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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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2. 청년기
3. 유비를 따르다
4. 촉한의 국력을 강화시키다
8. 묘소
9. 관련 문서



1. 출생[편집]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현 산둥성 린이시 이난현) 출신으로 다른 제갈가문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7살 연상의 형 제갈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나 2명, 동생 제갈균이 있다. 기록을 분석하면 제갈근은 친형제고 제갈균은 이복형제라고 추정할 수 있는 정황이 존재하나, 상반되는 기록 또한 있어서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사서에 따르면 한에서 사예교위를 지낸 제갈풍의 후손으로 부친 제갈규는 한 말기 연주 태산군에서 군승을 지냈고 제갈량이 어릴 때 사망했다. 이에 숙부 제갈현이 제갈량 형제들을 도맡았다. 이 무렵에 원술흉노 출신 어부라흑산적의 지원을 받고 조조의 근거지인 진류까지 진격했지만 광정 전투에 패하면서 회남으로 달아났다.

한편 제갈현은 서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원술이 회남으로 이주한 시기에 같이 제갈씨 일족을 이끌고 당시 양주(揚州) 지역의 예장으로 이주해서 제갈현은 예장 태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기록은 많은 면에서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는데, 서주에서의 학살이 현대에 와 부각되면서 제갈씨 이주의 원인을 조조와 잇는 작가들이 나타난 것이다.[1] 현대에 이러한 관점은 마치 사실처럼 퍼져 있으나, 이는 창작으로 엄밀한 증거는 없다. 다만 아래에 서술하듯 서주에 대한 조조의 위협으로 인해 제갈량의 가문이 고향을 떠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정황적 증거는 명확한 편.

제갈씨의 이주 시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록을 대조해볼 필요가 있다. 제갈현은 이주하면서 해당 지역의 군벌과 손을 잡았는데, 정확히 어떤 군벌과 협력했는지는 사서에 따라 기록이 나뉜다. 정사 삼국지는 원술에 의해 임명된 이후 유표로 다시 건너가고, 헌제춘추는 유표만을 기록했다.[2]

예장의 기존 태수의 사망으로 원술은 제갈현을 예장 태수로 임명했는데. 문제는 이때 조정에서도 예장 태수로 주호를 임명했다. 이에 주호는 원술에게 임명된 제갈현과 자리를 두고 싸우게 되었는데. 이에 유요착융을 보내 주호를 지원하여 제갈현을 공격했다. 여기서 제갈현은 패하여 혹은 물러나 헌제춘추에 의하면 서성에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서성이 형주 위흥에 속한 현이므로 정사 삼국지와 헌제춘추를 모두 존중한다면 이 시점에서야 유표에게 의탁했던 것 같다. 여기서 주호를 지원한 착융이 문제인데, 착융은 원래 서주에서 도겸의 세력에 속해 있었으나 조조가 도겸을 공격 할때 조조 군의 학살을 피해 남하하여 유요에게 의지하였다. 제갈현과 분쟁에서 착융은 유요세력으로서 참전했으므로 유요와 착융이 제갈현과 예주태수 자리를 놓고 싸운 것은 유요가 착융을 받아들인 후, 즉 서주대학살 이후 혹은 도중이다. 또한 195년에 착융이 예주에서 수성을 한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로보아 이때는 예주가 완전히 제갈현과 분쟁이 종료되고, 유요세력권에 속한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제갈량이 서주를 떠난 시기와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제갈현의 예주분쟁은 이 이전 즉, 193년에서 195년 사이라 봐야 할 것이다. 소위 서주 대학살이라고 하는 조조의 침공은 193년 과 194년에 행해지는데, 이 때 마침 시기가 일치하기는 한다. 정확히 학살을 피해 피난가지는 않았더라도 조조의 위협 등 서주가 온갖 난에 시달리자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 정도는 생각할 수 있을 듯. 실제로 제갈근 또한 난을 피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는 언급을 하기는 했다.

제갈현이 사망한 이후 제갈씨 일족은 형주 군벌 유표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한편 형 제갈근은 제갈현을 따르지 않고 양주로 이주하였다.

