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승방략

덤프버전 :

1. 조선 시대 군사이론서
1.1. 개요
1.2. 내용
2. 조선의 방어 체제
2.1. 개요
2.2. 조선 전기 병역 제도 및 군사 조직
2.4. 진관체제의 붕괴
2.5. 제승방략의 성립
2.6. 심각한 결함
2.7. 임진왜란과 제승방략의 붕괴
2.7.1. 임진왜란 시기 나타난 문제점의 배경
3. 관련 문서



1. 조선 시대 군사이론서[편집]


制勝方略
파일:제승방략2.png 파일:제승방략1.jpg

1.1. 개요[편집]


2권 1책 활자본. 제승방략은 원래 2권 1책의 목판본으로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가 처음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1588년(선조 21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1]이 증보(增補)하였고, 현재 전해지는 책은 1670년(현종 11년) 함경북도 병마평사 이선(李選)이 중간한 것이다. 최초 저술자가 김종서로 알려진 것은 이선의 발문(跋文)에서 비롯되었다.

1.2. 내용[편집]


함경도의 8진인 경흥진(慶興鎭), 경원진(慶源鎭), 종성진(鐘城鎭), 온성진(穩城鎭), 회령진(會寧鎭), 부령진(富寧鎭), 길주진(吉州鎭), 경성진(鏡城鎭)의 산천, 부락, 보루의 위치와 공수(攻守)의 요해(要害)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다음에는 8진의 경비대가 지켜야 할 군무 29조, 금령(禁令) 27조를 적어 놓고, 온성, 종성, 회령, 경원, 길주, 부령 등 6진에 있는 군관들의 관명을 써 놓았다.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列鎭防禦)가 실려 있다. 경흥의 서수라보(西水羅堡)부터 시작하여 부령, 종성, 명천, 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하고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산수, 봉수 및 적로(賊路)와의 거리와 추격, 요격의 요지 등과 고사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히 경흥, 경원 등에는 창상곡(倉上穀) 및 군량곡의 남아 있는 양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다음 제2권의 후반부에는 군무(軍務)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대분군(六鎭大分軍), 삼읍분군(三邑分軍),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 비국회관(備局回關), 방량식(放量式)이 수록되어 있는데, 군무 29조는 각 진, 보의 군사들이 지켜야할 수칙, 적병의 침구(侵寇) 소식을 들으면 각 진, 보의 군사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소식을 보고할 것인가와 군비(軍備), 천기(天氣) 등에 대한 내용이다. 금령 27조는 엄격한 법령으로 침구시(侵寇時)에 기간 내에 달려가 구원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다스리며 각기 그의 소속장(所屬將)을 잃었을 때에는 그 아래 장수를 참(斬)하며 이름을 불러도 응하지 않는다거나, 기한 내에 이르지 않는다거나 군호(軍號)가 불명하거나, 함부로 떠들고 웃고 상관을 무시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거나, 요망한 말을 하여 군심(軍心)을 어지럽히거나, 남의 재물, 남의 수급(首級)을 도둑질 하거나, 꾀병하여 전선에 달려가지 않거나, 부상하여 죽은 체 하였다가 도망하는 자 등은 모두 참하며, 호물(胡物)을 탐하거나, 군중(軍中)에서 큰소리로 부르는 자 등은 벌한다는 벌칙 조항 등이다.

다음으로 육진대분군은 6진의 관직과 부서 등의 명칭을 수록한 것이고, 방량식은 군사와 군마에 대하여 군량 지급량을 명시하였는데, 예를 들면 인마(人馬) 1만의 하루 소요량이 쌀 533석 5두와 콩 333석 5두라고 되어 있다. 책 끝에는 1670년(현종 11년)에 이선이 쓴 발문이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국경 방어 태세 및 군사 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규장각에 원본 2부가 보관되어 있고,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2호로 영인했다.

2. 조선의 방어 체제[편집]



2.1. 개요[편집]


위의 책과 동일한 한자를 쓰는 조선의 방어 체제.

간단하게 설명하면 평시에는 지휘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다가, 적의 대규모 침공이 있으면 각 지방에 있는 군대가 미리 정한 지점으로 모인 다음,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지휘관이 되어 전장으로 나가는 방어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이 체제는 임진왜란 때 단점이란 단점은 모두 보이면서 사실상 관군의 전투력이 제로에 가깝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데, 자세한 사정은 아래와 같다.


