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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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변 주도자
제2대 무신 집권자
鄭仲夫 | 정중부


파일:정중부.jpg

관향
해주 정씨(海州 鄭氏)
출생
1106년
고려 해주
사망
1179년 10월 18일[1] (향년 73세)
고려 개경 민가
신장
7척[2]
아들
정균
1. 개요
2. 생애
2.1. 무관이 되기 이전
2.2. 초급 장교 시절
2.3. 무신들의 쌓이는 불만
2.5. 갑오정변: 이의방의 몰락과 집권
2.6. 권력 다툼과 기해정변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인물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고려무신(武臣).

무신정변을 주도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연 인물로 무신정권의 제2대 집권자.[3]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며 그와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당한 굴욕적인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2.1. 무관이 되기 이전[편집]


정중부의 초기 관직
직위
공학금군(控鶴禁軍) 소속 장병
공학군은 국왕의 친위대로 이름은 당나라 천자의 친위대 이름을 가져 온 것이다.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의 사람이었다. 비범한 외모를 지닌 거구의 미남이었다고 하는데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정중부는 용모가 우람했으며, 눈동자는 네모졌고 이마가 넓었다. 또한 얼굴 빛은 백옥 같고 수염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키가 7척이 넘는 거구로서 위풍이 늠름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도 그의 외모를 기록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중부가 군문에 몸을 담그면서 출세하게 된 계기도 그의 위풍당당한 외모의 덕이 컸다. 처음에 정중부가 살던 고을에서 정중부를 군적에 올려놓고는 그의 팔을 매어 수도인 개경으로 보냈는데[4] 재상인 최홍재가 군사들을 가리다가 그의 풍채를 보고 비범하여 여겨 팔을 맨 것을 풀어주고 공학금군(控鶴禁軍)[5]에 편입시켰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정중부가 키도 크고 용모도 잘생긴 편이라 왕의 위엄을 발하는 자리에 세우기는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정중부는 이처럼 멋있는 용모 덕분에 공학군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2.2. 초급 장교 시절[편집]


정중부의 초기 관직
직위
견룡대정(牽龍隊正)
견룡군 소속 대정이며, 대정은 부사관급 직위다. 견룡군은 공학군과 함께 국왕의 친위대 중 하나다.
교위(校尉)
교위 역시 낮은 직위로 아마 견룡군 소속이었을 것이다.

정중부는 이후 인종(재위 1122년~1146년) 때 초급 장교 정도의 직책인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이 때 정중부에게 있어서는 평생토록 가슴 속에 원한을 심어준 사건이 일어난다.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제석: 除夕)날,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을 때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 자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장기자랑은 '잡기'(雜技)라고만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귀신 쫓는 춤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에 따라 왕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던 내시[6], 다방[7], 견룡[8] 등이 함께 춤을 추며 놀았는데, 그 와중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를 만만히 보고는 그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다룬 창작물에서는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이 길고 멋지게 생긴 것을 보고 "무신 따위에게 저렇게 멋진 수염은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질투하여 태웠다는 식의 묘사가 나오고는 하며, 다른 버전에서는 천한 무신 주제에 감히 문신들 틈바구니에서 같이 노는 게 못마땅해서 김돈중이 시비를 걸었다는 버전도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김돈중이 1144년 과거에 급제했고, 인종이 2년 후인 1146년에 붕어했으니 대략 이 시기 사이의 일로 추측된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정중부는 김돈중을 그 자리에서 붙잡아 주먹을 날리며 욕을 퍼부었다. 물론 정중부도 그의 정체가 알고 보니 김돈중이었음을 알고 순간 당황했고, 김돈중을 포함한 여러 문신들도 정중부에게 감히 무신 주제에 문신들을 업신여긴다면서 화를 냈다. 물론 여기까지는 젊은 관료들이 만취하는 바람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더 커졌다.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아들이 정중부에게 두들겨맞은 것을 알고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꾸짖기는커녕 노발대발하며 본인 가문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왕에게 정중부를 똑같이 고문해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군주였던 인종은 대학자이자 권신이었던 김부식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를 허락하기는 했으나, 정중부도 특별히 아꼈기 때문에 그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비록 정중부는 임금의 총애 덕분에 처벌은 면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김부식 부자는 물론 문신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9] 전근대에서 남성의 수염은 자존심과 관계된 문명이 많았기 때문이다.[10] 그 후 정중부는 다시 승진을 거듭하여 인종의 아들 의종 즉위 초(1146년 즈음)에 교위(校尉)가 되었다. 이때 어사대에서 왕의 명령으로 수창궁 북문을 봉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그런데 정중부와 산원인 사직재가 이를 마음대로 열고 드나들자 1147년 12월에는 어사대에서 정중부를 탄핵하여 이를 처벌할 것을 청했으나, 의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1170년대 정중부의 관직
직위
상장군(上將軍) 혹은 대장군(大將軍)[11][12]
2군 6위 중 최고위 무관직으로 상장군은 정3품, 대장군은 종3품 직위이다.

