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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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NSP.png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문민정부
9대
황창평

10대
정형근


11대
오정소

정형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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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북구·강서구 갑)
선거구 분리
문정수[1]
신상우[2]
송두호[3]

제15-17대
정형근


제18-19대
박민식






제10대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정형근
鄭亨根 | Jung Hyung-geun


파일:정형근 전 의원.jpg

출생
1945년 9월 2일[1] (78세)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2]
본관
해주 정씨[3]

송산(松山)
재임기간
제10대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차관급)[4]
1994년 12월 26일 ~ 1995년 2월 23일
제5대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2008년 9월 22일 ~ 2011년 9월 16일
배우자
최명진
자녀
1남 2녀[5]
학력
동신국민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 17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 석사 · 박사)
미시간 대학교 로스쿨 (법학 / 석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 전역 (군법무관)
종교
무종교
소속 정당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6, 17
약력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제12회 사법시험 합격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 검사
수원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 법률담당관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실 법률담당보좌관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 수사2단장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장
국가안전기획부 제1국장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변호사정형근법률사무소 변호사
신한국당 정세분석위원장
제15대 국회의원 (부산 북구·강서구 갑 / 신한국당)
한나라당 정세분석위원장
한나라당 총재비서실장 (이회창 총재)
한나라당 기획위원장
제16대 국회의원 (부산 북구·강서구 갑 / 한나라당)
한나라당 제1정책조정위원장
한나라당 대통령친인척 및 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장
한나라당 제16대 대선 선거대책부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 (부산 북구·강서구 갑 / 한나라당)
한나라당 중앙위원회 의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5대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제6대 한국유엔봉사단 총재
1. 개요
2. 생애
3. 사건사고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공무원, 정치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의 12대손이다.


2. 생애[편집]


1945년 9월 2일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에서 아버지 정태중(鄭泰重, 1915. 12. 12 ~ 1992. 10. 22)과 어머니 창원 감씨(昌原 甘氏) 감화자(甘華子, 1930. 2. 10 ~ )[6] 사이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부산 동신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17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학부 시절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학원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중위)으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였다.

이후 검사로 근무하였다. 1983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에 파견되어 근무를 하였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똑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보내달라"고 검찰에 요청해 정형근이 파견된 것. 안기부에 파견 직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같은 주요 사건을 수사하였으며, 이후에는 공안통으로 방첩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하지만 5~6공 내내 국가안전기획부에 소속돼 있을 때 고문을 지휘했고, 본인의 지인들을 돕고자 정보부 내 인맥을 활용해 약점을 잡는 등 무리한 일을 많이 벌여 주변에서는 찬사를, 정적들과는 불구대천의 척을 지게 되었다. 1986년에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관련자로 지목된 심진구(1960~2014)의 고문수사를 지휘했고, 서경원은 밀입북 사건으로 수사받을 당시 안기부 대공조사국장이었던 정형근이 자신을 직접 고문했다며 석방 이후 폭로했다. 이러한 고문 혐의로 10건 가까이 피소되었으나 무려 23차례나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였고, 이에 검찰이 긴급 체포권을 발동해 체포하려 했으나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 및 당시 한나라당의 철저한 비호 아래 기소를 면할 수 있었다.(KBS, MBC, 동아일보, 오마이뉴스) 이는 아직도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정형근이 벌인 일 중 크게 원한을 샀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자식문제를 가지고 협박한 것이었다고 한다.[7] 이런 연유로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이후락, 전두환의 경우처럼 과거 DJ를 핍박하거나 죽이려 들었던 사람들이 세간의 예상과 다르게 정치보복 없이 비교적 평온하게 여생을 보낸 반면, 유독 정형근만큼은 당사자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휴대전화를 바꿔쓴 적도 있을만큼 원한갚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94년 말부터 1995년까지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을 역임하였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북구-강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서 연속으로 당선되어 3선을 기록했으며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참고로 2004년 선거 때는 열린우리당 이철 후보와 맞붙어서 공안검사 VS 사형수라는 재미있는 구도가 나오기도... 후술한 것처럼 국회의원 재직 당시에는 소위 DJ정권 및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저격수'로 명성을 떨쳤다.[8]

1999년 국가정보원의 언론대책 문건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 나왔다는 폭로를 하면서 정국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나, 정작 본인이 폭로 당사자임에도 검찰 조사에 불응하는 등 비협조적으로 나오다가 결국 명예훼손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002년 9월에는 상임위와 국정 감사를 통해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국가정보원의 도청 의혹을 제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참고.

