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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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전쟁
鄭韓戰爭
Zheng-Han War

시기
기원전 397년
장소
한나라 양책(陽翟)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쉬창시(许昌市) 위저우 (현급)시(禹州市)[1])
원인
내우외환으로 인한 한나라의 혼란상
교전국
정鄭
한韓
조趙
위魏[2]
지휘관
정군 지휘관 미상
한후 한건[3]
조군 지휘관 미상
위후 위사[4]
병력
정군 2만 5천여 명

총 2만 5천여 명
한군 2만 2천여 명
조군 1만 2천여 명
위군 5만 2천여 명

총 8만 6천여 명
피해
정군 1만 3천여 명

총 1만 3천여 명 손실
한군 1만 3천 3백여 명
조군 8백여 명
위군 극소수

총 1만 4천여 명 손실
결과
한의 수도 일시 상실, 정의 대역전패, 위의 구원승
영향
정나라의 약화.
삼진(三晉)의 결속 강화.
위의 위상 강화


1. 개요
2. 배경
2.1. 한나라의 상황
2.2. 정나라의 상황
3. 전투의 전개
3.1. 정나라의 일방적 공격
3.2. 조나라의 아슬아슬한 도착
3.3. 위나라의 무시무시한 개입
3.4. 한건의 구사일생
4. 결말
5. 전후처리



1. 개요[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내우외환이 겹친 한(韓)의 빈틈을 노리고 정(鄭)이 한의 수도를 직공했다. 정군은 한군을 대파하고 수도 양책을 점령, 이후 한을 구원하러 온 조(趙)군을 상대로도 선전하지만 위(魏)의 대군을 이끌고 친정한 위문후에게 대패하고 한에게 다시 양책을 내주고 만다.

난릉대전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 국가인 조선은 관여하지 않았지만 당시 시점에서 초강대국이었던 위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실감하게 했다.

2. 배경[편집]



2.1. 한나라의 상황[편집]


제(濟)의 사주를 받은 자객 섭정(聶政)이 백주대낮에 관청에 난입해 업무를 보던 재상 협루(俠累)를 암살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하였고[5], 한후 한건[6]이 이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내정이 혼란해졌다. 여기에 난릉대전에서 초(楚)나라가 대패하고 군주 초왕 웅의도 유폐당한 여파로 초의 지방세력들이 조정의 통제를 아예 받지 않고 도적떼[7]처럼 변해 산발적으로 한을 약탈하는 등 깽판을 치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2.2. 정나라의 상황[편집]


기원전 403년 국군(國君) 정태[8]는 재상 자양(子陽)을 살해하고 귀족 세력을 제압했다.[9] 이후 귀족들은 다소 세력을 회복하지만, 내부 파워게임에서는 여전히 정태가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10] 이미 기원전 408년 한에게 옹구(雍丘)를 빼앗기고, 기원전 407년 한에게 역공을 가해 부서(負黍)를 빼앗는 등 서로 일진일퇴하던 상황에서 한이 혼란하다는 소식을 접한 정태는 전력을 다해 한의 수도 양책을 공격하기로 한다.[11]


3. 전투의 전개[편집]


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조와 위는 이를 승낙하였지만, 정과 한 양국의 수도가 워낙 가까운 탓에 양국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 정군과 한군이 단독으로 수차례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양국의 수도가 얼마나 가까웠냐면, 허난성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위 지도에서 중앙의 '쉬창시'에 한나라 수도 양책, 그 바로 위에 위치한 '정저우시' 남동부에 정나라 수도 신정이 위치하고 있다.

첨언하자면, 오늘날의 허난성은 이 시기에는 농사 잘 되는 인구밀집지역이어서 둘 이외에도 여러 나라들의 주요 도시가 위치하였다. 작중에서 이 시기 조나라의 수도 중모(中牟)는 허난성 북부의 '허비시'에 있었고, 위나라 동부의 중심지(이자 훗날 수도가 되는) 대량(大梁)도 지도상의 '카이펑시'에 위치하였으니 쉬창시, 정저우시의 동쪽에 인접한 셈이다. 정저우시 서쪽의 '뤄양시'에는 당시 천하의 명분상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주나라의 수도 낙양(洛陽)성이 위치하였고, 북동쪽 끝의 '푸양시'에는 작은 위(衛)의 수도 제구(帝丘)[12]가 위치하였으며, 작중에선 기원전 403년에 팽성으로 천도한 송(宋)의 이전 수도 상구(商丘)는 지도 중앙부 동쪽 끝의 '상추시'에 위치하였다.

