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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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군신 관계
3. 가족 관계
4. 친인척 관계
5. 교우 관계
6. 공적 관계
7. 적대 관계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제갈량의 인간관계를 다루는 문서.


2. 군신 관계[편집]


  • 유비-유선: 제갈량이 주군 유비를 위하여 힘을 다한 헌신적인 충성은 유비가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유선을 섬기어 생애를 일관한 것으로 세상에 유명하다. 그 일은 제갈량이 위를 향하여 북벌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유선에게 헌상한 출사표에 그 충절이 나타나 있다. 또 유비는 거병의 당초부터 유명한 관우장비와의 사이에 의형제에 준하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즉 임협자간에 이루어지는 매우 인격적인 맺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는 개인과 개인과의 사이에 맺어지는 매우 인격적인 종적관계 즉, 주종관계가 사회속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 본 임협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이것은 지식인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관계가 보편적으로 있었다. 즉 "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인정해 준 자로서 제자는 선생에 대하여 아랫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준 윗사람에 대하여 이후 오랫동안 헌신적인 충성을 다하였다. 이를 "문생(門生), 고리(故吏)"의 관계라고 한다. 일류의 지식인인 제갈량의 경우는 유비를 둘러싼 임협적 주종관계와 삼고의 예를 가질 만큼 인격을 인정받은 데 대한 은의감의 혼합상황이 느껴지는데, 이윽고 유비의 사후, 그가 승상으로서 촉한의 유지와 위에 대한 공격에 전심할 때, 촉한에서는 입협적 주종관계보다도 그의 문인으로서의 합리적 통치가 우선되어 간다.[1]


3. 가족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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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부인: 제갈량의 부인이자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 머리는 누렇고 얼굴은 검어 외모는 그리 볼품없으나 총기와 재주는 탁월했다고 한다. 이 결혼을 통해 제갈량은 양양의 상류 귀족층에 진입하였다. 황승언은 황부인의 외모를 폄하하면서도 그 재기만큼은 제갈량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딸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지만 공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2]

  • 제갈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제갈량의 친형. 일곱 살 연상이다. 제갈 형제의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과 제갈균, 그리고 제갈량의 큰 누이와 작은 누이를 데리고 남하할 당시 고향의 전원과 묘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에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된 제갈근이 계모를 모시고 영도에 남아 이들은 13여 년 동안 생이별을 하게 된다. 젊어서 낙양에서 유학했으며 결국 자신도 전란을 피해 계모를 모시고 강동으로 들어가 노숙의 인맥에 편입되어 손권의 막하에 들어가게 된다. 겸허하고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로 장소와 함께 군주 손권의 불 같은 성격을 제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사,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며 오나라의 신하로써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만큼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다.[3] 동생인 제갈량과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한번 만났고 이산가족 상봉, 근이 오의 중신, 량이 촉한의 승상이 되어서도 만났는데 사적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4] 다만 혈연이 혈연인지라 손권에 의해서 대촉 외교에 많이 애용되었다.[5] 이릉대전 당시 제갈량이 유비를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던 것도 제갈근 문제 때문이었음을 고려할 때 마냥 좋게만 작용한 건 아니었지만. 그 형에 그 동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케이스. 두 명 다 충신 중의 충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제갈균: 제갈량 삼형제의 막내. 형이 유비에게 출사한 뒤 유비를 따랐으며, 장수교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6] 형인 제갈량을 위해 약혼을 했다고 하는데 정치적인 정략결혼을 한 모양이다. 부인은 임씨로, 둘 사이에서 망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제갈망의 후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워낙 후대 기록이라 신빙성은 떨어진다. 한편 제갈균이 제갈량의 이복동생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황이 몇 가지 남아 있는데 친동생이라는 설 또한 존재하여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 큰누나: 괴월, 괴량 등으로 유명한 양양의 명문가인 괴씨 가문의 자제 괴기와 결혼.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을 갈며 공부를 할 당시 경제적 부분 등 이방인인 그가 양양에 정착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남편인 괴기가 위나라 소속으로 근무하다가 촉장 맹달에게 패사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 작은누나: 양양의 명문귀족이자 명성 높은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결혼. 즉, 방통의 사촌형수 되시겠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양양에 정착하고 공부하는데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 제갈첨: 제갈량이 47세 때 태어난 외아들이다. 태어난 해부터 북벌이 시작되었고 제갈첨이 8살 때 제갈량이 사망한 탓에 많이 만나지 못했지만 제갈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이가 총명하고 사랑스럽다며 팔불출 기질을 보였다. 촉한에서 벼슬을 하여 상서부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263년 면죽에서 위나라 장군 등애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 제갈상: 제갈첨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다.