2. 청년기[편집]


형주를 장악한 군벌인 유표는 군사적으로는 무능했으나 내정에 뛰어나 형주를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였다. 이 시기 형주는 수많은 명사들과 학자들이 양성되었는데, 제갈량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났다. 제갈량의 누이들이 형주 대호족과 혼인하게 되면서 형주 호족들과 인맥을 쌓게 된다. 제갈현이 죽은 뒤 청년이 된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했다.

제갈량은 신장 8척에 늘 자신을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기주 박릉군 출신의 최주평, 예주 영천군 출신의 서서(자 원직)만이 그의 말에 동의할 뿐이었다.[3]

젊은 시절 제갈량의 벗들인 석도, 서서, 맹건 등의 선비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정독해가며 세세한 구절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제갈량은 책의 큰 흐름만을 살펴 공부했다고 한다.[4]

3. 유비를 따르다[편집]


양양기에 따르면 수경선생 사마휘는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유비가 그에게 현 정세에 대해 질문하자 "이를 아는 건 시무를 아는 준걸 뿐이며 와룡(=복룡)과 봉추인 제갈량과 방통이 바로 그들이다."라고 대답하며 은근히 제갈량과 방통을 높여 소개했다. 제갈량과 방통은 모두 사마휘 휘하의 제자였는데, 이는 당대에 유행하던 인물평에 기반한 고용 방식에 해당한다. 사마휘 아래의 다른 제자들 중 일부도 유비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하였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과정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정사 삼국지는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 등용하였다고 적었고, 위략구주춘추에서는 모두 제갈량이 먼저 찾아가 유비에게 계책을 말하여 등용되었다고 적었다. 보통은 동시대인인 진수의 기록과 더불어 제갈량 본인도 출사표에서 이 삼고초려를 언급하기 때문에 전자를 사실로 본다. 이 일화에서 삼고초려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또한 유비에게 제갈량이 말한 전략을 융중대, 혹은 초려대라고 한다.

한실(漢室)이 무너지고 간신이 천명을 훔쳐 주상께서 몽진 길에 오르게 되었소. 나는 스스로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했으나 지모가 얕고 부족해 실패하고 좌절하다 오늘에 이르렀소. 그러나 뜻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으니, 장차 어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겠소?

유비의 질문


동탁이 나타난 후에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 주(州)를 타넘고 군(郡)을 연결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하면 명성은 미약하고 그 군사는 적었으나 마침내 원소를 이겨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천시(天時) 만이 아니라 또한 사람의 꾀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이미 백만 무리를 가졌고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니(협천자이령제후, 挾天子以令諸侯) 이는 진실로 그와 창끝으로 싸워 다툴 수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하여 차지한지 이미 3대를 거쳤으며, 나라가 험준한 곳에 있고 백성이 귀부하며 어질고 능력 있는자가 그를 위하여 쓰이니 이로써 그와 더불어 도와줄 사람으로 삼아야지 도모해서는 안됩니다.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 면수에 의지해있고 이로움은 남해(南海)까지 다하며, 동쪽으로 오회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파와 촉과 통하니 이는 전쟁하기에 적당한 나라이며 그곳의 주군은 지킬 능력이 없어, 이것은 거의 하늘이 장군에게 보탬이 되어 준 것이니 장군은 취할 뜻이 있으십니까?

익주는 험준한 요새이고 비옥한 들판이 1천리이며 천부의 토지입니다. 고조께서 이에 의지해 황제의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유장은 어리석고 약하며, 장로는 북쪽에 있으면서, 민은국부(民殷國富, 백성은 넉넉하고 나라는 부유함)하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구휼함을 모르니, 지혜롭고 능력 있는 선비들은 개명한 주군을 얻으려고 생각합니다.

장군께서는 황실의 후예이며 신의는 사해에 드러났으니, 영웅들을 총괄하여 관할하며 현인 그리워하는 것을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 하십니다. 만약 형주, 익주를 타넘어 차지해 그 험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화목하고 밖으로는 손권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안으로는 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秦川, 진령산맥 북쪽의 위수(渭水)유역 평원 지대. 지난날 이곳이 진(秦)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출병하신다면, 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霸業)이 이루어지고 한실(漢室)이 흥할 것입니다.

제갈량, 융중대(隆中對), 초려대(草廬對)


이를 유비가 옳은 말이라고 칭송하며 두 사람은 군신관계가 된다. 정사에서는 그냥 세 번만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묘사하면 소설로서는 재미가 없으므로 연의에선 이 삼고초려 에피소드가 각색된다.

