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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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동상

鄭起龍
1562년(명종 17) 5월 26일 ~ 1622년(광해군 14) 4월 8일 (향년 59세)

1. 소개
2. 생애
2.1.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2.2. 전후
3. 기타
4. 같이보기


1. 소개[편집]


임진왜란에 활약했던 조선의 장수. 본관은 진주(晉州)로 훗날 곤양 정씨(昆陽 鄭氏)[1]의 시조가 된다. 자는 경운(景雲) , 호는 매헌(梅軒), 초명은 정무수(鄭茂壽).

후에 영조 대에 와서 충의공(忠毅公)으로 격상되었다.


2. 생애[편집]


1562년 5월 26일 경상도 곤양현 금양면 중평리(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2]의 몰락한 양반가[3]에서 정호(鄭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정철석(鄭哲碩), 조부는 정의걸(鄭義傑)인데, 정기룡이 출세한 이후 3대가 각각 호조 참판(종2품), 호조판서(정2품),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 추증되었다.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의 아내 예천 권씨[4]가 그의 관상과 됨됨이를 보고 그를 성심껏 내조했다고 한다. 25세 되던 1586년(선조 19), 그가 무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선조가 자다가 꿈에서 종각에서 자는 을 보았고, 다음날 종각에 가서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기룡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별시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자, 선조가 친히 정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2.1. 임진왜란에서의 활약[편집]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 기준이 딱 나뉘는데 이순신과 권율은 바다와 육지에서 일군을 이끄는 원숙한 지휘관이고 한명련과 정기룡은 저돌적인 용맹으로 출세한 30대 젊은 장수들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손꼽히는 용장은 개전 초에 전사한 신립을 제외하고, 황진, 장윤, 이종인 등이 들어가는데, 정기룡도 이들 못지 않은 혁혁한 무용을 보여주었다.

세간에 알려진 약력에 의하면 상관인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단기 필마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 공식적인 기록에서 정기룡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4개월이나 빠른 1592년 5월. 참패로 유명한 용인 전투 초기에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2일 ~ 3일 전 단신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규모 일본군과 마주치자 이를 단신!으로 공격해서 격파한 것이다. 당시 경상 감영 아전으로 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아전이 남긴 기록 <정만록>에 실린 경상 감사의 장계 사본[5]에서 처음 나온다. 훗날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공훈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전과에 자극받은 타도 감사들이 세력도 약한 경상 감영만 공훈을 세우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진격을 서두르다가 용인에서 크게 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51130100812.384.3.jpg

감사군(敢死軍)이라는 부대를 이끌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어온 편곤을 무기로 마상에서 편곤을 휘두르며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었다.


2.2. 전후[편집]


1601년 울산부사를 역임했고 1610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일본과의 외교는 재개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여파가 워낙 엄청났던지라 정기룡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보직되었다.


3. 기타[편집]


  • 광해군 때 통제사에 자리에 오르지만 후궁들에게 뇌물을 써서 승진했다는 소리도 있고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있으나 무죄로 판명되었다.

  •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 하동군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다.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6]는 정기룡 장군의 고향으로, 그의 탄신지에는 생가와 사당인 경충사(景忠祠) 및 관련 문화재 세 점이 전해지고 있다. 상주시에는 정기룡의 묘소와 사당인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관련 기사 상주시에서는 정기룡 장군을 소재로 뮤지컬을 제작한 적도 있다.

  • 은근히 대한민국 육군에서 밀었던 인물인 거 같은데, 해군이 이순신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거 같다. 실제로 2010년대 초반에 육군에 비치된 책자에서 정기룡을 이순신과 동급인 조선의 수호신인 것마냥 설명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이 항목만 잘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무리수인 주장이라서 별 호응은 없었던 거 같지만...



  • 2020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전기역사소설 정기룡이 출간되었다.


4.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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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 인구조사에서 450가구 1,416명으로 나타난 희귀 본관이다.[2] 인근의 대송리·대치리·덕천리와 함께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3] 진주 정씨 자체가 계유정난갑자사화에 박살난 가문이다.[4] 권홍계(權弘啓)의 딸이다.[5] 실록에는 접수 사실만 보고되고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록에서 원균의 적전 도주 이야기가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6] 현재도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