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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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현장인 제국은행.

1. 소개
2. 상세
3. 수사 과정
4. 범인 체포
5. 재판 과정
6. 뒷이야기
7. 창작물에서


1. 소개[편집]


帝銀事件

1948년 1월 26일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일어난 은행강도 및 살인 사건.


2. 상세[편집]


1948년 1월 26일 오후 3시가 넘어갔을 때 도쿄도 도시마구에 위치한 제국은행에 도쿄도 방역반의 하얀색 완장을 찬 중년 남자가 나타나 후생성 기관의 명함을 내밀고 은행 직원들에게 "가까운 곳에서 집단 이질이 발생했습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이 은행을 소독해야 하는데, 소독 전에 우선 여러분들은 예방을 위한 약을 먹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은행에 있었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남자가 건네주는 약이란 걸 받아먹었는데 그것은 남자가 제일 먼저 약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약을 그냥 먹으면 치아의 에나멜질이 상하기 때문에 혀를 쭉 내밀어서 먹어야 한다고 해 사람들은 그 말을 따랐다. 약을 먹은 뒤 약을 먹은 이들에게 마치 위스키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자 남자는 두 번째 약을 먹으면 괜찮아진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두 번째 약을 받아 마셨다. 한 여자가 물을 마셔도 되겠느냐고 묻자 남자는 허락했고 여자는 물을 마셨지만 고통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사실 그 남자는 후생성 직원도 아니었고 약이란 것도 예방약이 아니었으며 시안화칼륨 혹은 아세톤시아노히드린으로 추정되는 청산화합물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된 상수도 시설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라 전염병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범인의 이런 수법이 통했다. 은행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먹고 중독되어 움직이지 못하던 틈에 남자는 유유히 은행 창구에 있었던 현금 16만 엔과 수표 1만 7450엔을 챙겨서 도망쳤다.[1]

사건이 알려진 것은 한 여성이 실신을 계속 하면서도 은행 밖으로 나와 도움을 청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16명이나 되는 사람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쓰러진 탓에 경찰의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1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한 명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숨졌다. 도난당한 수표는 사건 바로 다음날인 27일 현금으로 환전되었지만 경찰이 이를 확인한 때는 28일이었다.


3. 수사 과정[편집]


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유사한 범행이 두 차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1947년 10월 14일 은행 영업 시간이 끝난 후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에 한 남자가 나타나 '후생기관 의학박사 마쓰이 시게루(松井蔚)'라고 적힌 명함을 내밀면서 이질에 걸린 환자가 오전 중에 이 은행에 왔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은행 직원들과 돈을 소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점장은 경찰서에 연락해 순경을 불러서 확인하자 순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면서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순경이 나간 사이 남자는 제국은행 때와 완전히 똑같은 수법으로 약을 먹였지만 사망자는 나오지 않아 도망쳤다. 남자가 건넨 명함은 진짜였고 후생성 기관에 마쓰이라는 사람이 근무하던 것도 사실이어서 마쓰이가 범인으로 의심받았지만 그의 알리바이가 증명되었기 때문에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 1948년 1월 19일 미쓰비시은행(현 미쓰비시 UFJ 은행) 나카이 지점에 한 남자가 나타나 '후생성 기관 의학박사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郎) 도쿄도 방역과'라고 쓰인 명함을 내밀고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에 나타났던 남자와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지점장이 은행 직원들에게 약을 먹이고 돈을 소독하겠다는 말을 의심해 은행 업무시간이 지나 현금이 없다고 거짓말하자 남자는 직원들의 창구에서 소액 우편환을 찾아내 소독액이라면서 투명한 액체를 뿌린 후 나갔다. 이후 명함은 가짜였고 야마구치 지로는 없는 사람이란 게 밝혀졌다.

사건 초기에 경찰은 구 일본군, 특히 세균전 부대 관련자들에게 혐의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사건의 수법 등이 화학물질의 취급에 익숙한 자가 아니면 힘든 방법이었고 방역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을 사칭했다는 점에서 731 부대 관련자가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사팀은 구 일본군 육군 제9연구소 소속의 반 시게오라는 자로부터 유력한 정보를 입수해 형사반장은 구 일본군의 특수요원들 쪽으로 수사망을 좁혔다. 그런데 갑자기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구 일본군 특수요원들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수사는 난항에 봉착했다.

다른 한편으로 유사 사건들에서 나온 명함, 특히 마쓰이의 명함을 가지고 수사를 진행하던 다른 팀이 마쓰이 명함의 행방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갔다. 당초 수사팀에서 명함을 가지고 수사하던 팀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지만 사건이 난관에 봉착하자 이쪽으로 수사 방향이 급선회되었다.