  • 제갈경: 제갈첨의 차남으로 촉 멸망 때는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 형과 달리 참전하지 않았다. 촉이 멸망한 뒤 하동으로 이주했으며 서진 아래에서 강주 자사를 지냈다. 족보에 따르면 그의 아들 제갈충(諸葛忠)이 신라로 귀순하여 한국 제갈씨들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제갈교: 제갈근의 차남. 제갈량의 양자로 들어가 부마도위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제갈반은 익무장군을 역임했다. 제갈첨이 태어난 다음 해에 요절했지만 아들 제갈반을 남겼다.

  • 제갈반: 제갈교의 아들. 제갈량에게 있어선 양손자에 해당되는데, 제갈근의 장남인 제갈각과 그 가족이 오나라에서 죽임을 당해 제갈근의 대가 끊겼다. 훗날 손침이 주살되고 제갈각이 복권되자 오나라로 돌아가 제갈근의 후사를 이었다.

  • 제갈각: 제갈근의 장남인 관계로 제갈량에게는 조카. 제갈근 사후 손준과 더불어 오나라의 실세가 되었지만 오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했고, 전횡을 일삼은 것을 계기로 살해당하고 만다. 이 때문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제갈씨 능력자 3인방(제갈량, 제갈근, 제갈각) 중 혼자만 매력이 유난히 낮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둘 다 90대를 호가하는 매력이지만 제갈각 혼자만 50~60대의 매력이다. 매력 이외의 능력은 작은아버지와 거의 흡사할 정도의 귀재.

  • 제갈과: 제갈량의 딸로 전해진다. 선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여 이름을 과로 바꾸었다. 신선이 되었고 성도 근처에 성모선사승연갈녀지사라는 사당에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물론 제갈량에게 딸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제갈회(諸葛懷): 전설상에 나오는 제갈량의 어린 아들.

  • 제갈풍(諸葛豊) 한원제 때 인물로 제갈량의 조상이다. 제갈풍은 명경(明經) 출신으로 군문학(郡文學)이 되었으며, 인품이 뛰어나고 천성이 강직하여 사예교위(司隷校尉)가 되었는데, 비리를 지적함에 있어서는 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경사(京師)에는 "그 사이 어찌 보기가 뜸한가? 제갈풍을 만났기 때문일세."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시중(侍中) 허장(許章)이 황제의 외속(外屬)으로서 법을 무시하고 사음(奢淫)한 행동을 하자, 제갈풍이 부절(符節)을 들어 허장에게 명하며 포박하려고 하였다. 이때 황제는 제갈풍의 부절을 거두어들였으니, 사예(司隷)에 부절이 제거된 것은 제갈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제갈풍은 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를, "포의의 선비로서도 오히려 문경지교가 있는데, 이제 사해의 광활한 땅에 일찍이 절의를 지키고 정의를 위해 죽는 신하가 없습니다. 모두 아첨하며 구차한 태도나 취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서로 알랑거리는 행동을 하며, 사가의 이익만 생각하고 국가의 정사는 망각하니, 신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충신(忠臣)과 직사(直士)가 화를 피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군주를 위해서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곧았다. 그는 뒤에 서인(庶人)이 되어 집에서 죽었다.

