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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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훈 현재 모습.jpg
이름
정훈(鄭勳)
생년월일
1979년 2월 9일 (만 45세)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시
학력
충암초 - 충암중 - 명지고/낙생고[1] - 성균관대
종교
개신교
포지션
스몰 포워드, 파워 포워드, 가드[2][3]
신체조건
199.2cm[4], 85kg
프로입단
2002년 울산 모비스 1라운드 2순위
소속팀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2002~2003)
원주 TG삼보 엑써스(2003~2004)
국군체육부대(2004~2006)
원주 동부 프로미(2006~2007.1)
전주 KCC 이지스(2007.1~2009)
대구 오리온스(2009~2011)
국가대표팀
2005 도하 아시아선수권[5]
등번호
7[6], 3[7], 1[8]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9

1. 개요
2. 선수시절
2.1. 고교-대학 시절
2.2. 프로 선수 시절(몰락)
2.3. 커리어 스탯
2.4. 국가대표
3. 정훈은 왜 실패했나??
3.1. 스트레치 4의 기술적 한계
3.2. 외국인 선수 중심의 KBL



1. 개요[편집]


한국 남자농구 매니아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비운의 유망주 중 대표적인 선수. 대학 시절 장신 포워드로서 경기장을 휘젓는 전천후 플레이에 많은 팬들이 기대를 했지만 KBL 특유의 양궁농구와 빈약한 멘탈문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망가진 대표적인 선수다.


2. 선수시절[편집]



2.1. 고교-대학 시절[편집]


한국농구의 미래
실사판 윤대협 & 성균관대의 농구버전 갈색폭격기

농구를 시작하기 전엔 야구선수로 장성호와 충암중에서 같이 뛰기도 했던 정훈은 개인사정으로 1년만에 야구를 포기하고 일반 학생으로 명지고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박성근 감독의 눈에 띄면서 우연히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9] 농구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타고난 신체조건과 센스 덕분에 금새 팀의 주축 멤버이자 전국에 이름난 장신 유망주가 되었고, 명지고 2학년때인 1996년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FIBA Asia U-18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10] 고3이던 1997년초 박성근 감독이 갑작스레 낙생고로 이적하면서, 정훈은 박성근 감독을 따라 같은 학교의 이근석과 함께 낙생고로 전학을 가는데, 당시 중고농구연맹 규정상 전학생은 6개월간 공식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고 이바람에 정훈은 1997년 상반기를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7월 열린 종별선수권 대회부터 낙생고 소속으로 처음 출전하게된 정훈은 동기 이한권, 진경석, 후배 전병석, 이근석 등과 함께 낙생고 돌풍을 이끌며 1997년 하반기만 뛰고도 전국대회 3관왕(종별선수권, 쌍용기,[11] 전국체전)에 오르는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정훈을 비롯한 당시 낙생고 멤버들은 모두 농구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파일:image002.jpg
박성근 감독이 대학농구의 대표적 약체팀 성균관대학교 농구부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최강 낙생고의 멤버들 중 정훈, 이한권, 진경석은 박성근 감독을 따라 성균관대로 진학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였고, 팬들은 이들을 "낙생고 3인방"이라 불렀다. 1998년도 신입생 랭킹 1, 2, 3위라던 동아고 김주성, 휘문고 김태완, 낙생고 정훈이 모두 연고대행을 거부했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농구계에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1998 시즌이 개막하고, 고교최강팀의 주역 3인방이 의기투합해 대학 약체팀(성균관대)에 입학, 팀을 강호로 이끈다는 청춘만화 같은 스토리...가 펼쳐질것만 같았으나, 성인농구 무대는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정훈의 1학년 시절인 1998년의 대학농구서장훈현주엽의 졸업으로 연세대 vs. 고려대의 구도가 막 깨지면서 매 대회별로 총 5개팀(경희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한양대)이 우승트로피를 나눠가지면서 치고받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고, 시즌 마지막 대회였던 1998 농구대잔치에서 신입생 김주성이 맹활약한 중앙대가 우승하며 최종 승자에 올랐다. 같은 신입생으로서 역시 엄청난 기대를 모았던 낙생고 3인방의 성균관대는 모든 대회에서 예선탈락하며 한계를 절감한 시즌이었다.

