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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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70 박진만 [[코치(스포츠)#s-2.1|

]] · 75 손주인 · 76 타치바나 · 77 배영섭
· 78 강봉규 · 79 이병규 · 87 박희수 · 89 이정식
· 94 권오준 · 97 강명구 · # 이진영 · # 정민태 · # 정연창'''

2군
71 조동찬 · 74 박한이 · 90 박찬도 · 91 다바타
· 98 채상병 · # 정대현 · # 강영식 · # 김지훈


육성군
85 김정혁 · 88 정현욱 · 92 정병곤


컨디셔닝
72 나이토 · 80 황승현 · 81 권오경 · 82 김현규 · 83 윤석훈
86 한흥일 · 93 윤성철 · 95 박승주 · 96 류호인 · # 김용해 · # 염상철 · # 허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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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KBO 리그 팀 명단 보기


정민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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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펼치기 · 접기 ]

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8
2000
2003
2004

파일:2000 시드니 올림픽 로고.svg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

2000















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포스트시즌
2000 플레이오프 MVP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9, 2000, 2003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3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보유 기록
10승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승
115⅓이닝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이닝
73⅔이닝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 이닝


정민태의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20번
정은배
(1985~1991)

정민태
(1992~2000)


결번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51번
세오 요시히로
(2000)

정민태
(2001~2002)


나카하마 히로유키
(2003~2005)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20번
결번

정민태
(2003~2007)


팀 해체
KIA 타이거즈 등번호 64번
이성준
(2006~2007)

정민태
(2008)


유휘봉
(2009~2010)
서울-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77번
이광환
(2008)

정민태
(2009~2012)


강병식
(2013~202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4번
조원우
(2011~2012)

정민태
(2013~2014)


서한규
(2015)
한화 이글스 등번호 76번
김종모
(2013~2014)

정민태
(2015~2020)


송구홍
(202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번


정민태
(2024~)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 펼치기 · 접기 ]










삼성 라이온즈 No.
정민태
鄭珉台 | Chung Min-Tae

출생
1970년 3월 1일[1] (54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인천숭의초 - 동산중 - 동산고 - 한양대
신체
184cm, 90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2년 1차 지명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92~2000)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1~2002)
현대 유니콘스 (2003~2007)
KIA 타이거즈 (2008)
지도자
서울-넥센 히어로즈 1군 투수코치 (2009~2012)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3~2014)[2]
롯데 자이언츠 3군 투수코치 (2014)[3]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15~2016)[4]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6)[5]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6)[6]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16)[7]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6~2017)[8]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7)[9]
한화 이글스 육성군 투수코치 (2017)[10]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18~2019)[11]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9~2020)[12]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20)[13]
한화 이글스 육성군 투수코치 (2020)[14]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24~)
해설위원
SPOTV 야구 해설위원 (2023)
경력
KBO 재능기부위원 (2023)
상훈
체육훈장 기린장
1. 개요
3. 피칭 스타일
5. 해설자 경력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현대가 없어진 날, 내 야구 인생도 끝났다."[15]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해설위원. 現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


2. 선수 경력[편집]



현대 유니콘스를 대표하는 선수로, 현대 왕조를 이끈 에이스이자 인천 야구의 적장자로 불리었다.[16] 또한 정민철, 구대성 등과 함께 KBO 리그의 90년대를 대표하는 투수로 꼽히며,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포스트시즌 10승을 달성한 빅게임 피처이기도 하다.[17]

3. 피칭 스타일[편집]




146km/h 포심 패스트볼[18]


125km/h 슬라이더


125km/h 스플리터 - 141km/h 포심 패스트볼 - 88km/h 슬로우 커브

1998년 한국시리즈 4차전[20]


1998년 한국시리즈 1차전 [21]


99년 아시아선수권 대만전 1회 [22]

당대의 에이스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췄던 투수로 최고 구속 153km/h의 강속구(프로기준) [23]80km/h대의 정신나간 슬로우 커브[24], 130km/h대의 슬라이더와 당시 반포크볼로 불리던 스플리터 [25], 체인지업, 당시에는 OK체인지업이라고도 불리던 서클체인지업, 슬러브, 투심 등 당시 유행한 모든 구종을 모두 주무기로 던졌으며, 그 특유의 이닝 소화 능력을 바탕으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5년 연속[26]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 투수이다.[27] 당연히 역대 최강 우완 논쟁에 항상 끼는 대투수이다. 또한 리그 역사상 유일한 4년 연속 선발 17승 이상을 기록하며 4년 연속 리그 선발승 1위 (98년 17승, 99년 19승[28], 00년 18승, 03년 17승). 이미지와는 달리 단순히 힘으로 누르는 파워 피처가 아니라 좌우코너의 칼제구력을 바탕으로 힘과 기예를 갖춘 당대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 투구폼이 상당히 큰 편이고 던진 후의 반작용으로 오른팔이 크게 올라오는 모습이 유독 돋보인다. 다만 투구폼이 큰 오른손 투수임에도 주자를 묶는 견제 능력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해 도루 허용 확률은 다른 투수보다 높지 않다.