  • 제갈규: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의 친부. 자는 근공. 제갈풍의 자손이나 몇 대 자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 학계에서는 제갈풍과 제갈규 사이의 공백기를 따져 약 7-8대손 정도로 추정하는 모양. 태산군의 군증을 역임했으며 부인 장씨 사이에서 3남과 2녀를 출산. 순서대로 장남 제갈근, 장녀, 차녀, 차남 제갈량, 막내 제갈균이 태어난 모양. 제갈량이 3, 4세 때 장씨가 사망하자 후처를 들였고 제갈량이 8세 전후가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제갈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 제갈현: 제갈규의 동생. 제갈규 사망 후 제갈규의 가족을 수습했으며, 조조로 인해 전란이 서주까지 미치자 제갈량, 제갈균, 그리고 두 명의 질녀를 데리고 남하한다. 이때 원술의 요청으로 예장 태수를 역임. 예장은 양주 자사 관할로 원술에게는 권한이 없었으며 조정의 비준도 받지 않은 모양으로, 원술은 한실을 무시하고 있었고 또한 군벌로써 세력을 확장하려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조정에서 예장 태수 주호가 파견되자 순순히 물러나고[7] 형주목 유표를 찾아가 정착한다. 이후 제갈현의 두 질녀가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과 방씨 가문에 시집을 간 것으로 볼 때, 유표가 제갈현을 후하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제갈량이 17세가 되었을 때 병으로 사망한다.


4. 친인척 관계[편집]


  • 황승언: 제갈량의 장인. 양양의 명문귀족이며 채풍[8]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유표가 채풍의 차녀를 후처로 들였기에 황승언은 유표와 처형제가 되는 셈. 고로 제갈량은 유표와 처조카사위[9], 처이모부[10] 에 해당되는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제갈량에게 자신의 딸을 추천했으며, 이로써 제갈량은 양양의 명문귀족인 유씨, 채씨, 황씨, 괴씨와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 방덕공: 양양의 이름 높은 선비.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그의 며느리가 되기에 제갈량과는 친인척 관계가 된다. 벼슬길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으나, 유표는 그가 벼슬길에 나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해 찾아가곤 했었다. 유표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무얼 남겨줄 수 있겠소?" 방덕공이 답하기를,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안전을 물려줄 수 있지요." 유표는 그저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마휘보다 10살이 많아 사마휘가 형으로 모셨으며,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자주 지도했다. 와룡이라는 별호는 방덕공의 입에서부터 퍼진 것이라 한다.

  • 방통: 자는 사원. 방덕공이 별칭으로 붙여준 봉추로도 유명하다.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로 방덕공의 조카.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방덕공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방통과는 또 친인척에 해당된다. 사마휘 방덕공 부손 등 인사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이들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유비의 참모로 합류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유비가 익주에 입성하기 위하여 출전할 때 일군을 이끌다 전사하였다.

  • 방산민: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작은 누이와 결혼하였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황문이부랑에 올랐으나 요절. 그와 제갈량의 작은 누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환이 진나라에서 태수직을 얻었다.

  • 제갈탄: 제갈근, 제갈량의 먼 친척. 같은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손으로 고향도 같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진동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후에 수춘성을 근거로 기병했다가 사마 가문에 주살당한다.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을 빗대어 촉나라는 (제갈량)을 얻었고 오나라는 (제갈근)을 얻었으나, 위나라는 (제갈탄)를 얻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동대장군에 오를 만큼의 인재였으며 당대 선비들에게 흠모를 받기도 한 인재인지라 용과 범은 아니었어도 준걸은 분명 준걸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인재가 "개"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제갈량과 제갈근이 대단했다는 말도 된다.[11]

  • 괴기: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큰누이와 결혼하였으며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상기했다시피 위나라에서 방릉태수를 지냈으나, 맹달이 방릉을 공격했을 때 살해당했다. 괴씨 가문의 자제인 그가 자형이라는 것만으로도 제갈량이 양양에 입지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제갈량과도 교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유표: 형주의 주목. 한실의 먼 친척으로 유비와도 친척에 해당된다.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유표와 동서 사이이기 때문에 또한 친인척에 해당된다.