유비와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져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다독이자 불평을 멈췄다. 이것이 고사성어 수어지교의 유래다.

한편 형주의 주인인 유표는 채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작은 아들인 유종을 사랑하고 맏아들인 유기를 홀대했다. 유기는 제갈량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제갈량은 대답을 회피했다. 유기가 누각으로 제갈량을 불러 사다리를 치우고 조언을 강요하자, 제갈량은 유표의 근처가 아니라 바깥에 머무는 쪽이 안전하다고 조언한다. 때마침 황조가 죽자 유기는 밖으로 나가 강하태수가 되었다.

유표가 사망하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당황한 유비는 번성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했고 이 피난 행렬에 제갈량도 동행하였다. 제갈량은 양양을 지날 때 유비에게 유종을 공격하여 형주를 얻으라 권했으나, 유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 당시 공성전이 대단히 오랜 시간동안 이뤄지는 어려운 과정임을 감안하면, 유비가 제갈량의 조언을 따랐더라도 유표가 남긴 거성인 양양을 완의 조조군이 당도하기 전까지 함락시켰을 가능성은 낮다.

유비의 피난행렬은 강하태수 유기가 머무는 하구에 도착했고,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의 결성과정에 대해서는 사서별로 차이가 크다.

  • 촉서 제갈량전
제갈량이 주도적으로 손권과의 동맹을 주장하고, 손권을 직접 설득하여 동맹을 체결했다.

  • 촉서 선주전
유비는 하구에 도달한 이후,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동맹을 체결했다.
  • 오서 노숙전
노숙은 유표가 죽었을 무렵 이미 유비와의 동맹을 주장하였다. 노숙은 당양에서 유비를 만나 동맹을 주장했다. 이에 동의한 유비는 하구에 도착한 이후 제갈량을 사신으로 보내 공식적으로 동맹이 체결되었다. 제갈량의 설득 과정은 전하지 않는다. 손권은 노숙을 보내기 전부터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 오서 오주전
손권이 유비에게 노숙을 보내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하구에 주둔하던 유비가 제갈량을 보내 공식적으로 동맹이 체결되었다. 제갈량의 설득 과정은 전하지 않는다. 손권은 노숙을 보내기 전부터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 오서 주유전
노숙이 당양에서 유비와 만나 상의를 마쳤다. 하구에 주둔할 무렵 제갈량을 보내 공식적으로 동맹이 체결되었다. 제갈량의 설득 과정은 전하지 않는다. 손권은 노숙을 보내기 전부터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 강표전
손권이 유비에게 노숙을 보내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본래 창오태수 오거에게 의탁하려던 유비는 이에 손권과의 동맹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이하는 오수 오주전과 같다. 제갈량의 설득 과정은 전하지 않는다. 손권은 노숙을 보내기 전부터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 건강실록
오주전과 거의 같으나, 순서에 약간 차이가 없다. 제갈량의 설득 과정은 전하지 않는다. 손권은 노숙을 보내기 전부터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따라서 현재로서 제갈량전에 적힌 영웅적인 웅변-망설이던 손권의 마음을 돌리고, 동맹과 적벽대전을 성사시킨-이 실존했다는 근거는 거의 없다. 이는 오로지 제갈량전에만 나오며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전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사자로 동오에 간 데까지는 사실이나, 동맹이나 조위와의 결전은 제갈량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손오와 유비 사이에 이미 정해져 있던 사안으로 보인다.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어 조조와의 일전을 준비하였고,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찔렀다. 유비는 이때 형남 4군을 할양받았다. 제갈량은 군사중랑장이라는 지위를 받고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보급했다. 원자의 기록에 따르면 장소가 제갈량을 손권에게 추천했지만, 제갈량이 손권은 자신을 쓰지 못할 것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제갈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은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을 떠보며 제갈량을 영입하려 했으나, 제갈근이 거절하여 무마되었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서 유장을 공격하자, 관우와 함께 형주를 맡다가 장비, 조운과 함께 유비를 지원하러 북상하여 성도 포위에 참여했다. 유장이 항복하자 제갈량은 군사장군에 올라 유비의 벼슬인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서좌장군부사, 署左將軍府事)하였다.