2학년때도 별반 다르지 않아, 김주성-송영진 트윈타워의 중앙대가 MBC배와 1,2차연맹전, 농구대잔치까지 접수하며 시즌 4관왕에 오르는 동안 성균관대는 매대회 4강~6강 언저리만 맴돌 뿐이었다. 정훈은 팀의 에이스로서 3번부터 5번까지 전천후로 활약했지만, 중앙대와 달리 특출난 선배들이 없었던[12] 성균관대는 이제 겨우 2학년인 낙생고 3인방에 대한 의존도가 컸고, 결정적으로 감독들간의 역량차이로 인해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노련미 부족이 드러났다.[13]

정훈이 3학년이 되는 2000년도부터 성균관대는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면서 옥범준-김경범-진경석-정훈-이한권의 라인업은 MBC배와 대학연맹전에서 중앙대에 이어 연속 준우승을 차지하며 대학무대 2인자의 자리까지 올랐고, 2000년 전국체전에서는 마침내 우승을 차지, 성균관대 최초의 전국대회 우승 타이틀을 따낸다.

4학년때인 2001년, 송영진의 졸업으로 중앙대 트윈타워의 한축이 무너지면서 성균관대는 마침내 2001 MBC배 우승을 차지!! 드디어 성균관대의 시대가 오는 것으로 보였....지만, 역시 4학년이 된 김주성은 더욱 업그레이드 된 상태였고, 2년전 4관왕, 1년전 3관왕을 차지했던 멤버 중 동기 박지현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도 석명준, 손준영 등과 함께 1,2차 연맹전을 연이어 제패하며 여전히 대학 최강팀임을 입증한 반면, 성균관대는 2차연맹전 예선전 고려대와의 경기 중 12인 엔트리에 빠졌던 임효성을 넣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며 대회 전체 몰수패를 당하는 등 부진을 겪는다. 낙생고 3인방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2001-02 농구대잔치에서도 4강까지 오르지만, 상무와의 4강전에 무릎부상 중인 현주엽 한 명에 농락당하면서 패배, 대학 최강을 노렸던 3인방의 꿈은 아쉽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성균관대에서의 정훈은 아마농구팬들이 기대했던 장신"가드"는 결코 아니었지만, 팀내 최장신임에도 자연스러운 드리블에 백코트부터 센터까지 마크하는 전방위 수비, 그리고 화려한 드라이브인에 가끔씩 터트리는 슬램덩크까지...윤대협을 연상케하는 플레이를 자주 보여주며 팬들을 열광케 했다. 당시 성균관대 박성근 감독은 유명한 3점슛 덕후였는데, 오죽했으면 골밑 돌파해서 마무리한 선수를 작전타임때 불러다 "거기서 오른쪽 비어있는 김경범(G, 181cm) 봐주면 바로 3점 찬스자네!!!"라고 일갈할 정도였다. 유연한 돌파력과 훌륭한 피딩능력을 가진 정훈은 박성근 식 농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이었고[14] 수비시엔 김주성을 마크하는 센터로, 공격시엔 하이포스트에서의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이러한 플레이는 2001 오사카 동아시안게임 예선전에서 당시 대학-상무선발팀이 왕즈즈-야오밍이 버틴 중국 성인대표팀을 격파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면서, 다시한번 아마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파일:낙생고 및 성균관대 3인방.jpg
대학생활을 마치고 2002년 드래프트에서 정훈은 중앙대 김주성에 이어 2순위로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 드래프트되었다.[15]


2.2. 프로 선수 시절(몰락)[편집]


비운의 유망주 KBL 역사상 최악의 2번픽 중 한명[16]

파일:정훈모비스시절.jpg
루키시즌, 정훈은 게임당 평균 21분36초를 출전하며 구병두와 번갈아가며 백코트 수비요원으로 주로 출전했다.[17] 당시 울산모비스 주전은 전형수-우지원-(정훈 or 구병두)-데니스 에드워즈(192cm)-아이재이아 빅터(206cm)였는데, 신장이 낮은 에드워즈와 몸싸움이 약한 빅터로 인해, 정훈은 이창수와 함께 빅맨 수비요원으로도 자주 출전하곤 했다. 루키시즌 정훈은 5.3득점-2.2리바-1.0어시-0.9스틸이라는 다소 빈약한 기록을 남기는데, 후술하겠지만 놀랍게도 이 기록은 정훈의 커리어 사상 2번째로 좋았던 기록이다!!!

