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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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대표적인 정복왕조
4. 비슷한 사례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독일의 사회경제사학자인 비트포겔(Karl A. Wittfogel)이 붙인 중국정복한 이민족 왕조를 일컫는 명칭이다.


2. 설명[편집]


동북아 지역은 북방의 유목민이나 기마민족 사회와 남방의 농경 사회가 존재하였으며 양자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나라백등산 전투명나라 때의 토목의 변과 같이 한족 왕조들이 위기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기본적인 생산량과 인구의 차이 때문에 일시적인 공격과 약탈이었을 뿐 장기간 지배는 어려웠고 지배했다 하더라도 한화되거나 축출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한화된 왕조를 침투왕조, 축출된 왕조를 정복왕조라고 부른다. 침투왕조의 경우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화정책을 사용하였고 한족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정복왕조의 경우 한화를 경계했기 때문에 자민족 통치와 한족 통치를 분리해서 시행하였다.

일반적으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통치할 경우에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첫째는 통치자가 피통치자보다 고도의 문화를 보유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통치자가 피통치자보다 낮은 문화를 보유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통치의 조직과 정책이 정복민족 고유의 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무리가 없다. 따라서 피통치자 고유의 사회조직을 변화시키거나 동화하는 것을 통치정책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두 번째 경우, 정복민족의 미숙한 통치조직은 피정복민족에 대한 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피정복민족이 가지고 있는 체계와 조직을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개조하여 새로운 통치방법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경우 정복민족 고유의 통치조직과 정책에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정복국가의 통치조직이 점차 사라지고 피정복국가 고유의 것을 답습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통치에 있어서 피정복민족의 참여는 필수적이 된다.

가장 대비되는 것이 북위원나라이다. 이들의 정책은 극에서 극을 달리고 있다. 북위는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한족이 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펴 나갔다. 이러한 정책으로 중국을 다스릴 수는 있었지만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자신들의 장점 또한 소실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 중국에 자신들의 통치체제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책은 한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찍이 육가가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듯이 유목민족들은 중국을 정복할 능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다스릴 능력은 부족했다. 그리하여 중국에 있었던 유목민족 왕조들은 요나라나 금나라처럼 한화되고 문약해져서 다른 유목민들의 침공을 당해 멸망하거나, 혹은 원나라처럼 한화를 거부하다가 한족들의 역공을 받아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 세 제국은 중국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지배하였다. 일부 지역이긴 하지만 서하 역시 비교적 점령지역을 성공적으로 점령한 사례의 국가이다. 이들은 이원적 지배체제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방법을 찾았다. 유목민족은 유목민족의 방식으로 한족은 한족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이 네 민족은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중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해 나갔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불만을 잠재우는 동시에 양 민족의 조화를 꾀하기까지 했다. 이 네 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내부적 혼란도 없지는 않았지만 주로 외부의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전야생활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용기의 원천이기 때문에 야만적인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더 용감하다. 따라서 그들은 지배권을 획득하거나 다른 민족이 소유한 것을 탈취할 가능성이 더 많다. 이런 점에서 동일한 부족이라도 그 상황은 시간에 따라서 바뀐다. 사람들이 비옥한 평원에 정착하여 사치품을 집적하고 풍요롭고 세련된 생활에 익숙해지면, 전야에서의 습관이 사라져가는 것에 비례하여 그들의 용맹함도 줄어들어간다.

이것은 산양, 들소, 나귀와 같은 동물들이 가축화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도 입증된다. 그들이 인간과 접촉하면서 야수성을 상실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면, 그들의 활력과 난폭성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그들의 동작이나 모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야만적인 사람들이 사회적, 사교적인 인간으로 바뀔 때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익숙해진 습관이 인간의 성질과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배권은 노력과 용기를 지닌 특정한 민족에게 주어진다. 만약 어떤 두 집단이 숫자나 무력이나 연대의식에서 서로 비슷하다면, 전야의 습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보다 더 거친 생활을 하는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더 크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기술자나 전문적 장인들을 강제로 부려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도록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지니는 가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지도 않는다. 노동은 이윤의 진정한 원천이기 때문에, 노동이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면, 이윤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따라서 생산적 노동도 행해지지 않게 된다. 도회민은 흩어지고 문명은 쇠퇴해버린다.

