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진(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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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태진2.jpg
성명
정태진(丁泰鎭)

노수(魯叟)

외재(畏齋) 또는 서포(西浦)
생몰
1876년 8월 11일 ~ 1959년 5월 21일
출생지
경상도 영천군
(현 경상북도 영주시 상줄동 줄포마을)[1]
본관
나주 정씨 (羅州 丁氏)[2]
사망지
경상북도 문경시 모곡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운동
2.3. 광복 후 경력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정태진은 1876년 8월 11일에 경상도 영천군(현 경상북도 영주시 상줄동 줄포마을)에서 아버지 정규덕(丁奎悳)과 어머니 영양 남씨 남기홍(南基弘)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속한 가문인 나주 정씨는 고려 말 이후 주로 경기 지역에 살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法泉)에 살았다. 병조정랑을 역임한 정호공(丁好恭)의 아들인 정언숙(丁彦璛)은 원주에서 다시 경상도 영주의 상줄동 줄포마을로 이주했으며, 정태진은 정언숙의 10대손이다.

정태진은 1895년에 이병호(李炳鎬)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수학했고, 1908년에 이병호가 작고하자 곽종석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정태진은 이병호의 가르침을 받을 때 그로부터 주리론을 전수받았다. 그는 이병호가 이황 이후에 주리론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이병호를 애도하는 시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가학(家學)의 심통성격도(心統性情圖)가 전해지는데

진전(眞詮)이 오랜 세월 지나 바래졌도다.

문장마다 주리의 종지(宗旨) 담겨 있으니

천고토록 진실로 서로 부합한다네.


이후 그는 곽종석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그로부터 이병호의 학문과는 별개의 것을 전수받았다. 곽종석은 그에게 유자라고 하여 시국에 완전히 어둡거나 사물을 소홀히 하여 내치거나 버려서는 안된다며, 외국어를 익히고 서양의 신사상 중 참고할 만한 것은 참고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정태진은 이러한 곽종석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현실 대응에 있어서 다소 경세학적인 학풍을 지니게 되었다.


2.2. 독립운동[편집]


1910년, 정태진은 권종원(權鍾遠)과 함께 스승 곽종석을 모시고 조국을 떠나 요동으로 건너가려 했지만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그는 1916년에 이승희(李承熙), 조정규(趙貞奎), 정돈섭(丁敦燮), 김사진(金思鎭)과 함께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가서 덕흥보(德興堡)에 정착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경영하다가 2년 후에 농경자금의 조달을 위해 귀국했다.

1919년 4월 경상도 일대에서 곽종석, 김창숙, 장석영(張錫英), 송준필(宋浚弼) 등이 주동이 되어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서명운동을 펼치자, 정태진은 이에 참가하여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했고,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이 일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수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후 곧바로 요동으로 갔으나 독립운동계획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귀국했다. 이후 그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진주시 검암(檢巖)리에 선정(先亭)을 중수하고 수많은 장서를 탐독했다.


2.3. 광복 후 경력[편집]


8.15 광복 후, 정태진은 일제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국론이 분열되고 서양의 강국의 이해 관계로 인해 남북이 분열되는 등 여전히 상황이 위태로운데 연소배들이 회를 만들어 예법을 쓸어버리고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인심을 동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평소 독서로 이름이 있는 이들도 이러한 시세를 쫓아 혹은 단체에 들어가고 혹은 돈을 납부하고 혹은 편지를 보내어 이름을 팔고 있으니 세태가 실로 문란해졌다고 보고, 이러한 현실에서 유림으로서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문을 닫고 스스로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 뿐이라고 밝혔다.

정태진은 말년에 문경의 모곡에 은거했고, 1947년 5월에 친구 이성래, 김근부, 이양현 등과 함께 문경의 선유구곡을 유람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었다.

십년을 살다가 이렇게 한번 노니니

선유동문 깊은 곳에 흥취 가득하다.

맑은 시내 구비구비 원두에서 흘러오고

늙은 돌은 울툭불툭 푸른 빛이 떠돈다.

선인은 아득하니 숨은 자취 따라가며

몇번이나 자리잡고 좋은 계책 얻었는가.

금단은 한 해가 다하도록 소식 없으니

부끄러이 이 세상에서 백발을 탄식하네.


정태진은 때대로 나무 심기를 좋아했고, 채소밭을 가꾸었으며, 비록 산야에 궁핍하게 살았지만 오직 독서에 몰두하고 세상사와 인연을 끊었다. 그러다가 1959년 5월 21일에 노환으로 사망하니 향년 83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태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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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주 정씨(丁) 집성촌이다.[2]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참봉공계(參奉公系) 28세 (압해 정씨 4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