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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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데이비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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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gles_Champion_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5 KBO 리그 득점왕

한화 이글스 등번호 25번
김대헌
(1996~1997)

데이비스
(1999~2002)


이양기
(2003)
이양기
(2003)

데이비스
(2004~2006)


크루즈
(2007)




파일:jy97Kb9.jpg

제러드 제이 데이비스
Gerrod Jay Davis

출생
1970년 10월 3일 (53세)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포지션
중견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팀
한화 이글스 (1999 ~ 2002)
술탄네스 데 몬테레이 (2003)
코르도바 까뻬떼로스 (2003)
한화 이글스 (2004 ~ 2006)
세인트폴 세인츠 (2007)
아길라 데 베라크루즈 (2007)

1. 개요
2. 선수 경력
2.1. KBO 리그 진출 전
3. 이후
4. 기타
5. 통산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데이비스 3루 돌다.png
그의 상징인 거수경례 세리머니
한국프로야구에서만 7년 동안 뛴 외국인 타자로 한화 이글스의 대표적인 외국인 선수이자 타이론 우즈, 에릭 테임즈, 펠릭스 호세와 더불어 현재도 외국인 타자 이야기가 나오면 자주 언급되는 선수이다. 타격, 주루, 수비[1]가 모두 우수한 다재다능한 선수로 주 포지션은 중견수.

외국인 선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KBO 비율 스텟 집계 기준인 통산 3,000타석을 넘겼고, 통산 타율 3위, 장타율 3위[2]라는 기록을 남겼었다. 5시즌을 뛴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은 밀리지만 통산 경기수, 타석, 타수, 안타, 2루타, 타점, 득점, 루타수, 도루에서 외국인 선수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스탯티즈 WAR도 36.64로 2위인 우즈와 12가 넘는 차이를 벌린 1위다.

대표적인 별명은 '검은 독수리'와 더불어, 신라면을 좋아해서 한화팬들이 '남연이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화에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인 선수로 알려져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KBO 리그 진출 전[편집]


1989년 뉴욕 메츠에서 투수로 12라운드에 지명되어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마이너리그에서 뛸 적에는 코너 외야수였으며 파워는 거의 없고 발만 조금 빠른편인 마이너 레벨에서도 평범한 선수였다. 한국 진출 직전인 97,98년도에는 텍사스-루이지애나 리그에서 뛰면서 대활약하는데 특히 98년도에는 OPS 1.175의 놀라운 활약을 했다... 하지만 당시 해당 리그가 타고투저에다가 대부분 24세 이하 어린 선수들이 뛰던 리그라서 데이비스의 성적은 잘 봐줘야 상위 싱글A 정도 폭격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데이비스는 이 성적으로 한국리그에 이력서를 들이밀 수 있게 되었다.. 마이너리그시절 스탯

KBO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한 명인데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은 없다. 데이비스는 미국 시절 AAA 레벨에서는 출장 기회가 드물었고, 대부분 AA, 독립리그, 멕시칸리그[3] 코너 외야수를 보며 2할 중반대에 10홈런도 넘기기 힘들어 하던 평범한 마이너리거였다. 이런 선수가 KBO에선 리그 최강의 홈런도둑, 저격수 중견수이면서 리딩히터급의 타율과 30-30이 가능한 대괴수가 되었으니, 용병 신분으로 KBO에서 잠재력이 터진 드문 케이스이다.

참고로 데이비스가 입단한 1999년에는 비록 201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외국인 선수의 네임밸류가 크게 떨어졌지만, 펠릭스 호세, 에드가 캐세레스, 브레트 바워스, 조지 카날리 같은 메이저리그 출신도 있었고, 찰스 스미스 같은 멕시칸 리그 홈런왕이자 마이너리그 올스타 출신도 있었다. 반면에 데이비스의 마이너기록은 AA에서 한 해 OPS .800이 제일 좋은 기록(위에 나온 텍사스-루이지애나 리그는 독립 리그다.)으로 마이너 기록만 보면 당시 용병 중에서도 거의 최하 수준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KBO 리그 성적은 펠릭스 호세만이 비교할만 하고 다른 메이저 출신 선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뛰어났다.

