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원/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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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
2. 프로 시절
2.1. 태평양 돌핀스 시절, 인천 소방서장 등극
2.2.1. 1996년 현대vs삼성 빈볼 사건
3. 피칭 스타일


1. 아마추어 시절[편집]


야구 명문팀으로 유명한 군산상고 출신이였으나 원광대학교 시절[1] 그만큼까지 그저 그런 선수로 프로에 대한 욕심은 없었고 실업야구 리그로 가서 취직하며 소박한 인생을 살고자 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아주 별 볼 일 없는 투수였던 것은 아니다. 큰 키에서 내리꽂는 패스트볼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타자들의 배트를 곧잘 부러뜨린다는 소문이 지역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다만 문제는 그놈의 제구력. 긁히는 날은 제대로 포수 미트에 뻥뻥 꽂혔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마음 먹은대로 공이 가지 않아 스스로 경기를 말아먹던 투수였다. 그야말로 미완의 대기, 조련되지 않은 야생마였던 셈.

다만 제대로 보여준 성과가 없었기에 호남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지 못했고 대신 투수난에 시달렸던 태평양 돌핀스가 198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2순위 지명을 하며 생각에도 없던 인천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2]


2. 프로 시절[편집]



2.1. 태평양 돌핀스 시절, 인천 소방서장 등극[편집]



박정현-최창호와 함께 신인 트로이카[3]를 형성하며 11승 4패의 성적을 기록, 태평양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4] 데뷔 첫 해 38경기 11승 4패 6세이브를 거둔 이후에도 한동안 선발투수로 활동했지만, 신인시절을 넘어서는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흔히들 데뷔 시즌인 1989년 정명원이 태평양 2선발이었다고 알고 있으나 기록을 보면 거의 스윙맨이다. 38경기 중 선발등판 횟수는 18회에 불과하며, 38경기(당시 5위) 6세이브(5위)에 138이닝을 기록했다.[5] 박정현과 최창호가 선발로 혹사당하고 정명원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혹사당했다는 것이다. 즉 전천후.[6] 게다가 정명원의 6세이브는 당시 팀 내 최다였다.

그러다가 1991년에 부활해, 132이닝을 던지며, 12승 6패 14세이브라는 다소 황당한 성적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 시기 정명원은 선발로 고작 5번 만을 나왔다. 7승은 불펜승으로 챙긴 셈. 거기에 규정이닝을 채운 건 덤... 롤코를 타다가 1992, 1993년은 부상을 당해 얼마 뛰지도 못 했는데, 1993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 1994년 스프링캠프 때 보직을 마무리로 바꾸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아무래도 선발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 생각했는지, 1991년의 활약을 보고 나서 마무리로 보직이 변경된 듯.

하지만, 1993년 팀이 1988년 이후 간만에 꼴찌를 하면서 팬들이 감독 차에 펑크를 내거나 선수들 차에 파손을 하는 기행을 일삼았는데 이는 1992년부터 감독이었던 정동진 감독이 부상으로 신음한 선수들을 고려하여 아픈 투수들이나 타자들에게 재활과 수술로 휴식기를 준 영향이 있었다. 94년 시즌 전 감독은 롯데에서 은퇴하고 두문불출 하던 옛 제자였던 김시진을 영입하는 초강수를 뒀고 태평양에서 은퇴한 김재박을 주루코치 및 수석코치로 기용하였다.

정명원은 1994년 본격적인 마무리 첫 해, 4승 2패 40세이브 ERA 1.36으로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이는 종전 선동열의 최다 세이브인 31세이브를 뛰어넘는 것이자, KBO 리그 최초의 40세이브 돌파 기록이다. 최소한 세이브 부문에서는 선동열보다 나은 투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한 최초의 선수. 이후 오승환이 47세이브로 아시아 신기록을 기록하긴 했지만[7] 철저한 1이닝 마무리였던 오승환과 달리, 이 시즌 정명원이 거둔 성적은 50경기에서 105⅔이닝을 던지며 거둔 평균 2이닝 마무리였기 때문에 이 때 정명원의 포스는 가히 전성기의 오승환 그 이상을 연상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이면서 타 팀의 타자들에게는 통곡의 벽 그 자체였다.

참고로 정명원 이후에도 수많은 마무리들이 있었지만 단일 시즌 40세이브는 정명원을 제하면 오직 5명만 기록했다[8]. 그 정도로 달성하기 힘든 대기록이다. 괜찮은 구속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마무리로만 가면 얼마 못 가서 불을 질러대는 걸 생각해 보면... 보통의 선수들은 10세이브도 힘들어했던 건 사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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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07월 17일 잠실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로 선정된 태평양 정명원 투수가 부상으로 받은 승용차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출처:스포츠조선)

이 차량은 그 당시 핫한 신차였던 쏘나타 II이며 친형인 교사 정상원 씨가 사용하였다.

