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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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 貞熹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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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조 왕대비
자성왕대비 | 慈聖王大妃


조선 성종조 대왕대비
자성대왕대비 | 慈聖大王大妃



파일:남양주_광릉_정자각 문화재청.jpg

광릉 전경
출생
1418년 12월 23일(음력 11월 11일)
조선 충청도 홍주목
(現 충청남도 홍성군)
사망
1483년 5월 15일(음력 3월 30일)
(향년 64세)
조선 충청도 온양군 행궁
(現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
능묘
광릉(光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455년 8월 3일 ~ 1468년 10월 1일
조선 왕대비
1468년 10월 1일 ~ 1470년 1월 9일
조선 대왕대비
1470년 1월 9일 ~ 1483년 5월 15일
조선 대왕대비 | 조선 국왕 수렴청정
1470년 1월 9일 ~ 1476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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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파평 윤씨
부모
부친 파평부원군 윤번
(坡平府院君 尹璠, 1384 ~ 1448)
모친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
(興寧府大夫人 仁川 李氏, 1383 ~1456)
형제자매
3남 7녀 중 7녀[1]
배우자
세조
자녀
2남 1녀 (2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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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 ~ 1457)[1]
장녀 - 의숙공주(懿淑公主, 1441 ~ 1477)
차녀 - 요절
차남 - 예종(睿宗, 1450 ~ 1469)

종교
불교
봉작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
전호
태경전(泰慶殿)
존호
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
(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
시호
정희왕후(貞熹王后)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가족 관계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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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사전 – 조선의 완성을 꿈꾸다, 철의 여인 정희왕후〉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왕비이며 세종대왕소헌왕후의 둘째 며느리. 덕종, 예종의 어머니이자, 월산대군성종, 제안대군의 할머니, 소혜왕후, 장순왕후, 안순왕후시어머니다. 또한 연산군중종은 정희왕후의 증손자이다. 파평 윤씨 윤번의 딸로 충청남도 출신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여성이라서[1] 서적이나 사극에서 '정희대비'라고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대비 시절이라면 공식 존호인 '자성대비(慈聖大妃)'가 올바른 표현이다.


2. 생애[편집]


처음에는 그냥 대군이었던 수양대군의 아내로 시집왔다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후 조카인 단종왕위를 찬탈하여 왕이 되면서 부부인에서 왕비로 크게 출세한 인물이다. 상궁들이 자신의 언니를 보러 왔다가 우연히 본 여동생이 더 낫다고 여겨서 배필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부모인 세종소헌왕후한테는 포악함과 후일 궁녀와의 동성애 문제로 세자빈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를 연일 일으키며 골치를 썩히던 맏며느리 순빈 봉씨와는 달리, 몸가짐이 바르고 매우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총애를 받았는데, 특히 도원군을 출산할 시기가 다가오자 전례를 깨고 대궐에서 출산할 수 있도록 특혜를 직접 베풀었을 정도로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남편인 세조 역시도 그녀를 매우 아꼈다고 하며[2], 슬하에 덕종(의경세자), 의숙공주, 예종 등 자녀가 3명밖에 없었지만 금슬은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세 자녀가 전부 자신보다 먼저 사망했다.[3]

비록 남편명분없는 쿠데타가 성공했기 때문이지만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인물로, 예종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한명회 및 여러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잘산군국왕으로 즉위시켰다고 한다. 그 당시 예종의 원자 제안대군은 나이가 4세로 너무 어렸고,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은 병약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여러 정황상 잘산군한명회의 사위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건 왕위를 뒷받침 해줄 세력이 불안하다면 권신 한명회를 끌어들이는 것이 더 낫다 여긴 듯 하다.

처음 신하들이 수렴청정을 부탁하자 자신보다는 을 아는 며느리 수빈이 더 낫지 않냐고 거절한 기록이 있는데, 정말 한문을 몰랐다고 볼 여지도 있으나 겸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수렴청정을 하는 방식은, 직접 나와서 한 게 아니라 성종이 자신을 직접 찾아와 의논해서 결정하는 방식[4]이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활약하던 시기에 자신의 남편벌인 일을 대강 정리하고[5], 손자 성종의 정통성에 신경을 써서 아들으로 추증하고(덕종), 의경세자빈 한씨예종보다 지위를 더 높게 올려줬는데 그 정도는 해 둬야 막 오른 국왕 성종정통성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 듯 하다.

성종이 20세가 될 때까지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성종은 15세를 넘겨가면서 대다수의 직무를 스스로 처리했다고 하는 걸 보면, 형식적으로 수렴만 하고 실제로는 성종이 거의 다 처리했을 듯 하다. 정말 중요한 일만 할머니였던 자성대왕대비와 의논해서 결정한 듯하다.

