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크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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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0
No. 23
No. 33
-
제리 슬로언
(Jerry Sloan)

밥 러브
(Bob Love)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

스카티 피펜
(Scottie Pippen)

필 잭슨
(Phil Jackson)

-
🎙️
제리 크라우스
(Jerry Krause)

자니 커
(Johnny Ke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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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 영구결번

1988년 NBA 올해의 경영자상
스탠 카스텐

제리 크라우스

제리 콜란젤로
1996년 NBA 올해의 경영자상
제리 웨스트

제리 크라우스

밥 배스

1. 개요
2. 일생
2.1. 스카우터 시절
2.2. 불스 단장 시절
2.2.1. 평가
2.3. 말년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1939년 4월 6일 ~ 2017년 3월 21일

미국의 농구행정가 및 스카우터이자, NBA 역사상 유일한 비 농구인 프런트. 불스 왕조의 설계자였다.


2. 일생[편집]



2.1. 스카우터 시절[편집]


1939년에 일리노이시카고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부에서 포수로 활약했고, 브래들리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1964년경에 볼티모어 불리츠(현 워싱턴 위저즈)의 스카우터로 근무하며 농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자동차를 타고 일일이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우수선수 스카웃에 나섰으며, 한 번 찍은 선수는 끈질기게 영입을 한다는 근성도 지녔다. 입문 첫 해 얼 먼로를 영입하는 데 공헌했고, 뒤이어 1967년에는 노스다코타 대학교 출신인 필 잭슨을 지명하자고 주장했는데, 잭슨이 다닌 대학이 듣보잡이라 2~3라운드 정도는 지명될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는 잭슨을 놓지 않았으나, 불리츠보다 지명 순위가 2계단 앞섰던 뉴욕 닉스레드 홀즈먼 감독은 결국 필 잭슨을 지명하여 영입시켰다.[1][2]

이후 그는 1970년대 내내 LA 레이커스, 피닉스 선즈,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시카고 불스 등지에서 스카우트직을 전전했다. 특히 불스 스카우트 시절인 1970년 NBA 드래프트 당시 딕 모타 감독과 마찰을 겪었는데, 당시 딕 모타는 UTEP(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 출신인 네이트 아치발드를 지명하길 원했고, 크라우스는 뉴멕시코 주립대학교 출신인 지미 콜린스(1946~2020)를 원했는데 결국 크라우스의 의견이 관철되어 지미 콜린스는 불스에서 뛰게 되었으나, 콜린스는 1972년까지 겨우 612분만을 뛰고 소리없이 사라졌고,[3][4] 그 댓가로 크라우스는 결국 피닉스 선즈로 떠나야만 했다.(그 중에는 모타 감독의 압력도 한몫 했다.)

1980년대 초부터 MLB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카우터로 근무했고,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1985년에 시카고 불스를 매입하면서 크라우스를 단장으로 영입한다.


2.2. 불스 단장 시절[편집]


1985년에 로드 쏜(Rod Thorn) 단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크라우스는 1985년 찰스 오클리를 영입하며 존 팩슨을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사왔고, 1987년에 스카티 피펜호레이스 그랜트를 영입하고 1988년에 뉴욕 닉스로부터 빌 카트라이트를 영입했고, 1989년에는 아이오와 대학교 출신인 BJ 암스트롱 등을 영입하는 등 강팀으로써의 초석을 다졌고, 1990/91 시즌에는 마이클 조던-피펜-그랜트-팩슨-카트라이트로 라인업을 꾸려 첫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1992년, 1993년에 첫 3연패를 달성한다.

