 보이자 휘종 일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때부터 휘종 자신이 직접 초가집 지붕을 잇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 등 이전보다 힘들고 궁핍하게 산 건 사실이나 역시 학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자신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온 하인에게 "도 초가집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덤덤하게 말하기도 했다.

특히 황제시절보다는 빈궁한 생활이었지만 송나라 사람들이 받았다는 논밭이 45경이라고 하는데 1경이 3000평 정도 되는것을 보면 빈궁하고 고되기는 했어도 야사에서 말한 것처럼 억지로 썩은 음식을 먹고 지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휘종의 며느리들이 금나라 종실의 처첩이 되면서 금태종이 휘종에게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칙조를 내리며 끝나게 된다.

예전에 의 여자 여섯 명을 종실의 부인으로 취했으니 너의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인척에게는 장사를 시켜 돈을 벌어 말년에 의식이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 그대의 딸과 며느리가 궁궐 침소에서 시봉을 든 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조심하고 경계하여 잘못됨이 없어 은혜를 베풀어 돌보아 주고 있다. 이렇게 정숙한 자세는 본래 그대가 키워 준 것이므로 비단 10단을 내려 천자의 은총을 보여 주겠다.[15]

신음어(呻吟語)


거기에다 휘종은 금나라에 가서도 아들과 딸을 또 낳는다. 청나라 때 '만주 8성'으로 불렸던 이르건기오로(伊爾根覺羅)씨는 자신들을 휘종과 흠종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저 칙조를 받은 그해에 휘종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악(趙㮙)이 아버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금태종에게 무고했다가 휘종의 부마와 함께 맞아 죽었다. 역시 금나라에 의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해진 천조제의 노비들이 천조제를 무고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했다.

그러나 휘종·흠종 등이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종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나머지 황족들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금태종·금희종·황족·장군의 이 되었으며,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 역시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굶주림으로 3천 명 중 2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정강의 변 이후 흠종 역시 금태종의 뒤를 이은 금희종이 태종 때 흠종에게 내린 중혼후라는 모멸적 칭호 대신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봉해 주었으며 희종은 흠종에게 녹봉도 줬다. 일부에서는 아예 희종이 흠종을 귀양지인 오국성에서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녕부로 불러와 살게 해줬으며 흠종을 너그럽게 대해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황상 흠종에 대한 대우가 종혼후 시절보다 좋아진 건 맞는 듯하나 중국에서는 천수군공이라는 의미도 좋게 보지 않는다. 대놓고 모멸적인 의미의 종혼후에서 모멸적인 부분을 없앴지만 폐서인 된 포로에서 망국의 황족 취급으로 바뀐 정도.

이런 기록들뿐만 아니라 금사(金史)에는 휘종과 흠종이 죽자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물론 금사의 기록임은 감안하더라도 화살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쏜 후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는 따위 후일담은 과장된 괴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황제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던 사람이 평민으로 강등되어 농사 짓고 살게 된 점웰빙은 휘종이나 흠종 자신에게 있어 매우 고되고 비참한 치욕이었겠지만 금나라 측에서 의도적으로 학대한 일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로 당시 떠돌던 황제 일가의 비참한 말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한족 지식인들의 과장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추세다.[* 한참 이전 시대이지만 비슷하게 후한헌제 유협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위 정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촉한에 잘못 퍼졌었다. 이 역시 익주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유비의 황제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인지 몇 년이 지나도 소문이 정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당시에 정보가 느려도 헌제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산양공으로 격하돼 살고 있음은 늦게라도 알았을 텐데도 에서는 계속 모른 척했다.



4. 나머지 황족과 궁녀들의 운명[편집]



정강의 변 당시 금나라로 끌려간 송 휘종의 자식들 https://m.blog.naver.com/d916d021/220551141424

송 휘종에게는 딸, 공주들이 21명 있었다. 있었는데 한명 한명 후술된 행적들을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전원이 금나라 황족, 귀족들의 첩이 되거나 심지어 내기 상품으로 걸리기도 하고 금나라에서 운용하던 위안소인 세의원(洗衣院, 금나라 관기의 기방)에 들어가 관기 노릇을 하게 되며, 심하게는 살해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비참함의 극치이며 황녀들이 이럴 정도니 다른 후궁이나 궁녀들의 운명은 일일이 따져볼 것조차 없을 것이다.

아래 명단에서 '제희(帝姬)'는 휘종이 '공주'를 대신하여 만든 작위이다.