2.2. 조선 전기 병역 제도 및 군사 조직[편집]


일단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의 병역 제도 및 군사 조직은 아래와 같다.
  • 병역 제도

  • 양인개병제: 양인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닌다. 16세 ∼ 60세까지의 양인(良人)인 정남(丁男)이 병역 의무를 진다. 양인은 천민을 제외한 나머지 신분(양반,[2] 중인, 평민)을 모두 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평민들만 군역을 수행하게 되었다.

  • 정병과 보인: 정남은 정병과 보인으로 나뉘어 군역을 수행했다. 정병(正兵)은 현역 군인으로 일정 기간동안 군대에 복무하며, 보인(保人)은 정병이 복무하는 동안 정병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했다. 이를테면 사회복무요원 등이 따로 취직해서 돈을 벌어다가 현역병에게 월급을 주는 식이다.[3]

  • 병농일치제: 따로 직업군을 두는 게 아니라, 자기 땅 가진 농민들이 평소엔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 동원되어 전쟁을 수행한다.

  • 군사 조직

  • 중앙군: 오위로 편성, 취재를 통해 선발된 직업 군인인 갑사와 일반 백성 중 군역을 지는 정병으로 구성되었다.

  • 지방군: 각 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파견했고, 읍에는 읍성(邑城)을 쌓아 주로 외적의 방비에 대비했다. 지방군 역시 위-부-통-여-대-오로 구성된 오위진법에 따라 편성되었다. 병력의 대부분은 정병이었으나, 국경지대에는 갑사의 일부인 양계갑사[4]금군 소속 내금위, 겸사복 병력이 파견되기도 하였다.[5]

  • 지방군은 교대로 1년에 두 달씩 서울이나 지방에서 근무했는데 이를 번상(番上) 또는 수(戍)자리 선다고 했다.

  • 잡색군: 일종의 예비군.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 유사시에 병력으로 활용.

  • 세조 이후에 진관 체제를 실시. 이후 선조 대에 니탕개의 난을 겪고난 후 진관 체제가 제승방략 체제로 개편되었다.


2.3. 진관 체제[편집]


진관 체제는 각 지방에 주둔군을 두고, 해당 주둔군은 해당 진이나 관을 방어하며, 적의 대규모 침공시에는 진이나 관의 주둔군이 적을 막는 사이에 중앙의 중앙군이 응원군으로 달려오는 체제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이와 같다. 전국 행정 단위의 하나인 을 군사 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해,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수령이 군사 지휘권을 겸하게 하는 것. 예를 들면 현재의 수원, 성남, 화성, 오산, 용인, 의왕, 안산처럼 각 행정 구역이 인접해 있는 경우, 인구와 도시 중요성 및 규모가 가장 큰 수원이 주진(主鎭)이 된다. 두 번째로 큰 성남, 용인, 안산 등이 거진(巨鎭)이 되고, 의왕, 화성, 오산 등은 제진(諸鎭)이 된다. 이에따라 경기도지사가 평소 행정 기능을 담당하다가, 전쟁 등이 일어나면 그대로 군사 지휘권을 갖는다. 당연히 거진과 제진은 주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거진부터는 독자적 군사 작전권이 있어 유사시엔 독립 군사 행동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말해 자연 향토 단위의 소규모 방어 위주 전략 체제다.

진관 체제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 각 행정 구역이 자체적으로 군사 기능을 담당하므로 교통통신이 제한 되더라도, 해당 고을 수령의 강력한 통제 아래 밝은 지리를 이점으로 지형적 특성에 맞는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

  • 한 진관이 패퇴하면 다른 진관이 방위의 공백을 메워서 싸우게 하는 등, 후방 방어선이 촘촘히 형성돼 방어에 유리하다.

  • 병농일치와 양인개병 원칙이 지켜질 경우, 대규모의 군대를 가장 저렴하게 유지 가능하다. 실제 각 지방에 주둔한 주둔군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장비를 마련하며, 농한기에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진관 체제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 소규모 지역 향촌 방위 개념이어서 대규모 침공에 불리하다. 즉, 각 진의 방어능력을 넘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적 병력이 쳐들어오면 한큐에 지역 전체의 방위가 무너지면서 각개격파된다. 이는 을묘왜변때 대규모 병력이 쳐들어와 전라도 지역을 휩쓰는 것으로 현실화된다.

  • 병농일치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제도라, 해당 제도가 붕괴되면 실시가 불가능하다.