1999시즌을 앞두고 펼쳐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도 데이비스는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다. 1라운드 지명선수들은 메이저 리그 올스타 출신 펠릭스 호세를 필두로 대다수가 메이저 리그 경력이 있는 선수들이었고 2라운드급 선수들 또한 마이너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검증된 선수들이었다. 데이비스의 경쟁력은 드래프트 참가 선수들 중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는 것 정도...[4]

그런데 대다수 팀들이 외면하던 데이비스를 유심히 지켜보던 감독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삼성 라이온즈서정환 감독이었다. 이승엽김기태 두 좌타 거포를 보좌할 우타자 찰스 스미스를 1라운드에 지명한 서정환 감독은[5] 2라운드로 제이 데이비스를 지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스보다 더 빨리 뛰고 결정적으로 데이비스는 못 보는 센터 내야수[6]도 볼 수 있었던 빌리 홀을 지명하기로 결정을 바꾸었고[7] 결국 데이비스는 거의 최하위 순번이었던 한화 이글스에 지명되었다.

그런데 이 결정은 한화 이글스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중반까지 한화를 먹여살리는 탁월한 선택이 된다. 당시 이희수 한화 이글스 감독은 용병 타자로 댄 로마이어를 점찍은 후, 나머지 한 명으로 그 때까지 '껄렁껄렁하다며' 다른 구단이 주목하지 않았던 데이비스를 지명한다. 독한 선수가 필요했다는 판단이었다고...


2.2.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파일:우승의 주역 데이비스.png
KBO 역사상 가장 장수한 용병타자이며 역대 최고의 용병선수를 뽑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한화 이글스의 레전드이다. 979안타[8] 591타점으로 역대 외국용병 안타와 타점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KBO 통산 타율 .313으로 30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 중 통산 타율 역대 9위에 올라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9]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홈런을 친 이후에 하는 거수경례 세레모니는 지금까지도 코치나 선수들에 의해 종종 전파되어오고 있다.

1999년한화 이글스에 입단해 2003년을 제외한 2006년까지 7년동안 한화에서 뛰어왔다. 입단 첫 해인 99년부터 30-30을 기록하며 또 다른 한화의 레전드 용병인 댄 로마이어와 함께 한화 이글스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고, 이후에도 기복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많은 사랑을 받은 용병 타자였다. 2002년 이후 계약을 끝내고 멕시코리그에서 1년을 보낸 뒤[10] 2004년 다시 한화와 계약을 맺었는데 이 때부터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예전같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11] 성실한 선수로 재탄생하며 한화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복귀 후에도 도루 갯수가 줄었을 뿐 타격면에서는 그래도 매년 20개 이상의 홈런과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했던 선수였다. [12]
특히 2005년에는 타율 2위와 출루율 2위, 장타율 3위에 홈런 4위의 기록으로 시즌 OPS가 0.958에 wRC+가 160.4나 되는 대단한 활약으로 커리어하이를 경신하며 첫 외야 골든글러브도 수상했는데, 이것은 2023년 현재까지도 한화 이글스의 마지막 외야 골든글러브 수상이다.[13] 심지어 2006년에는 리그가 굉장한 투고타저였음에도 21홈런을 때려내며 한국 나이 37살에 중견수로 wRC+ 147.3을 찍는 등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2006년 계약이 끝난 후 재계약을 하지 않았는데, 전년도에 비해 조금 떨어졌지만 여전히 준수한 성적이었음에도[14]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방출되었고, 여러 가지 뒷말을 낳았다.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많은 나이와 06한국시리즈에서 시리즈통산 1할을 친 부진. 그 외에 약물검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있고...여튼 그렇게 KBO를 떠나고 그 뒤 멕시칸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2008년 초에 은퇴했다.

