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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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1. 개요
2. 구성과 내용
3. 편찬시기와 동기
4. 출간과 대중의 인지도
5. 문제 출제 유형


1. 개요[편집]


고려시대사서이자 서사시. 1287년(충렬왕 13)에 이승휴가 지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는 역사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역사책, 역사시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분류를 따른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 따라서 제왕운기를 삼국유사삼국사기와 달리 역사 분야가 아니라 국문학 분야 서가에 비치하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2. 구성과 내용[편집]


전 2권(상권·하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판본이 보물 제418호, 895호, 109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말선초 시기에 인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기록상 1360년, 1413년 중간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는 고려 후기의 관료이자 문인 이승휴(국역 고려사 열전 링크)다.

상권은 삼황오제부터 원의 흥기까지 중국사를 다루고 있다. 하권은 한국사에 관한 것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삼한과 삼국은 모두 고조선의 단군이 시조라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단군신화에 대해서도 "환웅이 자기 손녀에게 약을 먹여서 사람으로 만들고 단수신(檀樹神)에게 시집보내 단군을 낳았다"는, 삼국유사와는 다른 전승을 싣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또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승휴 본인이 관료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요하 지역의 큰 무덤이 부여 부마의 무덤이라는 현지인의 증언을 기록하고 당나라의 대학자 가탐의 저술[1]을 인용하여 부여와 고조선의 연계성을 기록하는 등 한반도 북부~요령 일대의 역사를 기록한 데에 있어서는 현지조사를 하지 못해 내용이 다소 부실한 삼국유사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

다만 주요 지명을 기록함에 있어서 한반도 내에 짜맞추려 한 것이 흠이라면 흠. 예를 들어 동명왕이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이 평양이라거나 비류국이 지금의 평안도 성천군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발해의 개국에 대해서도 주(周) 측천 원년 갑신(684년)으로[2]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17년 뒤(羅之滅麗後十七年也)"라고 했다.(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서기로는 668년이므로 17년을 더하면 실제로는 685년) 그런데 재미있게도 측천무후 갑신년인 684년은 신라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인 보덕국이 신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멸망한 시점이기도 하다. 발해와 보덕국 사이의 뭔가 연관점을 이승휴가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지만 현재 사학계에서는 속일본기의 기록을 따라 발해가 698년에 세워졌다고 보고 있다.

3. 편찬시기와 동기[편집]


1287년 편찬 당시 이승휴는 1280년 충렬왕에게 실정과 부원세력들의 폐단들 10여가지를 상소했으나 파직되어 은둔했는데, 제왕운기는 이승휴가 어려운 시기에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무신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여몽전쟁 등 연이은 난세에서 유교적 이념과 국가질서회복을 역사에서 제시하려던 것이다.

그 외에 이승휴가 원나라에 2차례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기 때문에 원나라에 의해 고려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을까하는 위기의식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일연삼국유사와 동기가 유사하다.


4. 출간과 대중의 인지도[편집]


제왕운기는 1287년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후 1360년(공민왕 9년)과 1413년(조선 태종 13년) 재발간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77년 아세아문화사에서 한 번, 1991년 을유문화사에서 한 번 출간되었지만 이 판본들은 재고가 거의 없어 도서관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고, 한자가 많아 읽기도 힘들다. 그나마 시중에 재고가 남고 한글로 읽기가 편한 것은 1999년 역락에서 출판한 번역본이 있지만, 상편 부분의 한자 몇몇이 군데군데 괴상한 특수문자 오타가 있다. 또 도서관 측에서는 제왕운기를 역사가 아닌 문학으로 분류해 두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다. 링크 참고

인지도의 경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비해 낮다. 삼국사기의 경우 엄연히 정사고, 삼국유사의 경우 삼국사기에서 없거나 부족한 기록들[3]이 많이 있어 조선조에도 허황되어 믿기 어렵다면서도 많은 사서에서 인용되고 현대에 와서도 두 책은 번역본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제왕운기는 국문학상의 가치는 높은 데 비해 그다지 인지도가 없고 앞에서 다루었듯이 번역본도 드물다. 문서가 형성된 시점만 봐도 앞의 두 책은 리그베다 위키 시절부터 있었지만 제왕운기는 많이 늦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해 분량이 적은데다가 역사책이 아닌 시집의 형태를 띄고있다는것이 가장 클것이다.


5. 문제 출제 유형[편집]


치사하게 낼 경우 충렬왕 때 이승휴가 편찬했지만 이승휴의 이름을 바꾼다든지 충렬왕이 아닌 충선왕 기타 등등 이름을 바꿔서 출제되는 경우가 있다.[4] 이 정도면 정말 더럽고 치사하게 출제하겠다고 마음 먹은 거다.[5] 수능이나 한능검 수준을 기준으로 고려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를 문제로 낸다면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우선 순위이므로 제왕운기를 출제한다는 것부터가 마이너한 선택인데, 저자나 왕 이름을 바꾸는 식으로 출제한다는 건.... 또 발해를 한국사로 인식한 최초 역사서[6]로서 우리 역사를 중국과 대등하게 비교하였다는 특징도 선지로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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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현재 사라짐.[2] 측천무후가 주를 선포하고 황제가 된 것은 서기로는 690년의 일이고, 이 해가 측천무후의 원년이라고 해도 690년은 간지로 무술년이지 갑신년이 아니다. 다만 684년은 측천무후 자신이 당중종을 폐하고 당예종을 즉위시켜 자신이 섭정을 시작하고 측천무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이경업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정의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해다.[3] 한 예를 들면 가락국기.[4] 충선왕 충렬왕은 두 왕의 몽고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충선왕은 본인이 원나라의 왕위쟁탈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심양왕을 겸하고, 원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림원을 설치하는 등의 그나마 자주성을 회복하려하는 시기였는데 반해, 충렬왕 대에는 몽고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박은 '충'자 돌림이 시작된 왕이었고, 결국 돌려받기는 했으나 여요전쟁에서 힘들게 얻어낸 강동6주 일대가 동녕총관부로 송두리째 떨어져나가고, 관제격하 등 당할대로 당한 어려운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특정 국가의 역사서에서 민족적 자주의식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한 때는 해당 국가가 타국에 의해 자주성을 침해당할 때이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신채호와 박은식의 민족주의 사관이 왕성해진 것을 떠올려보자. 제왕운기가 민족적 뿌리를 찾으려는 내용이 담겨있는 만큼 그것이 원 간섭기 중 가장 굴욕적이었던 충렬왕대에 나온 것을 결합시켜서 해석한다면 필연적인 전개임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같은 왕대에 나온 삼국유사가 최초로 한민족의 상고시절 역사까지 기록해가면서 그 기원을 밝히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더럽게 출제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5] 순경 공채에서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문제를 출제한 적이 있다. 오답률이 높았지만 문제 퀄리티도 낮고 기출 문제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 지 강사들도 수업하면서 이런 기출이 있었다 정도로만 언급하고 문제 출제자를 극딜하고 넘어가거나 그냥 기출 언급없이 개념을 꼼꼼히 설명해주는 정도로 넘어간다.[6] 이것만 보면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조선 후기 유득공발해고와 혼동할 수 있다. 함정에 빠지지 않게 조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