파일:TG시절의 정훈.jpg
이듬해 울산 모비스는 신인드래프트에서 "연세대 서태웅"이라던 김동우를 뽑았고, 정훈-김동우라는 드림 백코트가 생기는게 아닌가하는 기대감을 들게 했지만, 시즌 개막전 정훈은 원주TG 전창진 감독의 요청에 따라 김승기와 1:2 트레이드를 통해 원주 TG 엑서스로 이적하게 된다. "제 2의 허재를 보는것 같다"는 립서비스까지 날리며 정훈을 데려온 전창진 감독이었지만, 정작 2003-04 시즌에 들어서는 신기성-앤트완 홀-양경민-김주성-리온 데릭스의 베스트 5만 주구장창 돌리며[18] 식스맨 정훈에겐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고 정훈은 가비지 타임에 나와 덩크나 한번 꽂는 선수로 전락한다.

파일:20061206104716.417.0.jpg
원주 동부 시절엔 기존까지 정훈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소극적 마인드와 슈팅능력 외에도 또 다른 심각한 약점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바로 "움직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김주성이란 확실한 빅맨이 있는 상황에서 원주 동부의 스윙맨들은 탁월한 개인기를 가졌거나(데이비드 잭슨, 앤트완 홀, 카를로스 딕슨 등) 오프 더 볼 무브로 수비수를 따돌릴 수 있어야(양경민, 강대협, 손규완 등) 하는데, 본인이 볼을 가지지 않으면 윙포지션에 멀뚱히 서있는 시간이 많았던 정훈은 출전할 때마다 전창진 감독의 불호령을 들어야만 했다. 나중엔 전창진 감독이 "연습때 니가 잘 하던거(1:1 돌파) 한번 하고 들어와봐."라고 주문하기까지 했으나, 골밑까지 잘 뚫어놓고도 앞에 외인 센터만 서있으면 볼을 무조건 밖으로 빼는 통에 정훈은 공격시 존재감 0인 선수였다. 수비적인 면에서 보면, 일단 좋은 대인수비수긴 했지만 추승균, 방성윤 같은 파워와 센스를 겸비한 3번들에게 속수무책으로 털리면서 락다운디펜더로 쓰기에도 애매했다.

KBL에서의 실망스런 두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한 정훈은 다시 부활한다. 아마농구 폭격기;; 박지현, 옥범준, 이한권, 김태완, 김종학, 이현준 등 대학선발 시절 같이 뛰었던 동료들과 재회한 정훈은 상무의 키플레이어로서 성균관대 시절의 플레이를 재현하며 상무가 2005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는데 1등 공신이 된다. 수비시엔 센터로, 공격시엔 2~4번을 가리지 않으면서 "갈색폭격기" 시절의 모습을 재현했고, 정훈의 팬들은 제대후 KBL 무대에서의 정훈의 부활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마침 정훈이 제대를 앞둔 2006-07 시즌, 원주동부는 팀의 대들보 김주성이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으로 인해 2라운드까지 자리를 비워야하는 상황에, 전시즌 이미 양토토가 불법도박 & 성추문 콤보로 출장정지를 먹으면서 포워드진에 큰 공백이 생긴 상황이었다. 이에 원주동부팬들도 상무에서 완벽히 부활한 정훈이 마침내 기회를 잡고 주전으로 훨훨 날게 될것이라 의심치 않았으나... 많은 팬들의 우려대로 전창진 감독은 BQ 떨어지는 선수는 절대 쓰지 않는 감독이었고, 얊아진 포워드진 주전경쟁의 승자는 33세의 노장 손규완(186cm)이었다. 상무에서 또한번 아마추어 농구를 씹어먹었던 정훈이지만, 공격, 수비 어느것 하나 A급은 아니었던 정훈은 시즌 중반까지 상대팀 국내에이스 전담수비수나, 2쿼터용 토종 빅맨으로만 쓰였고, 김주성이 국대에서 돌아온 뒤에는 이마저도 잃고 마냥 벤치신세가 되고 만다.[19]

