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순(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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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진주 정씨
출생
1892년 9월 1일
경상도 남해현 설천면 문항리
(현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1]
사망
1920년 6월 29일
대구형무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학순은 1892년 9월 1일 경상도 남해현 설천면 문항리(현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말 이예모(李禮模)가 하동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자 정순조, 정몽호, 윤주순(尹柱舜)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서당학생과 인근주민들에게도 이 계획을 알리고 참가를 권유하였다.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시위군중이 남양리 노상에 모였다. 이예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그는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열이 고현면(古縣面)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알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을 안 시위대는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4일, 그는 장꾼으로 가장한 뒤 아침 일찍 남해읍 장터로 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들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우체국·학교·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서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 1920년 6월 2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정학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인근의 금음리·노량리·진목리와 함께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 국문학자 정병욱과 독립유공자 정몽호·정임춘·정순조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