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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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葛均
181년 이후[1]~?
1. 개요
4.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자 제갈규의 막내아들로 제갈근제갈량의 아우.[2] 서주 낭야국 양도현 사람.

삼형제 중 막내로 정사에서든 삼국지연의에서든 큰 활약을 하는 두 형들과는 달리 이야기의 전개 속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그래도 오나라 최고의 관료 중 한 명인 큰형촉나라의 재상 작은형을 비교 대상으로 삼으니 초라해 보이는 거지, 실상은 이 양반도 무시 못하는 고위직이었다.[3]


2. 정사[편집]


제갈균도 촉한에 출사했고 장수교위(長水校尉)의 벼슬까지 올랐다고 나온다. 제갈량이 제갈균에게 집과 밭을 맡긴다는 말도 연의에만 있을 뿐 정사엔 없다.

첨언하자면, 장수교위는 후한 말의 관제로 따지면 경찰청 겸 수도방위사령부인 북군의 주력, 오교위의 하나다. 녹봉도 비이천석으로 태수의 이천석 바로 아래 품계다. 결코 한직은 아니다. 그러나 형들의 관직이 대장군, 승상인지라 돋보이지 않는다. 요즘으로 치면 큰형이 국방부 장관이고 작은형이 국무총리라서 수방사령관인 막내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격.

청나라 시대의 제갈충무후문집(諸葛忠武侯文集) 인용 제갈씨보(諸葛氏譜)에 따르면 제갈균의 부인은 남양 사람 임씨(林氏)로 제갈량이 직접 맺어주었고 제갈망(諸葛望)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다만 너무 후세의 기록이라서 신빙성은 불명.


3. 연의[편집]


유비삼고초려의 예로 제갈량이 은거하며 지내는 초려를 두 번째로 찾아왔을 때, 제갈량에 앞서 유비를 맞아들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형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애매한 대답을 함으로써, 유비로 하여금 초려를 세 번째로 찾아오도록 하였다.

제갈량이 유비의 설득에 못이겨 초당을 떠나 출사할 때, 제갈량으로부터 "내가 을 이루고 이 초려로 되돌아 올때까지 집과 밭을 잘 돌보도록 하라"라는 분부를 받았고, 제갈균 역시 "예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했으나, 제갈량은 결국 초당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4.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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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갈량의 동생이니 그의 생년인 181년보다 늦게 출생한 것은 분명하다.[2] 이복형제일 가능성이 있다. 제갈근이 어려서 친모를 잃었고 계모를 효성으로 섬겼다는 기록, 제갈량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는 기록, 손권이 제갈근과 제갈량을 동복형제라고 굳이 콕 집어 표현한 것이 제갈균은 계모 소생의 이복동생일 수도 있는 것. 제갈근과 제갈량도 7살이나 차이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누이가 2명 더 있다. 즉 제갈량은 형 하나 누나 둘이 있는 넷째이며, 첫째와 넷째의 나이 차이면 7살 차는 그리 많은 게 아니다. 그러나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제갈량과 제갈균을 동복형제로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나라가 삼국 중 그래도 가문 족벌 문화가 가장 덜한게 촉한이기는 하다.[3] 하지만 오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출세한 제갈근과 달리 형이 하필 촉한의 최고 권력자였던 제갈량이라 진짜 후광없이 본인 능력으로만 저기까지 올라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식의 평가는 제갈균 뿐만 아니라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에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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