파일:2009071301496_0.jpg
그러던 2006-07 시즌 중반, 조성원의 은퇴와 이상민의 잔부상으로 인해 리그 최하위로 떨어진 전주 KCC 이지스에서 원주 동부와 3:3 빅딜을 하게 되고,[20] 정훈은 허재 감독의 리빌딩 플랜에 이름을 올리며 KBL 네 번째 유니폼을 입게 된다. KCC에서의 시즌 후반기 동안 정훈은 데뷔 후 가장 긴 경기당 28분 13초의 출장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무려 7.6득점-3.4리바-0.6어시-0.7스틸-0.5블록의 커리어 하이 스탯(!!!)을 찍는다. 그렇다. 리그 꼴찌팀에서 에이스 추승균과 함께 팀 내에서 유이하게 확실한 출장시간을 보장받으며 22경기나 뛴 결과가 겨우 이거였다. 그마나 나아지긴 했지만 슛찬스에서 머뭇대는 건 여전했고, 백코트 수비에선 상대의 발빠른 2, 3번들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골밑에선 상대 외국인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선수가 없어 출장시간만 늘었 을뿐, 허재 감독의 선택은 완벽한 실패로 판명되었다.[21] 여담으로 당시 한 성깔하는 허재 감독은 정훈에게 경기 중에 불호령을 낼 때가 잦았는데, 그에게 환한 미소를 보인 적이 정훈이 2쿼터를 몇 초 안남기고 버저비터를 성공시키던 그 순간 한 번 뿐이었다. 비바점프볼이란 방송에서 이를 허재 감독에게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말하자 허재는 그저 워낙 정훈 선수를 아껴서 그런 거라고 얼버무렸다(...).[22]

2007-08 시즌 FA로 서장훈이 합류하면서 전주 KCC는 외국인 선수로 스몰 포워드인 제이슨 로빈슨을 뽑았고, 이로 인해 정훈의 출장시간은 다시 줄어버렸다. 오히려 수련선수 출신인 이중원이 키 식스맨으로서 더 많은 기회를 얻었고, 정훈은 이제 서장훈의 체력유지를 위한 교체선수 정도가 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2008-09 시즌엔 복코 감독님이 하승진까지 뽑으면서 정훈의 출전시간은 더더욱 안드로메다로... 그나마 이 때는 프로 데뷔 후 우승을 경험하기라도 했다.

파일:정훈_오리온스.jpg
2008-09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정훈은 2001년 오사카 동아시안게임 당시 코치였던 김남기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구 오리온스와 계약하지만 전년도 9500만원의 연봉을 7100만원으로 깎는 계약이었다. 루키 김강선-허일영 콤비의 존재와 이동준의 부상이탈로 인해 정훈은 완벽히 4번으로 포지션을 전환하며 그간 기피하던 몸싸움에 매진하는 등 팀에 헌신하나, 원체 팀전력이 약했던 탓에 오리온스는 시즌 꼴찌에 머문다. 이후 2009-10 시즌 내내 부상으로 신음하던 정훈은 D리그에서만 간간히 얼굴을 비치다 시즌 종료후 은퇴를 하고 만다. 여담이지만 이때가 어쩌면 정훈의 농구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창진,허재같은 맹장들에게 억눌려있었던 정훈은 김남기라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리더쉽의 지도자를 만나 얼굴도 피고 종종 경기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쳐 그날의 mvp로 뽑혀 인터뷰를 한적도 있었을 정도... 당시 인터뷰에서 울먹이며 김남기 감독을 그저 감독이 아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던 참스승이자 평생의 은사로서 생각한다는 말까지 했었을 정도이니... 근데 너무나도 늦었다...

은퇴 후의 근황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2013년에 한기범 농구교실에서 유소년 강사를 하고 있는 게 확인이 되면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2.3. 커리어 스탯[편집]


시즌
소속팀
경기수
평균출장시간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FG%
3P%
팀성적
2002-03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40
21'36"
5.3
2.2
1.0
0.9
0.5
40.5
39.5
플레이오프 6강
2003-04
원주 TG삼보 엑서스
48
9'57"
3.5
1.7
0.6
0.3
0.5
50.0
40.4
준우승
2006-07
원주 동부 프로미
22
17'40"
3.4
3.2
0.6
0.7
0.5
38.0
32.7
8위
전주 KCC 이지스
22
28'13"
7.6
3.4
0.6
0.6
0.5
10위
2007-08
전주 KCC 이지스
48
12'19"
3.7
1.3
0.4
0.4
0.1
45.0
33.8
플레이오프 4강
2008-09
전주 KCC 이지스
32
10'28"
1.9
0.8
0.4
0.3
0.1
30.0
24.5
우승
2009-10
대구 오리온스
43
21'8"
5.4
2.3
0.6
0.5
0.1
43.3
34.1
10위
2010-11
대구 오리온스
1
5'59"
0.0
1.0
0.0
0.0
0.0
-
-
10위