멜 로하스 주니어에릭 테임즈와 같이 단일시즌에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준 적은 없었지만 중견수로 매 시즌마다 wRC+를 130 이상씩 얻어내는 리그 최상위급 타자였다. 장타력있는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중견수로 뛰었고 내구도와 수비력이 좋아서 더욱 가치가 높은 선수였으며 30-30 클럽에 올린 호타준족이기도 했다. [15] 특히 당시 전성기를 맞은 이영우송지만이 각각 좌익수와 우익수에 있었기에, 99~02년의 한화는 8개구단 최강의 외야 공격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훌륭한 성적과 달리 상복은 불운한 선수였다. 상술했듯 99년에는 타고투저로 더 괴물같은 성적을 낸 외야수들이 많아서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다면, 2001년과 2006년에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왜 골글 수상을 실패했는지 이해가 어렵다. 데이비스의 2001년 타출장은 0.335/0.404/0.558에 30홈런 96타점으로 굉장히 좋았으며, 세이버까지 파고들면 wRC+가 145.8이나 된다. 그럼에도 한참 성적이 떨어지는 정수근이병규(1974)에 밀려 수상에 실패했으며, 2006년에는 상술했듯 중견수로 wRC+ 147를 찍는 괴력을 보여줬음에도 한참 성적이 떨어지는 박한이에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라는 걸출한 외국인 선수를 보유했다는데 안심한 한화 구단은 중견수를 볼 수 있는 외야수 수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렇게 리빌딩을 소홀히 한 결과, 그 후폭풍이 계속 이어져 노장 강동우라든가, KIA 시절 코너 외야만 보던 김경언이라든가 추승우 같은 선수들이 중견수를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찌보면 지금 한화가 폭삭 망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물론 선수의 잘못은 아닌 리빌딩에 소홀했던 구단의 책임이다. 결국 중견수는 2014년 FA이용규를 영입하기전까지 한화의 고질적인 문제였었다. 다만 이용규도 영입 당시 29살이었던만큼 그리 오래 활약하지는 못했으며, [16] 2차 FA 계약 후 구단과의 마찰로 1시즌을 통으로 날리는 등 2021 시즌 후 키움으로 이적했다. 문제는 이용규가 그래도 외야 한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그 누구도 이용규를 대체할 외야수를 육성하지 못한 까닭에 2023시즌 현재까지도 한화의 외야는 어느정도 자리가 잡힌 내야진과 포수와는 달리 아직도 심각한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3. 이후[편집]


이인영 한화 스카우트 대리의 글에 따르면 제이 데이비스의 근황은 그리 밝지는 않은 듯 하며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고교 진학을 앞둔 아들이 농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아들로 알려진 앤서니 데이비스 주니어의 아버지는 당연히 앤서니 데이비스 시니어다. 아들이 그가 아니라 다른 선수인 듯 하다. 이인영 대리의 글에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앤서니 데이비스는 이미 University of Kentucky로 진학을 확정한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이후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를 거쳐 현재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소속의 파워 포워드로 활동 중이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파워블로거 박동희 기자 때문. 이 앤서니 데이비스가 어느 정도의 대선수로 성장했는지를 아는 현 시점에서 보면 참 우스운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기사에 의하면 이혼 후 위자료 등으로 인한 생활고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소문만 무성했는데 롤링스 히터스라는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15세 이하 타격/주루코치를 하다가 현재는 그만둔 상태다.


4. 기타[편집]


  •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생활을 해서 그런지 한국어에 능숙했고 매운 음식에 거부감이 없었으며, 특히 신라면을 매우 좋아해 '신남연' 이라는 별명도 생겨났을 정도다. 보통은 '데횽' 또는 '남연이횽' 이라고 불렸다. 실제로 미국에 있을 때 미국에서 파는 신라면은 맛이 없다면서 한국에서 만든 신라면을 공수해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신남연으로 검색해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었다. 23년 7월 5일 kt와 LG 경기를 중계하던 김태균이 언급하며 재확인을 시켜줬다.

  • 2000년 시즌 후 동료 용병타자 댄 로마이어가 LG로 이적하자 코칭스태프 중 한 명이 '너도 나갈래?' 하고 묻자 걔는 걔고 나는 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 괴짜스러운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로 출퇴근 시 2가지의 이동수단을 이용하는데, 하나는 일반 자전거도 아닌 (어르신들이 타고 다니는) 쌀집자전거에 다른 하나는 스쿠터로, 헬멧에는 매직으로 스우시를 그리고 다녔다고 한다.

