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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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정용복(鄭容復)
이명
정복용(鄭復容)[1]

규백(圭伯)
본관
연일 정씨[2]
출생
1912년 4월 30일[3]
경상북도 영천군 환귀면 매곡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4] 매곡마을[5] 1020번지[6])
사망
1944년 12월 15일[7]
묘소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매곡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임고면 삼매리 매곡마을 입향조인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 2. 22 ~ 1757. 7. 8)[8]의 9대 주손(胄孫)이다.

2. 생애[편집]


1912년 4월 30일 경상북도 영천군 환귀면 매곡동(現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매곡마을)에서 아버지 정종식(鄭宗植, 1893. 10. 30 ~ 1967. 7. 26)[9]과 어머니 밀양 손씨(1894. 4. 17 ~ 1958. 6. 14)[10]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정인식(鄭寅植, 1879. 1. 8 ~ 1918. 4. 16)[11]과 큰어머니 서흥 김씨(1880. 11. 9 ~ 1960. 10. 26)[12]에 입양되었다.

1926년 진량공립보통학교(現 경산 진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4년간 오사카시사이타마현 카와구치정(川口町) 등지에서 고학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동지규합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하였다.

1941년 1월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다시 중화민국으로 건너간 그는 1944년까지 3년간 베이징시·톈진시 등지에서 동지들과 연계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1944년 3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통의 공작원으로부터 비밀리에 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영천군 지방의 유지인 정도영[13]과 협의, 후방 교란과 일제의 무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대구 동촌비행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해 3월 25일 이웃으로 추정되는 곽종림(郭鍾林)[14]의 밀고로 인해 이틀 후인 3월 27일 영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로 이송되어 8개월에 걸쳐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백을 거부하여 동지들의 희생을 막았으며, 결국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빈사상태가 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출옥한 후 7일만인 1944년 12월 15일 순국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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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일정씨세보 권9 72쪽에 등재된 이름이다.[2] 생원공파(生員公派)-백암공계(栢岩公系) 30대 용(容) 항렬. [3] 영일정씨세보 권9 71쪽에는 4월 29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는 6월 14일(음력 4월 29일)생으로 등재돼 있다.[4] 인근의 선원리와 함께 연일 정씨 집성촌이다.[5] 1744년경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 2. 22 ~ 1757. 7. 8)의 고향인 영천군 환귀면 대환동(現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대환마을)에 천연두만연하자 이를 피해 산골로 찾아들어 개척한 마을로, 매산 정중기는 정원흥의 9대조이기도 하다.[6] 현재 이 지번에는 영천 매산고택(梅山古宅)·산수정(山水亭)이 자리해 있는데, 매산 정중기가 입향하면서 짓기 시작해 정중기의 장남 정일감(鄭一鑑, 1719. 12. 23 ~ 1798. 2. 10)과 차남 죽비(竹扉) 정일찬(鄭一鑽, 1724. 3. 20 ~ 1796. 12. 16)이 완성했다고 한다. 1970년 12월 29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정중기의 10대 주손인 정재영(鄭在永, 1931. 11. 30 ~ 2014. 7)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천정재영씨가옥및산수정(永川鄭在永氏家屋및山水亭)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되었으나, 2007년 1월 29일 가옥을 처음 짓기 시작한 정중기의 호를 따라 현재와 같은 명칭을 지니게 되었다.[7] 영일정씨세보 권9 71쪽에는 1945년 1월 9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는 1945년 2월 21일(음력 1월 9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8] 1715년(숙종 41) 식년 생원시에 3등 29위로 입격하고 1727년(영조 3) 증광 문과에 병과 24위로 급제해 1756년(영조 32) 형조 참의(參議)에까지 오른 뒤 은퇴했다.[9] 자는 형오(亨五).[10] 손세걸(孫世傑)의 딸이다.[11] 자는 성욱(聲旭).[12] 김기동(金驥東)의 딸이다.[13] 10대조가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 1660. 4. 13 ~ 1720. 11. 16)로 같은 20촌 지간의 족형(族兄)이다. 정도영은 해방 후 영천군 갑 선거구에서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14] 의사였다. 본적은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1925년 5월 25일 의사 계속 면허 6860호로 허가를 받아, 1925년 7월 3일부터 1928년 7월 2일까지 그 면허가 유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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