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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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종명
鄭鍾鳴, 鄭鐘鳴

파일:정종명.jpg
출생
1894년
경상북도 경주군
사망
몰년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간호부 활동
2.3. 산파 활동
2.4. 공산주의 및 여성 활동
2.5. 옥고, 그리고 이후의 행적
3. 기타



1. 개요[편집]


한국 및 광복 이후 북쪽 지역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 한국의 여성 항일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정종명은 법적으로는 1896년 8월 5일생이며, 본적은 경성 연지동 97번지로 되어 있다. 하지만 동아일보 1925년 10월 20일자 기사 '독자와 기자-청상과부로 가두에 서기까지'에 따르면, 정종명은 경상북도 경주 태생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삼천리> 1931년 기고 '전위선상의 인물평-열성과 근로의 정종명씨, 근우회 여류투사'에 따르면, 정종명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동향인 사회운동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회주의 사상가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실제 출생지는 경주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녀는 1929년 <삼천리>에 기고한 회고에서 자신의 나이가 36세라고 언급했다. 당시엔 유아사망률이 높아서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1948년에 출간된 <조선연감>에서 정종명이 1947년 무렵 55세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을 볼 때, 그녀의 실제 출생년도는 1894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종명은 어렸을 때 두창을 앓은 후유증으로 곰보자국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에는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다는 언급이 항상 있으며, 그녀에 대한 여러 별명 중 하나가 '정곰보'였다.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11살 때 배화학당에 입학한 것을 볼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명은 4년간 배화학당을 다니면서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부친이 러시아로 떠난 뒤 연락이 두절되고 어머니 박정선이 홀로 자식들을 부양하면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그녀는 1929년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빈궁과 고독과 학대로 다진 인생의 최하층에서 태어나서 소녀시대, 청춘시대를 모조리 보내었다."고 회고했다.

17살 때 대한의원 통역이었던 박모와 결혼하였고, 19살 때 아들 박홍제(朴弘濟)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후에 결혼 생활은 불행했으며, 그 이유는 당사자의 의사와 개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이혼할 뜻을 품고 기회를 엿봤으나 남편이 곧 병으로 사망하면서 아들 하나를 둔 미망인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21살 때 기독교 전도부인이 되어 성경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하지만 곧 경제적 독립을 꾀하고자 전도부인을 그만두고 간호부로 방향을 돌렸다.


2.2. 간호부 활동[편집]


정종명은 1917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녀는 재학 중에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곧 여학생들의 리더가 되었다. 그녀는 대우 개선 문제를 놓고 학생 20명을 선동시켜 동맹휴학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녀는 1920년 여성지 <신여자>에 '간호부 생활'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녀는 먼저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기숙사, 그리고 간호부의 일에 관하여 소개하였다. 이어 ‘기침과 식사’ ‘주간직무’ ‘야간의 로맨스’로 나누어 하루의 시작에서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일과를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정종명은 서양식으로 잘 갖추어진 기숙사, 식당, 병원의 환경, 동료간의 각별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미리 계획된 일정에 따라움직이는 나날에 대하여 자못 자랑스러운 어투로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렇지만 간호부로써의 일 자체에 대해서는 “혹 상당한 학력 있는 사람으로 이 뜬 세상 거친 물결에 헤메이고 울다가 할 수 없이 자선사업인 간호부생활에 들어온 사람이 많으며”, 간호직에 대하여 “어떠한 나라에서는 존경을 받고 어떠한나라에서는 멸시를 받는 신산하다면 신산하고 고상하다면 고상하다고 할 직업”인데 “정신이나 육체 두가지로 다 노동하는 직업”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병원의 규칙은 다른 데와 달라서 상하지별과 규칙이 엄중하옵니다. 그리하여 병실 안에서는 부장과 의사가 시키는 대로 명령을 맞추며 구구이 학과를 공부하는 터이니까 시간이 여간 총총하지 않습니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정종명이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서 공부하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생했다. 세브란스병원에서도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3월 5일 오전 남대문정거장 앞 광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대 가운데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11명이 붕대를 휴대하고 군중 속에 섞여 있다 체포되기도 했다. 정종명은 이 시기 3.1 운동 주동자들을 도와주었다.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에 재학하던 강기덕민족대표 33인과 연결되어 만세운동 계획을 지시받고 학생들의 시위 참여에 대한 연락책임을 받아 학생들을 규합하다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녀는은 강기덕이 외부와 원활히 연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 세브란스 병원 제약주임이자 삼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인 이갑성의 기밀서류를 맡았다가 경찰서에 잡혀 며칠간 취조받기도 했다.