왼발의 하이키킹을 통해 하체로 던지는 전형적인 투구폼으로 정민태가 부진했던 경기에서는 키킹에서 오는 특유의 텐션이 잘 보이지 않는다.[29] 선수 커리어 후반에 허벅지 부상이 오래간 까닭도 투구폼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창 부진하던 2005년. 키킹의 텐션이 사라지면서 투구폼과 팔스윙이 느려졌다.

또한 인천 올드팬들에게는 장명부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헛견제[30]로 상당한 재미를 선사했다.[31]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민태/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해설자 경력[편집]


2023년 3월 7일, SPOTV 새로운 해설진으로 합류한다. 기사

kt의 경기 중계시 유난히 kt에 적대적인 해설을 보인다.

SSG와 kt의 3연전 중계 당시 극심한 SSG 중심 편파 해설 논란이 있다. 또한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이빠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사용해 캐스터의 말문을 막았다.[32]

삼성과 kt의 3연전 중계 때도 지나친 삼성 띄워주기와 kt 선수 폄하로 kt팬들은 SPOTV에 불 지를 기세까지 달했다. 악성 기사들로 인해 큰 심적 피해를 받고 복귀한 강백호에게 마음고생 한 것 때문에 살이 빠졌냐라고 질문한다거나, 장성우가 안타를 치자 치기 싫어보이는데 안타를 쳤다, 황재균에게는 와이프가 직관오니 잘 친다. 계속 따라다녀야겠다라는 등 모욕적인 말과 더불어 삼성 선수인 호세 피렐라에게는 하나 쳤으면 좋겠다, 김지찬을 보며 흐뭇하다 등의 치우친 발언을 3연전 내내 보여주었다. 또한 ‘쇼부’라는 일본식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두산과 KT의 10, 11, 12회전에서도 여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KT의 호수비 상황에서 ‘안타가 아니어서 아쉽다’라고 표현했고, kt측의 안타는 ‘운 좋게 안타가 나왔다’식으로 두산을 대변하기 바쁜 모습을 보였다. 또한 포수 김준태를 박준태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랜 기간 코치직을 맡았던 한화 이글스 경기 해설을 맡으면 에피소드 보따리를 푸는 일이 많다.

목소리 톤이 같은 인천 출신인 이천수와 살짝 비슷하다. 다만 이천수의 목소리 평가가 좋지 않은 만큼 정민태의 목소리 평가도 좋지는 않다.

2023년 11월 3일,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에 부임하여 SPOTV 해설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기사

6. 여담[편집]


  • 위에 서술된 대로 구대성과는 한양대학교 선후배 사이인데(좌대성-우민태), 재미있는 사실은 정민태가 1년 선배지만 빠른 1970년생이라 88학번인데, 구대성은 1969년생이지만 학교를 1년 유급한 탓에 89학번으로 들어온 것. 정민태가 그 당시 창궐하던 한양대학교 야구부의 폭력을 근절시켰기 때문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구대성은 정민태에게 사석에서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33][34]

  •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이전, 사람들이 야구 선수의 병역 사건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선수였다. 촉망받는 2년차가 시즌 중에 수감되어 구치소 신세가 되었으니 당시 팬들의 뇌리에 깊게 박힐 수 밖에 없었던 것. 수법은 간단하면서도 대담했는데, 이전에 허리 디스크를 앓았던 자기 형(당시 무직 26세)의 CT를 찍어 제출한 것. 당연히 재검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대비해서 브로커를 통해 군의관에게 뇌물을 제공했는데, 이 브로커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 다만, 이게 정민태와 그 부모만의 문제였냐면 그건 아니었다. 사실 이 사건은 스포츠계를 기웃거리며 이름값을 얻던 한의원 원장 박명득[35]과 당시 태평양 돌핀스 단장이었던 강창호가 주축 인물이었다. 정민태를 비롯한 가내영, 김동기등 선수들에게 돈을 걷은 것은 단장 강창호였고, 돈을 받아 병무청 군의관들에게 전달한 것은 박명득이었다. 한마디로, 구단이 병역 브로커 역할을 하며 선수들의 병역 비리를 직접 주선한 대단히 질이 안 좋은 사건이었다. 이게 21세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무조건 구단 해체각이었을 텐데, 때는 1992년으로 병역 비리 그까짓꺼...라는 분위기였고 어차피 돌핀스 자체가 곧 선경에 팔리니 마니 하는 상황[36] 이었기에 결국 흐지부지 묻혔다.