조기에 넘겨주지 못한 것은 성종이 15세쯤 되던 시기에 한명회의 딸이었던 중전 한씨가 죽어서 국상 중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지 몰라서였던 듯 하다. 한마디로 안정된 상태에서 넘겨주기 위해서 일부러 미룬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높은 권력을 누리던 인물은 하나하나 사라져갔고 때가 돼서야 성종에게 넘겨줬다. 처음 수렴청정을 거두는 거라서 그런지 처음 거둘 때 반대도 많았던 모양. 그 이후로는 정사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노후를 보내던 중 1483년(성종 14년) 온양행궁에서 온천욕을 한 뒤 독감을 얻어 얼마안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편집]


  • 윗동서인 현덕왕후와는 같은 홍주 출신에 태어난 해도 1418년으로 같다. 현덕왕후는 1418년 3월 홍주 합덕 출신, 정희왕후는 1418년 11월 홍주목 출신. 조선왕조의 왕비들 중 홍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 두 명 뿐인데, 바로 손위-손아래 동서관계이면서 나이에 고향까지 같았으나 마지막 모습은 반대가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 드라마에서는 보통 며느리 인수대비와 갈등 관계인 손자며느리 폐비 윤씨를 옹호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내지까지 내리며 폐비 윤씨폐출사사를 적극 도왔다.[6][7] 하지만 인수대비와 다르게 증손자 연산군이 즉위하기 전에 먼저 사망해서 패륜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았다.

  • 자신의 친정인 파평 윤씨 가문만을 편들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그 예가 자기 족친이자 손자며느리 정현왕후[8]의 친정아버지인 윤호를 국문한 것.


4. 대중매체에서[편집]


세조부터 성종까지 사극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는 사건들이 즐비한 시기에 살았던 덕에 사극에 간간히 나오는 편. 보통 세조의 아내보다는 인수대비의 시어머니이자 성종의 할머니, 왕실 최고 어른의 포지션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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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비〉의 정희왕후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한혜숙이 연기했다. 손자인 자을산군의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야심만만한 며느리 인수대비와의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정치적인 모습보다는 단아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일찍 부모를 잃은 시조카에게 다정했고 남편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단종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며 두 아들을 모두 앞세우는 비극을 겪는 인물이다. 사육신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중전의 신분으로 대역죄인인 그들을 위해 불공을 올리는 장면까지 묘사될 정도. 드라마 자체가 대하사극이었던 관계로 긴 시간 동안 서서히 늙어가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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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정희왕후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배우 양미경이 연기했다. 전체적으로 기쎈 정치인의 면모보다는 자애로운 시어머니, 할머니, 시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수렴청정의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손자며느리 폐비 윤씨의 죽음을 슬퍼하다 쓰러져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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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의 정희왕후

  •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배우 김서라[11]가 연기했다. 계유정난 전에는 자신도 남편인 수양대군만큼이나 야심이 있어서 남편을 으로 만들기 위해 집안을 단속하는가 하면 딸인 세령에게도 냉정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줘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다. 하지만 막상 남편이 왕위에 오른 후 김승유를 죽이기 위해 세령조차 노비로 강등시키고 미끼로 사용하는 등 폭주하는 모습을 보이자 남편에게 맞서는가 하면 남편 몰래 세령과 김승유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빼돌려 조용히 살게 해준다. 결국 마지막 회에서 노년의 세조가 형수님의 원혼을 보고 기가 허해졌는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세령 부부를 우연히 보고 정희왕후에게 "그들을 살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며 훈훈하게 마무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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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의 정희왕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전 부부인 시절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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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대 대왕대비가 된 〈인수대비〉의 정희왕후 모습이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김미숙[13]이 연기했다. 전체적으로 야심도 있고 정치 감각도 있는 여장부의 모습과 계유정난 직전의 부부인 시절부터 말년의 자성대왕대비 시절까지의 정희왕후를 훌륭히 그려냈다. 특히 노년에 병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 한씨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으며 권력 게임+고부갈등을 긴장감있게 보여주었다. 중간중간 한자를 아는 똑똑한 인수대비에게 은근한 굴욕을 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같은 작가의 전작인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의 정희왕후가 외적으로 강단있는 정치인의 모습보다는 단아하고 부드러운 어마니의 분위기를 많이 풍겼던 반면에 <인수대비>에서의 정희왕후는 상대적으로 기가 센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특히 시아버지 세종대왕후궁이자 단종을 돌봐준 인물인 혜빈 양씨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왕과 비>에서는 겉으로나마 혜빈 양씨를 깍듯이 대하지만[14] <인수대비>에서는 혜빈 양씨를 대놓고 무시한다.[15] 매우 늦은 나이에 출산한 해양대군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대단해 계유정난 이후에도 장남인 의경세자를 제치고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어하며, 인수대비를 노골적으로 견제하 것도 해양대군이 태어나고 나서부터였다. 극 초반에는 엄격한 시어머니와 정치적 내조를 통해 남편을 돕는 강인한 아내로서의 모습이 그려졌으며 세조 사후 예종 시기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왕실과 친정 파평 윤씨 가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큰며느리 인수대비가 파평 윤씨 일문의 비리가 담긴 장부를 들이밀며 정계 은퇴를 강요하면서 마지막 갈등이 폭발하고 결국 굴복하여 은퇴한 후에는 극 초반과 같이 화해 모드로 돌아서다가 손주며느리인 폐비 윤씨의 사사 소식을 들으며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회고하며 사망하는 것으로 극에서 하차했다.