이후로도 정중부는 승승장구하여 훗날 무신정변이 일어난 1170년 즈음에는 지위가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다혈질적인 성격에 막가파스런 경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의종 부자가 모두 정중부를 좋아하며 특별히 우대해 준 것을 보면 사람을 끄는 리더십만큼은 뛰어났던 인물로 보인다. 사실 정중부는 젊은 시절부터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호위하는 직책을 지냈기 때문에 포지션으로 치자면 내시들과 더불어 국왕의 최측근 포지션에 가까웠다. 여기에 그의 위풍당당한 외모가 플러스 요인이 되어 유독 군주들이 정중부에게 큰 호감을 보였던 듯 싶다.


2.3. 무신들의 쌓이는 불만[편집]


이후로도 문신들은 계속 무신들을 얕봤고 멸시하고 괄시하고 깔봤는데, 특히 좌부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가 왕의 총애만 믿고 무관들을 업신여기자 더욱더 분노했다.

한편 임금 의종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점점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하게 놀러만 다니며 불교‧음양설‧선풍(仙風) 등 통치와는 연관이 먼 것들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의종이 강대한 개경 문신들의 힘에 짓눌려서 현실도피적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 사실 그 전부터 의종은 군주로서의 모습보다는 예술가 기질을 자주 보였다.

하여튼 의종은 놀러다니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 탓에 1164년에도 인지제(仁智齊)라는 곳에 놀러갔다. 그런데 법천사의 승려 각예가 대접하겠다고 해서 의종은 달령원(獺嶺院)까지 또다시 가서 대접을 받았으며, 1166년에는 왕이 성수원(聖壽院)[13]에서 각예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의종은 각예와 죽이 잘 맞았던 모양으로, 이 때 의종은 여러 학사들과 놀러다니며 끝없이 시를 짓고 화창했는데, 정중부를 포함한 호위 부대 소속이었던 여러 무신들은 먼 길을 질질 끌려다니며 피곤하게 호위나 서게 되었다. 이에 들러리가 된 무신들은 불만이 쌓여서 비로소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왕이랑 문신은 시나 지으면서 재밌게 먹고 노는 반면 무신들은 거기에 끼지도 먹지도 못하니 불만이 저절로 쌓일 수밖에 없었다.

1170년 8월에는 왕이 연복정에서 출발에 흥왕사에 놀러갔고, 이 때 결국 무신들이 폭발했다.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거사를 권하자 정중부가 답했다.

"다음에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자."