  • 선수의 권리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긴 문제, 예를 들어 훈련 방법이라던가 로테이션, 경기 출장 문제 등에서 트러블이 발생했을 경우, 감독에게 찾아가 대놓고 항의했다고 한다. 가장 오랜 기간 함께한 김재박의 경우 '실력만 좋으면 된다'라는 마인드라서 정민태의 항의와 요구를 그냥 들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 '돈을 밝힌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본인도 알고 있었다고 스톡킹에서 얘기를 했다. 다만 이건 정민태도 억울한 측면이 있는데, 단순히 그냥 돈이 좋아서 자린고비라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사업을 말아먹으며 거액의 빚을 졌었기 때문이라고. 일본에 진출하고자 했던 것도 목돈이 필요했던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37] 정민태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연봉을 더 받아 냈어야 하는 나름의 사정이 있긴 있었던 것이다.[38]. 그리고 요미우리를 가게 된 것은 본인의 뜻이 아니라 당시 모기업 하이닉스가 채권단의 손에 들어가면서 구단의 상황이 열악해졌던 현대의 사정 탓이 크다. 오릭스나 주니치도 연봉 자체는 엇비슷하게 책정했으나 이적료 액수는 제법 요미우리가 세게 불렀댜고. 정민태의 이적료 (5.5억엔 / 당시 환율 기준 55~60억 상당) 로 현대 구단을 운영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 선수 시절 부상 때문에 은퇴 이후로도 고생했던 듯하다. 2010년 10월 30일에 있었던 KIA 타이거즈김동재 코치를 위한 천하무적 야구단vs일구회 올스타 자선시합이 방송을 탔을 때 정민태가 방송에 나왔는데, 부상이 있어 경기에는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스톡킹에서 심수창이 말하기를 일반적인 캐치볼이나 배팅볼도 던지지 못할 정도로 팔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스톡킹 차명석 편에서는 심수창이 가장 펑고를 가장 못치는 코치로 뽑았는데 펑고를 못치는 이유도 부상의 여파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코치로 있으면서 제 역할을 못 하는 투수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건지 겨우 40대 초반의 나이에 벌써 흰머리가 보이고 있다.

  • 현대 유니콘스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시도하던 당시 박진만과 함께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면 더 좋잖아요."라는 말로 인천 야구팬들의 속을 뒤집었다는 카더라가 있었는데 스톡킹에서 잘못된 소문이라고 본인이 얘기를 했다. 당연히 인천 출신인 정민태는 반대를 했지만 모기업이 밀어붙였던 것이며, 이후 "(연고지에 상관없이)어디로 가던지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 했던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 아들 정시우(개명 전 이름 정선호)가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하지 않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포지션은 외야수. 이후 부상으로 야구를 그만두고 재활 트레이닝 센터를 차렸다고 한다. 앞서 잦은 부상때문에 헬스로 몸을 만들었는데 피트니스 대회에서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를 대표하는 우완투수 이기에 '정민태 vs 정민철' 키배가 상당하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도 많아 양 팀 팬이 아니라면 누가 낫다고 단정하기 힘든 비교.[39]

  • 팬 서비스도 역시 KBO를 대표하는 레전드 투수인 만큼 훌륭한 축에 들어간다. 데뷔 초창기였던 태평양 돌핀스 시절부터 잘해줬고 현대 왕조를 이끌면서 전성기를 보냈을 때도 현대 선수들 중에서는 팬 서비스 좋기로는 손꼽히는 선수였다. 말년에 기량이 상당히 떨어지면서 하락세에 접어들었을 때도 여전히 팬 서비스는 잘해주었으며 은퇴 후 코치가 돼서도 여전히 사인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잘 해준다.