익주 정복 이후로는 유비가 외정을 나갈 때마다 성도를 도맡아 식량과 병사를 공급했으며, 이 역할은 순욱과 유사하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위에 오르자, 유비는 조비를 찬탈자로 규정하고 자신을 한의 황제라고 칭하였다. 보통 이를 촉한의 건국으로 간주한다. 유비가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는 이런 행사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형식적인 겸양과 권유, 그리고 반대파의 실각 혹은 처형이 뒤따랐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에 오르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유비가 황제가 된 이후 승상에 임명된다. 이때 이미 녹상서사, 가절을 겸하였고, 장비가 죽은 이후엔 사례교위까지 겸해 제갈량이 내외조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유선의 나이가 후한 말 기준으로 결코 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런 인사는 상당히 과도했다. 유비가 황제에 오를 무렵 관우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장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었다. 유비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오와의 전쟁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즉위 석 달만에 친정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온전히 전시를 상정한 행보로 보이는데, 이 선택은 촉 정권의 정치구도를 결정짓게 된다.

이릉대전에서의 기록적인 패퇴 이후 병이 깊어진 유비는 성도에 있던 제갈량과 이엄을 불러 탁고대신으로 삼았다. 이엄은 군권을, 제갈량은 행정권을 총괄하였다. 이를 통해 내외조를 모두 장악한 제갈량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장치가 마련되었으나, 이 견제장치는 유비 사후 거의 곧바로 허무하게 부서져 작동하지 않았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유비가 사망할 당시 유언으로 제갈량을 재상의 지위에 올렸다고 하는데, 제갈량은 유비가 황제에 오를 당시 승상에 임명되었고 녹상서사도 겸했으므로 이때 받은 직위가 상국이라는 추론이 있다. 진수의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도 제갈량이 상국의 지위에 올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상국은 단지 승상의 다른 이름으로 취급되었다.

4. 촉한의 국력을 강화시키다[편집]


이릉대전의 대패가 촉한에 안긴 손실과 상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쟁이 종결된 직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는 유비가 없는 촉한을 사실상 없는 나라로 치부하며 동쪽의 손권에게로 공세를 집중했다.

조비의 이런 인식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각이었다. 최대 8만에 달하는 병력과 전국에 널리 명성을 떨치던 건국 황제 유비와 관우, 장비의 사망[5], 그리고 반란 세력의 거병.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국가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거친 시련이 아닐 수가 없다. 지도력이 검증되지 않은 후계자 유선이 황제 지위를 계승한 223년, 사태를 수습할 모든 책무는 무향후에 봉해진 승상 제갈량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나라에서 촉한이 약해진 틈을 타 당장 촉한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조비는 본인을 속인 손권을 목표로 삼았고, 재위기간 동안 총 3번 손권을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한다. 이 덕에 촉한은 침략받지 않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6] 한창 나라 복구하는 도중에 위에서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면 더 골치아팠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제갈량/업적 참고.

5. 남만 정벌[편집]


파일:남중정벌.jpg
제갈량의 남중정벌도

촉한의 정사(政事)는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제갈량은 사신을 보내 손오와 공식적인 동맹관계를 회복하였다. 이릉대전을 기점으로 월수의 수족 고정과 익주(군郡의 이름이다.)의 대호족 옹개, 맹획 등이 남중의 여러 군을 끼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월수는 유비 생전에도 사실상의 독립 세력으로서 사천 분지 내부로 군대를 보내 이엄이 진압할 정도였고, 다른 남중 지역의 경우에도 기존 유촉의 행정력이 명목상의 지배권 이상으로 발휘되었다는 근거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이 참작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월수태수 공록은 아예 월수군으로 가지도 못하고 안정현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보낸 촉군 사람 종사 상기가 군 주부를 잡아 심문을 하자 가뜩이나 불손한 태도를 보인 장가태수 주포가 상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나, 제갈량은 이제 막 대상(大喪)을 치룬 뒤였기에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중 4군 중 가장 크고 인구도 많은 군인 영창군에서는 여개왕항 등의 해당 지역 관리들이 반란에 맞서 충성을 유지했다.

건흥 3년, 225년 봄. 제갈량은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한다. 제갈량은 안상으로부터 수로로 월수로 들어갔으며, 마충을 장가로, 이회는 익주로 보내고, 건위태수 왕사를 익주태수로 삼았다.

