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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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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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장
정일권[1]
丁一權 | Chung Il-kwon


파일:정일권 국무총리.jpg

출생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SR 프리모리예 니콜스크우수리스키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우수리스크)
사망
1994년 1월 17일 (향년 76세)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카운티 호놀룰루 시
스트라웁 의료센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3묘역 4번
본적
함경북도 경원군
본관
영광 정씨

청사(淸史)
재임기간
제5대 육군참모총장
1950년 6월 30일 ~ 1951년 6월 22일
제8대 육군참모총장
1954년 2월 14일 ~ 1956년 6월 26일
제2대 연합참모본부총장
1956년 6월 27일 ~ 1957년 5월 18일
제11대 외무부 장관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7월 24일
제9대 국무총리[2]
1964년 5월 10일 ~ 1970년 12월 20일
제13대 외무부 장관
1966년 12월 27일 ~ 1967년 6월 29일
제9대 전반기 국회의장
1973년 3월 12일 ~ 1976년 3월 11일
제9대 후반기 국회의장
1976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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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정기영, 어머니 김순복
형제자매
형 2명[1]
배우자
윤계원(사별)
박혜수
자녀
아들 정기훈, 정병열, 정성일
딸 정영혜, 정성혜, 정지혜, 정희진
친인척
조부 정좌진, 사돈 이형근
학력
경원보통학교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학 / 석사)
종교
기독교 (개신교)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8, 9, 10
약력
제11대 외무부 장관
제9대 국무총리
제13대 외무부 장관
제9대 국회의장
제8대 국회의원(전국구/민주공화당)
제9,10대 국회의원[2]
군사 경력
임관
펑톈 육군군관학교 (5기)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만주국 육군
1940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9년 ~ 1957년
최종 계급
상위 (만주국 육군)
대장 (대한민국 육군)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1. 개요
2. 일생
2.1. 광복 이전
2.2. 해방 이후
3. 6.25 전쟁
3.1. 휴전 이후
4. 비판 및 논란
4.2. 사생활 논란
4.3. 평양 숭실고보 사진 논란
5. 선거 이력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9대 국회의장, 국무총리.

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중 최장 재임 국무총리[3]이다.


2. 일생[편집]



2.1. 광복 이전[편집]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SR 프리모리예주 니콜스크우수리스키(현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우수리스크 도시관구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4] 1935년 중국 만주간도에 있는 조선인학교인 광명중학교를 거쳐,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에 5기로 졸업했다. 졸업 성적 우수자로 추천되어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하게 됐는데, 보병에서 기병으로 병과를 바꿈에 따라 1년간 만주군 기병훈련소를 거치느라 동기인 김석범, 석희봉보다 한 기수 늦은 55기로 편입하여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権)으로 창씨개명하고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였다. 만주군 헌병 장교로서 계인주, 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이 시베리아 철도를 폭파하려고 만든 특수부대 돌격대에서 3개월간 폭파 훈련을 받은 뒤 독립헌병대에 배치되어 랴오허 방면으로 출동했다. 1941년 신징에 있는 만주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하면서 3월에 헌병 중위로 진급했고, 1942년에는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에게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다''라며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5]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고등군사학교[6]에 입교하여 졸업 직전 일제의 패망을 맞이했다.


2.2. 해방 이후[편집]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헌병 대위였던 정일권은 부대명을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바꿨다. 소비에트 군이 신경에 입성하자 만주군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군인 400여 명을 모아 '신경보안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았다. 후에 김석범에게 사령관 직을 넘겼으나, 소련군 NKVD 본부로 연행됐다. NKVD 본부로부터 모스크바에서 6개월간 재교육을 받고 북한으로 가서 군대 창설에 종사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감옥에서 소련군을 비방한 것이 발각되어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되었다. 이에 기차를 타고 소련으로 끌려가던 중에 탈출해서, 하얼빈 - 평양 - 개성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1945년에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1월 졸업과 동시에 조선국방경비대의 정위(대위에 해당함)로 임관하였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 중에서 기수 서열이 매우 높았다. 만주군 출신 장교들의 대부로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7]

1946년 5월 23일에 1대대[8] 소속 병사들이 영등포 보급중대에서 2개 차량의 보급품이 부정처분되었다며 이런 사이비 장교들을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색출하여 쫓아낼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B중대장의 대위 정일권이 훈시하여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불만이 많던 병사들은 정일권을 쫓아냈다.미군의 출동으로 겨우 그들을 진정시켰으나, 이날 저녁에 중대 선임부사관들이 정일권의 숙소를 찾아와 요구의 관철을 주장하고 대표자 체포에 항의하며 정일권을 폭행하는 등 7~8시간이나 난동을 부렸다.[9]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짧은 기간중에 빠르게 진급하여, 1949년 2월에 육군 준장이 되었다. 그 해 12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장이 되었다.


