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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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重燮
1898년 3월 6일 ~ 1978년 2월 25일 (향년 79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 경찰공무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종교가톨릭이다.

2. 생애[편집]


1898년 3월 6일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태어났다. 경성공업전문학교 응용화학과[1]를 졸업하고 일본 토요대학 동양윤리철학과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하였다.

경성공업전문학교 재학 시절 독립운동에 관여해 여러 차례 구금되었다. 토요대학 중퇴 후에는 중화민국 지린성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으로 건너가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다. 1922년 조선공산당 화요파 소속이던 이인구(李麟求)·이주화(李周和)가 대성중학교 교내에 '광명회'라는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모임을 조직한 뒤 10명의 학생을 포섭했는데, 이때 매일 저녁 이주화의 집에 가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혁명사상'이라는 강의를 해주기도 했으며, 1926년에는 좌익 단체인 평우동맹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 5월 30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연변당부에서 반일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피해 귀국했다. 이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북청공립공업학교, 북청산업학교, 북청중학교 등 학교의 교사로 근무했으며, 북청공립공업학교에서는 교장까지 지냈다. 1930년대에는 강원도 고성경찰서 형사부장이 되어 친일 행적을 일삼았는데, 1934년 봉명학교에서 만세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수사해 박종운 교무 등을 검거했다.

8.15 광복 이후 목포공업중학교(현 목포공업고등학교) 교장, 광주서공립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장, 목포상업고등학교(현 목상고등학교) 교장, 전라남도청 학무과장,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학장, 전라남도 교육국장, 전남교육회 창립 초대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일제강점기 시절을 포함해 32년간 교육계에 헌신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이던 대한노동총연맹 임기봉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2] 1955년 민주당이 창당하자 중앙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구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전임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무소속 강선명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신파 후배이자 가수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과 동시에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했고, 결국 김문옥 후보에 밀려 패하였다.

1963년 자유민주당에 입당했다가 탈당하여 다시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1968년 3월부터 1971년 11월까지 초대 목포문화방송 사장을 지냈다. 목포문화방송 사장 재직 시절인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다가 고소당했다.

1978년 2월 25일 밤 11시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482-8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목포시[3]


8,710표 (25.64%)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목포시[4]


16,041표 (43.17%)
재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16,538표 (39.02%)
낙선 (2위)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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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생물공학부.[2] 참고로 이 때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대통령은 5위를 기록하였다.[3] 제2선거구[4] 제4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