월수군의 고정은 모우로부터 정책, 비수에 이르기까지 망루를 많이 세워두었는데 제갈량은 고정의 군대가 모이길 기다려 그들이 모이자 한꺼번에 토벌하여 비수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고정을 참하고 마충은 장가군을 격파하고 이회는 남중의 이족을 격파했다. 한편 고정의 부곡이 옹개를 살해하자 맹획이 이어받았다. 5월에 제갈량은 노수를 건너 익주를 정벌하고 맹획을 격파한다. 이 과정에서 맹획을 일곱번 잡아 일곱번 놓아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칠종칠금)

가을에 마침내 4군을 평정해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고쳐 이회를 태수로 하고 안한장군과 교주자사를 더하고 미현으로 치소를 옮겼다. 당시 오나라가 교주자사를 둬 교주를 지배했으므로 이는 외교적인 문제 소지가 있는 행동인데, 오나라가 별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으며 이는 오나라가 익주자사를 두었음에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던 촉의 경우와 같다. 이를 볼 때 이회는 교주와 익주 사이의 소유권이 모호한 취락들에 대한 통제를 시도했으리라 보인다. 이 교주자사직은 229년에 폐지된다. 또한 건녕, 월수을 설치하고 여개를 태수로 삼고 건녕, 장가를 나누어 흥고군을 설치했고 마충을 장가태수로 삼았다.

남중의 경졸(강병), 청강 만여 가를 촉으로 옮겨 5부로 삼아 당할 자가 없는 정예로 육성하고 이를 비군(飛軍)이라고 이름했다. 연약한 자들은 현지 호족의 부곡으로 삼고 오부도위를 설치하였으며 이를 오자(五子)라 하여 남쪽 사람들이 이를 사성오자라 했다. 이민족들이 대호족과 부호를 따르지 않았는데 금과 비단을 내어 이들의 부곡으로 삼도록 권하고 부곡을 많이 얻은 이들은 관직을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이민족들이 재화를 탐하여 촉한에 점점 복속하였고 이족과 한족이 어우러져 부곡을 이루었다.

제갈량은 남중의 준걸 건녕의 찬습, 주제의 맹염맹획을 거두어 관속으로 삼았다. 찬습은 관직이 영군에 이르렀고 맹염은 보한장군, 맹획은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남중의 금, 은, 단, 칠, 밭가는 소, 전마가 군국의 비용으로 생산되어 촉한을 부유하게 했으며 도독은 항상 신중한 이들을 기용하였다. 이 공으로 제갈량은 부월(鈇鉞) 1구(具), 호분(虎賁, 숙위군) 60인, 고취(鼓吹, 취주악대) 1부, 곡개(曲蓋, 대가 굽은 일산) 하나, 우보(羽葆, 새깃으로 장식된 일산)을 하사받았다.

제갈량전이나 화양국지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으며 기록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이들만을 보고 판단하면 원정은 대단한 성공으로 보인다. 화양국지에서는 사실여부가 의문스러운 칠종칠금 일화가 등장하고, 양양기에 이르르면 심지어 '제갈량이 죽기 전까지 남방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적었다. 하지만 이는 실제와 다르다.

  • 4군을 정벌했다는 제갈량전의 기록과 달리, 유비가 죽기 전에도 익주로 군을 보낼 정도로 호전적이었던 독립세력인 월수군은 정복에 실패하였다. 몇몇 외곽 현들이 점령되어 신설된 운남군에 편입되었으나 군의 핵심인 치소 인근에는 접근하지 못했고, 원정 과정에서 월수 태수직을 맡았던 공록은 사망하였다. 월수군은 제갈량 사후 240년에서야 장억에 의해 정복되었다.

  • 제갈량은 남중에 대한 영토화 과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남중의 생산력은 국력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오의 손권이 의욕적으로 산월을 개척해 행정구조를 확립하고 적극적으로 국력에 편입한 반면, 제갈량은 기존 남중 지배층의 지배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형식적인 복속을 받아냈을 뿐 이들에게서 세금과 인력을 걷을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따라서 남중은 명목상 촉의 영토이되, 실제로 영토로서 기능할 능력은 없는 상태에 머물렀다. 이는 현대 학자들이 제갈량의 남중 정벌을 저평가하는 주된 이유이다.