  • 유기: 형주의 주목 유표의 장자. 기록에 따르면 유기 또한 평소에 제갈량을 매우 중시했다. 유기는 매양 제갈량과 더불어 스스로 안전할 수 있는 계책을 알려했는데 제갈량이 번번히 거절하니 어느 날 후원을 산책하다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연회를 베푸는 사이 사다리를 치우게 하여 제갈량으로부터 신생과 중이 이야기를 듣고 강하태수를 자청, 일신의 안전을 꾀할 수 있었다. 나중에 강하태수가 된 유기가 유비와 제갈량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덤. 유기가 누각 위의 사다리를 치우면서까지 제갈량에게 계책을 구했다는 것도 그렇고 사사로이 후원을 같이 산책하고 연회에 초대될 정도면 평소 친분이 있던 사이라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제갈량과 인척관계에 있어 자주 왕래하다가 제갈량의 능력을 보고 평소에 매우 중시하게 된 듯 싶다. 거기에 유기는 제갈량을 중시함으로써 유비와의 관계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 유종: 부인들이 모두 채모의 조카였던 동서 관계이다. 하지만 채모랑 같이 후계자 문제로 사실상의 정적.

  • 채모: 유표의 신하로 형주의 2인자. 채모의 형제들 중 둘째누나는 유표, 큰누나는 황승언의 부인이다. 즉, 제갈량에게 채모는 처외삼촌인 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채모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5. 교우 관계[편집]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면서 득을 본 것 중에 하나가 제갈량의 인적 네트워크란 시각도 있다. 그전까지 유비는 그를 보좌해 줄 인재들이 그리 많지 못했지만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써 제갈량이 알고 지낸 형주의 인사들을 추천받거나 하여 상당 수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12]

북벌 때 옛 친구인 서서석도가 위에서 하급 벼슬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서서는 어사중승(정3품, 감사원장 격)까지 올라갔고 석도는 전농교위, 역시 동문수학한 사이인 맹건은 양주자사(도지사 급)를 거쳐 정동장군까지 해먹었다. 결코 낮은 직책이 아니다. 게다가 촉에는 구품관인법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위나라의 시스템을 잘 이해 못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조비 때에는 주로 호족 등의 배경있는 인물들이 윗자리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그들보다 능력이 낫다고 보기 어려운 왕충 같은 인물들도 고위직에 앉은 걸 보면 더욱 그렇다.

  • 사마휘: 수경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 인물평이 실로 정확했으며, 방덕공과 형님아우하는 사이였다. 제갈량의 스승으로써 그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여남에 사는 풍구라는 이를 스승으로 모셔와 제갈량을 지도했다. 후에 제갈량을 유비에게 천거하였다.

  • 최주평: 박릉 출신.[13]이름은 균,자가 주평으로 한글로 동명이인인 형 최균이 있다.아버지는 한 영제 때 사도, 태위 벼슬을 지낸 최열로 동취(銅臭)라는 고사를 남긴 사람이다. 부패 관료인 아버지와는 달리 건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비유했을 때 다른 이들은 수긍하지 않았으나 최주평과 서서만은 그 재주를 인정하고 변호해 주었다. 또한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단점을 수시로 지적해줬는데 제갈량은 이 일을 들어 훗날 신료들에게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을 권했다.

  • 서서: 자는 원직. 본명은 복. 양양에 모여있던 인재들 중의 한 명이며, 제갈량의 가장 친한 친구로 추정된다. 제갈량과는 형주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교우를 맺게 되었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악의에 비교할 때 진지하게 그 말을 인정했던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제갈량과는 유별나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보다 먼저 유비를 섬기던 중, 장판파 전투의 혼란 속에 어머니가 조조에게 사로잡히자 조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출세했다.

  • 석도: 자 광원.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을 했던 인물. 제갈량과 우의가 상당히 깊었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때 임관해 군수, 전농교위 등의 관직을 거친다.

  • 맹건: 자 공위. 역시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했던 인물.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고향에 돌아가 조조 밑에서 벼슬살이 했다. 친구들 중에선 가장 먼저 출사한 인물. 이때 제갈량은 "중국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왜 하필 고향에서 노니려 하시오." 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사마의와 대치할 때 사마의의 편지에 답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맹건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 걸로 보아 둘의 우정은 그때까지도 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마량: 양양의 명문귀족인 마씨 가문의 아들. 백미(흰 눈썹을 가진 기재)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제갈량보다 나이가 어려 제갈량을 존형이라 불렀다. 제갈량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던 인물로 그를 따라 촉에서 벼슬을 지내나 이릉대전 때 사망.