2.4. 진관체제의 붕괴[편집]


16세기 전후 대규모 공신층 양산(훈구파)으로 인해 대규모 면세 토지 집적 현상이 일어나면서, 진관 체제는 근간에서부터 붕괴되고 만다. 면세 토지가 늘어나니 자연히 세금은 자영농들이 가진 비면세 토지에 집중되고, 연산군 이래로 조정과 왕실의 방만한 재정 운용과 과도한 재정 확대로 인해 쉽게 세금을 늘릴 수 있는 공납을 남발하였으며, 이는 15세기까지 조선이 견지하던 토지 중심의 조세 정책을 인구수 중심의 조세 제도로 바꾸는 결과를 불렀다.(토지 규모, 즉 자산이 아닌 그냥 사람 머릿수에 세금을 매기면 당연히 지주층에게 유리하다.) 그 결과 자영농들이 양반 관료에게 스스로의 토지를 바치고 소작농이 되거나(지주전호제), 아예 숨어버리는 경우(도호)도 많았다.

지주의 보호를 받는 전호는 세금 문제 뿐만 아니라 병역에서도 상당히 자유로웠고, 아예 숨어버리면 당연히 병역과는 무관해진다. 그 결과 군사의 군역 부담을 지원해주던 보인(保人)이 줄어들고, 병사들의 질도 떨어지게 되었다. 진관 체제는 이러한 변화를 견뎌낼 수 없다. 진관 체제는 병농일치, 양인개병을 기반으로 성립한 것이라, 자영농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것이 필수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농민층의 분화는, 진관 체제를 근간부터 무너트린다.

상비군 유지에 필수적인 기존 구조의 붕괴로 병력이 줄어드는 와중에, 16세기 중엽을 전후로 북방 여진족과 왜구의 약탈로 지방 방어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 조선의 군사력은 다각적으로 떨어지는데, 지방 약탈은 점점 심해진 것이다. 왜구삼포왜란 당시 40척, 사량진 왜변 당시 20척, 을묘왜변 당시엔 70척에 달하는 대단위 함대를 구축하여 경상도, 전라도 일대를 습격했는데, 이는 각각의 진포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부대였다. 거기다 여진족은 니탕개의 난 당시 1만에 달하는 대규모 전사 집단을 편성하여 경원성을 함락시키는 등, 외곽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약탈꾼들의 규모가 갈수록 커져갔다. 이는 조선으로 하여금 대규모 침략 대비를 위한 새로운 방위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안겨주었다.

2.5. 제승방략의 성립[편집]


결국 조선 초의 진관 체제는 16세기 잦은 왜변으로 인하여 방어전략을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전시에 여러 지역의 군을 합처 대규모 부대를 편성하는 방위체제(분군법(分軍法))로 변화하게 된다.

  • 조선의 세율은 타국에 비해 낮았고[6], 면세토지가 급증해 세수가 더욱 악화하면서 전근대 시절의 끔찍한 상비군 유지비를 감당할 수가 없게되었다. 당연히 상비 병력의 수 자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 애초에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해적선 70척이나 유목민 1만명 같은 규모를 상대할 병력을 지방 전체에 깔아둘 수는 없다.
  • 즉, 약탈꾼들을 모든 땅끝에서 차단하려면, 허공에서 병력을 소환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 그런데 조선은 막강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전근대 국가로서는 기적적인 수준의 징집속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군대는 부족하지만 가용인력은 넉넉한 희한한 특징을 가젔다.
  • 그렇다면 그냥 허공에서 소환하자!

...좀 황당하긴 해도, 이건 로마 이후의 유럽에서도 볼 수 있었던 흔한 병력 동원 방법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지방에 임의적인 병력 동원력을 가진 인사가 있으면 반드시 반란 분자로 변질되기 마련이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인 조선에서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이런 지방 병력 동원권자들은 중앙 정부의 직할 지휘관들에 비해 전문성이 훨씬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었다. 애초에 기존에 허공에서 병력 소환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지방 관리들이 징집한 병력을 제대로 통솔할 수가 없는 것도 이유였다.

즉, 제승방략은 병력 충원은 지방에서 충당하되, 전문 지휘 인력을 중앙정부에서 책임지며, 또 전문 지휘인력이 병력을 가지고 배신을 때리지 못하도록 중앙에 묶어두는, 지방 방어와 동시에 지방 통제를 겸하는 전략인 셈이다.

