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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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국내편
3. 중국편
4. 남중편
5. 예술편
6. 기타
7.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이 문서는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는 문서이다.


2. 국내편[편집]


  • 가련(可憐, 1671~1759)은 18세기에 활약했던 함흥(咸興)의 기녀로, 시문, 노래, 검무, 거문고와 바둑, 쌍륙 등에 두루 능한 팔방미인으로 유명했으며, 당대의 많은 관료들과 문인들이 그녀를 위해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재기(才妓)라고 칭했으나, 자기 자신은 여협(女俠)으로 자부하였다. 84세의 나이에도 제갈량의《출사표(出師表)》전, 후편을 외우면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당시 가련을 만났던 젊은 관료 간옹 이헌경 (李獻慶)의 기록을 통해 전해 온다.

  •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 19년 10월 21일에 치른 상재생(上齋生)에 대한 제술(製述)에서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吾心如稱)"를 부제(賦題)로 삼아 시험을 보였다. 이는 제갈량이 촉(蜀)을 다스리면서, "내 마음은 저울과 같아서 남을 위하여 경중(輕重)을 조작할 수 없다.(吾心如稱 不能爲人作輕重)"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 44에 실린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의하면 정조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어 크게 써서 벽에 걸어 두고 보곤 하였다고 한다.

  • 평안도 영유군에 있던 삼충사는 중국 촉한(蜀漢)의 재상 제갈량(諸葛亮), 남송(南宋) 초기의 무장(武將) 악비(岳飛), 남송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603년(선조 36)에 세워 제갈량의 위패를 모셨으며, 1668년(현종 9)에 '와룡(臥龍)'이라 사액하였고, 1695년(숙종 21)에 악비를 배향하였으며, 1750년(영조 26)에 문천상을 배향하면서 ‘삼충사’로 고쳐서 사액하였다. 삼충사는 국가에 대한 충절을 장려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녀 역대 왕들에 의해 건립, 보호되어 왔다. 때문에 1871년(고종 8)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사우 철폐 때도 그 훼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 경기도 화성시 용백사는 1666년(현종7)에 세워졌는데, 송나라의 명신 호안국(胡安國)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국한 윤계(尹棨)도 함께 향사하였다.[1]

  • 조선 전기에 중국에서 수입했던 《제갈충무록(諸葛忠武錄)》라는 책이 있다. 《충무록》과 관련 내용은 《중종실록》 36년 8월 27일자 기사에 나온다. 당시 《제갈무후전(諸葛武侯傳)》은 이미 경상도에서 간행하였다고 한다.


3. 중국편[편집]


  • 소녀풍은 서쪽에서 부는,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청하(淸河)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었다. 사람들이 언제쯤 비가 올 것인가 묻자 공명은 "오늘 밤에 큰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녁이 되어도 구름 기운이 전혀 없자 모든 사람들이 공명을 바보라고 생각했으나 공명이 말하기를 "나무 위에 이미 소녀풍이 불고 나무 사이에 음조(陰鳥)들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지저귀며 날개를 마구 치니, 그 효과가 이를 것이다." 하였는데, 잠시 뒤에 큰비가 쏟아졌다.[2]

  • 제갈량(諸葛亮)이 우장군(右將軍)이 되어 승상(丞相)의 일을 행할 때에 군사를 일으켜서 적을 공격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갈량이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군사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뒤에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의 잘못을 열심히 공격하기만 하면, 일이 성공할 수 있고 적은 죽을 수 있으며, 공을 세우는 것은 발돋움하고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3]

  • 제갈량이 주필역(籌筆驛)에서 출사표(出師表)를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사천성(四川省) 광원현(廣元縣) 북쪽에 있는데,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일찍이 여기에서 출사(出師)의 계획을 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상중(喪中)에는 부인이 실내에서 복머리를 한다." 하였고, 《촉지(蜀志)》에는 "건흥(建興) 12년 8월에 제갈공명이 54세로 전쟁터에서 죽자, 촉 나라 부인들이 애도하는 뜻으로 상중에 하던 복머리를 하였다."고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촉나라 부녀들이 슬퍼하면서 상례 때 하는 북상투를 했다. 이는아무렇게나 막 끌어 올려 짠 상투. 함부로 끌어 올려 뭉쳐 놓은 여자의 머리를 뜻한다