파일:데이비스우산.jpg
  • 1999년 10월 8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원정경기에서 삼성 vs 한화 전에서 이승엽의 홈런성 타구를 잡아냈다가 홈 관중들에게 물병, 우산 등의 오물 투척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이승엽은 아시아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인 55호 홈런을 하나 남겨 두고 있었으며 해당 홈런볼에 삼성상용차 트럭까지 경품으로 걸렸기 때문에[17] 홈런볼을 잡으려 잠자리채 등을 잔뜩 들고 온 관중들이 많았고, 이 날 경기 결과로 매직리그 1위 삼성과 2위 한화의 순위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런 판국에 홈런성 타구를 잡아 버린 데이비스가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데이비스는 능청스럽게 관중이 던진 우산을 주워서 썼고, 이것이 가끔 회자되는 데이비스 우산 사건이다. # 사실 당시 영상의 리플레이 상으로도 볼 수 있듯이 해당 타구는 궤적 상 펜스에 맞고 떨어지는 공이었기 때문에 데이비스가 잡아냈든 아니든 애초에 홈런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 온라인 야구게임인 마구마구에서는 좋은 성적을 꾸준히 기록한 행적을 반영하여 1999시즌, 2000시즌은 엘리트카드로 수록되어있고 그리고 레전드 카드 또한 수록되었다. 다만, 한가지 흠이 있다면 마구마구측에서 데이비스의 성명권을 구입하지 못한 모양인지 인게임에선 ‘드웨인’이라는 이름으로 된 선수카드가 있을 뿐이다.[18]

5. 통산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9
한화
130
525
.328
172
(3위)
31
3
30
106
93
35
(5위)
46
.570
.370
2000
107
419
.334
(5위)
140
29
1
22
80
72
21
27
.566
.367
2001
130
496
.335
(5위)
166
(2위)
21
0
30
(4위)
96
95
(4위)
15
62
.558
.404
2002
115
404
.287
116
23
1
21
72
56
14
50
.505
.364
2004
119
440
.291
128
26
1
19
77
70
9
64
.484
.378
2005
118
431
.323
(2위)
139
(3위)
24
0
24
(4위)
86
(4위)
90
(1위)
7
70
.545
(3위)
.412
(2위)
2006
117
415
.284
118
21
0
21
(3위)
74
(5위)
62
7
59
.487
(3위)
.370
KBO 통산
(7시즌)
836
3130
.313
(5위)
979
175
6
167
591
538
108
378
.533
(3위)
.383

통산 타율 0.313, 출루율 0.383, 장타율 0.533, OPS 0.915를 기록했다.

중견수로서 수비실력도 매우 뛰어나 KBO의 용병, 국내선수 통틀어 역대급 외야수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투수 출신다운 강견을 자랑해 매년 보살 순위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었다. 한화에서 뛴 7년간 단 한번도 sWAR 4.0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꾸준했으며, 성격도 좋았던[19] 장수 외인의 표본 같은 선수.

참고로 KBO는 통산 300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 기준으로 통산 순위를 집계하는데 외국인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데이비스만 포함되어 있다.

데이비스가 선수로 뛰던 시절은 투고타저 시절이라[20] 2010년대 중반 이후 타고투저 시절을 기준으로 하면 클래식 스탯이 그렇게까지 대단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세이버 스탯으로 보면 가장 클래식 성적이 나쁜 해인 마지막 2006년조차 wRC+(조정득점생산력)는 147.3이고 WAR은 4.98이다.[21] 게다가 스탯티즈가 부정확하게나마 수비 스탯을 반영하기 시작한건 2014년부터라서 KBO 최고수준이었던 데이비스의 수비력은 승리기여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2016년 비교적 좋은 활약을 했다고 평가받는 윌린 로사리오의 wRC+가 131.0이고 WAR은 3.01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좋은 활약을 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이상 스탯티즈 기준)


6. 관련 문서[편집]


