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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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諴
생몰년도 미상
1. 개요[편집]
고려 18대 왕 의종의 환관이자 내시.[1]
의종이 정함을 총애하여 내시의 벼슬 합문지후에 임명했기 때문에 환관에서 내시로 출세했다.
2. 생애[편집]
의종이 태자 시절에 같이 격구를 즐겼다. 의종이 즉위한 이후 정습명 때문에 의종이 오락을 즐기기 어려워지자 정습명의 해임을 요구하여 정습명을 궁궐에서 내보냈고, 내시 김존중과 계획하여 의종의 동생 대령후 왕경과 정서를 모함하여 처벌했다. 그리고 의종의 총애로 권지합문지후라는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물러났다.
그러다 이후 의종이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했다.[2]
합문은 왕실 조례와 의전을 주관하는 부서로 왕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는 곳이다.
엄청난 뇌물을 받고 이권 조정에 개입하여 재산을 쌓은 정함은 새 집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거의 왕궁과 같았고, 의종이 그의 저택에 '경명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그곳에서 국정을 보았을 지경이었다.
이후 등창으로 죽었다. 죽기 전 끙끙 앓고 누워 있던 그의 집 앞에는 병사 수십 명이 가져가도 남을 정도로 의종의 총애 덕분에 모은 재산, 그리고 문병을 가서 그에게 잘 보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다. 지나가던 백성들은 이 광경을 보고 "국권이 모두 고자한테 있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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