올스타전에 출전해 3이닝 퍼펙트 투구를 보이며 (서군이 졌는데도)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1985년 김시진과 함께 투수가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유이한 사례다.

이후 태평양 돌핀스현대그룹에 인수되어 현대 유니콘스가 되자 창단멤버가 된다.[10]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편집]



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사실 정명원은 그해 마무리 투수였는데, 포시에 돌입하자 마무리 상황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 코치들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연이은 접전으로 현대의 자랑거리였던 투수진들이 지치자 맏형 정명원이 자원해서 선발로 등판했다. 그리고 그게 대박을 터트렸다.[11][12] 상대는 그 해 우승 팀 해태 타이거즈. 인천에서 4차전을 끝내고 잠실로 올라가는 길에 해태 타자들은 코감독의 무시무시한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는 카더라가 전해진다.

1998년 현대가 마무리 투수 조 스트롱을 영입하며 선발로 전환하였고, 주장 완장을 찼다. 첫 선발 등판 경기에서 5회를 버티지 못하고 6실점으로 탈탈 털렸는데, 그 다음 등판 경기에서 '완투승'을 시작으로 괴물 모드로 각성(...), 14승 8패 1.86의 성적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13][14]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6이닝 무실점 선발승을 따내면서 본인의 힘으로 팀의 첫 우승을 맛보는 감격을 누렸다. 이 때 생방송으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15] 한 말이 "같이 고생한 창호정현이가 없어서 아쉽습니다."[16] 그야말로 사나이들의 인정과 의리가 물씬 풍겨지는 진심어린 인터뷰가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1999시즌은 스트롱이 재계약에 실패하자 마무리 투수로 뛰었는데[17] ,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부진했다.

이 시기의 99현대의 투수진은 정민태김수경을 제외하면, 위재영, 최원호, 임선동 같은 선발자원이 단체로 부진했으며 조규제, 조웅천 등의 계투진도 시원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무리이자 투수진 최고참인 정명원까지 부진했으니....[18]

물론 99시즌이 역대급 타고투저도 감안해야 겠지만 투수진이 정민태와 김수경을 빼면 모두 부진해서 가을야구를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0시즌은 5선발로 뛰면서 5승을 거두는데 그쳤으며[19], 그 해 한국시리즈 4차전에 패전처리로 올라온 것이 그의 마지막 등판이 되고 만다.

그리고, 후배 염경엽과 함께 2001년, 개막전때 은퇴식[20]을 치루고 연수를 갔다.


2.2.1. 1996년 현대vs삼성 빈볼 사건[편집]


1996년 6월에 2위 현대와 1위 삼성 라이온즈인천에서 3연전을 벌였을 때, 처음 2게임을 모두 승리한 현대는 뒤지던 5회 말, 박충식을 상대로 한 장정석역전 만루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하고, 이후 삼성 백인천 감독은 투수를 박충식에서 이상훈으로 교체하였다. 교체된 이상훈은 나오자마자 6-7-8회에 걸쳐 현대의 이근엽, 권준헌[21], 박진만의 무릎[22] 근처를 연속 차례로 맞추었다. 현대 측 벤치에선 이를 고의적인 빈볼로 받아들이면서 심기가 크게 불편해졌다.[23]

당시 마무리로 뛰던 정명원이 7:1로 크게 이기던 상황에 9회 초 등판했는데,[24] 일단 첫 타자 양준혁에게 위협구를 던졌다. 양준혁이 이에 반발하자 정명원은 양준혁을 맞췄다. 이때, 양측간 패싸움이 크게 날 뻔했으나 결국, 정명원보다 나이가 적었던 양준혁이 참고, 1루로 걸어가면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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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측은 정명원보다 나이가 4세 위였던 이종두양준혁의 대주자로 내보내 이후에 벌어질 만한 빈볼 상황에 대비했으며, 곧바로 정명원은 특유의 빠른 직구로 다음 타자 이승엽의 등 부분을 맞추었다.[25] 이에 곧바로 양 팀은 크게 패싸움에 들어갔으며 경기가 끝난 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 정명원이 10게임 출장 정지 및 벌금을 내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삼성과 현대와는 더욱 앙숙 관계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정명원은 현대 고위 간부로부터 금일봉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훗날 16년 후 두산의 투수코치로 옮기게 되었을 때의 인터뷰에서 '팀워크'와 '경기 출전 금지'에 따른 보상조로 금일봉을 받았으며, KBO에서 부과한 벌금까지 현대 구단 측에서 대납했다고 인정했다. 다분히 재계 라이벌간 자존심 대결의 성격이었음을 반영한 것.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정명원이 이승엽에게 빈볼을 놓은 사연…현대와 삼성, 두 재벌의 대리전"[26]

