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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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
帝國新聞
국가
[[대한제국|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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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창간
1898년 8월 10일
종간
1910년 8월 2일
설립자
이종일
편집
유영석
이종면
장효근 등
주필
이승만
종류
일반일간신문


파일:seo000876-000-000.jpg

《제국신문》[1]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편집]


유영석과 이승만이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시절의 경험과 이종일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1898년(광무 2년) 8월 10일 창간한 신문이다. 창간 당시 제호는 한글로 쓴 《뎨국신문》이었다. 그러다가 1903년(광무 7년) 7월 7일에 한자 표기인 《帝國新聞》으로 바꿨다.


2. 상세[편집]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 시절처럼 순국문체로 쓰였으며 민중계몽과 일반 대중이 타겟이었다. 1면에는 논설, 2면에는 잡보[2], 3면에는 국내외 정세, 4면에는 광고를 게재했다.

이승만, 유영석, 이종일 3인이 주동이 되어 창간하였으나 이승만은 한달도 못되어 만민공동회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되고, 유영석은 개인 사정상 퇴사하여 한동안 이종일 단독으로 사장과 기자 역할을 하며 운영하였다.[a][b]

《제국신문》은 발행 당시 대한제국과 외세의 수탈 야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외세와 조정의 법적인 탄압이 심했고[*b ][3]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제정한 신문지법[4]과 시스템 미비[5]로 인해 광고 수입과 구독료를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자 결국 경영난으로 1907년 9월 20일에 휴간에 들어간다. 이후 독자들이 의연금을 보내는 등 각종 지원으로 같은 해 10월 4일에 간행을 다시 시작했으나 결국 각종 여건의 문제로 1910년 6월 10일 다시 휴간에 들어가 결국 이 해 8월 2일에 폐간하고 만다. 종간 당시 《제국신문》의 발행 호수는 약 3,240호였다.

《제국신문》은 대중 친화적인 노선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3. 기타[편집]


  • 당시의 《황성신문》과는 대조적인 노선을[6] 가지고 있었는데, 사이가 좋지는 못했는지 《황성신문》은 《제국신문》을 아녀자들이나 보는 암신문이라며 신명나게(...) 깠다.

  • 가장 중요하고 인기가 있던 1면 논설 부분을 맡을 국문에 능하고 글을 쓸 여력과 학식을 갖춘 인물을 찾기가 어려워 한동안 옥중에 있는 이승만에게 부탁하여 1901년 1월부터 1903년 4월 17일까지 약 27개월간 비밀리에 그의 글을 익명으로 게재하였다. 그러나 외세와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압력이 들어오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승만을 주필에서 해임시켰다. 이후에는 이종일이 직접 논설을 담당하였다가 1907년 6월 7일, 새로운 주필인 정운복으로 교체되었다.[*a ]

  • 1899년(광무 3년) 2월 25일자의 논설(론셜) 란에 한국의 현재 발전상을 거의 정확히 예언한 글이 실려 있어 주목받고 있다. 필자가 잠들었는데 미래의 대한국을 친구들과 구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본 한국에서는 전기와 통신망이 잘 연결되어 있으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인도와 차도가 잘 구분되어 있으며[7] 도시의 구획이 우물 정자로 딱딱 나뉘는데다 거리가 가로수와 꽃으로 잘 꾸며져 있고, 도시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대도시가 되어 있고, 식자율이 99% 이상일 정도로 교육 제도가 발달했으며 학교가 모든 곳에 세워져 있고, 공원에는 여러 위인들의 상이 세워져 있으며 분수대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큰 상점에 들어가 봤더니 없는 것이 없을 만큼 시장경제가 잘 발달해 있고, 한강에는 화륜선, 증기선이 활발히 오가며, 해안선은 포대로 잘 지켜져 외세나 비적이 없어지고 인천에는 태극 국기 단 군함이 가득하며, 국민의 손으로 뽑힌 잘 배운 대표들이 국회에서 나랏일을 의논하며, 세출이 세입보다 많고[8], 외국인들이 수만 명씩 찾아와 관광을 하고 돈을 쓰며, 행정과 사법의 발전으로 무명 잡세가 없어지고 무고한 죄인, 혹독한 형벌이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갓을 벗고 예를 표했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그가 꿈 속에서 상의원에 들어가보니, 한 의원이 연설하기를 "수백 년[9] 전 나라가 나날이 위태로웠다. 그 때는 (사람들에게) 학문이 없고 매관매직도 성행하였는데,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자 외국 사람들도 조금 희망이 있다고 했으나 이걸 나라에서 찍어누르고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던 중 이대로 백성들을 억압하면 나라가 성치 못할 것을 알고 죽기로 힘을 다해 관민간 합심해 오늘날 우리나라가 문명 강국이 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위인들의 동상을 세우자고 제청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부럼 깨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는 것이 논설의 내용이다. # [10]
상기의 기사는 국립중앙도서관 아카이브제국신문 DB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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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2] 현재 신문의 사회면과 비슷하다.[a] 뎨국신문, 1907년 6월 7일, 「본사의 행복과 본 기자의 해임」[b] 뎨국신문, 1907년 6월 14일, “남대문 밖 원경민씨가 보낸 글”, 통권, 제2430호[3] 외세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쓴 기자를 연행하고 기사를 삭제하는 등 횡포가 만연했었다.[4] 조항 중 보증금 납부 조항이 있었다.[5] 당시 인쇄비 때문에 신문의 가격이 비싼 편이여서 대중들은 섣불리 을 꺼내기 힘들었다. 비슷한 시기 발행되었던 《독립신문》의 창간 당시 반 단(14행) 기준 구독료가 1년에 1원 30전, 1달에 12전, 1장에 1푼이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서재필은 싸게 매긴 가격이었는데도 신문값이 너무 비싸다며 항의 편지를 쓰는 독자들이 많았다. 거기다가 화폐 개념에 대한 대중의 무지와 운송 시설의 미비가 겹쳐 제국신문 뿐만 아니라 구한 말 시절의 신문들은 재정난에 허덕였다.[6] 《황성신문》은 중층 이상을 타겟으로 삼았다.[7] 불과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서울 차도에서 우마차가 다니는 곳이었다.[8] 구한말의 갈망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면, 정부가 부정부패 없이 적극적으로 복지나 기술개발 등에 예산을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인 입장에서야 정부가 세금을 엉뚱한 데 쓴다며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말기 조선-대한제국은 아무리 발전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는 군주가 비자금을 조성해 사치를 하고 왕비가 무당한테 억만금을 안겨주며 외척 가문이 나라를 들어먹던 나라다.[9] 필자가 논설을 작성한 때로부터 120여 년이 지났다.[10] 여담으로 마지막 문장을 보면 꿈에서 깨고 보니 원통하다(...) 라고 쓰여 있다. 아시발꿈도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