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환(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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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초기 이력에 대한 정보는 없다.

1955년 9월 22일자 로동신문에 "경제 사업에 대한 당적 통제"란 기사를 기고하였으며, 북한인명사전에 따르면 1956년 8월에 당중앙위원회 부부장 재임이 확인되었다. 1961년 7월, 직총 중앙위원장으로 조동된 김왈룡의 후임으로 평안북도 당위원장 임명이 확인되었으며 1961년 9월 8일자 로동신문에 "당원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공산주의 교양을 강화하기 위하여"라는 논설을 기고했다.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0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근로자 1962년 8호에 "간부들에 대한 개별교양체계의 철저한 확립을 위하여"를, 근로자 1964년 20호에 "10대 과업 수행을 위한 도당 위원회의 임무"를 기고하였다. 1963년 5월, 최고인민회의 3기 2차 회의에 출석하여 평안북도의 경제성장에 대해서 선전하는 한편 1963년도 국가예산안을 지지하는 토론을 하였다. 1964년 7월 28일자 로동신문에 "농촌문화혁명을 촉진하기 위하여"라는 기사를 기고하여 "평북도 당위원회는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를 받들고 농촌문화혁명을 계속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도내 농촌을 보다 문명한 사회주의 농촌으로 전변시킬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북한인명사전에 따르면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비서제가 도입된 후에 평안북도 책임비서로 유임되었다고 하지만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및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모두 탈락하면서 경질되었다. 이후 애국렬사릉 안장자 목록에도 없다. 만약 1966-1967년 사이에 경질된 것이 맞다면 리길송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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