2003년 10월에는 송두율 교수가 간첩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실체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최고위원 김철수라는 정황까지 폭로하며 심지어 북한의 핵심 세력이 노무현 정부 안에도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여담으로 후술된 디스켓 사건이 바로 이 시기다. 송두율이 간첩이라는 증거가 담긴 디스켓을 입수했다며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증거 제시 요구에 디스켓을 복사한 용지를 제시한 것. 한편 송두율은 1심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는 방북 사실을 제외한 간첩 혐의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후배 법조인 박민식에 밀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에 승복해 정계를 떠나 변호사로 활동 중 얼마 안 되어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부임, 2011년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2011년부터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말년에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서의 행보가 뜬금 긍정적인 평가를 받긴 했다. 평생을 정의롭다고 하지 못할 행보로 일관 했으나, 직업정신에는 충실했는지 의료민영화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 정형근이라면 이를 가는 진보진영 인사들도 이러한 마지막 전향(?)에는 호평을 했다.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3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2023년 10월 4일 한국유엔봉사단 제6대 총재에 취임했다.#


3. 사건사고[편집]


1999년 옷 로비 사건 때 얼떨결에 앙드레 김이 예명을 쓰게 된 경위를 파헤쳤다. 목요상 당시 청문위원장이 앙드레 김에게 증인선서를 할 때 본명을 요구하면서 김봉남이라는 이름이 밝혀졌는데, 정형근이 질문 도중에 "어떻게 해서 앙드레 김이라는 예명을 쓰게 되었나?"라는 질문을 하고 이에 앙드레 김이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2005년에 현직 국회의원일 때 한 호텔방에서 40대 여자와 몇 시간 동안 같이 있다가 그녀의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정형근은 자신이 주문한 필리핀산 묵주를 주고 받느라 같이 있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래서 "얼마나 특별한 묵주이길래 수령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리냐" "호텔방에서 둘이 손 잡고 기도만 하고 있었냐" 등의 조롱을 들었고, 끝내 '묵사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톨릭에서는 아내 외의 여자를 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9]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문서에는 무종교인으로 기재되어 있다.

파일:external/www.sporbiz.co.kr/47489_72245_5828.jpg

같은 해 국회에서는 북한 간첩의 통신 목록이 들어있는 디스켓을 증거로 입수했다고 주장하다가 디스켓을 보여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디스켓을 복사기로 복사 후 인쇄한 A4용지를 들고 나와버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컴맹 인증을 한 적도 있다. 사실 정형근이 1940년대 중반 출생인 걸 감안하면 이해할 법도 하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검사와 3선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도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이런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간에 깊이 인식시켜 준 해프닝 중 하나.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갑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56,876 (60.08%)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48,104 (76.56%)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41,547 (51.15%)
3선


5. 둘러보기[편집]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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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45년 7월 26일[2] #[3] 농포공파 22세 근(根) 항렬.[4] 기존의 장관급에서 문민정부 출범 이후 차관급으로 격하되어 오늘날의 국가정보원까지 이어지고 있다.[5] 이 중 맏사위 서봉규도 연수원 26기 검사이며, 과거에 대전지검 영동지청장, 대구지검 포항지청장을 지냈고, 현재는 광주고검 전주지부에서 근무하고 있다.[6] 감응실(甘應實)의 딸이다.[7] 측천무후 시절의 혹리(혹독한 관리) 내준신이 심지 굳은 중신들을 압박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즐겨쓰는 등 역사가 오래된 수법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내준신의 경우, 이 방법을 쓰면 결국 내준신 무리들이 원하는 대로 응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8] 공안검사 출신의 저격수 이미지는 훗날 김진태곽상도가 고스란히 이어받는다.[9] 십계명의 (가톨릭 기준) 6번째, 9번째 명령 참조. 정형근의 변명이 거짓이라면 거짓말을 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며,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3개나 어긴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