정종명 본인은 며칠간 취조받는 선에서 그쳤지만, 어머니 박정선은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북감리회 전도사였던 박정선은 전협 등이 이끄는 대동단에 가입한 뒤 1919년 11월 28일 대동단 동료들과 함께 경성 안둑동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종명은 1920년 <신여자>에 기고한 '간호부 생활'에서 어머니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 무슨 일로 철창 속에 갇혀 있는 부모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고"라며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2.3. 산파 활동[편집]


1920년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양성소의 제10회 졸업생이 된 정종명은 세브란스 병원이나 여타 선교계 병원에서 근무하지 않고 산파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산파는 간호부보다 보수가 좋았고, 병원에서 정해진 근무 일정에 따라 일해야 할 필요도 없어서 정종명이 꿈꾸던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데 적합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 면허 산파의 수가 21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면허를 취득하기가 어려웠다. 산파가 되려면 조선 총독부에서 지정한 조산학교를 졸업하거나 산파 면허 시엄에 합격해야 했는데, 간호학교 졸업이나 그 정도의 학력을 인정받아야 지정 조산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산파 면허 시험은 매우 어려워서 합격률이 낮았다.

정종명은 산파 면허를 취득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의원 산파강습소에 입학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를 위한 비용은 경성 관수동의 김용채 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면서 해결하였다. 김용채는 조선총독부의원 1회 졸업생으로 1919년개인의원을 개원했는데, 위치가 청계천 근처여서 현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조선총독부의원 산파강습소를 오가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정종명은 조산부과를 무사히 수료하고 산파 면허를 취득했으며, 바로 경성부 안국동에 자신의 조산원을 개원하였다. 이후 정종명은 일제시대 내내 사대문 안의 종로 근처 이곳 저곳에서 현직 산파로 활동하였고, 자신을 소개할 때나 남으로부터 소개받을 때나 항상 제일 먼저 ‘산파’임이 명시되었다. 또한 정종명은 산파로서의 경험을 자신의 사회활동에 반영하여 근우회를 이끌면서 농촌 탁아소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고, 1930년에 <삼천리>에서 펼친 산아제한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논객, 여기자 등이 망라된 7명의 필자들은 모두 각자의 견지에서 산아제한에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그중 정종명은 산파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여성노동자의 현실, 모성과 영유아 건강의 측면에서 산아제한이 필요할 뿐 아니라 제한적 낙태가 가능하도록 법률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현실적이고 제도적인 대안까지 제시하였다.

산파 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그녀는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6월 22일 경성지역에 운영되는 갈돕회 여자부를 독립시켜 여자고학생상조회를 발족시켰다. 여자고학생상조회는 조선 부인의 향학심에 쫓아 다방으로부터 상경하여 고학하고자 하는 여학생을 위하여 창립한 단체로, 취학에 편리케 하기 위하여 여자고학생의 가난을 상조하며 기숙사의 건설 적절한 노동기관의 설치 기타사업의 실현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즉, 여성으로써 경제적 독립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실천했던 정종명 자신의 삶과 같이 가난한 고학생들이 경제적 자활을 할 수 있도록 공동생활을 하면서 수익사업을 통하여 학업을 계속하고 서로 의지하도록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상조회에 회비를 내는 게 어렵자, 정종명 본인이 산파 수임료, 독지가들을 방문하여 받아낸 기부금, 그리고 전국 각지의 순회 강연에서 벌어들인 입장료 및 기부금을 모아 지원했다.


2.4. 공산주의 및 여성 활동[편집]


그녀는 여성의 무산계급론을 강조하면서 1923년 6월 블라디보스톡에 설치된 소련 코민테른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의 국내조직인 꼬르뷰로 국내부의 공산청년회에 가입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당시 그녀는 유일한 여성 공산청년회 회원이었다. 본격적인 조선공산당 자부를 조직하기 위한 길을 걸었다.

그녀는 1923년 여름부터 전국 각지에 대중 강연을 벌여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924년 2월 18일에서 3월 24일까지 40일 동안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의 약 21개 지역에서 연일 강연을 벌여 총 수입을 1,634원 30전이나 벌어들었다. 정종명의 대중강연 주제는 주로 여성문제에 관한 것으로,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조선 여성의 현실을 짚어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을 열정적인 스타일로 전달하여 커다란 인기를 끌었고, 당시의 대표적 대중연설가 중 한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듯 대중강연에서 맹활약한 그녀는 곧 유명인사가 되었다. 1924년 일간지 조선일보에서는 '여자고학생의 본영 여자고학생상조회-주장 되는 정종명 여사'라는 기사에서 정종명의 활약을 칭송했으며, 그녀의 곰보자국까지도 "진실로 보기 좋게 스멀스멀 슬기 있게 얽은 얼굴"이라고 호평했다. 게다가 이 기사에 실린 정종명의 사진은 크리스마스의 유래와 의미에 대한 기사, 그리고 아기 예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과 나란히 배치되었다.

1924년 1월, 정종명은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했다. 조선간호부협회는 조선인 간호부들의 단체로, 회원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직 알선 등을 했고, 동시에 대중을 대상으로 보건 교육을 개최했으며, 수해 등의 재난 상황에서는 다른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구호를 제공하는 등 폭넓은 사회 활동을 수행했다. 1926년 1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그녀는 진상을 파악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만약 병원 측이 중재에 응하지 않을 경우 “형편에 따라서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동시에 조선의 직업부인을 위하여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의 내면생활을 세상에 폭로하여 적극적으로 대항할 방침”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1924년 5월 10일, 정종명은 사회주의 단체인 여성동우회 발기 총회에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여성동우회에서 각 지방에 배포하려던 선언물이 불허되자 경찰에 항의하기도 했고, 1926년 신년간친회에서는 여성 활동 1년사를 보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1927년 고등여학교 졸업 이상 지식계급의 여자만의 모임이었던 망월구락부가 다른 여성들 역시 참여시키기로 하고 확장을 꾀할 때, 그녀는 발기인으로 자원하기도 했다.