1993년에 마이클 조던이 첫 번째로 은퇴하고 토니 쿠코치 영입 이후 피펜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잠시 구단이 침체기를 겪었다. 다만 조던이 없던 시즌에도 55승을 하는 등 그가 설계한 팀은 결코 조던 원맨 팀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결사의 부재로 인해 결국 뉴욕 닉스에게 패배하며 그 한계를 드러냈고 설상 가상으로 호레이스 그랜트가 이적하자 팀은 속절없이 무너지며 겨우 5할 승률만을 유지하다가 이후 조던이 돌아온 후, 또 다시 1996년과 1997, 1998년에 3연패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필 잭슨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며 필 잭슨과의 재계약 협상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잭슨이 나간 불스는 그대로 와해되며 본인이 직접 데려온 토니 쿠코치를 제외하고 아무도 잡지 못하며 리빌딩을 하게 되었다.[5]

이후 불스는 하위권으로 굴러떨어져 1999년에 엘튼 브랜드를 지명하여 리빌딩하려 했지만 실패했고,[6] 결국 2001년에 브랜드를 타이슨 챈들러[7]-에디 커리와 맞바꾸는 실책을 벌이고 2003년에 불스 단장직에서 은퇴한다.


2.2.1. 평가[편집]


크라우스의 안목은 불스 왕조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불스 왕조를 만들면서 거의 모두 실제 가치에 비해 적은 대가를 치르고 데려왔다. 당시 평범한 후보가드이던 팩슨을 주워와 주전으로 세우고, 피펜은 NAIA 센트럴 아칸소라는 듣보잡 대학 출신 선수였음에도[8] 드래프트 픽업까지 해가며 지명했고[9], 빌 카트라이트를 얻기 위해 찰스 오클리를 트레이드하고 호레이스 그랜트를 신인드래프트에서 데려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필 잭슨이 불스의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명백히 제리 크라우스의 공이다.[10] 심지어 토니 쿠코치를 알아보고 크로아티아에서 92년 NBA로 데려온 것도 그였다.[11] 89년에 18픽으로 지명한 또다른 가드 B.J. 암스트롱도 불스에서 쓰리핏의 주역이 되었고 올스타까지 드는 등 맹활약했다. 스퍼스에서 사실상 버려진 데니스 로드맨을 고작 윌 퍼듀라는 백업 포워드 한 명으로 영입한 것도 그였다.

문제는 누구를 데려오든 마찰이 생겼다. 찰스 오클리와 막역하게 지내던 조던[12]이 크라우스에게 반감을 갖게 된 계기도 크라우스의 오클리 트레이드 결정이었고, 92년 토니 쿠코치를 데려올 때 피펜과 연봉 협상을 후순위로 미루면서 피펜의 연봉을 깎으려한다는 오해도 샀다. 그 탓에 크로아티아 대표팀이던 쿠코치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드림팀과 붙으면서 조던, 피펜 듀오에게 가루가 되게 짓밟혔다.[13]

특히 피펜은 거의 원수가 됐다. 92년 트레이드 협상, 1994~1997년까지 네 차례 트레이드 대상으로 거론됐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이클 조던이 잠시 리그를 떠나있던 1994-95 시즌 득점에서 블락까지 모두 1위를 하면서 팀 멱살을 잡고 끌고가는 활약이었지만 연봉 서열은 여전히 5등이었다. 1997년 10월 기준 피펜의 연봉은 고작 3백만 불에 리그 전체 122위였다. 물론 이건 피펜이 그렇게 계약한 탓이지만. 97-98 시즌을 앞두고 피펜은 크라우스와 부딪쳤는데,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발을 다쳤던 피펜은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렇게 되면 2~3개월은 쉬어야 했다. 그런데 이때 크라우스가 여름 자선 경기에 참가해 발 부상을 악화시킨다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피펜은 크라우스가 자신을 마치 개인 재산 다루듯이 한다며 분노했다. 결국 피펜은 보란듯이 자선 경기 참가를 강행했고, 발 수술은 훈련 캠프 시작 전으로 미뤘다.[14][15]