2.4. 국가대표[편집]


명지고 2학년이던 1996년 FIBA Asia U-18 대표팀에 김주성, 전형수, 송영진 등과 함께 뽑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청소년대표)

성균관대 4학년이던 2001년, 당시 김춘수 감독이 이끌던 2001 오사카 동아시안게임 대표팀(대학선발)에 양동근, 김주성, 송영진, 김동우, 김태완 등과 함께 출전하여, 예선전에서 야오밍과 왕즈즈가 모두 출전한 중국 성인 국가대표팀[23]을 꺾는 대 파란을 일으키지만, 카자흐스탄 등 다른팀들에 패하며 4위에 그쳐 메달 획득에 실패한다.

파일:deejayku_255228_1[376857].jpg
동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시절 덩크하는 거만 보면 국대 에이스인줄;;

상무시절 팀의 에이스로 맹활약하던 정훈은, 전창진 감독이 이끌던 2005 도하 아시아선수권 대회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성인국가대표에 데뷔하게 된다.[24] 하지만 전창진의 국가대표는 여전히 문경은, 방성윤 등 3점슈터들만 중용하는 양궁농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3점은 커녕 공격시 존재감이 제로(0)였던 정훈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25]

2006년 오랜만에 한국에서 열린 국제농구대회였던 "비타500 월드바스켓볼챌린지(WBC)"에 출전한 최부영 감독의 대표팀 18인 로스터[26]에 이름을 올렸으나 안타깝게도 거의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고, 몸풀기 타임에 김민수와 함께 360도 덩크쇼만 보여준 게 끝이었다.


3. 정훈은 왜 실패했나??[편집]


*https://www.youtube.com/watch?v=Ov_9-da_Bhg
*https://www.youtube.com/watch?v=_i6vvG-ZKB4

유투브에서 '농구 클래식'으로 검색해보면 정훈의 과거 대학시절 경기 하이라이트를 찾아볼 수 있다. 확실히 낮고 유연한 드리블, 방향 전환 등을 보면 당시 농구팬들이 기대감을 가졌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조금만 밀어주면 화려한 2/3번 스타일로 터지지 않았을까라는 기대감을 주었고, 현장에서도 이러한 기대감은 일정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에서 실적이 전무했음에도 2006년 국대에 뽑히거나 2007년 신임 감독이었던 허재가 이 선수에게 3번롤을 부여주고 한동안 밀어주었고, 오리온스에 부임한 김남기 감독도 그에게 주장을 달아주고 자신감을 회복시켜주려고 애쓰기도 했다.하지만 대부분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안착에 실패했다.

낮고 유연한 드리블 때문에 현혹되기 쉽지만, 이 선수는 요즘 용어로 표현하면 스트레치 4에 가까운 선수이다. 다만 슛이 기반이 아니고 페이스업 드리블이 득점 기반이 되었을 뿐이다. 위의 서술들에서도 가드에 대한 미련을 드러내면서도 결국 3-5번이었음은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영상을 보아도 수비시에는 엄연히 빅맨 롤을 소화하고 있고, 매치업시 제끼는 선수들도 대부분 4-5번 선수들이다. 즉 이 선수는 다재다능한 파워포워드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선수들의 출현한 시점에 플레이는 존재하지만 정작 이들을 정의할 수 있는 용어가 아직 나오지 않았고 NBA의 앤퍼니 하더웨이, 슬램덩크의 윤대협 등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절이라 이들에 대한 동경이 투영된 것도 이 선수를 둘러싼 논쟁을 부채질했다.[27]

한국 농구의 계보에선 80년대의 김유택, 90년대의 정재근, 전희철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후 최근의 최진수, 최준용, 송교창으로 이어지는 다재다능하면서 스키니한 포워드들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의 김동우, 송영진, 이규섭 모두 한국 농구 레벨에서는 스트레치 4의 선구격인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며, 그 중에서도 정훈은 슛 대신 드리블로 페이스업 득점 루트를 찾은 특이한 케이스였다고 볼 수 있다.