  • 마속: 마량의 동생. 제갈량이 남정북벌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군략을 의논했던 상대. 마량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더더욱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제1차 북벌 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

  • 장완: 제갈량의 후임자. 일찍이 근무태만 혐의로 유비가 죽이려 했으나 그 능력을 알아본 제갈량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제갈량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북벌기간 동안 촉군의 후방을 지원했고 제갈량의 뒤를 이어 사실상의 제1인자로 촉한의 국정을 책임졌다.

  • 조운: 제갈량과 뜻이 잘 맞아 사실상의 교우.[14][15] 조운이 죽자 가장 슬퍼한 이 역시 제갈량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두사람이 각각 문과 무에서 정점을 찍고 있다. 제갈량의 인간관계에 속하는 모든 이들 중 최강자. 실제로도 제갈량은 조운에게 많이 의지했는데, 그 이유 역시 조운의 노련한 무력과 풍부한 실전 경험 때문이었다.

  • 강유: 제갈량이 북벌 중에 발굴한 젊은 인재. 기성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현의 학문(훈고학)을 익히며 한실 부흥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벌 당시 촉한에 귀순했고 그 재능을 알아본 제갈량이 중앙에 그를 추천하여 군사 경험을 쌓게했다. 이후 촉한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장완과 비의 사후 현상유지에 급급한 유선 때문에 망국 루트를 타는 촉한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평생동안 병법을 연구하여 만들어낸 심서를 강유에게 물려준다. 그걸 바탕으로 북벌을 계승하였으나, 제갈량만 한 기반이 없는 데다(위 출신의 항장이니까) 정치력이 모자라(싸우는 것 말고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스승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촉을 점령한 위군 상대로 반간계를 쓰다가 실수로 패사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최후는 연의에서는 자결이지만 정사에서는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죽었다.

  • 엄준: 손권이 황제가 되자 위위로 임명되어 촉한에 사자로 갔는데, 제갈량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그의 장면을 알고 있다면 참 눈물이 나는 장면.

  • 가비능: 선비족의 족장으로 위나라에 상당한 위협을 가했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협조적이었다. 연의에선 오로침공전에서 촉한을 공격하는 포지션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제갈량의 협력자였다.

  • 노숙: 노숙은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의 친구였으며, 제갈량을 동오로 데려가 손권과 대담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연의에서는 위태로운 행동을 일삼는 제갈량의 성실한 조력자를 넘어 거의 보호자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노숙이 사망하였을 때 제갈량이 사흘을 내리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바, 실제로도 둘의 교분은 매우 두터웠던 것 같다. 그 이전에 노숙이 유일하게 강경파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 이거 이제 어떡하지'에 가까웠던 것 같지만.

  • 관우: 연의에서 둘이 신경전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고우영이 관우를 질투하여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창작을 넣었다. 그런데 이문열 등이 이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제갈량과 관우는 실제로 사이가 나빴다고 주장하여 적지 않은 세월을 여러 사람이 낚였으나 오히려 정사에서는 서로 서신을 나눌만큼 친분이 있음이 밝혀졌다. 실제로 제갈량이 유비에게 임관한 초기에는 관우와 장비를 상대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몇 차례 관우를 치켜세워주는 서신을 보내줬다. 관우도 같이 알고지내는 시간 동안 그를 인정해서인지 제갈량이 자기를 띄워주는 서신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뻐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두 사람의 경력 및 나이 차이는 거의 부자뻘인데, 당대의 용장으로 이름값마저 높았던 관우쯤 되는 인물이 아들뻘인 제갈량에게 염(髥)이라 불린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아버지뻘인 직장 선배에게 "수염아저씨!" 하고 부른 격이니 나름대로 파격적이고,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상당한 친밀감과 호감이 있었다는 증거가 될만한 것. 특히 마초에 대해 문답한 두 사람의 서신 내용을 생각하면 형주 지사장쯤 되는 관우가 익주 본사의 사장 비서실장쯤 되는 제갈량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본사에 마초라는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던데, 그 사람 너 보기에 어떠냐?"고 묻자 제갈량은 "그 사람 대단하긴 한데, 수염아저씨만은 못하죠"라고 대답하고, 이 대답을 들은 관우는 "하하! 본사 량이가 보기에 마초가 대단하긴 해도 내가 더 낫다는군!" 하고 기뻐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한 격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상당히 호의적이지 않았다면 성립하기 쉽지 않은 상황인 셈. 거기에 관우 사후 아들인 관흥의 인물평을 좋게 해주었는데 당시 시대상 나이든 명사가 젊은 인재의 인물평을 해주는 것은 그의 후견인이 되어준단 의미이니만큼 관우 사후에도 그의 가문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다. 정치적인 수일 뿐이다 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지위가 되는 사람의 선택치고 정치적이지 않은 선택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 연의 기준으로도 처음에 관우가 불복했던 때를 제외하면 둘의 사이가 좋았던 편이다. 아무래도 관우가 오만했다는 점도 있고, 둘이 유비군 내의 서열 2위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다.[16]