  • 장녀 가덕제희(嘉德帝姬) 조옥반(趙玉盤, 1100~1140):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8세, 좌위장군 증인(曾夤)에게 출가하여 1녀를 두고 있었다.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금나라 송왕 완안종반의 첩이 되었으며 완안종반이 반역죄로 주살된 후에는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다. 딸은 훗날 완안올실의 3남의 첩이 되었다.
  • 차녀 영덕제희(榮德帝姬) 조금노(趙金奴, 1103~?):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5세. 좌위장군 조성(曹晟)에게 출가하였으며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완안창의 첩이 되었다. 완안창이 주살된 후에는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다 .
  • 3녀 안덕제희(安德帝姬) 조금라(趙金羅, 1106~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2세. 좌위장군 송방광(宋邦光)에게 출가하여 1녀를 두고 있었다.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금나라 도통 완안도모의 첩이 되었으나 얼마후 살해되었다. 딸은 포로가 되지 않았고 훗날 남송의 수왕 조백규에게 출가했다.
  • 4녀 무덕제희(茂德帝姬) 조복금(趙福金, 1106~1128):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2세. 선화전시제 채조(蔡絛)에게 출가하였으며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금나라 2황자 완안종망의 첩이 되었다. 완안종망이 죽은 후에는 완안희윤의 첩이 되었다.
  • 5녀 성덕제희(成德帝姬) 조호아(趙瑚兒, 1110~?):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8세. 향자방(向子房)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 6녀 순덕제희(洵德帝姬) 조부금(趙富金, 1110~?):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8세. 전비(田丕)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진주대왕 완안설야마의 첩이 되었다.
  • 7녀 현덕제희(顯德帝姬) 조교운(趙巧雲, 111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7세. 유문언(劉文彦)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전 남편 유문언 역시 포로가 되어 끌려갔는데 1132년 송나라 황자 조구와 함께 휘종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했다가 무고임이 드러나 도리어 처형당했다.
  • 8녀 순덕제희(順德帝姬) 조영락(趙纓絡, 111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7세. 향자의(向子扆)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완안종한의 첩이 되었다. 훗날 완안종한에게서 풀려났으나 다시 금동로도통 습고국왕의 첩이 되었다.
  • 9녀 의복제희(儀福帝姬) 조원주(趙圓珠, 111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7세.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훗날 완안종필(금울출)의 첩이 되었다.
  • 10녀 유복제희(柔福帝姬) 조현현(趙嬛嬛, 1112~114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완안종망(完顔宗望)의 첩이 되었다가 그가 주살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이후 개천대왕 완안종현(蓋天大王 完顔宗賢)과 부하장수 서환의 내기 상품이 되었는데 내기에서 이긴 서환(徐還)에게 내려져 그의 부인이 되었다. 사망 후 유해는 남송으로 돌아와 화국장공주(和國長公主)란 시호를 받고 장사지내졌다.
  • 11녀 보복제희(保福帝姬) 조선랑(趙仙郞, 1112~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
  • 12녀 인복제희(仁福帝姬) 조향운(趙香雲, 1112~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
  • 13녀 혜복제희(惠福帝姬) 조주주(趙珠珠, 1112~?):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보산대왕 완안사보의 첩이 되었다.
  • 14녀 영복제희(永福帝姬) 조불보(趙佛保, 1112~?):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 15녀 현복제희(賢福帝姬) 조금아(趙金兒, 1112~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
  • 16녀 영복제희(寧福帝姬) 조관주(趙串珠, 1114~?):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4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연왕 완안종준의 첩이 되었다. 완안종준이 주살된 후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熙宗)의 첩이 되었다.
  • 17녀 화복제희(和福帝姬) 조금주(趙金珠, 1116~?):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2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 18녀 영복제희(令福帝姬) 조금인(趙金印, 1118~?):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0세.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훗날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熙宗)의 첩이 되었다.
  • 19녀 화복제희(華福帝姬) 조새월(趙賽月, 1119~?): 정강의 변 당시 나이 9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훗날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으며 훗날 비(妃)에 봉해졌다.
  • 20녀 경복제희(慶福帝姬) 조금고(趙金姑, 112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7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훗날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다.
  • 21녀 순복제희(純福帝姬) 조금령(趙金鈴, 1124~?): 정강의 변 당시 나이 5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훗날 완안설야마의 첩이 되었으며. 이후 통역관이던 왕성체(王成棣)에게 하사되어 그의 부인이 되었다.

이렇게 휘종은 자신의 부인들과 딸들과 궁녀들이 오랑캐들의 노리개가 되었지만 아주 태연했는데, 그가 어느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때가 있었다. 그 소식은 바로 자신이 모은 서화 컬렉션이 금나라 병사들에 의해 훼손되고 약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심지어 금 태종은 송나라 휘종의 딸들을 후궁으로 취하고, 너의 딸이 내 아이를 낳았으니 너에게도 옷 두 벌을 보내주마 라는 서신과 함께 송 휘종에게 옷 두 벌을 보냈는데 말이 좋아서 선물이지 실제로는 휘종을 제대로 모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송 휘종은 저같이 쓸모없는 놈과는 달리 제 딸들이 폐하에게 도움이 되니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을 많이 생산하시길 기원합니다.로 답했다. 어찌보면 비굴하게 보이겠지만,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흠종의 부인인 인회황후는 27세였고 금나라 황궁으로 끌려와 금황제에 수청을 들라는 명을 받았으나[16], 더이상의 굴욕을 거부하고 자결을 택했다. 금태종은 이를 듣고 정실부인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5. 기타[편집]