그러나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의종도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하게 느낀 모양인지 보현원으로 출발하려던 오문(五門)에서 갑자기 멈추고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수박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줄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 때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난다. 이때 나이 든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조기에 빠져나왔는데, 한뢰가 튀어나와 이소응을 조롱하며 그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명색이 대장군씩이나 된다는 놈이 어떻게 새파랗게 젊은 것들도 감당하지 못하느냐?"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소응은 노쇠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체력적으로는 최고조인 젊은 무관들을 당해낼 수 없음은 당연지사였다. 대장군씩이나 되는 양반이 새파랗게 어린 문관들 앞에서 수박희로 재롱이나 떨어야 했다는 점을 보면 당시 무신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를 알 수가 있다. 또한 뺨을 때릴 때 왕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정중부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터뜨리며 한뢰에게...

"네가 비록 문관이라고는 하나, 이소응 장군은 3품 벼슬을 지내고 있는 분인데 너 따위가 어떻게 이딴 짓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외쳤다. 이런 정중부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대장군은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두 번째로 높은 종3품 품계이며, 한뢰의 직책 기거주는 종5품으로 이후의 사관에 가까운 직책이므로 대장군인 이소응이 한참 상급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 든 무신이 백주 대낮에 젊은 문신에게 맞는다는 것은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모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다만 문신들이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은 무신들의 권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밑에 계산을 깔고 하는 행위였다고 볼 여지도 꽤 많다. 의종의 입장에서는 무신을 키우고, 무신의 불만을 해소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수박 대회를 연 것인데, 갑자기 문신 한 놈이 눈치 없이 끼어들어 판을 파토낸 것이다. 한 마디로 한뢰는 눈치도 없었고 센스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와 그 과정에서 생긴 차별 의식 및 문신들의 오만 등이 불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애초에 놀러다니면서 문신들만 감싸고 돌았던 의종의 행동 자체가 무신들의 불만을 부채질한 것 역시 사실이다. 수박 한 번 재밌게 한다고 풀릴 수준의 불만도 아니었고, 이소응이 뺨을 맞았을 때 제재하기는 커녕 본인도 한바탕 크게 웃기나 한 주제에 결과적으로 수박을 안하느니만 못한 꼴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의종 자신이었다.


2.4. 무신정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무신정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무신난 시작 후 정중부의 관직
수직
수사공(守司空)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사공은 삼공 직 중 하나다.
직위
복야(僕射)
정2품 직위. 복야는 좌복야와 우복야가 있으며 상서성의 장관이다.

이소응이 뺨을 맞은 자리에서 이고는 칼을 뽑고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잠자코 기다리라고 했으며, 날이 저물 때쯤 왕 일행이 보현원에 접근했을 때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군을 소집시켰다. 그리고는 왕이 문으로 들어가고 문신들만 나오자 무신들은 그 자리에서 임종식과 이복기부터 가장 먼저 살해하고 침입했다. 한뢰는 왕이 앉는 어상 밑에 숨기도 하고 왕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처음에는 왕 앞에서 자제하던 이고가 칼을 빼들자 나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무신들은 개경에 들어가서 사졸들을 다 풀어 문신 수십여 명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일파는 원래 자신들의 원수는 문신 몇 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훨씬 많은 문신과 찬동하지 않는 무신들까지도 죄다 죽였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집까지도 모조리 허물 정도였으니 얼마나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개경에 있었던 김돈중은 감악산으로 황급히 도주했지만, 이후 시종의 밀고로 인해 자신의 동생과 함께 같이 잡혀 죽은 것으로 볼 때 인망이 없긴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의종은 정중부에게 그만 하라고 만류했지만, 정중부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 일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고 이미 분노 게이지가 마치 하늘을 뚫을 정도로 상당히 분기탱천해 있던 무신들에게는 이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이후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이 사건이 '보현원의 난', '무신의 난', '정중부의 난' 등으로 칭하기도 하는 무신정변이며, 고려시대의 역사를 전•후기로 크게 가르는 무신정권의 시작이 바로 이 사건이다. 정중부의 입장에서는 수십년 묵은 원한을 이때 풀게 된 것으로, 이 때 정중부의 나이는 60대 중반의 고령이었다.

