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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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제도
3. 후대의 영향
4. 창작물에서의 정전제


1. 개요[편집]


井田制[1]

기록상 등장하는 중국 최초의 토지 제도이다.《맹자(孟子)》, 《주례(周禮)》, 《춘추(春秋)》 등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주공(周公) 단이 창안했다는 설이 있으나, 《맹자》에서는 100무(畝)를 1전(田)으로 했다는 대(周代)의 정전법을 기준으로 하여 설명할 뿐, 창안자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주(周)나라 이전부터 미진하게나마 시행했다는 암시를 하는 듯한 구절이 있다.[2]

맹자의 영향으로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정전제 논의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농지가 현대의 경지정리된 밭처럼 네모로 나올 리가 없다. 모양이 당연히 다를테니 소출이 다를건데 누구나 좋은 땅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일단 분배받은 후도 문제인데 가정마다 노동력의 차이도 존재하는데 밭 크기가 똑같으면 아들을 많이 낳아서 10대 초반의 아들들처럼 가용 노동력이 많은데 먹일 입이 많은 가정은 어쩌란건지, 아들을 못낳았는데 가장이 힘이 약하거나 병에걸려 누워있거나 심지어 죽었다면 어쩌란건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 상식적으로 엄청난 변수가 발생할텐데 고작 9/1세로 이 행정력은 어덯게 확보할 것이며 이걸 어덯게 납득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대책이 없다. [3] 이런 문제 때문에 왕망이 정전제를 강행했을때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고 무엇보다 조세가 안걷혀 신나라는 바로 망하고 한무제로 넘어간다.

상나라 춘추전국시대가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여기서 착안해 정전제를 당시 아직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등장하기 이전이라 조잡한 농기구만으로 농사를 짓기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만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농업 방식이라는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일단 그 제도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판국에 거기에 또다른 가설을 얹은 것이 증거가 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공동 경작을 할거면 그냥 여전제처럼 공동농장을 해서 공동경작 공동분배를 하지 굳이 우물 정자로 집집마다 땅을 나눠줄 필요가 없다.

사실상 존재 자체가 매우 의심스러운 제도고 실험해본결과 작동 자체가 하지 않는 제도지만 맹자가 워낙 칭송하면서 뻥카를 쳐놔서 유학자들은 정전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특히 자기가 지주가 아닐때 끊임없이 했다. 유학자들은 기본소양으로 누구나 맹자 춘추 예기를 읽어보기 때문에 정전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이 뻘소리에 낚여서 여러번 상소를 했지만 지주가 많은 관료들이 당연히 묵살했으며, 무엇보다 제도 자체가 현실에서 동떨어져있어 실험적으로 특정지방에서 테스트해봐도 분쟁만 생기고 조세가 걷히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이 계속 나오는 등[4] 결과가 좋게 나온적이 없다. 그럼에도 가난하고 원리주의적 성향이 짙고 현실과 괴리된 유학자들은 야인일때는 누구나 일기장에 끄적거려보지만, 과거에 급제해 지주가 되면 입장이 바로 달라졌다. 따라서 사실 정책 추진 자체가 된 적도 거의 없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당하고 가난해지니 정전제하자고 징징거렸고 교과서에서도 실렸지만 사실 유학자 모두가 아는 내용이니 특별히 획기적인 내용도 아니고 막상 정약용 본인이 관료지주였다면 입장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중국사에서 땅을 나눠주는 개혁 중 유일하게 성공한 제도는 균전제와 그 셋트인 부병제였다. 이 제도는 북위에서 시작하고 수나라에서 그 효험을 입증했다. 북위 수나라 당나라는 이민족인 선비족 혹은 그들과 관롱집단지방 호족 혼혈들의 정복왕조들이라 실행할 수 있던 제도다. 당의 이세민한족 신사 지주층 눈치볼 필요없이 반항하면 가차없이 죽였기 때문에 전부 몰수해서 막대한 국유지를 확보했고 이걸 선비족 공신들에게 나눠주는 뻘짓을 하지않고 백성 정남 1인에게 100무씩 뿌렸다. 대신 자영농으로 인정하고 정전제에서 언급한 우물정자 한가운데 공전같은 꿈같은 헛소리는 안하고 조용조로 아주 높은 세율을 적용해 조세와 병력을 긁어냈다. 물론 나라가 거저 땅을 줬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런 높은 세금을 군말없이 받아들였고 당나라는 중원을 통일한다. 이후 호족들의 불법적 토지겸병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가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이것도 백성들 인구가 늘어나는만큼 줄 땅이 무한하지가 않아 유지하는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긴 했다. 정도전도 야인일때는 원리주의적으로 정전제를 칭송하고 균전제를 회의적으로 보았으나 막상 실무를 해야하는 입장에 처하자 결국 경기도에만 관료수조권을 남겨두고 나머지 지역엔 균전제를 실시하는 과전법을 지지했다.