한편 정강의 변으로 공자의 종가도 분열되었다. 곡부의 공묘를 지키던 연성공(공자의 적통에게 내려진 작위) 공단우는 남송 조정을 따라 남하해서 절강성 구주(衢州, 현 취저우)에 새로운 공묘를 세웠다. 곡부에는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가 남았는데, 이후 금나라는 공단조를 새 연성공으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공단우의 가문을 남종, 공단조의 가문을 북종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원나라쿠빌라이 칸이 남종의 종손인 공수(孔洙)에게 곡부로 돌아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면서 어느 쪽을 정통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논란이 불거질 뻔하였는데, 공수가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 자리를 양도하는 용단을 내려 집안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이를 공수가 연성공 작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공수양작(孔洙讓爵)'[17]이라고 부른다.

휘종, 흠종과 비슷한 굴욕을 겪은 황제가 있는데 서진회제(서진), 민제(서진), 명나라정통제, 서양사에서는 로마 제국발레리아누스가 있다.


6.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정충악비에서 나온 이 장면이 굉장히 유명하다.

사조영웅전에서 구처기곽정양강의 이름을 이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양강은 치욕이라 생각 안하는 건 안 자랑

수호전에서는 복선으로 전호편에서 전호의 부하인 범권이 병주 옆에 있는 금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고 말하자. 농민 출신의 변상이 "우리가 반란군이긴 하지만 금나라에 붙었다간 큰일날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농민도 알고 있고 반란군도 이런 짓을 안 하는데 이걸 한 북송 조정은 답이 없는 막장임을 알 수 있게 묘사하였다. 수호후전에서 본격적으로 나온다.


7. 관련 문서[편집]



[1] 1120년에 맺은 '해상의 맹'[2] 휘종과 흠종, 송의 황족들이 패전으로 인해 인질로 끌려갔다.[3] 사실 한탁주가 조정 내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 이다.[4] 이 사건이 100년 이상 동안 송나라와 금나라가 전쟁을 치르게 될 송금전쟁의 시작이었다.[5] 실제 요나라는 중화와 발해의 앞선 문화를 흡수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성취를 이뤄냈다. 자세한 건 거란, 요나라 문서 참조[6] 근세로 치면 송나라가 여진을 보던 시각은, 명나라의 한인들이 만주족들의 청나라를 보는 시선과 비슷했을 것이다.[7] 태조 왕건부터 "여진족은 겉은 사람처럼 생겼지만 속은 짐승 같아서 배 고프면 와서 붙고 배 부르면 등 돌려 가 버리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족속들이다"라며 그들을 성안에 들이지 말고 성 밖에 관사를 지어서 대접하도록 명했다.[8] 해당 인물은 수호전의 후속작인 후수호전에서 동명의 인물의 모티브가 되었다.[9] 먼 훗날 남송의 애산 전투때까지 곳곳에서 남송을 돕기위해서 의병이 일어나거나 수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남송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과 비교해 보면, 정강의 변 당시 송휘종의 실정으로 국가가 막장이 되었기에 소수의 저항세력을 제외하면 송휘종을 위해서 싸워주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10] 이 작위는 일회용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암군에게 종종 내려졌고, 즈엉녓레예종(쩐 9대)에게 이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1] 현재 북한 회령 고령진역 인근 주요 지역에 황제총이 두 곳이나 있는 등 상당수의 무덤이 남아있는데, 모두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한 황족들의 무덤들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황제총 두 곳은 오국성에서 죽은 휘종과 흠종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오국성의 위치가 만주 하얼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단순히 지역 설화일 가능성이 크다. 증거라는 것이 중국 동전 등이 나왔다는 것인데 이런 유물은 만주에서도 출토되고 있다.[12] 물론 이건 원에서도 문제가 되어 양련진가는 사형된다.[13] 다만 송태종의 폐태자 조원좌의 후손이라 정통성은 떨어졌다.[14] 정충악비에서도 다른 여진인들이 포로가 된 송나라 사람들을 학대하고 능욕할 때 알리불만이 동참하지 않고 심란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그 옆에 올출은 썩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포로라도 황족들인데 예우는 갖춰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15] 금사에 따르면 비단옷을 하사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16] 정확히는 "목욕"을 하라는 명을 받았다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17] 원사엔 공수양작에 관한 기록이 없고 당시 북방 사인들과 쿠빌라이 칸의 관계에 비추어볼 때 애초에 남인인 공수에게 연성공의 작위를 잇게 했을 리가 없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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