2.6. 심각한 결함[편집]



  • 치밀한 동원 계획과 발달된 수송 수단 하에 동작하는 총력전까지 감당 가능한 현대적 동원 계획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전근대 주먹구구식 동원 체계의 한계
    • 평시에 상주하는 상비 병력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동원령을 통한 병력 확보 전략에는 반드시 동원 시간이 고려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반드시 상비 병력이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주어야 한다.[7] 제승방략 제도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다. 매우 요새화된 환경에 정예 병력이 상주 중인 북방이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8], 타 지역들은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다.
    • 현대적 동원 계획표가 있는 것이 아닌 전근대적 주먹구구식 징집의 한계는 명확했다. 치밀하게 구성된 동원 계획 하에서 동원 대상을 제대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서류상으로 이름만 써서 올린 형식에, 주기적으로 소집시켜 정비하는 제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니 동원 대상을 파악해 끌고오는 것 부터가 곤욕스러운 난제. 동원 명령을 무시하고 탈영 해버려도 그걸 다시 잡아오기는 커녕 탈영했다는 걸 파악하기 부터가 곤란하다.

  • 징집병 부대 결성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조선의 행정력으로도 없는 군대를 갑자기 뿅하고 만들 수는 없었다.
    • 상술했듯 언제까지나 전근대적인 주먹구구식 동원 체계였기 때문에 사람을 억지로 끌고 오는 것 부터가 대책이 안 서는 고역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가용 인력의 대부분을 동원하는데 성공한 것 조차 기적이다!
    • 징집병을 결집하는 속도도 느려터젔지만, 지휘관 파견 속도는 그 보다도 느렸다. 징집병이야 징집령 내려놓으면 어떻게든 모인다 처도, 중앙에서 던저줘야하는 지휘관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은 교통통신 체계가 엉망이었고 한반도의 괴악한 지형까지 더해저 갑자기 수도에서 사람 한번 오갈려면 영겁의 세월이 필요했다. 당연하지만, 지휘 총책임자가 없는 부대, 그것도 징집병 부대는 지휘관이 없으면 모였다가 그냥 알아서 해산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실제로 상주 전투에서 이일은 대구에 모아놓은 병력이 이일을 기다리다가 도착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그냥 해산하는 바람에, 별다른 병력 충원 없이 상주 전투를 치뤄야만 했다.
    • 넉넉한 종심의 부재 제승방략이 근본부터 잘못된 발상인 이유이다. 한반도 지형이 험하기야 하지만, 악명높은 제국의 무덤들 마냥 답이 안 나오는 지형은 또 아니다. 생각보다 산지 내부에 우회로가 굉장히 많다. 동쪽은 산지이지만 적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서쪽으로 진격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용케 징집 후 빠르게 지휘관 배치까지 되었다쳐도, 적은 이미 종심으로 침투한지 오래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종심이 넓으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 경우에는 아예 지휘관 파견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어 제승방략의 수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 징집병의 훈련 수준에 있어서도 지휘관이 상주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 병력과 지휘관이 단 한번도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다. 똑같은 징집병도 이 지역의 사령관은 "누구누구다"란걸 알고 징집된 것과 허공에서 지휘관이 뿅! 하고 나타나는 것과는 통제 효율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징집병에게 제대로된 훈련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막되어먹은 발상이지만, 그렇다 해도 최소한 평소에 "무슨무슨 나으리께서 이리저리 하래~"라고 듣고 지내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난다.
    • 지휘관이 자신이 평시에 관리하는 부대를 가지고 있는 지휘관인 경우에도 이 문제는 여전했다. 자신이 평소에 굴리던 병력과 징집병을 제대로 병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순히 징집병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지만, 지휘관이 징집병을 아예 믿지 않거나, 상비병이 징집병에 반발심리를 가질 수도 있는데, 이리되면 차라리 징집병만 지휘하고 있는 것 보다 못하게 된다. 실제로 신립탄금대 전투를 지휘할때 징집병으로 구성된 보병 예비대는 아무런 지휘를 받지 못하고 낭비되었다.
    • 기본적으로 지휘관이 낙하산(...)이기에, 당연히 해당 지휘관은 전투 지역의 지리를 모른다. 신립이 탄금대 전투 전까지 주로 활약했던 무대는 논농사 비중이 매우 적은 조선 북방이었고, 전투가 벌어졌던 때는 모내기가 막 끝난 즈음인 음력 4월 28일이었다. 이 무렵이면 논농사 지대 근방의 땅은 거의 수준이 되는데 하필 신립의 특기는 기병이었다.[9]
    • 조선의 놀라운 행정력 덕분에, 국토의 절반이 점령되고 수도까지 따인 상태에서도 조선의 동원 인력 최대치인 35만의 절반쯤 되는 17만명을 소집하는데 성공하긴 했다. 하지만, 일단 모인 병력이 어떤 이유에서든 흩어지면 다시 모을 방도가 없었다.
    • 한방에 한 도의 병력 자체가 날아갈 수 있다. 실제로 이일이 경상도에서, 신립이 충청도에서 대패하자 조정은 더 손도 못쓰고 달아나야 했다.
    • 지휘관의 유고 또는 부재시 차상급 지휘관이 신속하게 지휘권을 이양받을 수 있는 진관 체제에 비해 제승방략은 지휘체계가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다. 현지에서 병력 소집이 끝났더라도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2.7. 임진왜란과 제승방략의 붕괴[편집]