  • 《음부경》은 황제(黃帝)가 지었다 하는 병서(兵書)이다. 《수서 경적지(隋書 經籍志)》의 병가류(兵家類)에 "《태공음부금록(太公陰符鈐錄)》 1권과 《주서음부(周書陰符)》 9권이 있으며, 태공(太公), 범려(范蠡),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이전(李筌) 등 6가(家)의 주가 있는 것이 《태공음부》다." 하였다. 경문(經文)이 384언으로 된 한 권의 책이다. 이전이 여산노모(驪山老母)에게서 전수받았다고 하였으나 이전의 위작(僞作)으로 짐작된다.[4]

  • 진수가 찬술한 《삼국지(三國志)》에 제갈량집 목록 24편을 수록하면서 전체가 10만 4112자라고 했다. 목록을 보면 열한 번째에 〈귀화(貴和)〉라는 제목이 있는데, 이 말은 《논어(論語)》에, "예(禮)의 쓰임은 온화(和)한 것이 귀함이 된다."에서 따온 것으로, 주자(朱子)는 화(和)를 "조용하여 급박하지 않다."로 풀이하였다.

  • 태평어람에 따르면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으로 하여금 말릉(秣陵) 즉 건업(建業)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용과 범이 서려 있는 것과 같은 기운이 뻗쳐 나와 제왕의 터전임을 알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사실 이 일화는 강표전에 유비가 손권에게 말릉을 도읍으로 삼으라 권하자 손권이 이를 따라 도읍을 옮기고 건업으로 삼았다는 말과 같다.[5] 또 태평어람에 실린 오록에 따르면 석두성(石頭城)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 수도 건업(建業)에 있던 성으로, 제갈량(諸葛亮)이 이곳 지세의 험준함을 보고 손권(孫權)에게 건의하여 석두성을 쌓게 하고 수도로 삼게 하였다. 제갈량은 주변의 종산(鍾山)과 석두산(石頭山)을 각각 용과 범에 비유하여 “종산은 용이 서린 듯,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의 거처이다.(鍾山龍蟠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하였다.[6]

  • 잔도 철산(棧道鐵山) 몹시 험준한 요해지(要害地)를 이르는 말로 모두 중국의 파촉(巴蜀) 지방을 이르는데, 잔도(棧道)는 산로(山路)가 험준하여 나무 가교(架橋)를 만들어 통행하는 것이고, 철산(鐵山)은 지금의 사천성 정연현(四川省 井硏縣) 동북에 위치한 철(鐵)의 산지로 제갈량이 이곳에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한다.[7]

  • 《사천통지(四川通志)》〈고비부(古碑附)〉에 "장맹양이 그의 아버지를 따라 촉(蜀)으로 들어가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다.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보고 천자에게 보고하여 비석에 새겨 검각(劍閣)에다 세웠다."라고 하였다. 검문(劍門)은 검각인데, 잔교(棧橋)의 이름이다. 지금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데, 제갈량이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천협(川陜) 사이의 주요한 통로로서 군사적 요충지이다.[8]

  • 제갈량이 남양(南陽)에 은거하면서 남들과 서로 왕래하지 않고 지내던 시기에 유독 서서(徐庶)와 방덕공(龐德公)과는 사이좋게 지냈으며, 특히 방덕공을 매우 존중하여 혼자 찾아가서 침상에 절을 하곤 하였다. 제갈량은 그를 매우 존경하여 스승으로 예우했고, 자주 인사하러 왔고, 방문할 때면 침상 아래에서 공경히 절하였고,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9]

  • 《풍우부(風雨賦)》는 천문(天文)의 변화를 통해 일기(日氣)를 예상하고 점치는 방법을 실은 책자로, 주(周)나라 강자아(姜子牙)가 짓고, 한(漢)나라 제갈량(諸葛亮)이 편집하였으며, 명(明)나라 요종도(饒宗道)가 주해하였다. 1795년(정조19) 천문에 관한 서적들을 편집하여 《협길통의(協吉通義)》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에 《풍우부》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10]

  • 송(宋)나라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은 제갈량의 가산이 뽕나무 수백 그루였다는 일화를 높게 평가하여 "이러한 사람은 진실로 대장부라 할 수 있다.(如此輩人 眞可謂大丈夫矣)"라고 하였다.[11]