조던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 샘 스미스 기자의 <Jordan rules>에 의하면 팩슨은 그의 친구 에드 닐리가 피닉스 선즈와 70만 달러에 계약하자 크라우스가 "자넨 저 정도 액수 기대하지 말게"라고 말했는데, 당연하지만 이 망언을 들은 팩슨은 변호사를 통해 크라우스와 어떤 대화도 거부한다고 했으며,[16] 그랜트에게도 80만 달러, 잭슨에겐 (90년대 후반에) 백만달러 이상 주지 않겠다고 해 욕을 사서 먹었다. 심지어 성격 좋기로 소문났던 그랜트와도 마찰이 있었으면 말 다한 것. 97-98 시즌 개막 직전까지 선수들 대다수의 다음 시즌이 불투명했고 로드맨은 개막 직전에야 싸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크라우스는 <Jordan rules>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고,[17] 샘 스미스에게 자료를 제공한 내부자를 색출하는 일에 집착했다. 곧 그는 불스의 내부정보를 유출한 사람이 조니 바흐 코치라고 여겼다. 필 잭슨은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했지만 크라우스를 말리지 못했고 결국 조니는 시카고 불스를 떠나 샬럿 호네츠의 코치로 이적해야 했다.[18] 이 사건 이후 필 잭슨과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엇나가기 시작했고,[19] 1996-97 시즌 중반 필 잭슨 본인의 계약문제로 끝내 원수지간이 되었다. 결국 구단주인 제리 라인스드로프가 비행기를 타고 몬태나로 가 필 잭슨을 직접 만난 끝에 서로가 만족할 만한 1년 재계약을 했지만 크라우스는 1997-98 시즌 개막 직전 자신의 사무실로 잭슨을 불러 '82승 0패를 해도 당신은 끝이야!'라며 노골적으로 필 잭슨을 적대했다.[20]

조던은 대놓고 그의 더러운 식사매너를 비꼬며 크럼(crumb,부스러기)이라고 크라우스를 불렀다. 못생기고 볼품없는 외모도 공개적으로 놀렸으니 정말 대놓고 조롱한 셈. 다만 크라우스는 조던에게 연봉 3천만달러의 계약을 안겼는데, 이는 당시 조던을 제외한 불스 선수 전원의 연봉을 합한 것보다 높은 액수였다.[21][22]

최종 오퍼라고 해놓고 몇번이나 말을 바꿔 선수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1라운드 지명이 확실시되는 수비 스페셜리스트 댄 멀리에게 "3라운드에 지명해줄테니 다친 척 하라"고 하거나, 다른 팀 GM에게 "신인 계약에 쓰는 돈 아끼는 셈치고 지명권 그냥 달라"고 하는 등 손해를 안 보려는 방식은 반감을 샀다. 결국 초창기 원맨팀에 지친 조던이 노스캐롤라이나 선배 월터 데이비스를 계속 요구했으나, 크라우스는 영입하겠다고 말만 해서 조던의 분노를 샀다.

정리하자면 불스 왕조의 탄생에 분명 크라우스의 공이 크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피펜을 데려왔고 필 잭슨을 선임했고 토니 쿠코치를 2라운드 픽으로 뽑아 식스맨으로써 성과를 만들어 내는 등 이외에도 그가 불스 왕조를 만들어 내는데 공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인품이었다. 그는 언론이 조던, 피펜 그리고 감독인 필 잭슨에게만 주목하고 단장인 본인은 이에 관한 성과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인터뷰에서는 틈만 나면 불스 왕조를 이룩한 데 대해 계속 '조직의 힘', '시스템의 힘'을 힘주어 강조하였고 이로인해 선수들과 척을 지게 되었다. 평소 성품이 완고하고 소심했으며, 감독을 단장 밑으로 밖에 보지 않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고 1998년 명장 필 잭슨을 내친 덕분에 조던에게 큰 구실을 줬다.[23]

사실 팀 스포츠에서 구단주와 프런트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팩트이며, 이 점은 조던을 비롯한 선수들도 인정하는 바였고 이들 중 크라우스가 불스에 한 공헌이 없다고 하는 이는 없었다.(물론 조던은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코트 위에서 직접 뛰는 선수들'이라고 강조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제리 크라우스의 성격 그 자체였다. 조던, 피펜, 잭슨은 크라우스와 최소 10년 이상 함께 일했고, 특히 잭슨같은 경우 코치 면접 기회를 두번이나 주는 등 은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크라우스가 데려온 사람들 중에 그와 친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를 두고 그를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보기엔 클리프 레빙스턴 계약건 당시처럼 거짓말과 말바꾸기[24], 팩슨, 필 잭슨, 그랜트의 경우처럼 가치를 후려치는 발언 등 누가 봐도 호감가지 않을 만한 행동을 계속했다. 결국 크라우스가 팬들이나 선수들에게 받은 대접은 억울한 면도 있긴 했지만, 본인이 자처한 바가 컸다고 볼 수 있다.[25][26][27]


2.3. 말년[편집]


불스를 떠난 이후 그는 본업인 야구로 돌아가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를 역임했다. 2005년에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를, 2010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카우트를 지냈고 2011년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카우트 부문 특별고문으로 추대됐다. 2017년 3월 21일, 고향인 시카고에서 지병이던 골수염으로 타계했다.