2. 제도[편집]


유교 경전이나 역사 사료에는 정전제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사방 1리의 사각형 토지(1정=900무)를 우물 정(井) 모앙으로 9등분하여 공전과 사전으로 나눈다.
  • 사전(私田): 9등분 된 토지에서 100무씩을 8가구가 각각 나눠가져 경작한다. 사전의 수확물은 스스로가 가지게 된다.
  • 공전(公田): 중앙에 있는 초기 100무이다. 공전은 공유지로서 정전에 소속된 8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고, 이 토지의 수확물은 모두 세금으로서 나라에 바친다.

정전제의 한 구획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한 변의 길이 135m짜리 정사각형으로, 면적은 약 1.82헥타르이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묘사한 정전제

중국사/세금 제도에서 정전제의 설명과 함께 한계 또한 서술되어 있다.


3. 후대의 영향[편집]


왕망이 실시한 왕전제, 그리고 후대의 균전제는 정전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이후로도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선에서는 토지 배분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될 때 정전제나 정전제를 개수한 토지 제도 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온다. 박제가도 저서인 북학의에서 정전제를 언급한다. 정약용경세유표에서 인구와 지형의 변화로 정전제를 시행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주대에는 지형이 변하지 않고, 인구가 늘지 않았겠냐며 정전제를 바탕으로 한 개혁 정책을 주장했다.

정전제의 의미는 세금 공출의 목적도 있었지만 마을 공동체의 유지·관리의 측면이 있다. 마을의 홀로된 과부나 노약자, 노동 수단을 상실한 집안에 공동의 경작지를 경작하게 하고 이에 일정 부분을 지급함으로 마을 공동체가 책임져야만 하는 사회적 비용을 최대한 낮추면서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 가구를 어느정도 한 공동체로 묶는다는 점에서는 오가작통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4. 창작물에서의 정전제[편집]


정도전육룡이 나르샤에서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는 이름으로 정전제가 등장한다. 두 드라마 다 정도전과 조준 등이 주축이 되어 추진한 정책이다. 하지만 반발 끝에 타협적인 정책인 과전제로 마무리되고 만다. <정도전>에서는 계민수전을 단순한 이상이 아닌 이성계에게 민심을 끌어 모아 결과적으로 왕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치적 도구로 썼으며, 이를 눈치챈 정몽주정도전이 명에 간 사이에 이성계와 조준을 설득하여 좀 더 온건적인 과전법을 채택하도록 유도하여 정도전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다만 그 당시 토지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생계 수단 중 하나였음은 염두에 둬야 한다.

<육룡이 나르샤>의 경우 정도전의 사상과 대비되는 무명이란 비밀단체를 등장시키는데, 극중 후반부 무명의 지도자와 정도전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무명 조직의 지도자는 "왕이 모든 땅을 차지하던 세상에서 개인의 권리를 조금이나마 더 낫게 만들어 온 것은, 왕권이 미치지 않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 땅을 일궈 이득을 보려한 개인의 이기심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 결과 권문세족이 평민들의 땅까지 뺏어먹는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정전제를 통해 땅을 더 얻을 수도 없지만 빼앗길 수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 평등의 기반 위에 성리학적 이상이 구현된 세상을 만들겠다."고 답변한다. 물론 저 둘이 대화를 나눈 시점이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되지 않았단 점,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패악이 실제 심각했던 점을 고려하자면 둘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명은 자본주의, 정도전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각각 대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애초에 무명이란 단체 자체가 역사에 실존하지 않는 단체인만큼, 작가가 선악구도가 분명히 초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일부러 이런 선악이 모호한 철학적 대립구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5]

참고로 두 창작물 다 고증은 사실과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이는 조준을 정도전 당여 수준으로 묘사하면서[6] 생긴 문제이기도 한데, 학계에서는 경제육전에 밀린 사찬에 불과했던 조선경국전처럼 계구수전 또한 말만 그럴싸 했을뿐 토지개혁 논의에 정도전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바는 없다고 본다. 당시 토지개혁은 조준의 주도로 시행되었으며, 계구수전은 개혁파들 사이에서도 큰 이슈가 되지 못해 정도전은 사상과 별개로 주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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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전법(井田法)이라고도 한다.[2] 《맹자》, 〈등문공 상〉, 3장을 참고하라.[3] 예를들어 가장이 죽었고 자식들이 노동력이 안되면 땅을 도로 회수한다는 원칙이 있다치자. 그러면 과부와 자식들은 굶어죽으란 이야기가 된다. 아들이 많고 노동력도 많은데 아직 성인이 안되어 결혼을 못시켜서 조혼을 시켰다고 치자. 그러면 이 10대 초반 아동부부와 20대 건장한 부부가 똑같은 땅을 분배받으면 노동력 투입의 극심한 비효율과 논쟁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없고 쓸데없이 복잡한 법칙만 무한히 늘어나는데 이걸 정리해줄 군사력 행정력을 꼴랑 9/1세로 확보할 방법이 없다.[4] 이 제도는 가구당 50무라 자식 많은 가족은 자식들이 굶어죽는다. 애 안낳거나 1명인 집은 쌀이 남아돈다.[5] 사족으로 여기서 더 나아가자면, 사실 현대에서도 볼 수 있듯 타협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6] 단, <정도전>에서 조준은 문하좌시중으로 부임한 이후로 정도전의 당여가 아닌 모습을 확실하게 보였다. <육룡이 나르샤>도 비슷한 흐름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