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익주

덤프버전 : r20210301



출생
189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금음리[1]
사망
1975년 3월 28일
경상남도 남해군
본관
진주 정씨[2]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익주는 189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금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이예모(李禮模)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가지고 귀향한 뒤 정순조, 정몽호, 정학순, 윤주순(尹柱舜)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을 때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인근 동리에 이 계획을 알렸다.

4월 3일 오후 3시경, 그는 많은 군중과 함께 남양리 노상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열이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알리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도 안 시위군중은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그는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들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우체국·학교·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서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정익주는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1919년 8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남해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5년 3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익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노량리·문항리·진목리와 함께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2] 첨정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