마쓰이는 자신이 명함을 준 날짜와 장소, 상대를 모두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추적은 나름대로는 쉬운 편이었다. 명함 100장 중 마쓰이 자신이 8장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92장 중 62장을 수거했다. 수거하지 못하고 받은 이들이 분실한 명함이 22장이었는데 이는 사건들과는 무관하다고 판명되었다. 나머지 행방을 끝까지 추적하지 못한 8장이 있었는데 이것들 중 한 장을 범인이 사용했다고 추정했다.


4. 범인 체포[편집]


그리하여 1948년 8월 21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유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히라사와 사다미치(平沢貞通)를 체포했다. 명함을 추적하던 수사팀이 히라사와를 체포한 이유는 마쓰이와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들 중 히라사와는 그 명함을 지니지 않았고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제국은행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았으며 과거에도 은행에서 사기 사건을 일으켰었고 결정적으로 제국은행에서 도난당한 금액과 거의 액수가 똑같은 금액을 예금했기 때문이었다. 히라사와는 그 예금의 출처를 끝내 해명하지 못했다. 춘화를 팔아서 번 돈이 아니냐는 설도 히라사와는 끝까지 부정했고 오늘날까지도 이 예금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에서 히라사와와 생존자들을 대질했지만 어느 누구도 히라사와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히라사와는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하다가 9월 23일부터 자백을 시작해 10월 12일 제국은행 사건과 앞서 일어난 유사 사건 2건의 범인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12월 20일에 열린 공판에서 히라사와는 갑자기 자백을 뒤엎고 범행을 부인했다.


5. 재판 과정[편집]


그러나 히라사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1950년 7월 24일 도쿄지방재판소는 히라사와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하필이면 과거 히라사와가 니혼도 사기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여론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니혼도 사기 사건과 제국은행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며 범죄 수법도 사기와 대량살인으로 큰 차이가 있다. 히라사와는 다시 항소했지만 1951년 9월 29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최고재판소에 상고했지만 1955년 4월 7일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고 5월 7일 최종적으로 사형을 확정했다.

사실 히라사와가 죄를 뒤집어썼다는 지적도 나왔다. 왜냐하면

  • 사건의 정황이 히라사와가 범인이라고 상정하고 보면 무리한 게 많다는 점
  • 히라사와가 광견병 예방접종의 후유증인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 때문에 생긴 정신질환을 앓아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점
  • 당대 일본의 유명한 형사 히라쓰카 하치베에가 히라사와를 심문한 방식이 고문에 가까웠다는 점
  • 결정적으로 히라사와의 사형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히라사와의 자백조서 3통이 실은 거짓이었다는 것. 사건 조사에 관여하지도 않은 이데이 요시오(出射義夫) 검사가 히라사와에게 백지를 건네서 지장을 찍게 했음을 오무라 도쿠조(大村徳三) 박사가 자백조서를 감정함으로써 밝혀냈다.

이런 의혹들 탓에 이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추리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 등이 히라사와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탄원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의 법무대신들은 엔자이 의혹이 있는 사건을 대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히라사와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만일 나중에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가 법무대신으로 재임 중이던 1967년 10월 13일 그는 신문기자들을 집무실에 모아 앞에서 사형수 23명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한 뒤 이를 보도하라고 요구했는데 현장에서 히라사와의 사형 집행 명령서를 보고 그조차도 "히라사와는 엔자이잖아."라고 말하면서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고 넘겼을 정도였다.[2]

1962년 히라사와는 도호쿠의 미야기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도호쿠의 기후가 좋지 않은 탓에 일각에서는 일본 법무성이 히라사와를 처형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계속 가둬 두면 뉴스가 되니까 기후가 안 좋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병으로 죽어서 잊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저명한 잡지 타임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런 점을 꼬집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히라사와는 95세를 일기로 1987년에 사망했다.


6. 뒷이야기[편집]


1968년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부 통치 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들 중 몇 건에 대해 재심을 시행하는 특별법안이 통과되었고 그 중에는 이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법무장관이 특별법안의 대상이 된 사형수 7명에 대한 특별 사면을 검토하기도 했다. 결국 멘다 사건 등은 무죄로 확정되었지만 히라사와는 무죄도 특별 사면도 받지 못했다. 그는 계속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일본 정부는 사형은 집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죄가 될 때까지는 구치소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히라사와는 계속 사형 집행도 되지 않고 재심도 받지 못한 채로 감옥에 있었다가 1987년 5월 10일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에서 향년 95세로 옥사했다. 다만 히라사와의 양자와 구명운동가들이 히라사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도쿄고등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하여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히라사와가 과연 범인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당시 범인이 사용한 독극물에 대해 희생자들의 사체를 부검하거나 토사물 등에서 추출해 검사했으나 액체의 보존상태가 나쁜 등의 이유로 청산 화합물인 것까지는 알아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물질인지는 끝내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건 당시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가 이 사건을 추적한 결과 일본 육군 제9연구소에서 아세트시아노히드린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청산가리가 인체에 들어가면 즉시 효과를 나타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아세트시아노히드린은 인체에 들어가도 약 1~2분 후에 효과가 나타나는 점, 피해자들이 죽어도 사체에서는 청산화합물이란 거 외에는 밝혀낼 수 없을 정도라는 것 등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외압으로 구 일본군 육군 관계자들을 수사하지 못하면서 요미우리 신문도 더 이상 이 사건을 취재하지 못했다.