명종 옹립 후 받은 관직
직위
참지정사(參知政事)
고려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직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평장사 계열 직위 중 네번째 직위.
중서시랑문하평장사(中書侍郞門下平章事)
평장사 계열 직위 중 두번째 직위.

9월에 군주 의종도 폐위하여 거제현으로 쫓아 유폐하고, 태자 역시 진도현에 유배보내며 태손을 살해한 뒤 의종의 친동생 익양공 왕호를 왕으로 옹립한다. 그 공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문하평장(門下平章)을 추가해 승진하여 재상의 반열에 오른다. 10월에 이고, 이의방과 함께 벽상공신으로서 공신각 위에 초상이 그려졌다. 그리고 서해도 군현을 자신의 고향 해주에 편입시켰다.

김보당의 난 제압을 위한 행영 군단
정중부의 직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事)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
고려 서북면의 군단장. 서북면의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받음.
'행영'은 임시 군단을 의미한다. 즉 임시로 편성된 군단의 병마사란 뜻.
행영의 편제 중 중군을 지휘하는 병마판사.

1172년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事),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 겸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에 임명되었으며, 김보당의 난이 발생함과 동시에 장순석, 유인준 등이 거제도의 의종을 데려와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군 이의민, 산원 박존위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게 하면서 또다른 군사를 서해도로 보내어 김보당의 난을 진압했다.

정중부의 마지막 관직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의 최고위 관직. 실권을 가진 직위 중 제일 높다.

1174년 12월에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며칠만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2.5. 갑오정변: 이의방의 몰락과 집권[편집]


무신 정권 기구
정치 기구
사병 기구
친위 겸 정규군 기구
연립 ~ 최충헌
최충헌
최우 ~ 임연
경대승 ~ 임연
최우 ~ 임유무
중방(重房)
교정도감(敎定都監)
교정도감 & 정방(政房) & 서방(書房)
도방(都房)
삼별초(三別抄)



이의방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 연신 패퇴하며 고전하자 이를 역이용하여 1174년 12월, 아들인 정균이 부하를 시켜 이의방을 암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갑오정변), 정균이 조위총의 난에 대한 처리를 할 때쯤인 11월 임자일에 어떤 이가 중방에 문관들이 남적들과 변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는 허위보고를 하자 도교승 김윤승 등 7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병부상서인 이윤수를 거제현령으로 강직시켰다.

또한 이 때, 보제사(普濟寺)를 중수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여 낙성식에 명종이 참여하기를 청원했지만 해당 관원들의 간언에 따라 가지 않았다. 비밀히 승록사(僧錄司)를 시켜서 임금의 거동을 청하고 갖은 성찬을 차렸으나 명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관원들이 대신하여 갔다고 한다.

정중부는 권세있는 직위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는데 12월에 낭중인 장충의가 그의 뜻을 맞추어, '왕이 재상에게 궤장을 주면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그만두지 않는다'라고 하자 왕이 궤장을 하사하도록 만들어 국사를 일체 자신에게 고하여 결재를 받았다. 때로는 중방(重房)에 앉아서 남의 죄에 대하여 발언했으며, 백관은 그의 집에 가서 축하를 드렸다 할 정도로 권세가 높았다.

대장군 홍중방이 무관들의 문관들의 임시직을 빼앗아 무관들이 독차지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하급 무관들에게 암살당할 뻔 하기도 했는데, 이의방 세력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졌으나 하급 무관들의 반발이 아직 남아있으며 오히려 그 주모자와 일당을 잡아서 귀양보냈다는 것은 이의방 세력과 달리 정중부 세력은 온건파인 만큼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하는 것이야 이미 변화의 대세였지만, 문관들의 임시직까지 뺴앗는 것은 지나치다는 홍중방의 의견은 중방에서도 내심 찬성했던 듯 보인다. 이는 홍중방의 대사 중 중방에서 그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말을 못하고 있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알다시피 중방은 친정중부 세력이었다. 이의방파의 반발 때문에 말을 못하던 중방의 고위 무신들이 정중부 정권에서 실세로 올라선 후에는 문신들과 척을 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14][15]

실제로 이의방이 죽을 당시, 2차 토벌군의 지휘자는 기탁성, 진준, 경진[16]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신란 당시 모두 정중부와 같은 노장파로 분류되는 이들이었기에 토벌군은 별 동요함이 없었다 한다.