이렇게 오밀조밀(?) 뭉쳐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국 수도의 안보 목적에서건, 상대와 빠르게 결판을 내기 위해서건 정공이 한의 혼란을 틈타 그 수도를 공격한다는 선택을 할 만 했던 것이다.


3.1. 정나라의 일방적 공격[편집]


한의 수도 양책에서 맞붙은 정군과 한군 양군의 싸움은 정군의 일방적 우세로 흘러갔다. 한군이 내우외환으로 인해 어수선했던 탓도 있고, 정군이 한군보다도 많은 수의 병력을 결집해 일시에 치고 들어온 탓도 있었다. 다만 한군의 경우 굳이 이길 필요 없이 구원병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었는데도, 정군에 제대로 피해를 주기는 커녕 지연전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졸전이었다. 두 차례의 교전에서 전 병력의 41%를 손실하는 등 탈탈 털린 한후는 기가 꺾여 결국 수도 양책을 버리고 의양으로 퇴각하고 만다.


3.2. 조나라의 아슬아슬한 도착[편집]


한경후의 도주를 확인한 정군은 양책에 입성해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했는데, 한의 요청으로 조와 위의 구원군이 오고 있던 중이란 점을 생각하면 정군의 대실책이었다. 급하게 도주한 한군은 구원을 위해 달려오던 조군, 위군과 소식이 엇갈렸고, 이 때문에 양국의 구원군은 모두 정군이 점거한 양책으로 향하게 된다.

먼저 양책에 도착한 것은 조군 1만 2천여 명이었다. 조보다는 위가 양책에 더 가까웠지만, 위의 국군(國君) 위후 위사는 아예 본인이 직접 군을 지휘했으며 정군을 단독으로 압도할 수 있는 초대형 정예 병력을 모으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조군이 도착한 이 때만이라도 양책 점령을 포기하고 물러났다면 정군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군은 조군의 숫자가 1만 2천으로 자신들(2만 5천여 명)의 절반 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양책 공성을 시도한다고 비웃은 뒤 전투를 속행하고 만다. 상대도 바보가 아닐텐데 왜 그 상황에서 계속 싸우고자 하는가,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은 짧은 식견의 한계였다. 첫 교전 자체는 조군 피해 7%, 정군 피해 1%로 정군이 우세하게 진행하였지만...


3.3. 위나라의 무시무시한 개입[편집]


정군이 눈앞의 조군만 바라보며 자만한 사이, 드디어 병력 집결을 끝낸 위사가 5만 2천 대군을 직접 이끌고 양책에 당도해버리고 만다. 심지어 위는 이 무렵 중원의 최강국으로, 그 병력의 정예도에 있어서도 정, 한, 조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상태였다. 진행자[13] 오피셜로 직접 지금 투입한 머릿수와 숙련도의 병력으로 싸우면 위 vs 정+한+조의 구도가 벌어져도 위군이 더 유리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한과 한 차례 싸우고, 조와 연이어 싸우던 중이던 정군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정군은 양책의 성벽을 이용해 어떻게든 버티면서 위군이 물러날 때까지 장기전으로 끌고 가고자 했지만, 싸움을 거듭해서 이미 피로가 쌓여있던 정군과는 달리 위군은 갓 전투에 투입되어 팔팔한 상태였고, 이미 수차례 공성전을 겪은 양책의 성벽은 미처 충분한 보수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정군은 전군의 52%를 손실하는 뼈아픈 타격을 받고 양책도 다시 내주게 된다. 물러나야 할 시기를 놓치고 과욕을 부린 결과였다.


3.4. 한건의 구사일생[편집]


양책 탈환에 성공한 위와 조의 군대는 도주한 한건을 빨리 찾아 탈환한 양책으로 다시 데려오고자 하였다. 수도마저 내버리고 도망치는 한심한 모습에 도주중이던 한군 내에서도 내분이 발생해 죽을뻔한 한건이었지만,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한후를 찾던 조와 위의 구원군이 등장하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다.

