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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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용훈 (鄭湧勳 / Jung Yong-Hoon)
출생
1979년 3월 11일
사망
2003년 8월 31일 (향년 24세)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76cm|69kg
학력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대신고등학교
포지션
미드필더
프로입단
199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8~2003)
아산 무궁화 (2000~2001)
국가대표
1998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U-20) 9경기 / 0골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2.2.1. 사망
3. 플레이 스타일
4. 기타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팀
6. 동명이인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2. 선수 경력[편집]



2.1. 유소년 시절[편집]


대신고 시절부터 초고교급 선수로 각광받았던 선수였다. 1998년 19세 이하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수비형 플레이메이커로 활약, 대한민국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하였다.[1]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편집]


대신고를 졸업한 1998년 정용훈은 드래프트 3순위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게 되었다. 입단 초기 쟁쟁한 선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지못한 정용훈은 1999 시즌이 끝난 후 경찰청에 입대하였고, 2002년 제대 후 대대적인 리빌딩을 시작하고 있던 김호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점차 출전시간을 늘려가게 된다. 그리고 2002년, 알 힐랄과의 아시안 슈퍼컵[2] 에는 첫 번째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침착하게 골을 성공하며 수원의 아시아 제패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듬해인 2003년 정용훈은 김두현, 남궁웅, 정윤성 등과 함께 팀의 중요 자원으로 성장하면서 팀의 핵심 자원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러나...

2.2.1. 사망[편집]


2003년 8월 31일, 광주 상무 원정을 앞두고 김호 감독에게 휴식을 요청한 정용훈은 집에 가기 위해 자신의 SM5 승용차를 몰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의 한 아파트 앞을 지나다 방호벽을 들이받았고, 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겪고 만다. 이 때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정용훈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3] 정용훈의 사망 당시 수원 선수들은 광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 있었고, 갑작스런 비보를 전해들은 선수들은 광주 원정에서 1:0으로 승리한 후 곧바로 빈소로 달려가 조문하였다. 이후 수원 서포터들은 매년 정용훈의 기일인 8월 31일과 가장 가까운 경기날에 맞추어, 정용훈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수비형 플레이메이커라는 평가를 들을만큼, 패스가 좋으면서도 몸이 탄탄해 여간해서는 상대 미드필더진의 압박에도 밀리지 않아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았다.


4. 기타[편집]


노병준과 굉장히 친했던 사이였다고 한다. 노병준은 이후 인터뷰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정용훈을 언급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5. 수상[편집]



5.1. 클럽[편집]



5.2. 국가대표팀[편집]


  •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 1998년


6. 동명이인[편집]


정용훈(교수)
[1] 당시는 고교 졸업 후 대학으로 진학하는게 추세였으나, 프로로 직행한 대표팀 동료가 2명이 더 있었다.이동국김은중. 당시 고려대 소속인 박동혁은 수비수로 활약했다.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는 일본과 혈전을 벌인 끝에 겨우 우승컵을 안을수 있었다.[2] 2002년까지 계속된 이 대회는 아시아 축구 연맹(AFC)이 AFC 챔피언스 리그를 신설하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에 합병, 폐지되었다.[3] 당시 사고를 조사했던 경찰관의 증언에 의하면 안전벨트만 맸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사고 소식을 들은 김호 감독은 이후 인터뷰에서 "내가 그때 그 애를 못가게 붙잡았어야 했다"라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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