여담이지만 위의 역전 만루홈런을 친 장정석이 2017년 넥센 히어로즈 감독으로 선임되어서 이 사건이 다시 회자되었다. 이전까지는 나무위키에도 문서가 없었을 정도로 철저한 무명이었기 때문에 그가 만루홈런을 쳤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3. 피칭 스타일[편집]


현역 시절의 트레이드마크는 삐딱하게 쓴 모자와 상대 타자가 오금이 저릴 정도의 강렬한 눈빛, 온몸을 내던지듯 와일드한 투구폼과 함께 마운드에서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 마초 스타일. 그리고 전매 특허의 포크볼을 가지고 있었다.

189cm의 큰 키에 걸맞게 오버핸드의 높이에서 내리꽂는 패스트볼과 포크볼로 리그에서 위력을 떨쳤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포크볼의 달인 할 때 제일 많이 언급되는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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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교 동기 이광우가 원광대에 입단할 당시에 무려 8명을 끼워팔기 했는데, 정명원은 그 중 한 명이였다. 당대 1985년 전두환 정권 물가를 고려하면 엄청난 일이나 다름없다...[2] 1988년 청보 핀토스를 인수해 창단한 태평양 돌핀스의 투수진은 명투수의 요람이라던 인천 연고팀의 위용과 다르게 눈물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청보 시절 팀의 에이스였던 최계훈은 육군 현역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던 터라 10승 투수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기교파 좌완 양상문과 재일교포 김신부가 9승을 기록한 게 팀내 최다승이였다. 심지어 양상문의 경우 완투만 8번, 완봉을 1번 하면서 9승을 겨우 따냈는데 같은 기간 해태 선동열은 시즌 9완투 1완봉으로 16승을 기록했다. 사실 태평양 돌핀스는 리그에서 손꼽힐 정도로 투타의 균형이 안 맞았던 팀이었다. 참고로 1988년 2차 1라운드로 입단했던 신인 투수 신완근은 전천후로 이리저리 구르며 139이닝을 던지고 부상으로 신음하다가 1993년에 쓸쓸히 은퇴했다.[3] 짠물 트리오 또는 마운드 신인 삼총사라고 불렸다. 기사까지 났을 정도였으니. 1994년 LG 트윈스에서 데뷔한 신인 트로이카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을 떠올려보면 딱 맞는다.[4] 이 시절 전지훈련에서 제구를 잡아줄려고 공이 벗어날 때마다 김성근 감독이 싸대기를 날렸다는 야사가 전해지나, 진위는 확인불명이다. 본인들도 (당연히) 언급하지 않고, 확실한 증언도 없고, 그땐 누가 이걸 물어볼 만한 용자도 없었으니(...) 본 설에 따르면 200~300개씩 던지는 제구 훈련을 하면서 포수 미트에서 10cm 이상 벗어날 때마다 한 대씩 맞았다고. 김성근은 2000년에도 삼성 2군 감독 시절에 배영수라던가, 정현욱(1977) 등이 제구가 안 될 때마다 죽빵을 후려갈겨 가며 틀을 만들었다.[5] 재미있는 점은 1989년 태평양 신인 트리오는 똑같이 38경기에 출장했다.[6] 당시 4선발이었다는 양상문 또한 이런 식으로 굴려져 35경기 15선발 161.2이닝을 기록한다.[7] 참고로 이 기록도 2017년 소프트뱅크 호크스 마무리 데니스 사파테가 54세이브를 기록하면서 깨졌다.[8] 진필중, 오승환, 손승락, 고우석, 서진용[9] 마무리 특성상, 연투를 밥먹듯 해야 하니..[10] 현대 유니콘스태평양 돌핀스를 공식적으로 인수하여 역사를 승계한다. 단, 키움 히어로즈는 해체 후 재창단이므로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와는 관련없는 팀이다. KBO 연감 참조.[11] 정규 시즌이 아닌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 나온 기록이므로 비공인 기록으로 남는다. 2004년 한국시리즈배영수가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지만 라이온즈의 물타선 때문에 경기는 11회를 향했고, 결국 비공인 기록으로조차 남지 못했다.[12] 참고로 당시 해태는 이종범이 20-20을 할 정도로 건재했고 홍현우도 20-20에 가까운 장타력과 OPS 0.9 이상 찍어주고 있었다. 여담으로 96년 현대의 팀 타율은 7위(.243), 해태의 팀 타율은 5위(.245)... 두 팀 다 투수들이 빵빵했기에 가능했고 타자들은 정말로 몇몇 선수들만 있었다. 현대 역시 박재홍이나 김경기를 제외하면 과거 태평양 시절 물방망이 타선과 별 차이 없었다.[13] 1998년 정명원이 평균자책점 1.86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한 이후로 1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선발 투수는 2010년의 류현진(평균자책점 1.82)뿐이다. 다만 저 쩔어주는 평균자책점에도 불구하고 승수가 겨우(?) 14승에 패수는 8패나 되는데, 타선 지원이 다소 살짝 빈약했던 감이 크다. 