2.6. 권력 다툼과 기해정변[편집]


1176년 8월 당시 정중부의 직책은 문하시중이었다. 그때 각 영의 군사가 익명으로 방을 내걸고 이르기를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 사위인 송유인이 권력을 희롱하면서 방자하게 횡포한 짓을 한다고 했다. 또한 남적들을 치려면 그들을 제거해야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해직을 청하면서 여러 날 동안 출사하지 않았다.

9월에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 별장 고득시, 대정 돈장 등이 정중부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시도했으나 이를 알아채고, 그들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추방했다. 1178년 7월에 기두 녹상이 대장군 장박인, 전 장군 조존부 등이 모의하여 정중부를 죽이려고 한 사실을 고하자 이들을 조사했지만 죄상이 없었으며, 또한 기두 80명이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면서 장박인의 탈옥을 꾀했다는 사실을 기두가 고했지만 이들도 죄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유배했다.

이후 1178년 정중부는 사직을 하며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권력을 이어받은 정균과 송유인[17]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결국엔 무인 세력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정균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무려 명종의 자제인 공주를 자신의 둘째 아내로 삼으려 했고,[18] 정중부가 문하시중으로서 관직에 있을 동안은 오랫동안 눌려있었지만 정중부가 물러나자 정2품의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게 된 송유인은 당시 조정의 영수였던 한문준문극겸을 탄핵하는 등의 행동으로 대신들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무엇보다 정중부와 문신들과의 중계를 담당하던 송유인이 문신들의 대표격인 문극겸, 한문준과 틈이 벌어지면서 문신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 치명타였다.[19]

이때 보면 장인인 정중부로부터 송유인이 정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권세를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정균이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것은 매부에게 밀리고 있기에 매부를 누를 수 있을 보다 확고한 권력을 취하려는 술수였던 듯하다. 혹은 이때 정균이 모든 권력을 송유인에게 밀려서 잃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궁녀들을 가지고 놀고, 공주까지 노골적으로 요구할 정도의 권세를 지녔던 것을 보면 아닌 듯 싶다. 적어도 명종을 우습게 여기며 누를 정도의 권력은 가지고 있었다.[20]

그로 인해 1179년 9월에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정균의 행태에 분노한 26세의 청년 장군 경대승이 결사대를 꾸려 기습했고, 아들과 사위와 함께 사이좋게 목숨을 잃으면서 정중부의 가문은 한 순간에 몰락하게 된다.(기해정변)


3. 기타[편집]


  • 고려사》에는 <반역 열전>에 실려있고, 오늘날에도 무신정변을 주도한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초장부터 대놓고 반역자 취급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지만 의외로 당시 무신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망높던 인물이었던 듯 하다. 애당초 이의방이나 이고 등이 정중부를 끌어들였던 이유가 하급 장교인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면 곤란하다고 여기고 이른바 자신들을 대표해줄 얼굴마담을 원했기 때문이었다.[21]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무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무척 컸다는 말이 된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무신정권 초기 이의방이 권세하던 시절을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해서 설명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물론 정중부가 대외적으로 대표자라고는 하지만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이의방, 이고가 처음에 내정한 인물은 대장군인 우학유이고 우학유가 "죽어도 따를 수 없다."며 거절한 걸 보면 이의방, 이고가 이미 실세로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학유가 그렇게 강경하게 거절한 이유는 우학유의 부친 우방재가 "문관들이 화를 당하면 그 화가 우리(무관들)에게 미친다."며 평소 이를 경계했기 때문. 《고려사》의 <경대승 열전>을 찾아 보면 이의민과 같은 용장이 경대승을 두려워하여 경주로 낙향해 있는 와중에도 일부 무신들은 정중부가 무신정변을 일으켜 그간 문신들에게 억눌렸던 설움을 풀어 주었는데 경대승 같은 새파란 어린 놈이 그 분을 해쳤으니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2] 경대승이 도방을 만든 것도 이러한 일부 무신들의 자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 때문이었고 역시 《고려사》에 보면 몰래 첩자들을 내보내어 항상 정황을 살폈다고 한다.[23]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당시 무신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막대했다는 뜻이며 경대승이 죽기 얼마 전에 꿈에서 정중부를 봤다는 것도 이러한 긴장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 한편으로는 문벌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24] 애초에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 아니라[25] 군적에 올라 개경으로 올라갔고 그 곳에서 눈에 띄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 하지만 천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오른 이의민김준 때문에 묻히는 감이 큰 편.

