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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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使君
12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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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선황제(先皇帝)
존호
대승명황제(大勝明皇帝)
연호
태평(太平, Thái Bình, 타이빈, 970년 ~ 979년)

딘(Đinh, 丁/정)

보린(Bộ Lĩnh, 部領/부령)
생몰기간
924년 ~ 979년
재위기간
968년 ~ 979년

1. 개요
2. 생애
3. 출처



1. 개요[편집]


베트남 딘 왕조의 초대 군주이자, '대구월'의 창시자로 사실상 대월 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영웅이었다. 시호는 선황제(先皇帝, Tiên Hoàng Đế, 띠엔 호앙 데)였으며 황제 즉위 이전 12사군 시대에는 '만승왕'(Vạn Thắng Vương, 萬勝王, 반 탕 브엉)으로 불렸다.


2. 생애[편집]


924년, 호아르(Hoa Lư, 華閭)에서 베트남의 자주 시대를 개막시킨 응오 왕조(Nhà Ngô, 吳朝, 오조)의 개국공신 딘꽁쯔(Đinh Công Trứ, 丁公著, 정공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산신을 모시는 사당 옆에서 살았다. 어릴 때 들판에서 아이들과 소를 치며 놀았는데, 그의 도량을 알아본 아이들이 딘보린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한다. 놀 때 왕노릇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손을 맞잡게 하여 가마처럼 만들어 그 위에서 타고 다녔고, 천자의 의장을 모방했다고 한다. 한가한 날에는 다른 마을 아이들을 공격해서 복종시켰다고도 한다. 그러자 두려워하면서 날마다 땔감을 바쳤고, 딘보린의 어머니가 기뻐하면서 집안에서 기르던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고 한다. 당시 마을 노인들까지 그를 비범하게 여기고 자제를 데리고 와서 복종했다고. 오직 그의 숙부만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자신과의 전투 중에 패주한 딘보린을 찌르려 할 때 황룡 두 마리가 호위하는 모습을 보고 복종했다고 한다.

951년에는 고향인 호아르에 근거하면서 독립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응오 왕조의 남진왕(남떤브엉, Nam Tấn Vương, 南晉王) 응오쓰엉반(Ngô Xương Văn, 吳昌文, 오창문)과 천책왕(天策王, Thiên Sách Vương, 티엔 사익 브엉) 응오쓰엉응업(Ngô Xương Ngập, 吳昌岌, 오창급)이 그를 정벌하려고 했다. 딘보린은 두려워하며 아들 딘리엔(Đinh Liễn, 丁璉, 정련)을 인질로 보냈는데, 응오쓰엉반과 응오쓰엉응업은 딘보린이 직접 자신들을 보러오지 않았다며 딘리엔을 꾸짖고 호아르로 진군했다. 두 왕은 딘리엔을 장대에 매달고 사람을 시켜 항복하지 않는다면 리엔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는데 딘보린은 오히려

"대장부는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침으로써 자부하는데, 어찌 아녀자가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본받겠는가?(大丈夫以功名自許, 豈效兒女之愛子耶?)”

라고 말하면서 노병(弩兵)을 시켜 딘리엔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그러자 두 왕은 질색하면서 철수했다. 딘리엔은 남진왕 사후 호아르로 돌아갔다.

965년 응오 왕조 제4대 왕인 남진왕(남떤브엉, Nam Tấn Vương, 南晉王) 응오쓰엉반(Ngô Xương Văn, 吳昌文, 오창문)이 승하하자 전국적으로 12사군(12 Sứ Quân, 十二使君)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딘보린은 12사군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던 진명공(쩐민꽁, Trần Minh Công, 陳明公)[1]의 휘하로 들어가는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출중한 활약으로 진명공의 총애를 사며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진명공이 자식없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가 되어서 보하이커우(布海口, Bố Hải Khẩu, 포해구)[2] 세력을 계승했다.

이후 나머지 세력들을 차례차례로 복속시키며 베트남의 통일을 이뤘다. 968년 국호를 대구월(大瞿越, Đại Cồ Việt, 다이꼬비엣, 큰 나라 비엣)로 정하고, 수도는 자신의 고향 호아르로 정했다. 또한 궁궐 정원에는 큰 솥을 두고, 우리에는 호랑이를 길러 법을 어기는 자는 팽형에 처하거나, 호랑이의 먹이로 던져주겠다고 선언했다.

970년 태평(타이빈, Thái Bình, 太平)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그로부터 베트남의 역대 왕조들은 계속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딘보린은 북송으로부터 '교지군왕'(交趾郡王)에 책봉되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재밌는 점은 북송과의 외교에서 아들 딘리엔의 이름을 대리했다는 점인데, 이러한 행동에는 자신이 황제를 칭하면서 중국과의 관계에 직접 관여하고 싶지 않고 싶어했던 저의가 깔려있었다. 그래서 당시 북송에서는 딘리엔이 딘보린의 대를 이어 즉위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심괄의 《몽계필담》이나 중국 북•남송의 역사를 다룬 정사인 《송사》이다.

974년, 10도(十道)를 정했다. 1도는 10군(軍),1군은 10려(旅),1려는 10졸(卒),1졸은 10오(伍),1오는 10인(人)이었다. 각 병사들에게는 위가 평평하고 모서리가 4개인 모자를 쓰게 했다.

딘보린은 후계자 선정에서 실책을 저질렀는데, 978년에 막내아들 딘항랑(Đinh Hạng Lang, 丁項郎, 정항랑)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로 인해 979년 봄, 딘보린이 미천할 때부터 고생했던 장남 딘리엔이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항랑을 몰래 죽여버렸다.

979년 겨울 10월, 딘보린은 장남 딘리엔과 함께 궁전 안에서 자신의 입에 별이 들어온 일을 길조라 여긴 지후나인(祗候内人) 도틱(Đỗ Thích, 杜釋, 두석)에게 시해당하고 말았다. 도틱은 황제 시해 후 수색을 피해 궁궐 물독 안에 숨었는데, 갈증에 시달리다가 3일 뒤에 비가 내리자 손을 모아 물을 마셨다. 마침 그 광경을 본 궁녀가 보고하여 체포되어 죽었다. 결국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 딘또안(Đinh Toàn, 丁璿, 정선)이 딘보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베트남어 위키의 Đỗ Thích 문서에 따르면 베트남에서는 딘보린과 딘리엔을 죽인 인물을 도틱이 아닌 레호안으로 보는 듯 하다.


3. 출처[편집]


  • 孫曉, 《大越史記全書 標點校勘本》 (西南師范大學出版社, 2016)

[1] 쩐람(Trần Lãm, 陳覧, 진람).[2] 오늘날의 타이빈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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