3. 참고 자료[편집]


  • I LOVE NBA - 손대범 저/김민석 그림. 루키. 2004. p70~81.
  • Jordan Rules - 샘 스미스 저.
  • 필 잭슨의 일레븐 링즈 - 필 잭슨 저.
[1] 그러나 크라우스는 1987년에야 필 잭슨을 시카고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함으로써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2] 크라우스는 아주 확고한 취향이 있었는데 손이 크고, 팔이 길고, 다재다능하며 이해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매우 선호했다. 잭슨 역시 여기에 딱 맞는 선수로 그는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닉스의 벤치 선수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주며 팀의 2회 우승에 공헌했다. 크라우스의 취향에 맞는 선수들은 그 외에 토니 쿠코치, 스카티 피펜 등이 있는데 그가 피펜을 얼마나 욕심냈는지는 항목 참조.[3] 은퇴 후 1973년부터 스승 루 헨슨(1932~2020) 감독이 있는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수습 코치로 1년 일하다 1976년 트럭 운전사를 했고, 이듬해부터 일리노이 주 쿡 카운티의 보호관찰관을 맡기도 했다. 1980년 시카고의 세인트 토머스 초등학교 농구부 감독으로 농구계에 다시 발을 들여 1983년부터 13년간 일리노이 대학교 어버나-섐페인 캠퍼스의 코치로서 은사 루 헨슨 감독을 보좌하며 1989년 NCAA 전국대회 4강 진출에 공헌했고, 1996년부터 14년간 동교 시카고 캠퍼스의 감독으로 재직했다.[4] 반면 네이트 아치발드는 전체 19위로 신시내티 로열스에 들어가 14년 동안 NBA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정도로 화려한 선수시절을 보냈다. NBA역사상 최초로 득점과 어시스트에서 리그 1위를 한게 바로 네이트 '타이니" 아치볼드였다. 크라우스를 위한 변명이라면 아치볼드는 훗날 앨런 아이버슨과 마찬가지로 단신 스코어러라 정통 농구의 시각으로 보면 다소 리스크가 있는 픽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그 엄청난 재능을 무시해선 안됐다. 게다가 아이버슨과 달리 아치볼드는 리딩가드로서도 팀플레이어로도 뛰어났다.[5] 그 토니 쿠코치랑 론 하퍼도 한 시즌 뛰고 팀을 이적했다.[6] 사실 이당시 론 아테스트를 뽑는 등 안목 자체는 살아있었다. 다만 불스는 조던 시대의 그늘이 너무 컸고, 이걸 후배선수들이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7] 물론 나중에 챈들러는 각성했지만, 이건 챈들러가 시카고를 떠난 후의 일이었다.[8] 센트럴 아칸소 대학을 나와서 NBA에 진출한 선수는 역사상 피펜 한명 뿐이다. 심지어 하버드도 5명을 보낸 판에... 실제로 피펜은 급성장을 하기 전 1학년 때는 팀의 매니저로 합류를 했고, 이후 키가 크면서 농구선수로 입지를 다진 것이다. (농구로서는) 완전 무명대 출신의 무명선수임에도 그의 가능성을 꿰뚫어본 것을 보면 안목이 대단하긴 하다.[9] 크라우스는 피펜의 플레이를 보자마자 몸에 스파크가 올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드래프트 날까지 피펜에게 상위 지명을 약속할테니 다른 팀의 눈에 안띄게 태업해도 좋다. 아니 하라고 몰래 주문까지 했다. 그런데 크라우스의 행동을 보고는 눈치를 챘는지 몇몇팀이 피펜을 관찰하러 왔고, 크라우스는 결국 당일 8순위였던 픽을 5순위까지 올려서 피펜을 지명했다. 드래프트 당일의 반응은 피펜? WHO? 그 자체.[10] NBA 하부 CBA에서 감독하고 있던 필 잭슨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를 NBA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고용했다. 그리고 덕 콜린스 감독을 경질한 후 잭슨을 감독으로 선임했고 그 이후는..[11] 토니 쿠코치는 93 시즌부터 2000년까지 불스에서 뛰었다.[12] 참고로 조던을 뽑은 것은 전임 단장인 로드 손의 작품이었다. 