  • 남중에 '관료도, 군대도 남기지 않은' 제갈량의 방침은 그가 남중에서 발을 떼자마자 즉각적인 반란을 유발했다. 이민족 유화주의라는 그럴듯한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촉은 남중을 내강도독을 통하여 군사적으로 지배하였다. 관료에 의한 통치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도독의 통제를 받는 남중은 영토이되 온전한 영토가 아닌 상태로 남았으며 촉의 멸망까지 저항을 유지했다.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반란이 없었다'는 양양기 등의 신격화나 다름없는 서술과는 달리, 남중에서는 제갈량이 군을 북쪽으로 돌리자마자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회는 이를 진압해야만 했다. 촉에게 충성을 유지했던 여개는 이민족 반란으로 사망했다. 233년에는 남중 전반에 걸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중앙에서 마충을 투입한 다음에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중 원정을 서둘러 끝낸 제갈량은 곧바로 유명한 북벌에 매진한다.


6. 제갈량의 북벌[편집]


제갈량은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에 나선다. 북벌의 동기에 대해서는 그냥 '위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라고 출사표 등에 나오는데 제갈량의 전략/전술이나 진태전의 구절을 볼 때 사실은 옹주/양주를 점령하여 촉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제갈량의 목표였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추풍오장원 문서 참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으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장군 사마문왕이 말했다. "옛날 제갈량은 항상 이런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시킬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만한 일이 아니오."


어림에 따르면 제갈무후(제갈량)가 사마선왕(사마의)과 위수 가에서 장차 싸웠는데, 선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일에 임하며, 사람을 보내 무후(제갈량)를 살피게 하였다. 과연 무후는 흰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며,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중군(眾軍)이 모두 그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고 하였다. 선왕(사마의)이 듣고 감탄하여 말했다.

가히 명사라 이를 만하도다!


7. 오장원에 지는 별[편집]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사망한다. 향년 54세. 다음은 당초에 유선에게 올린 유언이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頃)[7]

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8]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리게 하여 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

사마의의 추격도 강유의 기지로 뿌리치고 퇴각과정에서 있었던 위연의 반란도 왕평이 진압한 상황에서 무사히 제갈량의 유해와 북벌군이 성도로 돌아오자 황제 유선은 나라 전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크게 애도하면서 장례식을 준비했다. 유선은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며 슬퍼한다.

"생각건대 그대의 천성은 문무를 겸비하고 밝은 지혜를 갖췄으며, 독실하고 성실하여 탁고의 유조를 받아 몸소 짐을 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난세를 평정할 뜻이 있었다. 이에 육사(六師)를 정돈해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신무(神武)를 혁혁하게 빛내어 위엄을 천하에 떨쳐 계한(季漢,촉한)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큰 공훈과 나란하도다. 어찌 하늘이 보살피지 않아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병을 만나 죽게 되었는가! 짐은 상심하고 서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하여 쇠하지 않게 하려 한다.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후 그에게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9]의 인수와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렸다.

이후 촉한은 곧장 조정의 재편에 들어갔다. 생전에 제갈량이 미리 예고했던 대로 장완이 중요한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상서령(尙書令)에 도호(都護),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승진한 장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승진하며 촉한의 전체적인 군사와 정사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 외에 좌장군 오의가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하여 한중의 수비를 맡았고, 사마의의 추격을 무사히 저지했던 강유는 우감군(右監軍)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부의 요직에 올랐다. 또한 비의는 후군사(後軍師)의 직책을 맡았으나 얼마 후 대장군 녹상서사로 올라간 장완을 대신하여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이 엄격한 통치를 펼쳤음에도 그 동안 그를 원망한 백성들은 없었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사망했을 땐 백성들이 사당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유선이 듣질 않자 길거리에서 제사를 올리고 융이(즉, 주변 이민족 부족들)마저 들판에서 제사를 올려, 결국 한중 면양에 제갈량의 사당을 짓게 했다는 구절이 양양기에 기록되어 있다.[10] 공권력이 오히려 공식적인 추모 행위를 무시했음에도 민간에서 촉한이 망할 때까지 30여년이나 백성들과 이민족들에게 자발적인 경애와 존경을 받았다는 것은, 제갈량의 정치가 촉한 백성들을 위한 정치였으며 그 덕의 민중의 자생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민간 단위의 자발적인 경애와 존경은 이로부터 수십여년 후 서진-성한에서도 이어졌고, 수백년 후 당나라의 서적 만서나 손초의 각무후비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명나라 시기의 유기의 전설에서도 드러나고, 현재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런 존경은 사대부들도 마찬가지로 면양의 이 사당은 후일 위나라의 종회가 촉한의 한중을 공격했을 때도 참배했다고 한다. 게다가 남만에도 제갈량을 기린 장소가 많으며 심지어 제갈량이 물을 떴다는 우물도 있다.

