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철(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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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 정치인.

2. 생애[편집]


1909년 2월 28일, 함경남도 신흥군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님이 중국 장백현으로 이주하면서 만주에서 성장하였으며 장백 제4소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1930년 초에 장백현 13도구 도천리에서 야학을 차려 계몽운동을 했는데 북한에선 이게 김일성의 교시 덕분이라고 이빨을 까고 있다. 1936년에는 13도구의 구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물밑에서 조국광복회 활동을 했다 카더라. 하지만 김정숙과의 접선이 들통나는 바람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수년간 복역하다가 1944년에 병이 너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해방 이후 지방 사법기관에서 일하게 되었고,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46년 11월에 김일성과 재회하였다. '종파분자'들과 싸우느라 일시적으로 출당을 당하기도 했으나 김일성이 김책을 파견하여 복당시켜주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을 도운 공이 인정되어 1955년, 량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58년 인민위원장까지 승진하였다. 1959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으며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내각 림업상에 임명되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림업상에 유임되었으며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9월 2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림업상에서 해임되어 중앙검찰소 검사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1년, 전임 검찰소장 윤태홍이 사망하면서 후임 검찰소장에 임명되었다.

1972년 12월 26일,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법안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검찰소장에 유임되었다. 그러다가 1976년 12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진수에게 검찰소장 자리를 물려주었고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상설회의 의원, 법안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조국전선 중앙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4월 5일,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되었으며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말년에 김일성을 칭송하는 여러 저작물을 발표했다.

이후 별 소식이 없다가 1986년 11월 17일에 사망했다. 하필이면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의 혼란 중에 죽었기 때문인지 로동신문에 부고는 발표되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며칠 후에라도 부고는 발표하기 마련인데 부고 발표도 없이 치워버린 것은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어쨌거나 시신은 처음에는 애국렬사릉에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가 대성산혁명렬사릉으로 이장되었으며 반신상에 제막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조선대백과사전 17권.
  • 인민들 속에서 38(평양: 조선로동당사출판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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