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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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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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충익공(忠翼公)
정태화
鄭太和

출생
1602년 2월 12일
(음력 선조 35년 1월 21일)
사망
1673년 11월 16일 (향년 71세)
(음력 현종 14년 10월 8일)
재임기간
제123대 영의정
1652년 1월 17일 - 1654년 6월 6일 전후
(음력 효종 2년 12월 7일 - 효종 5년 4월 22일 전후)
제128대 영의정
1656년 8월 1일 - 1658년 7월 16일
(음력 효종 7년 6월 11일 - 효종 9년 6월 16일)
제130대 영의정
1659년 4월 16일 - 1667년 4월 2일
(음력 효종 10년 3월 25일 - 현종 8년 3월 10일)
제132대 영의정
1668년 2월 13일 - 1670년 12월 28일
(음력 현종 9년 1월 2일 - 현종 11년 11월 17일)
제134대 영의정
1672년 6월 1일 - 1673년 5월 27일
(음력 현종 13년 5월 6일 - 현종 14년 4월 12일)
시호
익헌(翼憲) → 충익(忠翼)[1]
본관
동래 정씨

유춘(囿春)

양파(陽坡)
부모
부친 - 정광성(鄭廣成, 1576 ~ 1654)
모친 - 황근중의 딸
부인
여흥 민씨 - 민선철(閔宣哲)의 딸[2]
자녀
5남 3녀
장남 - 정재대(鄭載岱)
차남 - 정재숭(鄭載嵩, 1632 ~ 1692)
3남 - 정재악(鄭載岳)
4남 - 정재항(鄭載恒)
5남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1648 ~ 1723)[3]
장녀 - 이명기의 처
차녀 - 이두령의 처
3녀 - 은진 송씨 송규성(宋奎成)[4]의 처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집안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관.


2. 생애[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인조 6년인 1628년에 별시 문과에 동생 정치화와 같이 합격한 뒤 청요직과 세자 시강원을 거쳐 이조 정랑# 등의 요직을 지냈다. 병자호란 시기에는 도원수 김자점 밑에서 종사관을 맡았고,# 평안 감사를 지내던 인조 18년에 용골대가 병자호란 때 도망간 포로값을 내라고 협박했으나 굴복하지 않은 기개를 보여주기도 했다.# 대사간, 대사헌과 6조의 판서를 모두 거쳐 인조 27년(1649년)에 우의정에 올랐고,# 효종 즉위년(1649년)에 좌의정,# 효종 1년(1651년)에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다.# 이후 현종 14년(1673년) 병으로 면직되기 전까지 23년 동안 5번의 영의정을 지냈으며, 37번의 사직 상소를 낸 적이 있다.[출처1] 정승 자리에 오르기 전에 6조의 참의(정3품), 참판(종2품), 판서(정2품)를 모두 지냈는데, 이 기록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가히 관직 생활에서 경험해볼 것은 다 해본 셈이다.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에서 송시열, 이시백과 같이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결정했으나, 송시열이 의례를 인용해 얘기한 체이부정(體而不正)[5]의 주장이 가진 폭발력을 감지했기 때문에 1년복의 사유를 국제로 들자고 했고, 송시열은 대명률의 경우까지 끌어들여 1년복의 사유에 대한 정치적 포장을 했다. 후에 서인이 갈아엎은 현종개수실록에는 이 부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6]

마지막 상소 즈음에는 정말로 몸이 불편하여 (중풍이었다고 한다.[출처1]) 면직되었고 6개월 후인 현종 14년(1673년) 10월에 사망한다. 초기(숙종 6년) 시호는 익헌이었다가 순종 3년 8월 20일에 충익으로 변경되었다.

현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들어갔다.[7]


3. 평가[편집]


남인이 편집했던 현종실록의 졸기에서는 재지가 넉넉하고 명민해서 집안 관리 잘하고 정승이 된 지 25년 동안 세력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했으나, 시류에만 영합하며 국사를 제대로 책임지려고 한 적이 없고,[8] 뇌물로 구설수에 올랐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현종개수실록에서는 추가적으로 사신의 평을 덧붙여 위와 같이 예송논쟁 때의 처신과, 남인 허목의 의견을 깐 것을 높게 평가하며,[9] 허적이 그의 지모를 두려워 했는데[10] 정태화가 죽자 허적이 멋대로 하는 걸 막을 사람이 없었다고 한탄하기까지 한다.