당시 현대 타선이 박재홍-스캇 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에 박종호, 박경완 등 괜찮은 타자들이 포진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시 마무리였던 조 스트롱이 워낙 작가질을 많이 해서 승리도 몇차례 날아간 점도 감안해야 할 듯.[14] 후덜덜한 점은 선발이면서 당대 최고의 마무리였던 임창용보다 평균자책점이 낮았다. 거기에 더 무서운 건 그해 8월 19일 한용덕에게 잠깐 1위를 뺏겼다가 바로 탈환한 뒤 ERA 1위 자리를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15] 우승이 확정된 후 헹가래 투수 정민태가 마운드에서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서 엉엉 울기 시작하자 정명원이 정민태를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1998년 한국시리즈 하이라이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 장면을 관중석과 TV로 본 도원전사들도 덩달아 대성통곡한 것은 덤.[16] 이 때 박정현은 시즌 중 쌍방울에 트레이드된 상태였다. 태평양 시절 김성근의 엄청난 혹사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현대가 조규제를 받는 조건으로 쫓아내듯 트레이드시켰다. 최창호는 시즌 트레이드 마감일에 LG 내야수 박종호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는데, 하필 1998년 한국시리즈 상대 팀이 LG였다. 후에 최창호는 '그토록 염원해 왔던 우승이 이루어졌는데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곳의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져서 너무 화가 나더라' 라고 회상했다.[17] 전년도 이적 후 선발로 뛴 조규제가 시즌 개막부터 마무리 역할을 맡았지만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4월 말 이후에는 김수경이 기용되었으나 역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쳐 정명원이 최종 낙점되었으며 그 이후 조규제는 전년도 때처럼 선발로 뛰었다[18] 특히 스트롱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생긴 마무리 투수의 공백이 컸는데 전년도 이적 후 선발로 뛴 조규제가 시즌 개막부터 마무리 역할을 맡았지만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4월 말 이후에는 김수경이 기용되었으나 역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쳐 정명원이 최종 낙점되었으며 그 이후 조규제는 전년도 때처럼 선발로 뛰었다. 그나마 뒤에 들어온 박장희가 있어서 5위였지 안그랬다면 간소하게 뒤에 6위로 따라오던 LG에게 잡혔을지도 모른다.[19]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 3인방은 18승을 거두며 공동 다승왕을 거두었다. 그렇다보니 4선발과 5선발이 이래저래 등판횟수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5선발은 신철인마일영이 그 해 성공적인 데뷔를 하여 그나마 짐을 덜어줬다. 단지. 정명원의 개인사가 있었기에 좀처럼 선발 출장 비율이 중간계투로 나오는게 있었다.[20] 염경엽과 정명원은 코치직을 잠시 다른 팀에서 했지만, 원클럽맨이고 같은 동향 사람이고, 정명원이 염경엽의 팀에 선수생활을 할땐 2년 먼저 입단한 선배다. 정명원, 염경엽 은퇴.[21] 당시에는 타자였고 95년도에는 3할을 친적이 있다. 투수로 전향한 것은 2000년도이다.[22] 박진만은 이미 고교 시절 무릎 부상으로 유급한 바 있었다. 그만큼 박진만에게 무릎은 꽤나 신경쓰일 것이다. 이후 박진만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2005년 중순 대구 홈구장 경기 중 무릎 부상을 입으면서 잔여 시즌을 결장하는 타격을 입었다.[23] 당시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몸맞은 공을 던지고도 삼성 투수 이상훈이 전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현대 타자들에게 '뭘 봐, 불만있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고의적 빈볼이라는 심증을 굳히기에 충분했다.[24] 삼성측의 처사에 분노한 정명원이 자진해서 등판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보복성 빈볼을 염두에 두고 나갔다는 의미.[25]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정명원의 릴리즈 포인트, 투구 후 착지 각도가 모두 왼쪽으로 치우처져 있어서 명백한 고의 빈볼임을 알 수 있다.[26] 이후 이승엽은 99년 그해 홈 구장에서 정명원을 만나 한국 프로야구 최연소 100 홈런을 기록한다. 통쾌한 복수가 따로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