5. 가족 관계[편집]


  • 시조부 : 조선 제3대 임금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
  • 시조모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 시부 : 조선 제4대 임금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
    • 시모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

  • 남편 : 조선 제7대 임금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 장남 : 추존 덕종(德宗, 1438~1457)
    • 맏며느리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 : 인수대비(仁粹大妃)
      • 손자 : 월산대군(月山大君,1454~1488)
      • 손부 :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1455~1506)
      • 손녀 : 명숙공주(明淑公主 1455~1482)
      • 부마 : 당양군 소이공 홍상(唐陽君 昭夷公 洪常, 1457~1513)
      • 손자 : 조선 제9대 임금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5)
    • 장녀 : 의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
    • 차남 : 조선 제8대 임금 예종(睿宗, 1450~1469, 재위 1468~1469)
    • 며느리 :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
    • 손자 : 인성대군(仁城大君, 1461~1463)
    • 며느리 :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1498)
    • 손녀 : 현숙공주(顯肅公主, 1464~1502)
    • 손자 :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
    • 손녀 : 혜순공주(惠順公主, 1468~1469)


6. 관련 문서[편집]


[1] 어찌보면 '만약 소헌왕후가 실제 역사보다 오래 살고 더 나아가 단종이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게 된 뒤에도 얼마 동안 계속 살아있었다면?' 의 좋은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단종은 할머니인 소헌왕후와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모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숙부 수양대군을 견제할 사람이 없어져서 결국 계유정난을 막지 못하고 무서워서 왕위를 반강제적으로 내주고 상왕이 되었다. 만약 성종의 즉위 초기 내지는 그 이전에 정희왕후와 소혜왕후 모두 일찍 죽었다면 성종단종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왕권을 위협받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성종은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던 탓에 정통성 자체는 형인 월산대군보다 약했으며 이 점에서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던 단종과는 대조적이므로, 정희왕후와 소혜왕후가 일찍 사망했을 경우 성종이 즉위 초기에 받게 될 위협은 단종보다도 훨씬 컸을 것이다.[2] 세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세조는 국정을 운영할 때 대신들 앞에서 종종 "이 사안에 대한 중궁의 의견은 이러한데, 대신들이 보기엔 어떠시오?"라고 물어봐가면서 정희왕후의 의견을 국정에도 반영하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인의 배우자였던 윤씨를 어느정도 정치적 파트너로 우대를 해준 듯.[3] 반대로 후궁 근빈 박씨 소생의 서자들인 덕원군창원군 형제는 무난히 20대를 넘기며 장수했다.[4] 실록에는 품의라고 표현.[5] 단종정순왕후에게 매달 을 지급하거나 문종의 유일한 외손자이자 (단종의 친누나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당시 정미수대역죄인의 아들이어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기 때문.[6] 다만, 폐비 윤씨를 원래 좋게 보았던만큼 사사까지 적극 도왔을지는 의문.[7] 폐비 윤씨 항목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음이야"라고 까지 했다고 한다.[8]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에 이어 성종이 3번째로 맞이한 왕비. 진성대군의 어머니.[9]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고증에 맞게 가체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비녀가 보이도록 같이 꽂혀 있다. 고증과 복식미 모두를 잡으려는 시도 같지만 현실은 둘 다 놓치고 방영 당시에도 "괴랄한 복장"이라며 대차게 까였었다.[10] SBS는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 때에도 문정왕후의 대왕대비 시절 문정대비라고 넣은 적이 있다. 성렬대비라고 해야 맞다. 정희왕후의 경우 왕대비 및 대왕대비 시절 자성대비라는 존호로 불렸기때문에, 원래 자막에는 자성대비라고 넣어야 맞다. 여인천하왕과 나 둘 다 같은 감독이 연출한 사극이기때문에 동일한 자막오류가 일어난 듯.[11]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한명회의 부인 역을 맡은 바 있다.[12] 원래 세조 연간이면 당연히 가체를 쓰고 나오는게 맞는 고증이지만 이 드라마는 가체 대신 비녀와 첩지를 하고 나왔다. 아마도 촬영시 배우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미적 아름다움을 최대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듯하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색채의 한복과 복식을 보여주었다.[13] 놀라운 것은 〈인수대비〉가 김미숙의 첫 사극 연기였다는 점이다! 2004년 <토지> 리메이크 판에서 주인공 최서희의 할머니 윤씨 부인 역을 맡은 적이 있지만 동학농민운동 끝무렵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극으로 보기에는 애매하다.[14] 물론 혜빈 양씨가 남편 수양대군의 이다 보니 마음 속으로는 꺼린다.[15] <왕과 비>에서는 양녕대군이 동생의 인 혜빈 양씨를 대놓고 멸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정희왕후한테 옮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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