  •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겨울의 추위를 노래하기를 "화정에는 불길이 꺼지고 온천에는 얼음이 얼었으며, 불담에는 물이 끓어오르지 않고 뜨거운 염풍이 불지 않으니, 북쪽으로 난 방문 틈을 잘 바르고 나양에서는 처음으로 비단옷을 걸친다.(火井滅 溫泉冰 沸潭無涌 炎風不興 北必墐扉 裸壤垂繒)" 하였다. 화정은 촉(蜀) 땅 임공현(臨邛縣) 서남쪽에 있는 우물인데, 제갈량이 처음 발견했으며 불길이 올라왔다고 한다. 나양은 나라 이름으로 이 나라 사람들은 옷을 입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 조조가 제갈량에게 편지와 함께 한약재 계설향을 보낸 적이 있다.(삼조시문전집역주, 여제갈량서: 三曹詩文全集譯注, 與諸葛亮書) 내용인 즉슨 '계설향 다섯 근을 보내니 작은 성의로 알고 받아주십시오.(今奉雞舌香五斤,以表微意.)'라는 달랑 한 줄의 글귀였다. 사실 이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표현인데 계설향은 정향이다. 후한시대 학자 응소(應劭)의 〈한관의漢官儀〉에 의하면 상서랑이 황제에게 상주할 때에는 입 냄새가 나지 않도록 정향을 입에 물고 아뢰는 것이 법도였다.[12]너는 황제를 모셔야 할 사람이다 = (황제를 모시고 있는) 내 밑으로 오라라는 뜻이 되는 것으로 조조가 제갈량에게 일종의 스카우트회유의 의미로 보낸 것이다.[13] 2018년에 나온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조조집(曹操集)》에 따르면 이 서찰은 건안 13년(208년)에 인편으로 정향 5근과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데 이걸 제갈량에게 보낸 이유는 유비-손권 연합의 공격을 늦추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유비에게도, 손권에게도, 주유에게도 안 보냈는데 정향 안 보낸 걸로 봐선 제갈량을 손유연합 주도자, 혹은 저 동맹에서 상실될 시 가장 타격이 클 인물로 보아 조조 입장에서는 제갈량이 무척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었던 듯. 아니면 이간계를 겸해서 보냈을 수도 있다. 제갈량은 이에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냥 무시했다. 제갈량이 의미를 몰랐을 것 같지는 않고, 유비에 대한 충성심과 서주대학살에 대한 원한 때문일 듯.[14] 유비 사후 항복하라는 위 명사가 보낸 서신에 대해 정의(正議)라는 글로 명사들과 위를 깔 때 조조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다.

  • 남북조(南北朝) 시대 송(宋)나라와 양(梁)나라 사이의 이름 난 의약학자(醫藥學者)이자 도가(道家)인 도홍경(452년 ~ 536년)이 쓴 책 중에는 '고금도검록'이라고 하여 당대까지 전해지던 명검들에 대한 서술을 하고 있는데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 제갈량이 검중을 평정할 때, 청석사를 지나다가, 칼을 뽑아 산을 찔렀는데, 칼이 빠지지 않아 가버렸고 지나던 사람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동양의 엑스칼리버?
    • 유비는, 장무 원년, 간지가 신축이었으므로, 우산의 철을 캐서 검 8자루를 주조했고, 각 검의 길이는 3척 6촌이었다. 하나는 유비 자신이 차고, 하나는 태자 유선에게 주었으며, 하나는 양왕 유리에게, 하나는 노왕 유영에게, 하나는 제갈량에게, 하나는 관우에게, 하나는 장비에게, 하나는 조운에게 주었다. 모두 제갈량이 칼에 글을 썼으며, 모든 검이 풍각(風角)을 만들었고, 영을 내려 도(刀) 5만 자루를 만들게 하고, 모두 칼날을 연결하고, 72련(鏈)의 칼자루를 늘어놓았으며, 그것들에 모두 두 글자가 쓰여있었다고 한다.[15]

후세에 방자용은 말하길: 당나라 사람 상서랑 이장무의 본명은 방고인데, 정원 계년, 동평사가 되었다. 이사고는 과거에 급제하여 판관이 되었는데, 땅을 파서 검신이 좁은 검을 얻었으며, 위에 '장무'란 자가 모나게 쓰여져 있었다. 옛 <박물지>에서 장화 또한 말하길 촉의 재상 제갈공명은 검을 패용했다고 하였다. 이에 이름을 고쳐 '사고'라 하였고, 주청하여 '장무'라 하였다. 아마 이것이 유비의 8검중 하나였던 듯 하다라고 적고 있다.