3.1. 스트레치 4의 기술적 한계[편집]


낮고 유연한 드리블 때문에 가드나 스몰포워드로 포지션 컨버젼 요구가 팬들 사이에서 자주 이루어졌고, 실제로 KCC 시절에는 허재 감독이 이런 시도를 하기도 했다. 최희암 감독은 그에게 단신 용병 수비를 맡겨보기도 했고. 그러나 대부분 단발성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김동우, 이규섭처럼 슛터로 컨버젼에 성공한 경우를 보면 오프 더 볼무브와 캐치 앤 슛이라는 스몰포워드의 기본적인 동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윤호영 같은 경우는 오프더볼 무브나 캐치앤 슛은 없었지만 국내 3번 포지션에 대한 사이즈의 비교우위를 앞세운 포스트업과 미드레인지 게임을 앞세워 득점 롤을 수행했다.

그러나 정훈의 경우, 슛팅 터치도 부재했지만 스크린을 활용한 오프 더 볼무브, 여기서 이어지는 캐치 앤 슛 혹은 돌파라는 기본적인 스몰포워드의 움직임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NBA 스윙맨이건, 양궁농구의 슛터건, 스몰포워드 포지션의 일차적 기본기는 스크린 활용과 볼 미팅에 이은 연속적인 플레이의 전개이며, 운동능력의 차이 등으로 NBA 선수는 돌파를, 국내 선수는 슛을 선호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3번으로서는 기본기 부재였던 셈이다.

윤호영처럼 포스트 게임으로 풀어나가기에는 파워 부재가 발목을 잡았다. 정훈은 운동능력의 우위를 가졌던 대학 시절 영상을 봐도 포스트 게임을 즐겨하지 않았고(못했고), 프로에서는 가드 상대로 스위치가 되어도 포스트 게임을 전개하지 못했다. 사이즈의 우위를 살린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송영진처럼 수비와 삼점, 즉 일종의 3&D 플레이어로 가자니 투지 부족, 수비 전술 이해의 부족 등이 발목을 잡았고, 특히 파워 부재 때문에 빅맨 상대로는 포스트 수비에서, 2-3번 상대로는 스크린을 파이트 스루하는 힘이 부족해서 픽 한번에 찬스를 내주곤 했다. 2-3번을 상대로 1:1 수비에서는 상당히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2000년대 후반 즈음에는 이미 한국도 다른 지역처럼 2:2 플레이가 대세가 된 지 오래였다.

포인트 가드 포지션은 아예 논외인 것이 게임 내내 풀코트로 볼을 운반하는 역할을 한 적이 없고, '볼을 들고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선수에 맞추어 패스'하는 가드 포지션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한 적 자체가 없다. 이러한 풀코트 속공을 주도하는 능력은 센터의 박스아웃과 스크린 걸기, 포워드의 오프 더 볼 무브처럼 포인트 가드의 기본기에 속했다.

위에서 언급되는 2001년 대회에서도 박지현이 로스터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애초에 영상도 없는 게임이어서..검증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실제로 국제대회나 오리온스에서 보여준 김남기 감독의 농구도 1-3-1 같은 변칙 지역방어에 방점을 찍고 있었지 딱히 장신 스윙맨이나 장신 포인트 가드를 이용한 패싱 게임 같은 것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3.2. 외국인 선수 중심의 KBL[편집]


이처럼 2-3번으로서는 한계가 명확했지만 외국인 선수가 없었다면 다재다능한 파워 포워드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훈이 뛰던 시절 외국인 선수 2인이 스타팅 라인업에 나왔고 외국인 선수들의 신장과 기량의 인플레도 절정에 달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국내 빅맨에게 매우 불리했던 상황이었다. 또한 많은 선수들이 롤 축소에 심리적 갈등을 겪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외국인 선수의 득세가 다소 약화된 상황에서 데뷔한 김민수, 윤호영 등도 데뷔 시즌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공격롤의 축소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훈의 실패는 이러한 당시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NYJY-RQ9CLM

위의 영상을 보면 2000년대 중반 KBL 외국인 선수들, 퍼비스 파스코단테 존스 같은 선수의 운동능력이나 외곽슛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현재 KBL 최고 센터 사이먼과 비교해 봐도 운동능력이나 슛팅 터치의 우위가 한 눈에 보일 정도다. 또한 국내 최고 포스트맨인 서장훈이 3점슛 콘테스트에 나온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데, 물론 빅맨의 외곽슛은 현대 농구의 트렌드이며 서장훈의 출전은 이벤트성이기도 하지만, 당시 외국인 포스트맨들의 수준이 어느정도였는지 실감하게 한다. 당시 KBL 외국인 선수들의 수준은 NBA 바로 다음 레벨의 선수들이 모였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당시 최고 외국인 선수였던 피트 마이클 같은 선수가 유럽으로 돌아가서 여전히 최고 선수로 통한 것을 생각하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당시 외국인 선수들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하승진, 함지훈이나 오세근, 이승현 같은 선수도 당시 같은 용병제도 하에서는 성장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장훈조차도 이 시기에는 롤플레이어 정도로 역할이 축소되었고[28] 전희철, 현주엽, 방성윤 같은 스타 기질이 강한 선수들보다 롤플레이어 성향의 선수들이 오히려 팀 성적에 도움이 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정훈의 실패는 운동능력을 앞세운 국내 스타 플레이어들의 위상 저하와 궤를 같이 한다.