여기서 유선이 사당을 짓지 못하게 했다고 해서 유선이 제갈량을 부정적으로 여긴 것은 당연히 아니다. 유선 역시 제갈량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존중했다. 제갈량이 사망한 직후 이막은 그를 비방하며 제갈량이 사망했으니 이는 경축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자 유선은 극도로 분노하며 그를 감금한 뒤 곧 처형했다. 유선이 비록 현대에 이르기까지 암군으로 까일지언정 최소한 인품 자체는 유순한 사람이었고, 촉한의 풍습도 혹형이 거의 없어 온건한 편이었는데, 그 유선이 제갈량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노발대발하며 사형에 처해버렸다는 건 그가 제갈량을 매우 의지하고 고평가했다는 증거다. 다만, 제갈량의 위상이 황제인 유선 자신을 능가할 정도로 높아서 그에 대한 열렬한 추모가 황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을 정도였기에, 황제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별개로 적절히 견제를 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막의 주장은 이런 정상적인 신권 견제를 넘어서 인간적인 모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유선이 제갈량을 신뢰하고 의지한게 몽땅 쓸모없다는 의미가 된다. 유선으로선 인간적으로도, 군주로서의 위엄과 권력 면에서도 이막이 선을 넘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한편 죄를 지어 유배갔던 이엄은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자신이 속죄할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고 탄식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마찬가지로 시종 거만한 언행을 일삼다 파직당해 쫓겨났던 요립은 눈물을 흘리며 '날 알아볼 인물은 제갈량밖에 없었거늘 그가 죽었으니 난 더 이상 복직될 길은 없게 됐다' 고 슬퍼했다.

한진춘추, 양양기의 저자 습착치는 이런 제갈량의 죽음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옛날 관중(管仲)은 백씨(伯氏)가 가진 병지(騈地)의 식읍 300호를 빼앗았으나, 죽을 때까지도 원망하는 말이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성인께서도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제갈량은 요립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이엄(=이평)은 죽게 되었으니 어찌 단지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에 그치겠는가?

무릇 물이란 지극히 평평한 것이므로 사악한 사람조차도 그곳에서 모범을 찾고, 거울이란 아주 밝게 비추는 것이므로 추한 사람도 화내기를 잊는다. 물과 거울이 사물을 끝까지 다 드러내지만 그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에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에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비방을 면제받는 것이니, 하물며 대인과 군자가 즐겁게 살려는 마음을 품고 긍휼히 여겨 용서하는 덕을 보이며, 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만 사용하고, 형벌도 그들이 스스로 범하였던 죄에만 주어지고, 작위를 줄 때 사사로움을 품지 않으며, 주살하였다고 해도 노여움에서 한 것이 아니니, 천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8. 묘소[편집]


제갈량의 무덤은 오래 전 유비가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참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던 정군산에 있는데, 생전에 제갈량이 미리 유언을 남겨 정해둔 바라고 한다. 제갈량은 무덤의 크기를 관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고, 자신의 시신은 평복으로 염하되 따로 부장품을 넣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늘날에도 혹자들은 정군산 밑에 그가 묻인 무후묘가 따로 있음에도, 정군산 전체를 제갈량의 무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7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있어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한 분위기다. 이곳 안내원은 "무후묘가 1700년이 넘도록 훼손되지 않은 것은 다른 무덤과는 달리 매장품이 없어 도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곳에는 수령 1700년된 측백나무로 무후묘를 지키고 있는데, 묘지 안에는 여기저기에 오래된 측백나무가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제갈량이 54세에 죽어 당시 54그루를 심었는데, 그 중 22그루가 아직도 살아 무덤을 지키고 있다. 이 나무들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중국인들에게는 귀한 국보로 통한다.