[1] 수비가 매우 뛰어난 선수인건 분명 사실이지만 역대 중견수 중 최고 급이냐면 그 정도는 아니다. 투수 출신이라 그런지 타구판단이 좀 늦었고, 잔실수도 좀 있었기 때문. 그대신 발이 빨라서 수비 범위가 매우 넓었고, 총알같은 송구가 있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중견수라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2] KBO에 타고투저 열풍이 불었던 2010년대 중반까지 10년 넘게 3위를 유지하다가 자리를 넘겨주었다. 타율은 장효조양준혁에 이은 기록, 장타율은 이승엽심정수에 이은 기록이었다.[3] 당시 멕시칸 리그는 AAA 소속이긴 했지만 MLB 구단과 제휴를 맺은 것도 아니고 MLB의 유망주 팜과 연관이 없어서 그냥 독립 리그나 마찬가지였다. 리그 수준도 다른 AAA 리그에 비해 떨어지는 AA 정도로 취급받았다.[4]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쌩쌩한 AAAA급 용병이 오는 현재 프로야구와는 달리 당시엔 한물 간 왕년의 메이저리거 또는 마이너리그 죽돌이들이 많았기에 평균 연령이 높았었다.[5] 찰스 스미스는 사전접촉 의혹도 있었다.[6] 당시 삼성은 거포에만 집중하던 나머지 2루수, 유격수가 부족했다. 주전(정경배, 김태균)이야 있었지만 백업이나 플래툰 등으로 돌릴 수 있는 여분의 선수가 부족했다는 거다.[7] 당시 센터 내야수가 정경배, 김태균, 그나마 써먹을 수 있던 백업 내야수로는 은퇴를 코앞에 두었던 류중일 정도밖에 없던 데다가 김재걸은 군 복무를 하고 있었던 상황인지라 서정환 감독의 이러한 결정은 당시로써는 현명한 선택이었으나, 문제는 홀이 예상외로 수비를 너무 못했다. 빠른 발의 이점을 살려 중견수로 전환시켰지만 외야도 수비를 못해 나중에는 주로 대주자 등으로 나갔다.[8] 2003년에도 활약했다면 1000안타까지도 기록할 수 있었다.[9] 이 기록을 깰 가능성이 보이는 외국인 용병들은 보통 NPB나 메이저리그로 진출을 꾀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이 될 것으로 보인다.[10] 2002 시즌 후 감독으로 부임한 유승안 당시 코치에게 체벌당해서 재계약을 거부했다는 설이 있다. 참고 자료[11] 원래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로 입단 초기에는 꽤나 말썽을 부리기도 했으나, 유승안 前 감독에게 체벌을 당한 후 쫄아서 그렇게 됐다는 설이 있다.[12] 실제로 중견수 한정 세이버 스탯을 살펴보면 WAR나 wRC+에서 박재홍, 라뱅 이병규와 동급.[13] 많은 사람들이 99시즌의 30-30의 임팩트 때문에 99년을 커리어하이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극심한 타고투저 시절에 기록한 성적이라 시즌 wRC+는 138로 통산 wRC+인 142보다도 낮다. 실제로도 이병규(1974), 심정수, 펠릭스 호세 등 그보다 월등한 성적을 거둔 외야수 경쟁자들이 많아 골든글러브 수상은 실패했다[14] 어디까지나 과거 타율을 중심으로보는 구시대적 관점으로 봤을 때 준수하다는 것이며, KBO 역사상 단일시즌 wRC+가 145를 넘기는 중견수는 정말 찾아보기 어렵다.[15] 다만 통산 도루성공률은 66%도 되지 않으며, 99년에도 35도루 18실패로 현재 기준에서보면 팀에게 손해를 끼치는 도루이다.[16] 이마저도 어깨부상의 여파로 14시즌에는 내내 지명타자로만 뛰고 있으며, 또 다른 외국인 펠릭스 피에로 중견수 문제를 해결했다.[17] 대형 트럭일 리는 없고 아마 야무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홍보를 줄기차게 했지만 실상은 내구 등의 기본기가 매우 좋지 않았던 실패작이었다.[18] 출시때부터 선수카드가 본명이었다. 그리고 그의 타격폼은 온전히 있기 때문에 올드팬들은 데이비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19] 성격이 순했다는 뜻이 아니라 야구 외적인 잡음이 없고 다른나라, 팀원들과의 융화에 문제가 없었다는 말. 성격 자체는 다혈질이라 심판판정에 불만이 있으면 맹렬히 항의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다만, 2004년 복귀 이후는 불같은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 승부욕이 아주 강해서 팀 훈련 당시 항상 가장 먼저 나와서 훈련했다. 김인식 감독과 특히 사이가 좋았는데 '아빠'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20] 특히 06년은 굉장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다. 이 해 준우승한, 그리고 데이비스가 소속된 팀이었던 한화에는 규정타석 3할타자가 없었고, 리그 전체에도 규정타석 3할타자가 5명. 이대호,이용규,이택근,장성호,양준혁이 전부였다.[21] WAR은 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라서 얼마나 팀 승리에 기여를 했냐는 것을 말하는데, 데이비스가 선수시절에는 KBO리그의 경기수가 133/126게임이라 144게임 기준인 2010년대 중반 이후보다 WAR 수치가 적게 나온다. 데이비스의 말년 기록을 WAR/144로 조정하면 5.695이다. 이것은 2017년 대활약한 윌린 로사리오의 WAR 5.26보다도 위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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