3. 6.25 전쟁[편집]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 육해공군총사령관이 서울 함락으로 해임되자, 1950년 7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육-해-공 3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10] 이후 낙동강 방어전, 인천상륙작전, 북진, 중국의 참전에 따른 후퇴, 38선 일대 재탈환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미국이 주도하는 UN군 사령부 지휘 하의 한국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이 드러나면서, 그에 따른 문책 차원에서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하였다.[11]

총사령관 사임 직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미국으로 파견되어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입교해 1952년 7월 졸업하였다.[12] 귀국 후 2군단장으로 영전하여 저격능선 전투[13], 금성 전투 등을 지휘한 후 휴전을 맞았다.

3.1. 휴전 이후[편집]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이형근 장군과 같이 2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그 해 6월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하였다. 예편한 뒤에는 주터키대사, 주미대사 등 외국의 여러 국가에서 외교관을 지냈다.[14]

1963년 12월 박정희 정권의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5개월 뒤인 1964년 5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일회담 당시에 외무부장관까지 겸임하며, 그의 국무총리 재임시절에는 이른바 '불도저내각', '돌격내각'으로 불릴 정도로 한일기본조약을 맺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1966년 한국비료공업(당시 삼성그룹 소속)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에게 똥물(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맞는 수모를 당했다.[15] 그 후 1970년 12월 정인숙 살해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1년 7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 2월에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79년 초까지 6년간 국회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비록 유신헌법의 국회는 거수기나 다름이 없었지만, 여하간에 최장수 국회의장 이효상(8년)의 뒤를 잇는 영달을 누렸다.

1979년 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5.17 내란으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에서는 국정자문위원,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1989년 1월부터 박원근의 후임으로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아 2월부터 후신인 한국자유총연맹 출범을 주도하는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 1월 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4. 비판 및 논란[편집]



4.1. 친일 행적[편집]


상술했듯이 정일권은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군 헌병 장교 및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활동하였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군(軍) 부문에도 수록되기도 했다.

정일권 본인은 부인하였지만 정일권이 만주군뿐만 아니라 간도특설대에서도 활동했었다는 의혹이 있는데, 간도특설대 문서를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간도특설대는 악랄하고 잔혹하게 독립군을 토벌한 부대였으므로 만약 의혹이 사실이라면 정일권은 악질 친일파 그 자체이다.


4.2. 사생활 논란[편집]


정인숙 살해사건에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에는 귀의 모양 등으로 정인숙 아들의 생부가 '청와대의 그분'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졌지만, 정인숙 아들의 얼굴을 보면 정일권과 판박이라 지금은 정일권의 사생아라는 게 정설이다. 그 외에도 사생활이 매우 문란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본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는 것을 핑계로 많은 여자들과 외도를 해서 자기 자식의 수가 얼마인지 자기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아내와 사별한 뒤 29세 연하의 여성과 재혼했는데, 재혼녀가 딸의 친구인 것도 모자라 이 재혼녀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다.

이 아들 부분이 정인숙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재미언론인 문명자에 의하면, 정일권은 자기가 정관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생식능력이 없어서 정인숙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문명자도 그 말을 믿어서 정인숙의 아들을 박정희의 사생아로 생각했으나, 훗날 정일권이 재혼을 해서 멀쩡히 아들을 낳는 걸 보고 그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고. 정인숙 아들이 외할머니에게서 친부가 정일권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는 점, 정인숙 아들의 외모가 정일권과 많이 닮았다는 점, 정인숙 아들이 성장한 후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는데 정일권 측에서 소극적으로 나왔다는 점[16]을 보았을 때 정일권의 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4.3. 평양 숭실고보 사진 논란[편집]