제승방략으로 완전히 개편된 것은 선조 중엽이었고, 이 체제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외적의 침입은 임진왜란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결국 이 체제는 무너진다.

꽤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데, 임란 초기에 병력이 제때 모이지 않았다거나, 장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각지의 병사들은 제때 결집했고, 각종 물자류 보급 또한 수량 및 품질의 관리가 기본은 되어 있었다.[10] 이는 조선의 우수한 행정 체계의 힘이다.

하지만 병사들의 훈련도는 그에 따르지 못했다. 거기다 최일선이었던 경상도의 경우, 일본군 침입 당시 경상 순찰사 김수는 대구에 경상도 병력을 모으고 이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대구에 당도했으며, 결국 대구에 모였던 경상도군 주력 부대는 전투 한번 못해보고 자체 해산되었다. 정작 이일이 상주에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코앞에 있었고,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경상도군은 없었다. 그래도 이일이 왔다는 소식에 다시 병력이 결집하여 6천여명의 군을 이루었지만, 결국 패배. 교전 직전 이일이 하던 것은 습진, 즉 진 짜기 훈련인데, [11] 진형 자체가 해당 병력의 전투력 자체였으므로, 그것조차 제대로 짜지 못한다는 건 기본적인 전투력 자체도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았다는걸 뜻한다. 이들이 말 그대로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민간인 수준임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이후에도 낮은 훈련도는 내란으로 단련된 일본군과의 맞대결에서 끝까지 문제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측은 몇차례에 걸처 만 단위 이상의 병력을 집결해 일본군과 야전을 시도한 바 있다.[12]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이 겹치면서 붕괴되고, 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서쪽으로는 평양까지, 동쪽으로는 함경도를 장악하고 만주까지도 일부 부대가 침입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이 겹친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에서의 경상도 군 해산, 이일이 패한 상주 전투, 신립이 지휘하여 싸그리 전멸한 충주 탄금대 전투라 하겠다.

현령이나 현감 등의 지역 지휘관들의 자질에도 큰 문제가 보인다. 전란 초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열심히 싸웠으나, 용궁 현감 우복룡은 하양 군사 수백 명이 단순히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위해 죽였다. 징비록에 상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양 군사들은 소집 명령에 따라 집결지인 대구로 서둘러 가는 중이었다. 우복룡이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으니 너희가 역적 모의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꾸짖자, 하양 병사들은 공문을 꺼내어 변명하려 했으나, 우복룡은 일방적으로 반란군으로 몰아 죽이고 상부에 반란을 일으키려던 하양 군사들을 토벌했다고 보고했다.[13] 경상 감사 김수가 이를 공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우복룡은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가 되었다. 졸지에 유가족이 된 하양의 과부들과 고아들이 사신이 올 때마다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우복룡이 이미 명성이 있어서 이들을 변호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 일로 인해 광해군 때 파직된다.

신립이 삼도순변사로 임명돼 이일의 뒤를 따라 남하 준비를 할때에도 마찬가지 문제는 발생한다. 우선 군관을 구하기 힘들었다. 신립이 지휘해야 하는 부대의 장부상 규모는 10만여에 달했으며, 이를 장악하고 통제하려면 그만큼 많은 군관이 필요한데 그걸 구하기 힘들었던 것.