역사서설 / 이븐 할둔



3. 대표적인 정복왕조[편집]



3.1. 몽골계 민족[편집]



3.1.1. 요나라[편집]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거란 제국)는 북면관과 남면관이라는 통치 기관의 이중화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였다. 상경임황부의 북면관은 유목민족들을 통제하였고 중경대정부의 남면관은 한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북면관은 요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관제로 행궁, 부족, 속국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고 주요 기관으로는 최고 권력 기관인 북추밀원이었다. 남면관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해서 조직한 관제로 주현 · 세금 · 군마 · 한인과 발해인에 대한 민정을 담당했다. 남면관의 최고 권력 기관인 남추밀원이었다. 황제는 날발(捺鉢)이라는 제도를 통해 제국을 순행하면서 지방을 위무하고 신료회의를 하여 전국을 다스렸다.

요나라 군대의 핵심은 정규군인 오르도 부대였다. 이들은 중무장 기병으로 기병창과 활, 검, 철퇴 등을 가지고 싸웠다. 병사 한 사람마다 보급 담당과 잡역꾼 한 사람이 배정되어 정군 1인과 부군 2인의 3인 1조 편제를 이루었고, 여분의 활, 창, 극을 가지고 다녔다. 보급 담당 역시 갑옷을 입고 무기를 지녔으며 잡역꾼도 무기를 사용했다. 이러한 편제는 그대로 3열의 야전배치로 이어졌다. 1열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이 배치되고 2열에는 갑옷을 입은 기병이 서며, 3열에는 말까지 갑옷을 입힌 중기병이 배치되었다. 오르도 부대는 3열에 서서 정예 예비대 역할을 하고, 잡역꾼과 보급 담당이 각각 1선의 전초전 부대와 2선 지원대 역할을 하였다. 오르도 군 이외에도 거란 부족병 동맹군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유목민 방식으로 산발적인 기마전을 담당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징집한 한족 농민 무리를 전투부대 앞에 내세워 화살받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상술한 특징 및 그 밖의 여러 측면을 볼 때 요나라의 전술은 후대 몽골군 전술의 선구적 형태였다. 보통 유목민 기마궁수들이 넓게 산개하여 스웜 전술을 사용하는 데 비해, 요나라 군대와 후대 원나라 군대는 좀 더 밀집된 대형을 이루었다.


3.1.2. 원나라[편집]


원나라는 몽골인은 천호제, 한족은 행상서성으로 다스리는 이원적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천호, 만호는 추밀원으로, 행상서성은 중서성으로 변화하였고 중서성의 행정관청으로 행중서성을 설치하였다.

원나라는 몽골 특유의 군사제도를 유지하였고, 중앙군은 추밀원, 지방군은 행중서성이 통제하게 하였다.

또한 원나라는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 순서의 신분제를 시행하였다.


3.2. 퉁구스족[편집]



3.2.1. 금나라동하[편집]


초기에는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였으나 송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중앙의 발극렬(포기레) 제도와 지방의 맹안모극제, 도포긴·포긴제 군사제도의 맹안모극제와 북방수비에 거란인을 배치하였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달리 초원지대를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복속해 오는 일부 유목민 족장을 지원하여 유목민들끼리 서로 맞서도록 함으로써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나라가 칭기즈 칸의 경쟁자를 지원하자 칭기즈 칸은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1209년부터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호령 전투는 정복 왕조 금나라 군대가 어떻게 약화되었는지는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투였다. 몽골군을 저지하기 위해 금나라는 완안승유가 지휘하는 50만 대군을 파견하였는데 금나라 군대는 여진족과 거란족 기병 및 대규모의 한족 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완안승유의 참모들을 고비사막을 넘어 온 몽골군들이 말에게 풀을 뜯기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기병대로 급습을 가하자는 부장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한족 보병들이 따라붙을 수 있도록 천천히 진군하는 쪽을 택했다. 야호령에서 완안승유는 기병을 보병 앞에 일렬로 배치하였다. 몽골 기병들이 훨씬 더 용맹하게 싸웠던 것은 물론 초원의 몽골 기병의 활은 여진족들이 삼림에서 사냥할 때 사용하는 활보다 훨씬 더 사정거리가 길었다. 몽골군의 공격에 금나라 기병이 후퇴하는 와중에 한족 보병들이 금나라 기병에게 치어죽거나 깔려죽고 기병과 보병 전열 모두 흐트러졌고, 금나라의 50만 대군은 어이없이 궤멸하였다.