정훈의 포지션 전환 실패를 국내 장신 포워드 전체의 실패, 더 나아가 국내 농구 국가 대표팀의 경쟁력 상실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과장된 견해이다. 아시아 농구의 판도 자체가 중동, 귀화선수가 가세하면서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고, 그러나 이러한 과장된 비관의 이면에는 국내 선수는 스타 플레이어가 될 수 없는 KBL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깔려있음은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자신들이 좋아했던 선수가 위상이 축소되는 모습을 좋아할 팬은 어디에도 없다. 다소 허황된 판타지라도 그런 판타지를 투영해가면서 즐길 수 있는 스타 플레이어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프로스포츠로서 KBL의 매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명지고 3학년이던 1997년 3월, 박성근 감독을 따라 낙생고로 전학갔고, 이 바람에 1997년 상반기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2] 정훈이 가드였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2001년 동아시아대회 당시 김남기 감독이 정훈에게 포인트 가드를 맡겨서 중국전에서 승리를 했는데, 이처럼 변칙적으로 가드로 기용된 경우 좋은 활약을 펼치기도 해서 그가 장신 가드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피딩이 좋은 포워드였을 뿐, 커리어 중 단 한 시즌도 가드 포지션을 메인으로 보낸 적이 없다.[3] NBA의 케빈 가넷을 연상하면 된다. 가넷은 변칙적으로 포인트 가드로 뛰며 좋은 활약으로 중요한 플레이오프 경기를 승리로 이끈 적도 있지만 누구도 그를 가드라고 보진 않는다. 실제로 정훈이건 가넷이건 워낙 드리블과 패스, 시야가 좋아 가드를 일시적으로 소화 가능한 것 뿐이지 풀로 소화하면 애로사항이 꽃핀다. 수비부터 높은 드리블, 슈팅레인지 등..[4] 2001 KBL 드래프트 당시 측정치.[5] 상무 입대 후 대학 시절의 폼을 되찾으면서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전창진 감독(정훈의 원소속팀 원주 TG의 감독이기도 했다.)에 의해 이규섭의 대체선수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6] 성균관대, 오리온스 시절[7] 모비스 시절[8] TG삼보, 동부, KCC 시절[9] 이때 명지고의 주요멤버로 2년선배 이정래-김기만, 1년 선배 전형수, 1년 후배 김동우 등이 있었다.[10] 당시 대표팀의 주요 멤버로는 명지고선배 전형수, 마산고 3학년 송영진, 그리고 부산동아고 2학년 김주성 등이 있었다.[11] 정훈이 MVP에 올랐던 대회. 당시 스포츠신문에도 201cm의 장신 가드 정훈!!이라고 소개되었다;;;[12] 4학년 가드 이흥배(180cm), 3학년 포워드 듀오 이현준(193cm)-임영훈(193cm) 정도가 활약했지만 A급이라 보기엔 부족했다.[13] 중앙대엔 노련한 가드 임재현, 황진원 백코트가 있었고, 연세대엔 장신가드 은희석과 명장 최희암 감독이, 고려대엔 전형수이규섭이 팀을 잘 리드했다. 심지어 주전 이름값이 훨씬 떨어지는 한양대에도 자주 깨졌는데, 당시 대표적인 폭력감독으로 유명했던 故 김춘수 감독이지만 나름 대학농구계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이었다.[14] 당시 성균관대의 공격 1옵션은 진경석의 3점슛이었다. 정훈이 득점에 나서는 건 진경석이 막히거나 부진한 경우였다.[15] 드래프트 당시 감독은 박수교였는데, 시즌 종료후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면서 정작 루키시즌 감독은 최희암이었다.[16] 성균관대 2년 후배 옥범준(G, 174cm), 부상으로 커리어가 짧았던 건국대 출신 노경석(G,188cm) 등이 포함된다.[17] 당시 원주TG의 테크니션 데이비드 잭슨을 가장 잘 막는 수비수로 유명했다. 팔이 워낙 긴데다 운동능력이 좋았고, 수비센스도 좋아 데이비드 잭슨의 헤지테이션에 잘 속지않았다.[18] 이 멤버로 2003-04 시즌 정규리그 1위를 달성하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선 전주 KCC에 3승 4패로 무너지고 말았다. 