재밌는 건 손이 조던을 뽑고 나서 센터를 뽑지 못했다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 당시 최대어인 하킴 올라주원과 좋은 센터 유망주였던 샘 부위가 뽑히고 나자, 포지션은 슈팅 가드이지만 대학 최고의 선수였던 조던을 데려간 것.[13] 아래 언급되는 조던 룰즈에 나오는 피펜과 쿠코치 관련 일화는 다음과 같다. 90-91 시즌 당시 (책 자체가 이 시즌을 주로 다룬다) 피펜은 계약기간이 남아있었음에도 건강문제에 스스로 회의감을 갖고 있어 본인이 연장계약을 원했다. 그러나 이때 제리 라인스도프와 제리 크라우스는 연장계약 요구를 묵살한채 시즌 도중 크로아티아로 가서 쿠코치를 직접 보고오기까지 했다. 그러자 인내심을 잃은 피펜이 언론에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라인스도프는 시카고로 돌아와 언론에 공표한 것에 대해 질타하는 한편 결국 피펜이 원하는대로 장기계약을 해주었고,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피펜의 노예계약이다. 당시 피펜은 90년 올스타 선정, 91년 올스타 선발에 아깝게 실패하는 등 특급 조력자 정도의 위치였고, All-NBA 퍼스트팀급 선수가 되리란 예상은 누구도 못했으며 오히려 피펜 본인이 불안해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91년 기준으로 올스타급에 준하는 연봉이었던 2~300만달러는 오히려 후한 액수였으며 피펜 역시 계약에 만족했다. 실제로 92년 피펜은 리그에서 연봉 16위, 93년엔 8위였다. 그러나 조던과 마찬가지로 이후 샐러리캡 폭등으로 노예계약이 된 것. 사실 이건에 관해서 크라우스와 라인스도프의 잘못은 팀내 넘버투는 무시하면서 같은 포지션의 신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 것이고, 계약 관련해선 본인의 가치 판단을 잘못한 피펜의 탓이다.[14] 피펜은 1998년 1월 10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 때 선수 명단에 다시 올랐다.[15] 이 시즌 피펜의 몸관리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고, 파이널 때조차 피펜은 허리통증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시즌 내내 조던이 개고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놀랍게도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다..[16] 팩슨은 시즌 중후반까지 이적을 결심했지만 우승 이후 높아진 그의 가치 (아이러니하게 그에게 오퍼를 한 팀 중엔 원 소속팀인 스퍼스도 있었다)+우승멤버를 유지하고픈 잭슨 감독의 의지까지 해 연간 백만달러 이상으로 3년 재계약을 하게 된다. 할 필요도 없는 말을 해서 욕을 사서 먹은 셈이다.[17] 사실 이때 민감한 내용인 빌 카트라이트와 조던의 갈등관계도 이 책에서 폭로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우승할 당시 그 갈등은 완전히 봉합된 상태였기에 조던과 카트라이트 모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18] 노장 코치들인 조니 바흐와 텍스 윈터는 단순한 코치일 뿐 아니라 89년에 첫 감독직을 수행한 잭슨이 갖지 못한 경험을 채워주고 선수들과 친분을 통해 팀 케미스트리를 유지하기 해준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바흐가 사망할 당시 마이클 조던이 "그 분은 나에게 코치 이상의 존재였다"고 할 정도로 선수들의 존경과 신임을 한몸에 받던 인물이었기에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19] 그 외에도 선수들을 대하는 것에 두 사람의 차이가 컸던 것도 있었다. 필 잭슨은 어떤 경우에도 팀원들의 자율성과 사생활을 지켜줘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지만 크라우스는 조직에 대한 장악력을 가지는 것에 집착했다. 문제는 크라우스의 의사 전달 방식이 좋지 못해 선수들과 대화를 할 때 진실성이 결여되거나 심할 경우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고스란히 선수단의 불만을 불러왔다.[20] 얼마나 잭슨과 크라우스의 대립이 심했냐면, 1997년 크라우스의 딸이 결혼식을 올릴 당시 모든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들은 초대되었음에도 크라우스가 잭슨 감독만 초대하지 않았다. 