  • 정변을 일으킨 덕에 고려무관 출신 중 최초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 직을 기록해본해본 인물이다. 정중부는 난을 일으키기 전 무관의 최고위 직위인 상장군(上將軍)[26]이었고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에는 문관의 최고위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27]까지 해봄으로서 문•무관 최고위직을 모두 해본 인물이다.[28] 정중부 이전에는 지채문이 상서복야, 강민첨이 지중추원사 - 판병부사, 왕국모[29]가 참지정사, 척준경이 평장사까지 올라갔으나 아무도 문관직 정점을 찍지 못했는데 정중부가 최초로 도달한 것이다.

  • 조선 중기 정치, 사회 전반을 뒤흔든 사건인 정여립의 난의 주도자로 알려진 정여립의 태생 설화에서는 태몽에서 정중부가 여러 번 나왔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존재하나 이는 정여립을 폄하하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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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후반부터 무신정변을 밈으로 쓰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드립이자 무신 드립에서는 사실상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5. 관련인물[편집]




6.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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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9월 16일.[2] 《고려사》에 7척의 상당히 건장한 체격이었다는 인물 묘사가 등장한다.[3] 하지만 사실상 무신정변 당시에도 무신들의 상징적인 리더였다. 당시 실세였던 이의방은 소위 소장파의 리더격 입지였고 항상 정중부가 더 높은 직위에 있어 노장파의 수장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이의방의 집권기, 혹은 이고를 제거한 후에 이의방과 정중부가 서로 견제하던 기간을 이의방, 정중부의 연립 집권이나 정중부의 집권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4] 封臂. 직역하자면 팔을 묶어서 보냈다는 뜻이다. 전갈을 급히 보낼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5] 공학군(控鶴軍)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에 임금이 조회나 연회 등을 위해 행차할 때마다 동원되었던 국왕 호위 부대였다.[6] 환관과는 다르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문자 그대로 가까이서 왕을 모셨던 신하를 의미하며, 대체로 유력한 가문의 자제들이 거쳐가는 엘리트 코스였다.[7] 다방은 조정의 다례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8] 견룡은 국왕을 호위하는 무인들이었다.[9] 김부식은 1151년에 사망했으나, 김돈중은 이후로도 관직을 지내다가 무신정변 당시에 살해되었다. 정중부는 김부식에게 얼마나 원한이 컸는지 무신정변 후 김부식은 시체가 토막나게 되며 직계 자손은 다 처형되었다. 수염 사건에서 무신정변까지의 기간이 대략 26년 정도 차이가 난다고 추측되므로 그 기간 동안 잊지 않고 복수한 것을 보면 원한이 어지간히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10] 2019년 8월 한강 몸통 시신 사건의 피의자 장대호가 호송차에서 내려 고양경찰서로 조사받으러 들어갈 때 이 일화를 언급하여 논란이 되었다. #[11] 기록에 따라 다르다. 상장군으로 나오지만 대장군으로도 나온다.[12]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상장군 서열 1위인 응양군 상장군으로 나온다.[13] 각예가 창건한 이다.[14] 사실 문하시중으로 조정을 틀어쥔 정중부나 실세들이 된 원로 무관들 입장에선 굳이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서 복잡한 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이미 문신들까지도 자신들과 한 배를 타게 됐고, 이의방도 제거된 마당에 하급 무관들의 지나친 요구를 수용해서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15] 또한 홍중방은 이후에 정중부 정권에서 수사공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에 올라 애첩을 통해 수많은 뇌물을 받는 등 권력을 누렸다. 이를 보아 고위 무신들만이 아니라 정중부 정권의 의중도 홍중방과 다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기록된 것에 따르면 홍중방을 여론이 중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문신들 입장에선 이런 하급 무관들의 지속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원로 무신들의 지원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16] 경대승의 아버지[17] 송유인은 정중부가 문하시중의 자리에 있을 때는 친족 규정에 의해 재상이 되지 못해서 정중부의 딸인 자신의 처에게 의지했다. 