1985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가 공개되어 요미우리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사건의 범인의 수법이 군비밀과학연구소의 독극물 취급 매뉴얼에 나온 것과 일치하고 범행 시 사용한 도구가 그 연구에서 사용한 도구와 일치하며 1948년 3월에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이 연구소에 대한 취재를 일체 금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요미우리의 보도대로라면 히라사와는 범인이 될 수 없는 게 당연했는데도 일본 법무성이나 재판소측은 이 보도를 무시했다.

히라사와가 사망한 다음날 당시 사건 수사에 협조했던 반 시게오가 TV에 출연해 "진범은 히라사와가 아니며, 구 일본군 육군 관계자다"라고 강조했으며 사건 당시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나루치 히데오도 회고록에서 범행은 히라사와처럼 화학물질이나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며 진범은 구 일본군 특수부대에 있었던 군인 출신이라면서 731 부대 관련자 50명 중 S모 중좌(중령)가 진범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731 부대 출신 인사들은 나루치가 말한 S모 중좌와 같은 동일 인물은 확인하지 못하고 S모 중좌와 성은 같고 이름이 비슷한 2명의 다른 사람이 있다고 말해 나루치가 이들을 혼동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사건으로부터 6년 후인 1954년 이바라키현에서 이 사건과 흡사한 수법의 청산 독극물을 이용한 대량 살상사건이 일어났는데 제국은행 사건처럼 사람들에게 보건소에서 나왔다고 말한 뒤 독극물을 약인 것처럼 먹게 하는 수법이었다. 변호인단이 이 사건과의 관련성을 캐내기 위해 현지에 잠입했지만 체포된 용의자가 음독자살했기 때문에 끝내 이 사건과의 연관성은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 수사에서 히라사와가 어떻게 독극물을 입수해서 사용했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과 사건의 정황을 볼 때 히라사와가 범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외압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실제 범인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필요에 의해서(어쩌면 구 일본군의 비밀 연구자료를 받는 대가로) 숨겨지고 엉뚱한 히라사와가 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연합군 최고사령부 통치 기간에 벌어진 대표적 사건인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도 무리한 경찰, 검찰의 짜맞추기 수사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개입 의혹 등으로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이 사건도 그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 사법부가 의심은 가는데 1심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관행 때문에 히라사와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가둬 두기로 했다면 얼추 들어맞는다.

2023년 8월 731 부대의 직제표가 사상최초로 공개되었다. 이 명단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코가타"란 남자가 731 부대원이었고 제국은행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중요한 점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일본 경찰 내부에서는 731 부대원이 범인일 가능성을 계속 염두에 두고 수사했던것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본 정부가 731 부대원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인적사항을 관리했다는 것이다.

7. 창작물에서[편집]


사건의 수법이 워낙 극적이라서인지 여러 소설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 히라사와의 구명운동을 벌였던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 "제국은행 사건"과 연합군 최고사령부 통치 기간에 일어난 의문의 사건들을 추적한 "일본의 검은 안개" 등의 대하 논픽션을 집필했다.


  • 미국의 추리소설가 엘러리 퀸도 이 사건의 대담성에 놀라 "엘러리 퀸의 국제사건부"에서 소재로 삼았다.

  • 교고쿠 나츠히코백귀야행 그림자 제9탄 사매의 우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자로 여겨지는 인물에 대한 기술이 있다. 망량의 상자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된다[3].

  •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아오사와가 독살 사건 역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 영국 작가 데이비드 퍼스의 "Occupied City"는 이 사건을 다룬 논픽션으로 워너브라더스가 이를 영화화할 예정이다.

  • 모리무라 세이이치악마의 포식에서는 상기(上記)된 가설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독을 먹일 수 있다는 건 경험에서 나온다는 이유로 당연히 마루타를 대상으로 해 본 적이 있는 731 부대 관계자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 2004년에 나온 이마가와 야스히로철인 28호에 등장한 괴도 블랙 마스크 에피소드의 초반부에 나온 나레이션이 설명하는 식으로 나온 사건은 이 사건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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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의 가치로는 약 107만 엔에 상당한다.[2] 법무대신이 쇼맨십으로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한 것을 당시 모인 일본 기자들도 매우 고깝게 보았는지 산케이 신문에서만 이 일을 보도했다고 한다.[3] 애니메이션판은 11화에서 해당 사건의 묘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