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후겸

덤프버전 :

정후겸
鄭厚謙

본관
연일 정씨[1]
출생
1749년(영조 25) 경기도 인천도호부 제물포
사망
1776년(정조 원년) 함경도 경원도호부
향년 27세, 사사
부모
생부 정석달
생모 전주이씨
양부 정치달
양모 화완옹주
가족
아들 정00
손자 정운구
증손자 정준택
현손자 정경택

1. 개요
2. 생애
2.1. 영조 생전
2.2. 영조 사후
2.3. 사후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2], 자는 백익(伯益). 초명은 정인대(鄭麟大).[3]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시가 쪽 먼 친척 출신 양자이자 외척이다.

북한 정무원 부총리를 지낸 정준택은 그의 증손자이며, 북한 국가보위상 정경택은 그의 현손자이다.


2. 생애[편집]


1749년 경기도 인천도호부 제물포(현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생선장수로 생계를 잇던 아버지 정석달(鄭錫達)[4]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기태(李基泰)의 딸 사이의 6남[5]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6] 그의 직계에는 5대조 정시창(鄭始昌)이 1633년(인조 1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2위로 입격하여# 정5품 형조 정랑(正郞)에 오르고 고조부 정백빈(鄭伯賓)이 81살 넘게 장수하여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관직에 오른 조상들이 없었고,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생선장수로 생계를 잇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1757년(영조 33) 사종숙(四從叔, 11촌 지간)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에게 입양되면서#, 그를 비롯하여 생부와 생가 쪽 식구들의 형편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팔자를 고치게 된 것이다.


2.1. 영조 생전[편집]


당시 영조에게 가장 총애받던 딸 화완옹주양자이다 보니 정후겸도 덩달아 영조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다.

1764년(영조 40) 종8품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정7품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765년 식년시 생원시·진사시에 각각 3등 57위#, 2등 10위#로 급제하여 같은 해 종6품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종6품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에 제수되었다. 1766년(영조 42)에는 정시 문과에 을과 1위(아원)으로 급제하여# 정6품 병조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 이후 1767년(영조 43) 정6품 홍문관 수찬(修撰)에 올랐고, 이어 종5품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정5품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내고 1768년 정3품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이듬해 정2품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정3품 호조 참의·종2품 호조 참판·종2품 공조 참판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정후겸은 김귀주와 함께 혜경궁 홍씨세손을 공격하는 등의 모략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세도가로 혜경궁 홍씨의 숙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할 것을 선언할 때에도 강력히 반대했고 동궁에 사람을 비밀스럽게 보내어 세손의 언동을 감시케 하기도 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부사직(副司直)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분주하였다.


2.2. 영조 사후[편집]


정조 즉위 후 정조에 반대했던 홍인한 세력이나 화완옹주의 힘이 줄고,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 채제공이나 소론, 남인 등이 힘을 얻으면서 정후겸도 힘이 줄어든다. 정조 즉위 후 대신들이 정후겸을 죽일 것을 요청하면서 결국 함경도 경원도호부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정조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결국 사사되었다. 그리고 역적을 법적인 영조의 양외손(養外孫) 자격으로 둘수 없다는 정조의 명령으로 정조 원년 8월 28일 양모 화완옹주와 강제 파양되게 되었다.[7]


2.3. 사후[편집]


순조 때 역적으로 단죄되었지만 1908년(순종 융희 2) 내각 총리 대신이자 매국노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매국노인 법부대신 조중응 등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3. 여담[편집]


  • 화완옹주는 1738년생으로 양어머니와 나이차가 11살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혼인과 출산을 빨리 하던 시대였으므로 현대의 부모자식에 비하면 '약간' 수준이었지만.

  • 본인이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고 죽은 함경도에, 시간이 제법 흐르고 본인의 현손자가 태어나서 자랐다. 그가 바로 북한에서 국가보위상과 총정치국장을 역임한 정경택.

  • 노론인 홍인한과 손잡고 어울리기는 했지만, 양조부 정우량이 소론계였기에 소속 당파는 소론으로 추정된다. 영조에게 청해 소론 삼대신들인 조태억, 최석항, 이광좌의 관작을 복구하게 하였고[8], 소론 대신들인 구윤옥과 서명선이 정후겸과 친하게 지냈다며 정조에게 사죄하기도 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7년에 방영된 이산에서는 배우 조연우가 맡아 연기하였다. 정조 즉위 전 세손시절에도 뒤를 캐고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정조 즉위 후 자객을 보냈다가 실패하여 유배 후 사사된다.

  • 배유안의 역사 동화 창경궁 동무에서는 정조와 정후겸의 아름다울 수 있었던 우정이 어떻게 어긋났는지 잘 나와 있다. 마지막 장면에 정후겸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 타임인조선에서는 노론의 중신들에게 정조를 권총으로 암살하자고 주장한다. 총을 만들 인물은 미래에서 온 황찬기 박사.

  • 2021년작 드라마인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권현빈이 맡아 연기했으며[9], 여기서도 세손 시절의 정조를 모해하는 것으로 나온다. 허나, 위의 이산과는 달리, 노론의 사주가 아닌[10] 순수 본인의 의지로 그를 적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가 유배가기 직전에 그 동기를 고백하는데, 자신을 친아들처럼 사랑해준 양어머니 화완옹주에 대한 비뚤어진 효심이 그것이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12:07:25에 나무위키 정후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세 공(恭) 항렬이다.[2] 문정공파-판결사공파 22세 겸(謙) 항렬.[3] #[4] 1757년 종9품 참봉을 시작으로#, 정후겸의 후광을 입어 1759년 종6품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정6품 사헌부 감찰(監察)#·종6품 연기현감(燕岐縣監)#, 1765년 종5품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종4품 배천군수(白川郡守)#, 1768년 종5품 대구판관(大丘判官)#, 1772년 종3품 서흥도호부사(瑞興都護府使)#·정3품 상주목사(尙州牧使)# 등 문과는 커녕 생원·진사시에도 등과하지 않았는데도 정3품 요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5] #[6] 본생가 형인 정일겸(鄭日謙, 1747년생)은 1771년(영조 47)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7위로 급제하고# 1772년(영조 48) 정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1775년 정3품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본생가 첫째 동생 정시겸(鄭時謙, 1754년생)은 1773년(영조 49) 증광시 진사시에 1등 4위로 급제하였다.#[7] 조선왕조실록 : 정후겸을 본종으로 돌리라고 명하다. 이때의 기사.[8] 심지어는 신축년037) 과 임인년038) 의 삼흉(三兇)들은 선대왕에게 만세의 원수가 되는 자들인데, 속이는 말로 덮으며 주선하여 관작이 복구되게 하였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25_001[9] 여기선 본명이 아닌, 자인 정백익으로 나온다.[10] 애초에 이 드라마에서 노론정조는 커녕, 영조에게도 기가 죽어 지내는 겉절이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