또한 자신이 지역 군과 합류하기 전에 일본군과 조우할 것을 대비해야 했다. 신립이 임지로 향하면서 인솔한 군관은 88명 뿐으로, 하급 지휘관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이일 본인도 지원 병력으로 함께 남하할 정예병을 뽑고자 하였으나, 징병 문서에는 훈련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과 유생들 뿐이어서 3일을 지체하다가 결국 뽑지 못하고 먼저 남하하며 별장 유옥을 남겨 병력을 뽑아 뒤따르게 하였다. 이일이 3일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대구에 모인 경상도 병력이 와해되기 전에 병력을 인수하여 대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립은 경군을 자신과 동행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이일보다 뒷빽이 든든했던데다 당시 조선의 제일가는 장군이였던 신립의 요청이니만큼, 결국 조정에서는 법도까지 어겨가면서 선조가 직접 나서 경군을 차출한다. 체찰사로써 남하할 것을 준비하던 류성룡이 지휘하기 위해 편성한 장사 8천 명을 신립에게로 돌린 것.[14][15][16]

그리고 신립은 충주에서 일본군과 조우한다. 이때 신립은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군대의 극히 일부분인 충청도군(연려실기술에 따르면 8천)과만 합류했던 상태였고, 북상하던 전라도군과는 미처 합류하지 못했었다.[17] 거기다 훈련도가 형편없는 군대의 상태는 조령에서 방어선을 형성하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했으며, 조령으로만 적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3개의 진격로로 나뉘어서 한양으로 돌격하는 상황이라 빠르게 하나씩 각개격파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쨌든 높은 기병의 비율을 믿고(일단 경군들에게는 한성을 출발할때 전마가 1필씩 지급되었다.) 야전을 걸었으나, 지리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실책이 겹쳐 전멸당하고 만다.[18]

이런 혹독한 사태를 겪은 후에야 류성룡(柳成龍)에 의해서 진관 체제의 재정비론이 거론되었고, 이후 지방에 속오군(束伍軍) 등이 설치됐다. 하지만 속오군 또한 임시 방편이었던지라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문제점을 드러냈으며[19], 양반 관료층의 토지 겸병 문제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체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엔 없었다. 수도에 오군영을 두고 막대한 전비를 투입해 이를 유지하는 체제로 갈 수밖엔 없었다.


2.7.1. 임진왜란 시기 나타난 문제점의 배경[편집]


북방의 대여진족 전략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에, 조선이 가진 수많은 지리/정치/외교적 특이 조건이 죄다 악조건으로 작용하면서, 제승방략은 제대로 동작할 수 없는 기형적인 전략이 되었고, 가용 인력의 절반이나 징집에 성공한 것이 기이할 지경이었다.

제승방략 체제가 기존의 진관 체제를 대신한 조선의 국방 체제가 된 것은 니탕개의 난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니탕개의 난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 시대 최대의 외부 침략으로, 니탕개는 최대 2만으로 추정되는 여진족 중기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 때 신립과 이일이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사용된 전략이 니탕개의 난과 이후 대북방 전략에서 사용되었다. 대북방 여진 전략으로는 제승방략이 제대로 작동했다. 제승방략이 본격적으로 조선의 전략이 된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때이고, 실행자가 신립과 이일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면전과 북방 여진족 침투에 따른 국지전은 전혀 달랐다. 여진족의 병력은 중기병을 동원한 소수 정예에 가까웠고, 절대 상대하기 쉽지 않은 까다로운 적이었으나,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보병전에 대한 정석적인 투자가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이는 전면전 상황시 기동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조선의 상황은 서유럽보다는 동유럽의 동로마에 더 가까웠다. 기병 위주의 테마군을 운용한 동로마 제국에서 비슷한 예시를 찾을 수 있는데, 보병은 오히려 전면전 상황시 공격적인 기동에 필수였다. 즉, 상대가 정석적인 조직화가 되어 있을수록, 반격을 비롯한 공세를 펼쳐야 하는 상황일수록 보병의 중요성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는 서유럽의 기사 위주 전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인데, 사방에서 약탈꾼들이 침투하면서, 유목민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도로 조직화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이슬람 세력도 같이 있는 영향이 컸다. 또한, 서유럽의 기사 위주의 전투도 플레이트 아머라는 사기템의 출현에 따른 "기병 돌격으로 보병 방진을 박살내는" 기형적인 현상 때문이었지, 단순히 상대가 정예 기병 위주로 들어오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서유럽에는 용병 운용이 기본이었기에, 전문 보병 전력은 각종 용병대로 충당하였으므로, 보병이 버려진 것도 아니었다.