  • 송사》 〈종택전〉에 따르면 종택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종택이 전후로 고종에게 수도 개봉으로 돌아오라는 상소를 20여 번 올렸으나 매번 황잠선 등이 물리쳤고, 이에 울분이 쌓여 등창이 생겨 병에 걸렸다. 제장들이 문병하여 왔는데 종택이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말하길 "내가 두 황제께서 오랑캐에게 잡혀간 일로 울분이 쌓여 이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능히 적을 섬멸할 수가 있을 터이니 내가 곧 죽어도 여한이 없다!" 제장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길 "감히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제장들이 나가자 종택이 탄식하며 말하길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였는데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게 하는구나!"[16] 다음 날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날이 어두웠는데 종택이 한마디도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다만 "도하! 도하! 도하!" 세 번 연이어 외치고는 죽었다. 개봉 사람들이 서러워 부르짖었다.

  • 청나라의 장주(張澍)가 집본한 《제갈량집》의 유적편(遺蹟篇)에 《촉고적기(蜀古蹟記)》를 인용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을 옮기면 이러하다.[17]
    • 태조 건륭 2년(961), 조빈(曹彬)이 명을 받고 촉 땅을 정벌하러 갔다가 무후사에 들렀다. 그런데 조빈은 자못 불쾌해하며 "공명이 비록 한나라에 충성했다지만 촉나라의 군민들을 피로하게 만들고 중원의 만분지 일도 회복하지 못했는데 어찌 시호에 무(武)가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 하고는 "제갈량은 나라를 기울게 한 자이니 이곳은 철거하여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게 한창 무후사를 철거하고 있는데, 무너뜨린 중전(中殿)에서 돌로 된 비석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빈이 가서 보니 한 자 가량의 비석에 공명이 친히 지은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내용은 "내 흉중을 헤아릴 이는 송의 조빈 뿐이리!(測吾心腹事 惟有宋曹彬)"였다. 이를 읽고 대경실색한 조빈은 비석에 절하며 "저같은 애송이가 어찌 무후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무후사를 새로이 정비하란 명을 내렸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에 떠났다.

  • 중국에서 무속의 신으로 숭배된다. 이때는 '와룡선생'이라고 부른다.


4. 남중편[편집]


  • 타전로(打箭鑪)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남정(南征)할 적에 여기에서 대장간을 설치하여 화살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서강성(西康省) 경계의 강정현(康正縣)이 그곳이다.

파일:제갈남정.png
제갈량의 남정을 묘사한 그림
  • 당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번작(樊綽)의 책 만서(蠻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창(永昌)은 옛 애뢰(哀牢)의 땅이고 점창산(玷蒼山) 서쪽으로 6일 거리에 있다. 서북쪽 광탕(廣蕩)과의 거리는 60일 정도이다. 광탕은 토번(吐蕃)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후설산(候雪山) 서변의 대동천(大洞川)과 사이를 두고 있으며, 또한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성이 있다. 성 안에는 제갈무후의 신묘(神廟)가 있는데 토속(土俗)이 다 함께 경외하며 기원(禱祝)을 빠뜨리지 않는다. 만이(蠻夷)가 말을 타고 가다가도 멀리서 사당을 보면 즉시 말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뛰어간다.'[18]

남조의 사람들이 제갈량을 신으로 모셨다는 기록으로 참고로 제갈량이 건축했다는 성은 신당서에도 기록이 나온다. 사실 제갈량의 사당이라거나 성이 3세기에 만들어져서 당나라 시절까지 유지·보수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아마 지역의 오래된 성채의 기원을 유명한 중국 영웅과 연관시킨 것 같다. 마침 제갈량은 운남 지역과 이래저래 연이 깊은 중국 영웅이기도 하고.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지역에서 제갈량의 인기가 이 정도였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라 생각하면 되겠다.출처
  • 만서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난창강(瀾滄江)의 수원은 토번 내의 대설산(大雪山) 아래의 사천(莎川)에서 흘러나온다. 동남쪽 율재성(聿賫城)의 서쪽을 지나면 뇌수하(瀨水河)라 하는 곳이 있는데 순만(順蠻) 부락이라 불리는 곳을 지난다. 남쪽으로 흘러 검천(劍川)의 큰 산을 지난다. 난창강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용미성(龍尾城)의 서쪽 제 7역(驛)에 다리가 있는데, 곧 영창(永昌)이다. 양편의 절벽은 높고 험하며 물살은 빠르고 세차다. 큰 대나무를 가로로 이어 새끼줄로 묶어 다리를 만들었는데, 위에 대자리를 깔고 대자리 위에 판목을 덮으니, 이로 인해 죽옥개교(竹屋蓋橋)라 하였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새끼줄로 묶었는데 공명(孔明)이 개착한 것이다.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영창을 정벌하고 이곳에 성을 쌓았다. 오늘날에도 강의 서쪽 산 위에 있는 폐성에는 유적과 옛 비석이 여전히 존재하며 또 신사와 위패(廟)도 존재한다.