여성 공산당원으로써 관련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4년 11월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에 참여하고, 북풍회의 월간 사상잡지 ‘해방운동’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북풍회를 비롯한 4개 공산주의 활동 단체가 합동으로 결성한 ‘정우회’가 결성되자 여기에도 참여하고 상무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1927년 2월 좌우 합작의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에도 함께 하였다. 정종명은 1929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데 이어 1930년에는 신간회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5월 27일, 정종명은 근우회 창립총회에 참석해 중앙 집행위원 21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선전조직부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해 9월에 상무집행위원이 되었고, 1927년 11월 전남 목포에 직접 가서 근우회 지회에 관해 조사했다. 또한 1928년 종로경찰서가 근우회 전국대회를 금지시키자 경찰과 교섭하기도 했고, 1928년 7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녀는 지방에서 검거된 독립운동가들이 징역을 살기 위해 경성에 도착하면 마중 나와서 격려하고[1],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판장에 방청객으로 나서서 격려했다.[2]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면서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인물들을 추운 초봄에 창밖에서 몇시간이고 지켜보는 것으로 위로했으며, 때로는 이러한 자리에 아들 박홍제까지 데리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3] 그리고 붉은 철쭉꽃을 들고 기다리다가 수감자와 눈이 마주치면 노래를 부르며 위로했다고 한다.[4] 또한 형무소에서 구금된 인물의 건강 문제가 심각할 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하기도 했다.[5]

그녀는 독립운동가들의 장례도 앞장서서 치루곤 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국내 강연회 도중 사망한 정우영의 사망 1주기에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했고, 1925년 8월에는 서울 송파에서 익사한 사회주의 운동가 전일[6]의 장례를 주도했다. 또한 1928년 1월 35개 단체가 연합하여 준비한 여성운동가 박원희의 사회단체장에 준비위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면서, 박원희의 사망은 “여성운동의 큰 손실”이라는 인터뷰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영결식에서는 “눈물 섞인 애도사”를 낭독하였다. 1929년 이정수의 장의에는 재정부장으로 나섰으며, 1930년 이승훈 사망 후 사회장을 치를 때 준비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1930년, 정종명은 <삼천리>에 '동지 채 그리그리 선생'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 따르면, 그녀는 러시아 국적의 사회주의 운동가 채 그리고리가 조선에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먼발치에서 목례로 첫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일면식도 없던 채 그리고리가 이후 3년간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면회를 하며 위로하다가 결핵 말기로 입원했을 때는 수차례 병문안하며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을 지켜보았다.

정종명은 “제3기 폐병이라 하야호흡이 자못 곤란해 보였다. 그날 맥박은 130으로부터 140도까지 쳤었고 신열도 40도를 상하 하였으니 이미 여간히 중태인 것이 아니다”고 회고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채 그리고리가 1930년 4월 30일 숨지던 날, 원하는 사이다를 사다주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다가 임종을 맞이하자 국내에 친인척이 단 한명도 없는 그를 위하여 앞장서서 장례를 치루었다.


2.5. 옥고, 그리고 이후의 행적[편집]


1930년, 정종명의 외아들 박홍제가 '무서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배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천 소념감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그녀는 1931년 4월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8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그녀는 1932년 10월부터 취조를 받았고, 1934년 3월 공판에 참석했다. 그녀는 김문수와 함께 주도자로서 매번 기사의 제목이나 사진을 장식했다.

일제는 그녀로부터 전향서를 받아내기 위해 갖은 고문을 가했고, 결국 그녀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전향서를 작성했다. 이 전향서는 1934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 '옥(獄)의 투철(透徹)한 자각은 과거의 오류(誤謬)를 청산'이라는 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후 그녀는 4년형을 구형받았다가 6월 25일 징역 3년형을 최종적으로 언도받았다.

1935년 7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녀는 경성에서 산파 일에 전념하며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 후 1945년 12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그러다 북한으로 넘어가 함경남도 대표 자격으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47년에는 함흥에서 부인 운동을 펼쳤고, 1948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북조선민주여성동맹은 조직을 이용해 북한 공산세력의 권력을 강화하고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기타[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정종명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임원근, '옥중기', <삼천리>, 1930[2] '철통같은 경계 살도(殺到)하는 군중', <매일신보>, 1927년 9월 14일자 기사[3] 김일성, '감옥에서 보든 여성', <혜성>, 1931[4] 김경재, '옥중생활 로맨스', <삼천리>, 1932[5] '김약수 옥중 발병 의사가 왕진', <매일신보>, 1927년 6월 24일자 기사[6]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일(1893), 전일(1896)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