사실 한건도 골고루 터지는 내우외환을 어떻게든 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군주의 권위가 낮아지고 국가 통제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작금의 한나라 상황을 타개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양책이 쑥대밭이 되었으니 혹시 천도할 생각이 있냐는 위사의 물음에 '수도를 탈환했는데도 돌아가지 않아 민심을 잃을 수는 없다'면서 양책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여줘, 한건 본인이 아예 답이 없는 막장 군주는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4. 결말[편집]


수도 양책을 되찾은 한건은 양책으로 복귀한다. 구원군 파병으로 한, 조, 위 3국의 결속은 강화되었으며, 특히 직접 친정에 나선 위후의 명성은 다시금 드높아졌다. 그러나 말년에 무리하게 군을 지휘한 위사의 건강은 악화되고 만다.

한편 정나라는 끌어모은 투입 병력의 절반 가량을 손실하며 당분간 외정이 불가능할 정도의 대타격을 입었지만, 놀랍게도 정태는 내부적으로 귀족들 상대로 여전히 주도권을 유지하는 수완을 보여주었다.[14] 한나라의 경우 수도 양책을 빼앗겼다 되찾는 과정에서 크게 피해를 입는 손실을 보면서 당분간 피해 복구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5. 전후처리[편집]


삼진(三晉) 국가간의 단합을 이로써 공고히 한 위사는 군을 지휘하느라 무리한 모양인지 이듬해 거짓말같이 바로 세상을 떠난다.[15] 기원전 403년 역사적 네임드인 오기가 1차 서하 전투에서 의거를 상대로 일방적 대승을 거두고 이 전쟁에서 위문후가 정예병을 이끌고 친정하며 위용을 과시한 이 사건에서 보여진 위군의 강력함은 작품[16]에 참여하는 참가자[17]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작중 이듬해에 시작된 연나라 정벌에서 위군의 개입 가능성에 참가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만한 위용이었지만, 다르게 보자면 그렇게나 위군이 신경 쓰였기 때문에 위사의 자식 위격이 국군(國君) 지위를 계승하면서 인수인계에 시선이 돌아가 위가 움직이기 어려운 그 때 전력을 다해 연나라를 들이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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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에서는 곽가의 고향인 영천군(穎川郡) 양책현(陽翟縣)이다.[2] 진(晉)이 갈라져 성립된 한조위 3국이라 묶어서 '삼진(三晉)'이라고도 통칭함.[3] 작중에서는 시호인 한경후로 표기[4] 작중에서는 시호인 위문후로 표기[5] 원래 역사에서도 일어난 일이다.[6] 원래 역사에서는 기원전 400년에 사망하고 한열후가 뒤를 잇지만, 작중에서는 해당 연도의 사망 판정에서 수명연장에 성공하였다.[7] 작중에선 당시 초왕이었던 웅장과 그 동생 웅량부의 AA가 각각 쟈기와 켄시로였던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모히칸으로 표현됨.[8] 작중에서는 편의상 실제 역사상의 시호인 정수공으로 표기[9] 본래 역사에서는 기원전 398년에 일어난 일이다.[10] 본래 역사에서는 자양을 살해한 뒤 대대적으로 역풍이 불어, 자양을 죽인지 2년 뒤인 기원전 396년 정수공은 자양의 남은 무리에게 살해당한다.[11] 본래 역사에서는 기원전 400년에 한을 공격해 양책을 포위했다가 초나라의 공격으로 물러나지만, 여기선 해당 연도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나간 나비효과라고도 볼 수 있다.[12] 나중에 복양(濮陽)으로 개명하게 된다.[13] 작중 호칭은 연재처인 참치 인터넷 어장의 통용 호칭인 '어장주'[14] 작중 연표의 395년 항목 '월, 제, 한, 정의 내부정리' 참조.[15] 사실 역사적으로도 해당 연도가 사망 연도였고, 한경후와는 달리 판정에서 수명연장에 실패했다.[16] 연재처인 참치 인터넷 어장 내 용어로는 '어장'[17] 역시 연재처 용어로는 '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