유명한 신선우 감독의 바셋 꼼수 임대트레이드가 있었던 시즌.[19] 시즌 초반 전창진 감독이 주전으로서 몇차례 기회를 주었지만 여전히 "KBL 모드"인 소극적인 모습만 보여줬고, 이후 포워드인 앨버트 화이트가 영입되면서 더욱 존재감이 희미해져갔다.[20] 전주 KCC get: 정훈, 김영만 배길태 ↔ 원주 동부 get: 표명일, 변청운, 백주익[21] 정훈과의 트레이드로 원주 동부에 합류한 표명일은 팀의 빈자리를 메우며 다음 시즌(2007-08) 팀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었고, 심지어 같이 이적했던 변청운마저 키 식스맨으로 활약했다. 반면 정훈과 함께 전주 KCC에 합류한 김영만, 배길태는 시즌이 끝나고 곧장 은퇴했다.(정확히 말하면 김영만은 모교인 중앙대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고 시즌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은퇴를 결정하고 은퇴식을 치렀다.)[22] 허재 감독은 훗날 강병현, 하승진이라는 두 명의 대형 신인을 지도하게 되는데 성격이 여리고 자유분방한 하승진은 자유투 하나만 실패해도 괜찮아를 목청껏 외쳐주고 자신과 공교롭게도 포지션이 같은 강병현에겐 폭풍 잔소리를 해 강병현이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했다(...). 물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허재 감독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 근데 그것을 매 경기마다 들었던 정훈은 어떻게 되었겠는가.[23] 바로 직후에 열리는 2001 상하이 아시아선수권 우승멤버들이었다.[24] 당시 이규섭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대체선수로 선발되었다.[25] 대표팀이 중국에 더블스코어급으로 참패했던 4강전 가비지타임에 잠깐 출전해 쑨웨(G,206cm)를 상대로 한차례 위력적인 블록을 보여준게 끝!이었다.[26] 당시 2006 도하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선발한 18인의 예비로스터 개념의 대표팀이었다.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펼치던 8월, 에어콘도 안나오는 잠실실내체육관(서울 삼성 썬더스 홈구장)에서 5일간 4경기를 연속으로 치러야 하다 보니 선수단을 최대한 많이 구성했었다.[27] 80년대 초반 태생 90년대 중후반 학창 시절을 보낸 선수들 절대다수는 바로 페니와 윤대협이 가지는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장신 가드 포지션 선수가 직접 볼을 운반하고 득점이 필요하거나 클러치 상황에서 승부를 가르는 모습은 분명 마이클 조던과 또다른 모습으로 당시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데 직접 농구부에 속한 학생들은 더욱 이런 플레이에 반했을 것이다.미국 역시 비슷한 세대인 르브론 제임스, 트레이시 맥그레디역시 애초에 우상 선수가 바로 페니였고 실제 데뷔 전 기사나 인터뷰보면 지금도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28] 이건 사실과 좀 다르다. 외국인선수의 수준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한 게 2004년 자유계약 제도로 바뀌면서인데, 서장훈은 04-05시즌 전시즌과 비슷한 22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크리스 윌리엄스, 단테 존스같은 선수들이 뛰던 05-06시즌엔 19점 7.5리바운드, 피트 마이클이 상륙한 06-07시즌에는 16.3점을 기록했다. 또한 드래프트 제도로 돌아간 07-08시즌엔 16.3점을 기록했다. 즉, 서장훈은 팀 사정(06시즌에 빠른 농구를 추구한 삼성)이나 노쇠화(74년생)에 따라 득점기록이 하락했을 뿐, 외국인 수준 때문에 롤플레이어로 전락한게 아니다. 그나마 저 기록도 서장훈치고 떨어진거지 33세이던 06시즌 기록이 28세로 전성기를 달리던 김주성보다 더 좋다. 물론 김주성은 수비력이 더 뛰어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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