6. 공적 관계[편집]


  • 황권: 황권과 개인적 친밀감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일단 제갈량과 황권은 서로 높게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편지를 쓴 것도 있고, 황권도 촉한이 황권의 일가족을 주살했다는 헛소문이 돌며 위문제가 황권에게 발상을 명하자 이를 일축하며 황권 본인은 "유비, 제갈량을 믿고 있으며 유비, 제갈량 또한 황권 본인의 진심[17]을 알 것이기에[18] 이후 사실관계가 제대로 확인되면 그때가 돼서야 상을 치르겠다"고 한다. 이후 황권의 말대로 되었다.
  • 위연-양의: 능력은 있지만 성격과 인간관계가 개차반인 이 둘을 버릴만큼 인재 여력이 있던 상황이 아니라 제갈량은 이들을 중용하여 잘 써먹었지만 그 막장 성격들이 어디 안 가서 잊을 만하면 말썽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중립을 지키며 이 둘을 중재하고 타일렀지만 들어먹지 않았다. 그나마 어찌저찌 이들을 중재하고 다룰 수 있던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기 무섭게 고삐가 풀린 둘은 병림픽 끝에 공멸했다.

7. 적대 관계[편집]


  • 조조: 고향을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불구대천 원수. 원래 서주 낭야군 출신이던 제갈량은 조조가 자기 고향을 개박살내자 고향을 버리고 멀리 형주로 피난갔다. 그가 유비에게 임관하고 평생을 위나라를 상대로 죽을 때까지 싸운 것은 바로 조조에 의해 어린 시절에 개고생을 한 영향도 적지 않다.

  • 사마의: 4차 북벌과 5차 북벌에서 첨예하게 대립한 숙적으로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삼국지에서는 아주 유명하다. 한편으로는 내심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면모를 보여줬으며, 전쟁터에서도 서신을 교환하였다.

  • 장로: 예문유취에 따르면 제갈량은 장로에게 글을 보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교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제갈량에게 있어 종교 왕국을 세운 장로는 그렇게 좋은 인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9]