제갈량의 무덤에는 봉분 옆에 황과수(黃果樹)라는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제갈량의 아내인 황부인을 상징한다. 거의 전쟁터에 살다시피 한 제갈량과 황부인은 전생에서 부부의 정을 깊이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황부인은 못다 한 부부의 정을 다하기 위해 죽어서 남편의 무덤 옆에 나무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이곳 사람들은 곤경에 빠지거나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지혜의 화신'으로 불리는 제갈량의 묘를 찾아 방법을 강구한다고 한다.

인근 면현 무후사는 중국 전국 각지에 위치한 2천 개가 넘는 제갈량 사당 중 유일하게 촉한 당대에 황제(유선)가 조서를 내려 만든 사당이다. 그런 의미로 ‘천하제일무후사’라고도 불린다. 무후사는 성도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화려하지만, 면현의 무후사는 그보다 50여년 먼저 지어졌다. 현존하는 무후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당은 대문(大門), 이문(二門), 악루(樂樓), 사정(祠亭), 대전(大殿)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전(大殿) 안에는 제갈량의 앉은 상이 안치돼 있고, 좌상의 양측에는 관우의 아들 관흥(關興)과 장비의 아들 장포(張苞)의 입상이 있다. 관흥과 장포의 동상은 무후묘에도 있는 것인데, 이곳에 있는 동상들의 손에 든 칼과 창이 더 크다. 집 밖에서 제갈량을 수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무후사에도 수령 1700년 된 측백나무가 제갈량이 만든 팔진도의 원리에 따라 64그루가 심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16그루만이 살아 무후사를 지키고 있다. 사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청나라 옹정제가 내린 '한승상제갈무향충무후사(漢丞相諸葛武鄕忠武侯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아래 '충심이 하늘을 찌르다'라는 의미의 청 가경제의 ‘충관운소(忠貫雲宵)'라는 편액이 있다. 이곳에 가면 무후사의 방문 후기를 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클릭해보기 바란다.

9. 관련 문서[편집]


[1] 참고로 제갈량이 유년시절을 보낸 집터와 서주대학살의 원인이 된 조숭의 무덤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도보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이지만 제갈량의 집터는 박물관화 되어서 남아있는 반면 조숭의 무덤은 옛지도에만 남아있을 뿐 현재는 도로를 낀 평지가 되어있다.[2] 최진열 교수는 정사 삼국지가 헌제춘추의 기록을 무시한 부분을 수상하게 생각한다.[3] 촉서 제갈량전[4] 촉서 제갈량전 주석 위략[5] 당시 촉에서 전국에 명성을 떨치던 자들은 이정도가 다로, 당시의 제갈량은 그정도의 명망이 없었다.[6] 단순히 조비가 본인을 속였다는 것만으로 손권을 공격한 것은 아니다. 진령이 가로막고 있어 보급이 힘든 촉한보다는 강을 통해 쉽게 보급할 수 있는 형주와 양주 공략 난이도가 훨씬 낮으며 강릉을 위시한 남군 일대와 한수와 장강이 만나는 하구를 장악한다면 형남과 교주는 손권의 본거지인 장강 하류와 사실상 단절되며 촉한 또한 잠팽과 오한이 공손술을 정벌할 때처럼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순식간에 정벌할 수 있다. 손권 세력을 멸망시키면 언제든지 촉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니 촉한 정벌을 뒤로 미룬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7] 1경은 100무(畝)이고 1무는 약 100평이다. 즉 여기선 약 15만 평의 토지로 헥타르로 환산했을때는 약 49.5 헥타르이다.[8] 수백년 뒤의 기준이기는 하나 북위당나라에서 운영했던 토지제도인 균전제에서 일반 양민 1명에게 주는 토지가 북위 때엔 80무(畝), 당나라 때엔 100무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15경(頃)이란 토지는 꽤 부유한 부농(富農)이나 소규모 지주 정도의 재산으로 보면 적당한 수준. 아무리 시대상을 감안한다 해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던 제갈량의 생전 위치를 생각한다면 청빈하다고 해도 무방한 정도이다.[9] 흔히 제갈량을 두고 서책에 제갈무후(諸葛武侯)라고 쓰여 있는게 이 시호 때문이다.[10] 263년 강유의 참군이었던 상충이 상소를 올려 짓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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