야호령 전투의 대패 이후 금나라는 야전에서 병력 부족에 시달리며 몽골군에게 끌려다니게 되었다. 이미 금나라는 1194년 황허강의 대홍수로 커다란 재해가 일어나자 한족 농민들이 계속 반란을 일으키며 국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1215년에는 북방의 도읍인 중도를 잃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217년 남송이 조공을 중단하자 금나라의 선종은 남송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몽골과 남송 사이에서 남북으로 포위당하는 상황을 만들었고 1235년이 몽골군이 개봉을 함락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3.2.2. 청나라[편집]


청나라는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한이 피지배 민족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청나라 황제는 만주의 한, 몽골의 대칸, 한족의 천자, 티베트의 보호자인 전륜성왕,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 이슬람교도들의 수호자 등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한족에 대한 유화책으로 표기에 있어 한자만주 문자를 병기하는 만한합벽, 관직임명에 있어 만주족과 한족을 같이 두는 만한병용제[1] 등을 시행하였다. 반면 강경책으로는 변발호복 강요와 문자의 옥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청나라는 군사적 기반인 팔기군을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팔기로 구분하였다.


3.3. 티베트[편집]



3.3.1. 서하[편집]


탕구트(당항)족의 나라. 한화 정책 및 한화 현상을 두려워해서 매우 경계했으며, 자신들의 변발을 유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서하에서 만든 서하 문자로 한자, 중국어로 적혀진 유교 사서들, 불교 경전들을 번역했다. 대장경 역시 서하 문자로 썼다.


4. 비슷한 사례[편집]


의외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유럽 일대에도 침투왕조나 정복왕조들과 비슷한 성향의 왕조들이 들어선 적도 있었다.[2] 동북아시아에서 몽골계, 그리고 마지막에는 퉁구스계가 주로 많이 활약했다면 서양과 중근동, 남아시아에서는 튀르크계들이 대부분 차지했다.

4.1. 한국[편집]


  • 고조선
    • 기자조선 - 전근대에는 실존했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실존하지 않은 설화 속의 왕조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 위만조선 - 위의 기자조선과 달리 확실히 실존했던 이민족계 한국 왕조다.
  • 발해 - 창업군주인 대조영고구려화된 속말말갈의 후손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현재로서 대조영의 혈통에 대해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4.2. 동남아시아[편집]


남부 중국 내륙에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주해온 타이족 계열 왕국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침투왕조에 가까웠다.


4.3. 티베트[편집]




4.4. 중양[편집]



4.4.1. 이슬람화 이전[편집]



4.4.2. 이슬람화 이후[편집]



4.4.3. 비이슬람권[편집]


  • 서요 - 대승불교를 믿은 몽골계 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였지만 거란 및 요나라 유민들은 많아봐야 소수나 일부였고, 대다수가 튀르크계 카라한 유민들인데다 서요 때에도 그들의 문화가 많이 남아서 유지가 되었기에 문화적 이유로 튀르크계로도 분류된다.
  • 십자군 국가

4.5. 유럽[편집]



4.5.1. 게르만족[편집]



4.5.2. 노르만족[편집]



4.5.3. 튀르크계 민족[편집]



4.5.4. 몽골계 민족[편집]



4.5.5. 아랍민족베르베르인[편집]



4.5.6. 마자르족[편집]


  • 헝가리 왕국: 헝가리어가 현대까지도 헝가리 국민들의 주류 언어로 명맥을 이어나가는 점에서 본 문단의 정복왕조들 중에서는 오스만 제국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케이스다.

4.5.7. 기타 민족[편집]


  • 훈 제국: 제국 후기에는 피지배민족인 고트족의 영향이 강해져 궁정에서 고트어를 쓰게 되면서 침투왕조에 가까워진 측면도 있다.

5. 기타[편집]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준(浚)은 〈병으로〉 휴가〈休暇〉 중에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전(道傳)과 은(誾)이 명령을 받고 준(浚)의 집에 이르러 이를 알리고, 또 말하기를,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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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 신묘 1번째 기사


제3차 요동정벌을 계획 할 당시에 정도전태조 이성계에게 중국 역사속의 '정복왕조'들을 그 근거로 하여 제3차 요동정벌의 실행을 강하게 요구하였다고 한다. 즉, 조선도 정복왕조들처럼 중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으므로 명과의 충돌을 피할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인 것이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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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급관리에 한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2] 출저: 김호동 교수의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124-125페이지)[3] 지배층은 이집트인이었으나, 왕조 자체가 아시리아의 괴뢰국가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