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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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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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海駿[* 1936년 2월 6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鄭海
으로 오기돼 있다.] | Jeong Hae-jun



원재(元齋)[1]
본관
하동 정씨[2]
출생
1903년[3] 12월 17일
전라북도 금산군 군이면 중다리
(現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1리 410번지)[4]
사망
1993년 5월 4일 (향년 89세)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60-31번지 자택[5]
묘소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선영[6]
학력
금산공립보통학교[7] (졸업)
금산공립보통학교 부설 공립간이농업학교[8] (졸업)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 졸업)
동경문학원 (졸업)
도쿄대학 대학원 (수료)

1. 개요
2. 생애
4.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언론인, 한국화 화가.


2. 생애[편집]


1903년 12월 17일 전라북도 금산군 군이면 중다리(現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1리 410번지)에서 태어났다. 금산공립보통학교(現 금산중앙초등학교), 금산공립보통학교 부설 공립간이농업학교[9],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동경문학원을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금산공립보통학교 부설 공립간이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28일, 금산면 읍내 장터에서 열린 3.1 운동 제2차 시위에 김현재(金現在)·한철종(韓喆宗)·김봉준(金奉俊) 등 20여 명과 함께 참여했다가 이튿날인 3월 29일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체포돼 구속되었다. 이후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에는 정구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1929년 5월 4일[10], 경기도경찰부에서 촬영된 사진.

귀국 후 신문 판매업에 종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금산청년동맹 위원으로 있던 중 군산청년동맹대회에서 정기총회 개최 축하문을 금산청년동맹에 발송했다. 이때 김백일(金百日)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의 실행을 격려하는 등 불온한 내용을 담은 격문을 적어 동맹대회에 발송했다는 이유로 전주지방법원에 기소되었고, 결국 6월 1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군산청년동맹대회에 발송한 문서는 압수당했다. 이듬해인 1929년 4월 27일 제3차 조선공산당(ML당) 적위대 사건에 연루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고, 5월 5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재차 체포돼 결국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31년에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전주형무소 등지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조선일보사 학예부장, 충남모다스회사 지배인 등을 지냈다. 또한 1930년 일본 제국 문부성에서 주최한 전람회에 '모란'을 출품해 입선했고, 1933년·1935년·1936년·1937년 등 4차례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뇌성상합(雷聲相合)' 등의 작품으로 입선하는 등 한국화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쌓기도 했다.

1936년 전북일보 금산지국장에 취임했다. 1938년 11월 19일 금산공립농업학교(現 금산산업고등학교) 설치 기성회 발회식에서 기초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당일 총무에 선출되었다. 1939년 1월 1일 매일신보 금산지국장에 임명되었다.

8.15 광복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민족대표외교후원회 선전부 차장 및 선전부장, 독립전취궐기대회 선전부장, 공업신문사 편집고문 등을 지냈고, 민족통일총본부 사무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또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해 전국대회 의장, 중앙본부 문예부장, 조직부장, 문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에서 재정위원회 위원장,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 등을 겸했다. 또한 한미원조협정에 한국 측 대표로 참석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여자국민당 임영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남도 대전부(現 대전광역시)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정상열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대한민국과 일본, 중국 등 국제공모전에 심사위원 및 초대 작가 등으로 참여했고, 대한중석 고문을 지냈다. 77세 되던 1979년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 신문회관[11] 화랑에서 희수 기념전을 열었고,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에 있었던 호텔 뉴재팬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86년에는 서울예술인총연맹 화랑에서 불우아동돕기 개인전을 열었다.

1993년 5월 4일 오전 7시 50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60-31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 1948년 6월 2일 허정,이항발과 함께 통신위원으로 뽑혔다.
  • 1948년 8월 4일 국회 부의장 투표때 각각 8표,1표를 받으며 떨어졌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북 금산군[12])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7,735표 (60.95%)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금산군[13])


340표 (1.00%)
낙선 (13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대전부[14])

[[무소속|
무소속
]]

1,839표 (3.67%)
낙선 (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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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옥션 작가검색[2] 1950년 간행된 대한민국인사록(大韓民國人事錄)[3] 아이옥션 작가검색, 1929년 5월 9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2년생으로 등재돼 있다.[4] 192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5] 1993년 5월 5일 동아일보 부고 기사[6] #[7]금산중앙초등학교[8] 1913년 부설되어 1921년 폐교되었다.[9] 1913년 부설되어 1921년 폐교되었다.[10] 또는 5월 9일[11]한국프레스센터[12] 제17선거구[13] 제7선거구[14] 제1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