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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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芝龍
1604년 4월 16일 ~ 1661년 11월 24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아시아의 격동기였던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명청교체기)에 활약한 대상인이자, 해적이었으며 부흥 정권인 남명의 수군 장수였다.

자는 비황(飛黃), 호는 비홍(飛虹), 아명은 일관(一官)이었으며, 대만 섬에 건국된 정씨 동녕 왕국의 건국자인 정성공의 아버지로 정사표(鄭士表)와 황씨(黃氏)의 아들이었다.

세례명은 니콜라스 가스파르드 이콴(Nicholas Gaspard Iquan)이었다.


2. 생애[편집]


명나라 남부 복건성 천주시 남안현 사람으로 하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18세 때 가출해 상인인 외삼촌 황정을 따라 일본, 중국, 대만 등을 오가며 무역을 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가 거상 이단의 부하가 되어 일본의 히라도번으로 건너가 이단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단의 양아들이 되고, 안사제의 딸과 결혼하는 방법을 통해 조직 내에서 세력을 키웠다.

일본 나가사키 히라도에서 히라도번의 번사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인 다가와 마츠(田川松)와 혼인해 훗날 타이완 섬동녕 왕국(명정)을 건국하는 정성공(아명은 '후쿠마츠')을 낳았다.

정지룡은 어린 정성공을 일본에 두고 다시 중국으로 떠나 포르투갈령 마카오 등에서 활동했고, 민남어, 남경관화, 일본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기에 1624년에는 팽호항에서 네덜란드어의 통역을 맡았다. 1625년에 주군인 이단과 장인인 안사제가 죽자 그 둘의 세력을 흡수하고 이국조, 허심소 등의 경쟁자들을 격파해 그 세력을 흡수했다.

결국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게 세력을 인정받아 1628년에 도독동지에 임명되었고, 1630년에는 정성공을 중국으로 데려왔다. 정지룡은 비록 자신은 거칠게 살아왔지만, 아들은 확실하게 중국식 유학 교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게 하겠다고 생각해 아들의 교육에 각별히 공을 들였다. 이는 정성공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3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한스 푸트만스가 중국 연안으로 오자 금문요라만 해전에서 격파해 조약을 맺었으며, 유향이 푸트만스에게 가담한 것을 알고 추격해 1635년에 일어난 광동 해전에서 승리해 죽게 만들어 이때의 공으로 복주도독이 되었다. 이후 복건성의 8개 지역이 정씨의 땅이 되었다는 말이 떠돌거나, 동인도회사가 일본 함선으로 위장해 정씨의 깃발을 사야 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1644년 농민 반란인 이자성의 난으로 제16대 의종 숭정제가 자결하고, 명나라가 멸망하자 처음에는 남명을 받들어 반청복명운동에 가담해 남명 제2대 융무제를 섬겼지만, 곧 청나라가 대세임을 깨닫고 1646년에 투항해 북경에서 동안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이었던 정성공이 철저한 유학 교육으로 인해 명나라에 대해서 일편단심이라, 아버지와 갈라서고 계속해서 청나라에 대항하자 1655년에 정지룡은 투옥되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아들 성공에게 귀순을 권유했지만 실패했고, 이 일로 이용가치가 바닥나자 결국 모반죄를 적용받아 1661년 11월 북경의 시시에서 처형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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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교롭게도 정지룡이 처형되고 1년 후에 정성공은 말라리아에 걸려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