실제로 제갈량이 성을 쌓고 다리를 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당서 지리지에서도 또 서쪽으로 노강(怒江)을 건너 200리를 가면 제갈량성(諸葛亮城)에 이른다고 했다. 또 월수군 대등현에도 제갈량의 남정 당시 축성한 성이 있다고 한다.
  • 만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석성천(石城川)은 미현(味縣)의 옛 땅이다. 정관[19] 연중에 낭주(郎州)로 삼았고, 개원(開元) 초에 남녕주(南寧州)로 고쳤다. 주성(州城)은 곧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싸웠던 곳이다. 성 안에는 제갈량의 찬문(撰文)이 적히 두개의 비석이 있다. 뒤쪽 상단의 전문篆文에서 이르길 "이 비석이 넘어가면 만(蠻)은 한노(漢奴)가 될 것이다." 라 했는데, 근해에 만이(蠻夷)들이 나무 기둥으로 괴어놓았다.'

  • 기고전설원집(紀古滇說原集)은 원나라 때 편찬된 책인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몸소 남정에 나서며 월수(越嶲)에서 출발하여 건흥 3년 봄에 남중(南中)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싸워 이기며 옹개(雍闓) 등을 참하였다. 옹개는 익주군(益州郡)의 기수(耆帥)로 한나라의 군대를 막아섰는데, 제갈량이 그를 베어 마침내 평정하였다. 그때 맹획이 만왕(蠻王)을 참위하며 여러 이족들을 유혹하고 선동하니, 장가(牂牁)와 월수가 모두 맹획에게 호응했다. 그의 품성은 평소 이족과 한인이 복종하는 바가 있었기에 호응하는 것이 곤명(昆明), 동천(東川), 무정(武定)부터 오살(烏撒), 첨몽(沾蒙)의 수천 리 땅에 이르고, 무리가 수만 명이니, 제갈량은 회천(會川)을 지나 삼강(三絳), 무정, 농동(弄棟)과 요안(姚安)을 넘었다. 영창(永昌)에 이르러 구륭산(九隆山)의 맥을 끊어 왕기(王氣)를 없애고, 마침내 맹획을 생포하여 군영으로 돌아왔다. 영루를 보게 하고 7번 사로잡아 7번 풀어주니, 이에 맹획은 제갈량에게 천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백애(白崖)로 회군하여 쇠기둥을 세워 남정을 기념하였으며, 익주군을 고쳐 건녕(建寧)이라 하고 장인과(張仁果)의 17대손인 장용우(張龍佑)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20]

해당 내용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삼국시대나 진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고 남조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지만. 칠종칠금도 나오고, 한족과 만족의 지지를 받는 맹획을 더 대단한 제갈량이 때려잡는 둥 별별 이야기를 다 때려넣은 전설이다.

  • 사갈편(思葛篇)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운남(雲南)과 면전(緬甸, 미얀마)의 이인(俚人)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가지런히하여 3개의 상투를 트는데 가운데의 상투는 무후(武侯)를 표시하고 좌우의 상투는 부모를 표시한다. 매번 차를 마실 때마다 반드시 찻잔을 이마까지 들어올려 보답을 표한다. 그들 중 한어(漢語)에 능한 자는 무후에게 지극히 칭하기를 '제갈아버지(諸葛老爹)'라 한다.'이상 일화들 출처는 여기 제갈량은 당시 운남을 비롯한 서남 소수 민족에게 널리 전승되어 숭배되었으며 심지어 지금도 미얀마엔 제갈량묘가 있다.

  • 위 전설에서 제갈량이 세웠다는, 혹은 세웠다고 여겨지는 쇠기둥은 남조도전(南詔圖傳)에 그려져 있다.

