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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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승
鄭起勝

출생
1928년 7월 23일 (95세)
충청남도 공주군[1][2]
학력
공주고등학교 (졸업 / 22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경력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대전지방법원 판사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장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형사법원 부장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 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부원장
서울민사지방법원장
서울형사지방법원장
대법원 판사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회장

1. 개요
2. 생애
3. 1988년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법조인.


2. 생애[편집]


1928년 7월 23일 충청남도 공주군(現 공주시)에서 태어났다. 공주고등학교(22회)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대전지법 홍성지원장, 서울형사지방법원, 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부원장, 서울민사, 형사지방법원장을 거쳐 1985년 3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하여 대법원 판사임명되었다.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에 의하여 대법원장으로 지명되었으나, 국회 본회의에서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부결되어 대법원장이 되지 못하였다.

1998년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을 창립하여 회장이 되었다. 200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에서 제17회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에는 국회 측 대리인(소추인단)으로 나섰고 2017년 2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으로 합류하였다.


3. 1988년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편집]


1988년 7월 1일 당시 제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은 정기승 전 대법관에 대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성명에서 정기승 전 대법관에 대해 “정부가 유신시대대한민국 제5공화국 치하에서 사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시국사범 재판 등에 부당한 간섭을 일삼는 등 정치권력의 의도에 직접ㆍ간접으로 협조해 온 허물 있는 인사를 재조ㆍ재야 법조인들의 압도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동의를 요청한 것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사법부를 손아귀에 장악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폭거”라고 맹비난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과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 시국사범 재판에 부당한 간섭을 하는 등, 독재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결국 당시 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국회는, 1988년 7월 2일 정기승 전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7표 차이로 부결시켰다. 이는 헌정 사상 최초의 부결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3]이었다.

참고로, 이때 평민당과 민주당 소속의원 131명 전원은 백지투표를 하면서 기권하였고 무소속 의원들 2명의 반대표가 있었으며, 여당과 공화당에서도 3명의 기권표, 4명의 반란표와 14표의 무효표가 나왔다.

이는 신민주공화당 총재인 김종필은 고교-대학 직계후배이자 중앙정보부장 시절에 자신과 호흡이 잘 맞았던 정기승을 지지했지만, 공화당 초선 의원들이 찬성 시 '가', 반대 시 '부'를 적어야 하는 국회법을 몰라서 투표지에 '정기승'이라고 써 무효표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임명 동의안이 부결되었다는 것이 정론이다. 다만, 이는 무효표가 14표 밖에 안되고, 일부 민정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의 반발때문이라는 기사도 있기 때문에 정말 그런지는 모른다.

결국 이 부결은 여소야대 국회의 한계를 절감한 노태우 정권이 90년 1월 3당 합당을 감행하도록 만든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4.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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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충청남도 공주시[2] #[3] 정기승의 임명안이 부결된 지 35년만인 2023년 10월 6일 이균용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서 유일한 사례는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