  • 이막: 원래 유장의 신하였는데 아예 대놓고 유비에게 나는 유장의 신하이지 너(유비)의 신하가 아니다. 너를 섬기는 건 너가 좋아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거다.라는 말을 해 유비를 머리 끝까지 분노하게 만든 걸 제갈량이 잘 변호해서 이막을 살려냈더니 정작 이막은 나중에 읍참마속의 일이 발생하자 제갈량에게 개기다 좌천되었다. 그리고 이막은 계속 제갈량을 이를 갈며 증오하다가 제갈량이 사망하자마자 바로 유선에게 '제갈량의 죽음은 쌤통'이라며 기뻐했다. 그러자 유선은 그대로 이막을 참수형에 처해버렸다.[20]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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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2] 양양기襄陽記 -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우스워하고 즐겁게 여겼다. 마을에서는 그 때문에 '공명처럼 부인을 선택하지 말 것이니, 그리되면 아승阿承(황승언을 말함)의 추녀를 얻게 되리라'는 말이 유행하였다.[3] 최종 직위는 대장군이다. 그리고 제갈근이 죽었을 때, 손권이 정말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는데, 제갈근이 유비를 회유하기 위해 서신을 보냈을 때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손권이 직접 나서 제갈근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해 준 덕에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적인 이야기를 안 하면서 처신을 조심했다고 볼 수 있다.[5] 덕분에 연의에서는 최후의 보루의 사신으로 가기도 한다. 다른 놈이 갔으면 분명히 당장 목이 날아갔겠지만 제갈근이라 목숨을 부지해나오는 경우가 대다수. 관우에게 투항을 권하러 갔다가 관평이 목을 치려고 하는데 관우가 말리는 장면도 있고, 유비에게 동오 침공을 멈춰달라 부탁했다가 동생 때문에 살아돌아가는 거라고 수모를 겪는 일도 당하는 편. 애초에 제갈근이 보내지는 것은 진짜 급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6] 현대로 치면 경찰청장으로 두 형이 각각 대장군과 승상(현대로 치면 각각 국방부 장관과 총리)에 올라서 낮아보이는 거지 결코 낮은 지위가 아니다.[7] 다만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와 헌제춘추에서는 주호와 제갈현이 싸웠다고 기술되어 있다.[8] 채모의 아버지[9] 유표 입장에서 제갈량이[10] 제갈량의 입장에서 유표가[11] 고대 중국에서 '개'는 의미와 달리 충성스러운 동물의 이미지를 띄며, 사자성어인 '견마지로(犬馬之勞)', 몽골 건국의 '사준사구(四駿四狗)'처럼 긍정적으로 활용되는 용례가 있으니 이는 비하적 의미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언어에서든 용례에 따라 단어에 내포된 의미는 달라지는 법이다. 포청천에서 작두에 들어가는 세 동물이 용, 범, 그리고 개인 이유가 각각 신분의 차이를 상징함을 생각해보자. 비교급에서 다른 동물들과 개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에는 용례 중 "격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당장에 같은 시대의 동탁이 여포에게 죽으며 남긴 유언이 개새끼 같은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였다.[12] 제갈량을 얻기 전 유비군의 인적자원 구성은 이렇다. 유비가 처음 유주 탁군에서 거병하면서 따른 관우, 장비, 간옹, 평원상을 거쳐 서주자사 시절 도겸에게 물려받은 손건, 미축, 예주목 시절부터 따른 진도, 유염 등이 있고 위연은 유비의 부곡 출신, 조운은 공손찬 휘하 객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인재이다. 그러나 이들도 유비 못지않게 고생해 생활기반을 모두 버리고 온데다가 사마휘의 평가처럼 한 국가를 경영하고 유지할 재목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진등, 진군, 전예, 원환처럼 유비가 초창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부하들도 있었다. 또한 유비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생활이 길어서인지 친족 중심으로 운영하던 조조나 손씨 가문과 달리 유씨 종친 네트워크나 스승 노식으로 구축된 학파 인맥의 덕을 거의 보지 못한 듯하며 유표 사후 유기를 따르는 형주의 잔여 세력을 포함, 제갈량과 방통으로 대표되는 형주파와, 입촉 전후로 얻게 된 법정, 황권 등 유장 휘하에 있던 익주파를 다수 얻게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재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13] 박릉 최씨는 남북조, 수당시기 태원 왕씨 등과 함께 산동귀족의 대표가문이다.[14] 연의에서 오나라에서 동남풍을 불게 한 후 도망칠 때 유비에게 도울 사람으로 조운을 요청했으며, 유비가 오나라로 정략결혼을 갈 때도 조운에게 호위를 맡기며 계책 3개를 주는 내용이 있다. 그만큼 조운을 신뢰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5]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이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반대하기도 했다.[16] 이렇다 보니 설화에서는 제갈량과 관우가 대립, 대결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부분 관우가 지거나 하는 식으로 제갈량이 띄워지는 식으로 흘러가는 편.[17] 황권은 위나라에 항복하면서도 자신은 '동오에는 도저히 항복할 수 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괜히 황권이 조위로 전향했는데도 촉한에서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게 아니다.[18] 실제로 유비도 황권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황권을 배신한 격이라고 하며 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리의 황권의 일가족 체포 상주에 대해 일축한다.[19] 정작 장로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자신이 차지한 한중을 그런대로 잘 다스려서 당시 한 조정으로부터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받기까지 했다.[20] 성격만큼은 순한 유선도 이 때만은 크게 분노하며 이막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