파일:남조도전.png
이 그림이 남조도전인데 어깨에 새가 올라간 인물이 흥종왕 나성염, 선두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인물이 장용우의 후손인 운남국주(운남대장군) 장낙진구(張樂進求). 장낙진구는 이후 남조 황실에 선양한다. 참고로 제갈량이 백애에 세웠다는 쇠기둥은 승전기념비 같은 것으로 복파장군 마원교주에 이런거 세웠다는 일화가 있다.
기고전설원집에 따르면 또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나라 때 장인과(張仁果)의 33대손 장낙진구는 건녕(建寧)을 고쳐 운남(雲南)이라 하였으며, 당나라에서는 장낙진구를 수령(首領), 대장군(大將軍), 운남왕(雲南王)에 책봉했다. 장낙진구가 쇠기둥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금으로 주조한 봉황(鳳凰)이 습농락(習農樂)의 왼쪽 어깨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장낙진구 등은 이를 보고 놀라서 기이하게 여기며 마침내 애뢰왕(哀牢王)의 자손에게 양위하였다. 왕은 국호를 몽(蒙)이라 하고 왕을 기가(奇嘉)라 일컬었다. 사직이 이곳에서 비롯하였기에 몽사(蒙社)라 하였다. 이는 고종 영휘(永徽) 4년의 일로, 곧 몽 13왕의 비조이다.'
또 남조도전(南詔圖傳)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철주기鐵柱記』에서 말했다. 처음에 삼탐백(三賧白)의 대수령, 장군 장낙진구가 흥종왕(興宗王) 등 아홉 사람과 더불어 쇠기둥 곁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주조(主鳥)가 쇠기둥 위로부터 날아와 흥종왕의 팔뚝 위에서 쉬었다. 장낙진구는 이 일이 있은 후로 더욱 놀랍고 의아하게 여겼다. 흥종왕이 이를 기억하기를 '이는 우리 집안의 주조(主鳥)로다.'하며 비로서 스스로 기뻐하였다.
여기서 습농락은 세노라, 흥종왕은 나성염이다.
애뢰, 혹은 애뢰이는 한나라 시절에 남중에서 나름 세력을 떨치던 서남이의 한 일파로, 설화에 따르면 제갈량은 남중 정벌 때 구륭산에 맥을 끊어 왕기를 훼손시켰는데, 마침 이곳이 애뢰의 시조가 났다는 지역. 그런데 남조 황실은 스스로 애뢰의 후예를 자처하던 양반들이다.
그러니까 대강, 제갈량이 구륭산(애뢰산)의 왕맥을 끊은 이후 왕이 나타나지 않고 수백 년간 분열되고 지배받던 운남 지역에 옛 애뢰왕의 후예가 나타나 나라를 세우고 민족을 통합했으며, 이후 애뢰왕의 후예들은 왕맥을 끊은 제갈량이 승전비로 설치한 쇠기둥을 남조의 사직이 시작된 곳이라 여겨 성스럽게 여겼다더라식의, 무슨 예언서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이상 일화들 출처는 여기

  • 구당서 장간지전에 따르면 황제 측천무후에게 대신 장간지[21]가 말하길, 옛날 제갈량은 남중을 깨뜨리고 그곳의 거수(渠率, 무리의 우두머리)들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두어 진수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3가지 이유로서, 관리를 두고 이적과 한인이 섞여 살면 반드시 싫어하게 되며 병사를 두어 양식을 옮기면 근심이 더해지고, 반란하면 수고가 거듭 많아진다는 것이며 기강이 서투르게 서면 자연히 안정된다고 제갈량이 말했다고 했다. 그는 생각하건데 이 제갈량의 계책이 만이를 기미(羈縻, 굴레와 고삐라는 뜻으로, 속박하거나 견제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하는 묘술로 알겠다며 여기 유지하는 데 비용과 수고가 많이 들고 여기 관리들이 제갈량처럼 (이족들을) 놓아주고 가둘 수 있는(칠종칠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요주(姚州)[22]를 폐지하고 요부(姚府)는 수부(嶲府)에 통합시키고 관리대신 그 지방의 우두머리들에게 자치를 시키자고 했다. 그는 (삼국지) 촉지에 따르면 제갈량이 남정하고 나서 국가는 부유하고 갑병은 충분하다고 했고 전대(당고조)에도 이 말을 따라 그 이로움이 자못 깊었는데 지금은 소금과 베(布)를 세금으로 바치지않고 진기한 공물을 들이지 않으며 병장기를 군대에 충실히 보낼수 없고 보화의 소비는 대국을 깨뜨림만 못하니 국고를 비워가며 백성들을 몰아 만이를 정벌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라고 했다.출처진짜 제갈량 이 아저씨는 대단하게도 온갖 곳에서 튀어나온다. 평가가 나쁜 것도 아니다.