4. 집안[편집]


졸기에도 나오지만, 그의 집안 관운은 탁월했다. 그의 현조 할아버지가 중종 시절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던 정광필이며, 정광필의 손자이자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정유길은 좌의정을 지냈다. 할아버지 정창연광해군과 인조 시절 좌의정을 지냈으며[11] 아버지 정광성(鄭廣成)은 형조 판서, 작은 아버지 정광경(鄭廣敬)은 이조 참판, 동생인 정치화(鄭致和)는 좌의정, 다른 동생인 정만화(鄭萬和)는 예조 참판, 작은 아버지 정광경의 아들인 사촌 동생 정지화(鄭知和)는 좌의정을 지냈다. 후손의 관운도 뛰어나 차남 정재숭(鄭載嵩)은 우의정, 오남 정재륜(鄭載崙)은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 장남 정재대의 손자 정석오(鄭錫五)는 정재륜의 외아들 정효선(鄭孝先)이 후사없이 일찍 죽자 효선의 양아들로 후사를 이었으며 좌의정까지 올랐다. 더 많은 사항은 할아버지 정창연(18세) 때부터 그의 7대손까지(27세)의 주요 인사들의 간찰첩인 <선세필적(先世筆蹟)>에 수록된 인물 소개 링크를 참조. 서울시 동작구 솔밭로에 있는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에 증조할아버지 정유길, 할아버지 정창연 등과 함께 묘소가 있다. 그 외에 증조할아버지의 외손자, 그러니까 정태화에게는 고모 할머니의 아들이 훗날 김상헌, 김상용이다.

이런 그 집안의 관운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야사도 존재한다. 정태화가 공부하러 절에 들어갔는데, 먼저 들어와 맹렬히 공부에 정진하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가 생년월일은 물론 태어난 시간까지 동일한 것을 서로 알게 됐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사람은 공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 자신은 가난한 집안의 사람이지만 사주팔자가 워낙에 관운이 좋다고 해서 집에서 무리하게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거였는데, 같은 사주팔자라면 당연히 집안 좋은 당신의 관운이 좋은 것이지 나는 아닐 거니, 집안 사정도 안좋으니 무리해서 공부할 필요는 없다라고.[출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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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년(순종 3) 8월 20일에 충익으로 변경되었다.#[2] 성종의 9녀 경휘옹주의 외5대손. 경휘옹주 → 파평 윤씨 윤희로 → 진주 류씨 류임의 처 윤예은 → 민몽룡의 처 류여경 → 민선철 → 민씨부인[3] 효종의 5녀 숙정공주의 부마.[4] 중종의 3남 금원군의 외5대손. 금원군의령 남씨 남관의 처 이견복 → 안동 권씨 권극중의 처 남란 → 권위기 → 송국구의 처 권씨 → 송규성[출처1] A B 어메이징 조선랭킹실록 (공)저 : 이성주, 글로세움, 2011년 12월 05일, ISBN13: 9788997222049, ISBN10: 899722204X[5] 서자(중자)를 세워 후사를 이은 경우. 아들이긴 하나, 맏이가 아니므로 정통성이 없는 아들.[6] 사관의 평에서 남인과 서인 사이에서 중재를 잘 하고 송시열의 의견을 제지한 그가 없었으면 기묘사화을사사화 같은 대 참화를 피할 수 없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거론한다. #[7] 숙종실록 숙종 2년 7월 17일 두번째 기사[8] 이성주가 지은 '실록에서 지은 조선의 민낯'이라는 책에서는 37번이나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나온 평가로 판단하고 있다. 동생과 사촌이 모두 잘난 덕분에 상피를 하면서 자신의 깨끗함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재상직을 너무 가볍게 보지 않았나 하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9] 원자(훗날의 숙종)의 세자 책봉을 빨리 하자고 임금의 마음을 떠보니, 정태화가 '원자가 태어나는 날 이미 국본이 정해졌는데 뭘 그리 서둘러' 하니 현종이 세자 책봉은 천천히 해라...고 했다.#[10] 근데 정태화가 평안 감사 시절인 1640년에 그를 평안 도사로 추천했다고 한다.#[11] 정창연이 속한 당파는 중북인데 중북은 인목왕후 폐모론을 반대한 대북 온건파이다. 정태화의 후손인 정홍순이 소론 이니 정태화는 북인계 서인이라고 볼수 있다.[출처2] 흥미진진한 조선 왕조 기네스북, 김두봉, 씨앤드씨그룹, ISBN13: 9788988204016, ISBN10 : 8988204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