  • 심수창의 말에 의하면, 투수들의 밸런스를 잘 잡아주고 선수들과 편하게 잘 지내는 코치였다고 한다.[40][41] 좋은 팬서비스와 대학시절 폭력 근절 등 미담이 많은 인물이다.

7. 관련 문서[편집]



[1] 음력 1970년 1월 24일, 빠른 생일이다.[2] ~8월 20일[3] 8월 21일~[4] ~4월 12일[5] 4월 13일~7월 1일[6] 7월 2일~8월 12일[7] 8월 13일~8월 17일[8] 2016년 8월 18일~2017년 5월 23일[9] 5월 24일~6월 13일[10] 6월 14일~[11] ~6월 23일[12] 2019년 6월 24일~2020년 6월 5일[13] 6월 6일~6월 7일[14] 6월 8일~[15] 그의 말대로, 그의 전성기가 곧 현대 유니콘스의 전성기였다.[16] 김경기, 박재홍도 같은 별명이 있다.[17] 통산 포스트시즌에서 10승 1패 2.1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18] 사진은 한때 임시 연고지로 사용하던 수원 야구장이며, 2000년도 이다. 타자는 롯데 자이언츠김응국.[19] 당일 최고 151km/h[20] 안쪽과 바깥쪽을 넘나드는 145km/h 포심[19], 136km/h 스플리터, 132km/h 슬라이더, 135km/h의 체인지업으로 선발 타자들을 전원 탈삼진으로 돌려 세운다.[21] 1회 몸쪽 속구로 삼진. 이날 최고 150km/h[22] 147km/h 포심. 130km/h 초반대 슬라이더와 스플리터. 슬로커브가 보인다. 1회 마지막 타자에게 몸쪽 속구 삼진.[23] 아마시절 기록에 154km/h, 156km/h가 있기는 하다[24] 일명 아리랑볼이라고도 한다. 100km/h 전후로 던져서 타자도 주심도 벙찌게 웃게 하는 정민태의 특기 중 하나.[25]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사용[26] 1996~2000년[27] 5년 연속 200이닝 이상 던진 선수로는 정민태 외에 최동원이 있지만, 최동원은 데뷔 첫시즌이었던 1983년 9승에 그치고 이후 4년간 200이닝 투구,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했다.[28] 최종 20승[29] 2000 시드니 올림픽, 일본프로야구 시절[30] 주자가 3루와 1루에 출루한 상황에서 3루 쪽으로 견제구를 던지려다 뒤로 돌아 1루로 견제하는 포즈. 그러나 야구 룰이 바뀌면서 앞으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됐다. 3루 쪽으로 발을 내디딘 상황에서 3루로는 송구하지 않고 1루 쪽을 향해 공을 던지면 보크가 된다.[31] 사실 장명부 이후 삼청태현에서 20승 투수는 정민태 한 사람 밖에 없었다.[32] 참고로 김성근도 라디오 해설 시절 저런 표현을 쓰는 바람에 해설에서 하차했을 정도다.[33] 구대성의 저서에서도 민태형, 민태선배라 일컫고 있으며 그(구대성)의 생애 중 라이벌을 꼽자면 1년 선배인 정민태라 밝히고 있다. 대학 시절 국가대표 원투톱으로 룸메이트로 함께하며 서로 격려하고 배우는 사이였다고. [34] 스톡킹에서 구대성이 직접 사실이라 증언했다.[35] 부친이 여고 농구팀 감독이어서 30살때부터 지연, 학연으로 남녀 농구대표팀 주치의가 되어 대학을 갓 졸업하자마자 스포츠계에서 이름 좀 날렸다.[36] 다만 중간에 협상이 파토나서 이 때 팔리지는 않고, 3년 뒤 현대그룹에 팔린다.[37] 당장 현대에서 다승왕을 하며 연봉 3억원을 받을 때까지 자기 집도 없었다고 한다.[38] 당장의 빚 변제는 물론이요, 변제 이후로 본인에게 남는 돈이 있어야 생활이 유지된다. 게다가 정민태 본인 역시 가정을 꾸렸으니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그리고 야구선수 생활은 길어야 40 전후로 끝나니, 그 전에 최대한 돈을 모으는 것이 맞긴 하다.[39] 스톡킹에서 이걸 주제로 토론도 했는데 정민태 우위를 주장하는 패널이 정민철.[40] 실제로 강정호와 농담을 티키타카 형식으로 주고 받을 정도였다.[41] 정민태 말로는 너무 편해서 심수창이 개길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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