5. 예술편[편집]


  • 제갈량은 (琴)을 잘 다루었다. 제갈량은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교양과 높은 예술적 성취를 갖고 있었다. 그는 노래뿐만 아니라 기악도 할 수 있고 음악 창작을 하면서 악기도 만들 수 있었고 '금경'이라는 음악 이론 전문 저서도 한 편 썼다. 중흥서목(中興書目)에 "금경(琴經) 1권, 제갈량이 제금(制琴)의 시작과 칠현의 소리를 저술했다. 13휘(徽)[23]의 모양을 취한것라는 의미이다." 라고 했다. 사희이(謝希夷) 금론(琴論)에도 제갈량이 양보음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보음 노래는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그는 양보음을 금으로 타기 위해서 일종의 편곡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지지(輿地誌)》에는 "정군산 무후묘 안에 석금(石琴)이 하나 있는데, 이를 스치면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다, (제갈)무후가 남겼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의를 비롯해 여타 창작물에서 제갈량이 금을 타는 장면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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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섭첩(遠涉帖, 비단에 적어 보낸 원정에 관한 장계)》
  • 제갈량은 또한 서예에도 능했다. 제갈량이 살던 삼국시대는 서예가 성숙하여 자리잡았던 시기였다. 그는 서법, 초서, 전서 모두 뛰어났다고 한다. 가장 고전적인 서예작품은 《원섭첩(遠涉帖)》[24], 《현막첩(玄莫貼)》으로 《원섭첩》은 서예의 대가 왕희지가 제갈량의 작품을 모사하여 쓴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험한길을 통해 북벌을 나섰던 선현에 대한 존경을 표한 것이다. 북송 시대의 서적 선화서보(宣和書譜)에는 촉한의 서예가로 제갈량이 홀로 기록되어 있다. 남송 진사(陳思)《서소사(書小史)》에는 팔분[25](篆隸八分)을 잘했다고 한다.

  • 제갈량은 그림에도 능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능하지 않은 게 뭔가 싶다 당나라 시기 장언원의 역대명화기 권1에는 역대의 그림에 능했던 화인 373명에 아들 제갈첨과 함께 들었으며 권2에는 삼국시대 유명한 화가 중 하나로 제갈량을 꼽고 있는데 지금 삼고로 나누어 귀천을 정하고, 한위 삼국을 상고하면, 조기, 유포(劉褎), 채옹, 장형(이상 4인은 후한), 조모, 양수, 환범, 서막(이상 4인 위나라) 조불흥(오나라의 화가), 제갈량(촉한)의 흐름이 있다고 하였다. 권4에서는 제갈량, 제갈첨 부자가 촉한에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썼다. 화양국지에는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할때 이도(夷圖)를 그려보내자 이인들이 그걸 잘 간직했다는 기록이 있다.


6. 기타[편집]


  • 제갈량은 한서에 대한 책을 썼는데 <논전한사論前漢事> 1권(수서 경적지2)과 와 <한서음漢書音> 1권(신당서지 제48 예문2)이다. 유비와 제갈량은 한왕조를 계승하는 촉한을 건국하였다. '한실부흥'은 유비의 거병 이래 목표였으므로 '한서'를 한제국의 정사로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서는 그들 조상에 대한, 한왕조 전반부분의 사서로서 중요한 사서였다고 유비는 생각한 것 같다. 유비는 임종전에 아들 유선에게 한서의 독서를 권할 정도로 이 책을 중시하였다. 제갈량의 이 저작들은 이런 바탕하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 제갈량의 생일은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사실 기일도 정사 삼국지자치통감에 나온 8월이라는 것 외에는 불명. 가정제가 8월 28일로 정했다는 기록도 있고 제갈씨들도 셀 때는 이 날짜를 쓴다고는 한다. 누가 먼저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전북도민일보에 따르면 제갈량이 남만 정벌에 나섰는데, 맹해지역 남나산을 지날 때 병사들이 풍토병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된다. 이것을 본 제갈량이 지팡이를 산에 꽂자 그 지팡이가 차나무로 변해 그 찻잎을 따서 병사들이 끓여 먹자 눈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남나산의 포랑족들은 제갈량을 차의 시조로 모신다. 그가 베푼 은덕에 감사하며 해마다 7월 23일(을 제갈량의 생일로 삼아) 제갈량의 생일이 되면 제사를 올리고 있다.출처