사임 후 잭슨은 "둘 사이엔 어떤 하자가 없다"고 했으나, 크라우스는 잭슨이 유나이티드 센터를 찾아와도 반겨주지 않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21] 시카고 불스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것도 조던의 계약을 후려치려다가 빡친 조던이 계속 이러면 닉스와 계약하겠다고 반협박을 해서 나온 결과였다. 원래 불스는 조던을 패트릭 유잉과 비슷한 선에서 재계약하려고 했다.[22] 이 때도 조던의 에이전트 데이비드 포크는 2년 5천만불 선에서 합의하려고 했으나, 돈을 아까워한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단년계약을 원해 1년 2500만불에 합의했고, 다음해 우승후 1년 3000만불로 재계약하면서 지출이 더 커지게 되었다.[23] '라스트 댄스'에 언급되다시피 조던 본인은 7번째 우승에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확고했으나, 문제는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조던을 제외하고) 나이가 들며 가치가 떨어지고 있던 피펜, 로드맨에게까지 거액을 줘가며 선수단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던 것. 또한 필 잭슨 역시 거액의 연봉을 줘야만 잡을 수 있는 거물이 된 상태였으니, 비즈니스 측면에서 보면 조던을 빼곤 안 잡는게 답이었다. 이 때문에 말년에 원맨팀에서 고생할 이유가 없던 조던이 미련없이 은퇴를 다짐한 것. 실제로 '라스트 댄스'에 "난 필 잭슨에게 재계약을 제안했다"는 라인스도프의 면피성 발언을 들은 조던은 순간 울컥하며 말을 못 이을 정도였다.[24] 자세한 내용은 시카고 불스 문서 참고. 짧게 요약하면 레빙스턴의 계약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해 다른 팀과 계약을 못하도록 해놓고, 시간을 질질 끌다가 그와 계약하겠다는 팀들이 다른 선수들과 계약하자 원래 조건보다 훨씬 못한 조건을 제시해 뒤통수를 쳤다.[25] 일반 직장인에 비유해보면 취업준비생인 자신을 채용한 사람이 고맙긴 하겠지만, 재계약 때 노골적으로 인사고과를 평가절하하거나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통해 원래 가치보다 훨씬 낮은 연봉을 받게 하는 인사과장이 곱게 보일리가 있을까? 심지어 불스 구단주 라인스도프도 구두쇠인 것과는 별개로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던 등과 친근한 사이를 유지했지만, 크라우스는 열등감과 공격적인 성격으로 인해 선수들과 사이가 두루 안 좋았다.[26] 사실 라인스도프와 조던의 친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크라우스의 성격이 결정타였다. 당시 선수들이 바보도 아니고, 크라우스의 저짓거리는 짠돌이 라인스도프의 묵인이 있었다는 걸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나 라인스도프는 선수들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고 존중해주는 태도였기에 원수가 되지 않은 것. 염가봉사로 불만을 가졌던 피펜의 경우도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지갑을 풀지 않은 구단주였음에도 크라우스를 싫어했고, 조던은 애초에 자신의 적은 연봉에 대해 코멘트한 적도 없다.(조던의 가장 큰 불만은 어디까지나 전력보강에 게으른 면, 그리고 크라우스의 성격 자체였다) 사람들이 사는데 불만이 없을 수 없고, 특히나 인사권을 가진 단장이면 갈등이 있을 수 없는데, NBA 단장 중 유독 크라우스만 저렇게 사람들이 싫어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27] 어떤 면에선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을 본인이 그 못난 행실로 인해 다 떠안은 것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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