조선은 대여진 전략을 전면전 상태에서도 고수하였다.[20] 그리고 상대는 보병 위주였기에 이미 먹힐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총기를 고려해도 아직 기병의 비중이 굉장히 큰 시기였기에, 제대로된 충격기병이 있었다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보병 상대로도 충분히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나, 당시 조선의 주력은 기병으로 기병을 잡는데 집중되어있어 충격기병이 없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제승방략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준 신립, 이일 등 장수들의 발상도 문제였는데, 북부 여인들은 남부 장정보다 나으니 북부 여자들을 징병하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기에, 조선 시대 하급 군관의 산실과도 같았던 북방에서는 장수만 있으면 농민들을 긁어모아도 정규병력에 준하는 병력이 나올 수 있었으나, 나머지 지역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신립/이일 등은 북방을 조선의 다른 지역과 동일시해버렸다.

더군다나 이들은 우수한 인적 자원이긴 해도 다른 지역 지리에는 문외한이었고, 한반도 남쪽에선 사방으로 우회해서 진격하는 왜군 상대로 정상적인 방어 계획 수립 조차 하지 못하고 헤매었다. 더군다나 지리에 무지하니 기병의 정상적인 운용조차 불가능했고, 이는 결국 신립의 대패로 이어젔다.

이러한 문제점이 대두된 정치/외교/지리적 이유를 살피면, 조선이 세력투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한반도가 통일된 후 외적은 북방에서나 침입했기에, 북쪽 말고는 육군을 보낼 일이 없게 되었는데, 조선이 명나라와 우호적 관계가 되면서 전면전이 일어날 일이 없어졌다. 따라서 육상으로는 세력 투사가 불가능하니, 군사력 증강 의지를 일으킬 곳은 "해상"만 남게 되는대, 하필 명나라가 해금령을 때려 해상 무역을 봉인해버린 것이다. 이러니 군사력을 증강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조선 정부는 창업군주인 태조부터가 위화도 회군이라는 반란으로 고려의 실권을 잡은데다 그 태조도 결국 1차 왕자의 난이라는 반란으로 실권을 잃는 등 국가의 초창기가 반란으로 얼룩졌던 기억 탓에 광적으로 반란을 억제하려 했다. 제승방략 특유의 지휘관 파견제도 자체가 반란을 막기 위한 광적인 집착의 결과물이다. 동로마의 테마제도가 얼마나 많은 반란을 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현장에 동원권자를 두지 않는 것은 적절했으나, 제때 지휘관이 파견될 수 있어야 제 역할을 할 텐데, 왜란 당시 쏟아진 수많은 "의병을 가장한 징집병"만 봐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훤히 보인다.[21] 이러한 조선 정부의 반란억제 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이 지역 저 지역 부대를 막 섞어서 지휘체계를 꼬아놓는 행위는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 문제는 신미양요 때 까지 이어져, (미군이 보기에) "포는 무시무시하게 잘 쏘는데 정작 육상 전투는 못하는" 해괴한 군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악조건을 우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면세 토지다. 전근대 국가에 있어 면세 토지의 증가는 곧 군사력의 증발이다. 로마 제국이 2천년 역사로 증명해보였고, 동로마가 최후를 맞은 후에도 프랑스의 그 악명높은 앙시앵 레짐으로 그 악독함을 찾을 수 있다.[22] 이 문제는 인류의 역사를 뒤엎은 인공 비료의 탄생 이전까지 완화될 기미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공산주의와 고전 자본주의 사상가가 입을 모아 그토록 증오한 것이 지주였고, 면세토지의 근원인 지주 문제의 영향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23]