  • 중국 절강성 난계시에는 제갈량의 후손들이 모여서 사는 집성촌이 있다. 이름은 '제갈팔괘촌'(诸葛八卦村)이라고 하는데, 그 팔괘촌 근처에 강유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강촌'(姜村)이라는 작은 촌락이 7개나 있고, 팔괘촌을 향한 채 부채꼴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강촌의 모습은 흡사 북두칠성이 제갈량 후손들의 보금자리를 지켜 주는 것만 같아 보인다고 한다. 촉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이 두 성씨가 어떤 경위로 이렇게 지척에 모여 살게 된 건지 참 궁금해지는 대목.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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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2] 《初學記》[3] 《諸葛忠武書 卷8 法檢》[4] 《新唐書 卷59 藝文志》[5] 《太平御覽 卷156 註》[6] 《太平御覽 卷156 吳錄》[7] 《한서(漢書)》 권40 장량 열전(張良列傳), 《독사방흥기요(讀史方興紀要)》[8] 《元和郡縣志 劍閣道》[9] 《資治通鑑》,《漢丞相諸葛忠武侯傳》[10] 《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子部 天文, 算法類 天文》,《日省錄 正祖 19年 3月 16日》[11] 《小學 嘉言》[12] 그래서 향을 머금어 품는다는 의미로 상서랑을 회향옥란(懷香屋蘭)이라고도 불렀다고.[13] 다만 똑같이 자가 공명(孔明)인 영천 사람 호소(胡昭, 161-250)에게 보낸 편지인데 후대에 잘못 명명되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태사자에게도 당귀를 보낸 적이 있는 조조인 만큼 제갈량에게도 비슷한 회유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14] 기록에서 제갈량이 서주에서 형주로 이주한 것은 가족 일 때문으로 나오지만, 그 시기에 고향이 지옥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15] 사실 장무 원년은 221년으로 관우가 이미 죽었을 터인데 관우에게도 검을 내렸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다. 아마도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죽은 관우를 추모하기 위해 검을 만들고 관우의 사당이나 그의 유족들에게 전달했다는 의미인 듯하다.[16] 위에서 나오듯이 당나라 시인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을 방문하고 지은 시이다.[17] 원문은 이곳을 참조.[18] 원문: 永昌城,古哀牢地,在玷蒼山西六日程。西北去廣蕩城六十日程。廣蕩城接吐蕃界。隔候雪山,西邊大洞川,亦有諸葛武侯城。城中有神廟,土俗咸共敬畏,禱祝不闕。蠻夷騎馬,遙望廟即下馬趨走。[19] 당태종의 연호[20] 원문: 三國蜀漢丞相諸葛亮南征自越嶲,乃建興三年春至南中,所在戰捷,由是斬雍闓等。雍闓者乃益州郡之耆帥,阻拒漢兵,亮斬之,遂平。時孟獲僭爲蠻王,誘扇諸夷,牂牁、越嶲皆應孟獲。其人素爲夷、漢所服,占據昆明、東川、武定以及烏撒、沾蒙數千里地,其衆數萬,亮經會川,歷三絳、武定也。弄棟姚安也。而抵永昌,斷九隆山脉以歇王氣,遂將孟獲生擒於營,使觀營壘,七縱七擒,以知亮有天威也。回兵白崖,立鐵柱以紀南征,改益州郡曰建寧,以仁果十七世孫張龍佑領之。[21] 625 ~ 706, 양양 사람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간언을 올린 측천무후를 705년에 정변을 일으켜 퇴위시키고 당나라를 회복했다.[22]윈난성 추슝(楚雄)이족(彝族)자치주 야오안(姚安)현. 고대엔 야오저우(姚州)라고 불렸으며 '야오저우를 알면 윈난 역사의 절반을 안다'라는 말도 있을 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다.[23] 금(琴)의 줄 짚는 자리를 표시한 것. 금의 '휘'는 소라 또는 조개로 만드는데 모두 13이고, 가운데 제7휘가 가장 크고 가운데 '휘'에서 제1휘와 제13휘 양쪽으로 이를수록 점점 작아진다.[24] 원문은 師徒遠涉,道路甚艱。自及褒斜,幸皆無恙。使還,馳此,不復云云。亮頓首。이다. '군사들이 먼거리를 걸어 도로에서 많은 고생을 한 끝에 포야도에 이르렀는데, 다행히 모두 무사합니다. 사신을 보내 날아가듯 빠르게 서신을 보내니, 이외에 운운은 또 없을 것입니다. 량이 돈수합니다.'[25] 예서 이분(二分)과 전서 팔분을 섞어서 만든 서체, 채옹이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