이후 정중부가 치사를 하여 문하시중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야 문하시랑평장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 때도 아내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듯 하다.[18] 이의방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만들려다가 죽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개념없는 행동이었다. 왕의 사위가 태자비보다 낮긴 했다만 그래도 개념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19] 전과는 달리 독점하지 못할뿐 여전히 무신들보다 많은 수의 문신들이 관직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문신들은 정중부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이들을 우대해줌에 따라 정중부 세력과 결탁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송유인의 행동은 문신들의 반감을 사는 일이었는데, 정중부가 물러난 후에 폭주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20] 아니면 조선 후기,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오늘날과는 다른 고려시대의 외가 관련 인식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가르치는 것과 같이, 고려에서는 사위도 아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고, 딸도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또 족보에도 사위, 외손자 등이 기록되었고, 장인이나 외할아버지가 고관인 경우에도 음서제가 적용되었는데, 이 말인즉 외가로도 혈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 즉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왕위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고, 그래서였는지 많은 고려의 공주들 가운데 왕씨 이외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은 예는 단 하나밖에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21] 그렇지만 정중부는 문신들을 싸그리 족치자는 이의방, 이고 등과는 달리 문신들을 살려두고 훗날 정권을 잡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울분에 차 복수에 눈이 먼 이의방, 이고와는 달리 나름 훗날 일까지 미리 계산해놨던 셈.[22]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정 시중(鄭侍中, 정중부)께서 앞장서 대의를 부르짖고 문신들을 억눌러 여러 해 쌓인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 줌으로써, 무반의 위세를 펼친 공이 막대하다. 이제 경대승이 하루 아침에 네 분의 대신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할 것이냐?(鄭侍中首唱大義 沮抑文士 雪吾曹累年之憤 以張武威 功莫大焉. 今大升一朝而尸四公 孰討之耶.)'[23]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경대승정중부송유인을 제거한 이후부터 마음이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을 큰 거리로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게 하였다. 어쩌다가 유언비어를 듣기만 하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했기 때문에 큰 옥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매우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大升自去鄭 宋以來 心不自保 常令數人 潛伺里巷. 偶聞飛語 輒拘囚鞫問 累起大獄 用刑深峻.)'[24] 애초에 이 시기 권력의 맛을 한 번씩 본 고급 무관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좋은 신분을 가진 인물들은 아니었다. 후에 이의민, 두경승과 연립 정권을 이루는 조원정 역시 옥공과 관기 사이의 아들이라는 천한 신분의 인물이었고, 후대에 많은 무신정권의 인물들도 천민 출신들이 있었다.[25] 정사에서 그는 해주 출신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가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26] 응양군 소속으로 정3품 직위.[27] 중서문하성 소속으로 종1품 직위.[28] 두경승, 최충헌도 상장군과 문하시중을 다 해보았다. 이의민은 상장군은 해봤지만 문하시중은 <두경승 열전>에만 해봤다고 나와서 조금 애매하다.[29] 숙종배향공신으로 최종 무관직은 상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