3.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20:41:10에 나무위키 제승방략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임진왜란 초기 상주 전투탄금대 전투에 참여했던 경상병사 이일이 맞다.[2] 본래 제도상으로는 양반들에게도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양반은 본래 전, 현직 관료들을 말하는 것이며, 관직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병역 의무가 면제되었지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 다시 병역 의무를 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후 양반이 관직 여부와 관계없는 세습 계급화하며 이러한 원칙이 무너졌으며, 사실상 양반은 관직과 무관하게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이러한 부조리는 결국 세월이 한참 지난 흥선대원군 때나 가서야 시정된다.[3] 류성룡이 남긴 기록 중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 병력에 관한 기록 시무차자(時務箚子) 1594년 4월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의 군적상으로 정병은 7920명, 보인은 15,700명이 전부였다. 즉, 상비군은 7920명이고, 상근 예비역 또는 보충역에 해당되는 인원은 15,700명이었다는 뜻이다.[4] 이와 반대로 도성에 주둔하던 갑사들을 경갑사라 불렀다.[5] 우림위가 창설된 이유가 내금위, 겸사복 군병들 다수가 국경 경비에 투입됨에 따라 궁궐의 경계가 느슨해졌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6] 조선의 세금은 토지 1결당 4~20석이었고 이것도 나중에는 영정법으로 인해 아예 4석으로 고정된다. 기타 세금(공납, 군역 등)을 포함해도 약 20% 정도로 당시 일본이 대체로 전국시대에 칠공삼사(세율 70%)였고 에도막부 시절에 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많이 봐준게 사공육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율이 엄청나게 낮은 것이다.[7] 이에 실패한 졸전 사례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프랑스가 있다. 당시 프랑스는 병력을 제대로 동원하기도 전에 파리를 빼앗기고 6주만에 항복하는 치욕을 겪은 바가 있다.[8]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는 이괄의 난으로 인해 생긴 병력 공백으로 인해 바로 수도로 적이 몰려오는 사태를 일으킨 바가 있다. 이때는 제승방략이 이미 폐기된 시기였지만 근왕군이 남한산성을 구원하려 오기도 전에 패전한 점에서 결국 제승방략 시절부터 이어저온 고질적 문제가 그대로 다시 드러난 것이다.[9] 모내기를 하려면 보통 물을 대놓고, 건식 재배라 하더라도 마른 늪지 수준으로 땅을 푹 적신 후에 파종한다. 또한 당시 탄금대 일대는 강변이라 갈대는 물론이고 수풀이 우거진 지대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립이 주로 달리던 조선 북방의 평원과는 자연환경 자체가 다른데도 신립은 충주성 주변 지리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던 바람에 파멸을 자초했다.[10] 조선의 대표적인 졸전으로 평가받는 용인 전투에는 무려 5만명이나 모였다. 이는 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 기준으로 2~3배 규모라고 보면 된다.[11] 기관총과 현대식 화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진 짜기가 매우 중요한 전술 능력이었고, 근대의 전열 보병이 위세를 떨친 것 역시 총기의 낮은 신뢰도를 만회하기 위해 과거의 진형을 그대로 적용한 것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이 맹활약하기까지 진형은 전술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현재에도 병역 자원이 훈련소에 입영하여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제식훈련이다.[12] 대표적으로 용인전투.[13] 우복룡의 이같은 미치광이 같은 행동은 원균이 조선 백성 민간인 머리를 잘라 수급이라고 보고한 짓 처럼 조선 지휘관들 중에서 종종 보여지던 행위였다.[14] 류성룡은 이에 대해 징비록에 신립이 모으려 하니까 안모여서 내가 나서서 모았다고 적어놓았다.[15] 장사라 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경군과 갑사에 준하는 병역 경험이 있는 훈련된 병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전마가 1필씩 지급된 것으로 보아 승마 경험이 있는 병력으로 볼 수 있고, 모든 인원에게 전마가 지급되었다는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참하관도 상당수 포함된 인원이라 보아야 타당하다. 즉 현대의 기갑여단 수준의 병력을 붙여준 셈.[16] 무과 급제자들은 당연스럽게 승마술이 기본 소양이었고, 북방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갑사들의 경우도 여진족을 상대하였으므로, 이들은 기병으로 복무한 경우가 흔했다고 볼 수 있겠다.[17] 근데 이쪽과 합류 못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병력들은 나중에 용인 전투, 이치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쪽에 있던 인물들 중 하나가 권율임을 생각하면... 이때 합류했다가 신립과 함께 전멸했다면 이후 반격전의 주축이 되는 전라도와 수군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을 수 있다.[18] 싸움이 벌어진 달천 평야와 탄금대 일대는 분명 평탄한 땅이었지만, 시기상 논농사가 시작된 때고 강변이었기 때문에 질퍽거릴 수 밖에 없어 기병의 기동력이 극히 저하되는 곳이었다. 또한 기록상 전투 초반에 적전 도주한 이일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충주성이 점령된 이후 조선군이 포위되어 출전했던 전 병력이 몰살당했다고 본다. 군사적 의미에서의 '전멸'이 아닌, 진짜 모조리 죽었다는 뜻의 전멸(全滅)을 한 것이다. 말을 탈줄 아는 장사 8천명 + 충청 지방의 소집병 8천명의 전사율이 99%라는 말이다.[19] 대표적인 예가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이다[20] 조선은 분명히 왜란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21] 소집 병력이 지휘관이 오기전에 적을 만나 증발. 이후 의병장들의 노력으로 다시 모여서 의병이 된다.[22] 서유럽식 해결법은, 정부가 을 엄청나게 진 다음 파산으로 넘기기인 경우가 많고, 그 대표주자가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재정 파탄이다.[23] 오직 농업인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전의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