파일:external/image.asiatoday.co.kr/%EB%AC%B8-(1).jpg


위 사진은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로 편입한 4명의 학생(맨 앞은 이영헌, 뒷줄 왼쪽부터 신원불명, 문익환, 윤동주)이 찍은 기념사진으로, 이 사진이 널리 퍼지면서 뒷줄 좌측이 장준하, 앞에 앉은 사람이 바로 정일권이라는 설명이 붙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이들이 동창이면서도 각기 아주 상이한 인생을 살았다는 식의 첨언이 붙기도 한다. 그러나 정일권, 장준하는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이렇게 잘못 퍼진 정보 때문에 심지어 이들을 같이 기리겠다며 행사를 주선하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다만 뒷줄 가운데는 문익환, 뒷줄 오른쪽은 윤동주가 맞다. 그러나 문익환의 말에 의하면, 앞줄에 앉아있는 사람은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이영헌'이라는 사람이고, 뒷줄 좌측은 문익환의 은진중학 동창이며 숭실에 같이 다닌 친구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장준하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는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며, 이 사진에 있는 사람도 장준하가 아니라고 했다.

윤동주 연구가로 저명한 작가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위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런 가당치 않은 왜곡과 날조를 모두 멈추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17]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6,254,921 (48.8%)
당선 (2번)
초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강원 4[18]
57,994 (64.03%)
당선 (1위)
재선[19]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58,251 (60.28%)
3선



6. 기타[편집]



파일:정박.jpg

△ 정일권 국무총리와 박정희 대통령

  • 정일권이 만주군 헌병 중위로 복무할 때 박정희신징군관학교 생도였다. 박정희는 정일권과 1917년생 동갑내기 사이였지만[20] 중위와 사관생도라는 계급 차이로 그를 형님으로 대접해 주었고, 정일권도 매주 일요일 학교에서 외출을 나온 박정희가 관사로 놀러오면 술을 잘 못하던 자신이 배급받은 장교용 정종을 술 좋아하는 박정희가 마시게 하고 담배까지 주는 등 각별히 챙겨 주었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는 집권 시절 정일권을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 등 자리를 마련해 주며 후대했다.

  • 국무총리 시절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 회고록을 두 편 남겼는데, 6.25 전쟁 부분은 동아일보에서 1985년 6월 3일#부터 1985년 9월 19일#까지 매일 89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연재 종료 이후 1986년에 『전쟁과 휴전』(동아일보사)이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정일권은 말년에 하와이에서 투병생활을 하며 6.25 전쟁 이후의 행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마무리하지 못한 작업을 '청사 정일권 기념사업회'(회장 홍성철[21])로부터 이어받아 2주기인 1996년 1월에 『정일권 회고록』(고려서적)으로 출간하였다.#

  • 유언으로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출처가 불분명하다.

  • 김종필은 개인적으로 정일권은 박태준과 함께 상당한 멋쟁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늘 가슴팍에 포켓스퀘어를 꼽고 다녔으며 패션 감각 또한 좋은 편이었다고.

  • 6.25 개전 당시 총참모장이던 채병덕은 평소 정일권의 경험과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국방부 참모총장, 육군 총참모장 재임기에 1대대 난동사건으로 인하여 중앙에서 멀어진 정일권을 각각 육군참모차장, 작전참모부장직에 등용하며 중앙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정일권을 다시 중용할 무렵에는 "정일권이 언제 오나?"며, 조속히 중책을 수행할 것을 독촉했다. 또한 6.25 전쟁 중 자신이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정일권이 임명되자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다가 정일권의 손을 잡고 말을 높이며 "총장 각하, 이제 제가 보좌하겠습니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의 친남동생과 사돈지간이다. 정일권의 딸이 이원만의 친조카며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병희 영풍그룹 창업주과도 사돈지간인데 정일권의 아들이 장병희 창업주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 생애 2등에 만족한 처세의 달인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최고권력을 넘보지 않고 현실에 도전하기보다는 공작급의 지위에서 남았다는 평가가 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4년 KBS1 다큐드라마 <전쟁 6.25> - 노주현

  • MBC 표준FM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 50년> - 정승현[22]

  • 1993년 6월 13~20일, 9월 19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 - 강민호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 최범호[23], 김건호[24]

  • 2004년 MBC 특별기획 드라마 <영웅시대> - 배우 미상

  • 세계정복자 시리즈에서 근대 한국군 장교로 나왔다. 친일파 출신인데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훈장 600개로 구매할 수 있다.[25] 북한의 경우 최용건이 있다.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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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은 나카지마 잇켄 (中島一權(なかじまいっけん)[2] 외무부 장관 겸임.[3] 1964년 5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6년 7개월 남짓 재임했다. 정권 교체 이후에도 총리를 계속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정권은 5년 뿐이며 그 정권 안에서도 총리가 자주 바뀌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특수한 상황이나 개헌 없이는 사실상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여 정권이 바뀌고도 하루 정도 유임한 황교안 총리처럼 정권 교체 후에도 총리직을 유지한 사례가 있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이라도 절대 오래는 있지 않는다.[4]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되어 있다.[5] 덕분에 신경군관학교 1기에 광명중학교 출신이 11명이나 된다.[6] 1943년 신경에 설립된 고급장교 양성기관. 정일권은 제2기 합격생 25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7] 특히 만주국육군군관학교 후배인 박정희를 위기 때 구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대사의 한국군 동향 보고에 의하면 한국군 내 파벌에서 정일권은 함경도 파벌을 이끌고, 봉천군관학교 9기인 백선엽평안도 파벌을 이끌었다고 한다. 일본육사 출신인 이종찬은 입학 때부터 일본육사인 파벌을 이끌었다.[8] 대대장 채병덕[9]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대대장이던 채병덕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10] 1950년 4월 22일부로 미국 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갔으나, 전쟁초기 육군참모총장이자 3군총사령관인 채병덕 소장이 방어작전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하여 미군의 불신을 받았고, 미군정시기 양성한 주요 지휘관들당시 미군은 광복군이나 일본군, 중국군(중화민국군), 만주군 출신자들의 계급과 경력을 거의 다 무시하였다.이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여 했기에 참모총장으로 임명받을 수 있었다.[11] 19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당시의 발언도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검찰관이 정일권에게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이에 정일권은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발언했는데 정일권의 발언에 격분한 김석원이 "이봐! 오늘 답변 그게 뭐야! 당장에 계급장을 떼어버려!"라고 일갈했다. 당시 정일권은 소장, 김석원은 준장이었기 때문에 김석원에 대한 징계 얘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김석원은 일본군 대좌 출신이어서 그냥저냥 무마되었다.[12] 정상적인 군대라면 야전의 실병력을 지휘하는 코스를 거친 후 참모총장이 되어야 하는데 정일권은 그런 거 없었던 게 문제. 정일권 자신은 이 인사 조치를 일종의 좌천으로 여겼다 한다. 정일권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것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때는 문제없이 지나가더니, 국민방위군 사건에는 걸려서 물러났으니 말이다. 이 때문에 사단장에 임명된 정일권은 상심해 전역을 할 생각이었는데 백선엽 등 다른 장군들이 말려 하지 않았다.[13] 저격능선 초반 전투가 바로 중국군이 아직도 승전으로 여기는 상감령 전투이다.[14] 당시에는 예편한 고위 장성들에게 대사 자리를 주어 해외에 내보내는 관례가 있었다.[15] 이 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를 했고 김두한이 뿌린 오물을 직격으로 맞은 정일권은 양복과 시계에 심한 냄새가 배는 바람에 모두 버려야 했다.[16] 정일권 주장대로 정말 친자가 아니라면 DNA검사만 하면 간단하게 억울함을 풀 수 있는데도, 정일권은 재판에 불출석하는 등 재판을 피하다가 사망해서 재판이 유야무야되었다.[17] 이 단락 역시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참고함.[18] 속초·인제·고성·양양[19] 전/후반기 국회의장[20] 생일은 박정희가 일주일 빠르다.[21] 정일권이 국무총리로 재직하던 시절에 비서실장을 역임하였다.[22] 1993년작 KBS TV 드라마 <제3공화국>과 1998년작 SBS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23] 군인 시절.[24] 총리 시절[25] 세계 정복자3 중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살 수 있는 장군 중에서 유일한 포병 3성을 가진 장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