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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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키드의 수상 이력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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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키드
헌액 연도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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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네츠 No. 5
댈러스 매버릭스 감독
제이슨 프레드릭 키드
Jason Frederick Kidd

출생
1973년 3월 23일 (51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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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UC 버클리
신장
193cm (6' 4")[1]
체중
95kg (210 lbs)
윙스팬
203cm (6' 8")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94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지명

소속 팀
댈러스 매버릭스 (1994~1996)
피닉스 선즈 (1996~2001)

뉴저지 네츠 (2001~2008)
댈러스 매버릭스 (2008~2012)
뉴욕 닉스 (2012~2013)
지도자
브루클린 네츠 (2013~2014 / 감독)
밀워키 벅스 (2014~2018 / 감독)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19~2021 / 코치)
댈러스 매버릭스 (2021~ / 감독)
등번호
2번 - 댈러스[2]
5번 - 뉴저지 / 댈러스[3] / 뉴욕
32번 - 피닉스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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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수 경력
2.1. NBA 데뷔 이전
2.2. NBA 시절
2.2.3. 백투백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 뉴저지 네츠 시절
3. 지도자 경력
4. 기록
5. 수상 내역
6. 플레이 스타일
7. 여담
8. 관련 문서
9.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현 댈러스 매버릭스의 감독이며 댈러스 매버릭스뉴저지 네츠프랜차이즈 스타이다.

현역시절 통산 어시스트 2위, 통산 스틸 2위, 포인트 가드 기준 트리플 더블 3위를 기록했다. 별명은 'J-Kidd'.

신인 시절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신인상을 수상, 피닉스 선즈를 거쳐 당시 약팀이라고 평가받던 뉴저지 넷츠 시절에는 백투백 파이널 진출까지 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말년에는 다시 댈러스 매버릭스로 돌아와 자신과 같이 팀의 또 다른 레전드 디르크 노비츠키와 함께 파이널 우승까지 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2.1. NBA 데뷔 이전[편집]


데릭 지터처럼 흑인-백인 부부의 혼혈로 태어났다. 아버지 스티브가 흑인이고 어머니 앤이 아일랜드 계통.[4] 태어난 곳은 샌프란시스코였으나 어릴 적 오클랜드로 이사간 후, 동네 선배 게리 페이튼과 1on1을 하면서 농구실력을 키웠다. 그 때부터 게임을 보는 시야와 수비실력, 패싱 스킬을 연마해왔다.

청소년기 때 앨러미다에 있는 세인트 조셉 노터데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농구부에서 프랭크 라포테(1933~1997) 감독에게 농구 수업을 받으며 1991 및 1992년 주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끔 했고, 이 공로로 캘리포니아 미스터 배스킷볼, <퍼레이드> 지 선정 올 아메리카 퍼스트 팀 등지에 2년 연속으로 뽑혔다.

이후 UC 버클리에 진학하여 선배 라몬드 머레이와 함께 루 캄파넬리[5] 및 토드 보즈먼[6] 감독의 지도를 받아 2년 동안 평균 14.9점, 8.4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특히 1992-93 시즌에는 감독이 도중에 바뀌는 와중에도 NCAA 전국대회 16강 진출에 공헌해 올해의 스틸왕, 미국농구기자협회 및 퍼시픽-10 컨퍼런스 올해의 신입생상 등에 선정됐고, 1994년에는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에도 선정됐다.

대학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후 1994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1라운드 2순위로[7]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된다.


2.2. NBA 시절[편집]



2.2.1. 댈러스 매버릭스 1기 시절[편집]


댈러스는 제이슨 키드의 합류로 자말 매쉬번, 짐 잭슨 등 '3J'로 불리는 촉망받는 신예들을 모아놓은 전도유망한 팀이 되었다. 루키 시즌에 키드는 79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11.7점, 7.7어시스트, 1.9스틸을 기록하며 그랜트 힐과 함께 그 해 공동 신인왕에 선정된다. 그러나 필드골 성공률이 38.5%, 3점슛 성공률이 27.2%에 그쳐 점프슛을 의미하는 알파벳 'J'를 뺀 'Ason Kidd'라는 좋지 못한 별명을 얻고 만다.

1995-96 시즌에 키드는 평균 16.6점 9.7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하며 향상된 모습을 보여줬지만, 팀의 현실은 시궁창, 26승 56패의 저조한 성적을 보이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다. 특히 이 시즌에 키드는 총 328개의 턴오버를 범하며 전체 턴오버 부문 1위에 오르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턴오버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8] 그리고 경기장 밖에서는 유명 흑인 여가수 토니 브랙스턴을 사이에 두고 팀 동료 짐 잭슨과 삼각관계가 되었다는 설까지 도는 바람에 더욱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이슈를 생산하고 말았다.

다만 이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게, 당사자들이 지속적으로 부인을 하고 있기 때문. 키드 본인은 "브랙스턴을 만난 적도 없다"고 했으며, 짐 잭슨은 소문대로 1995년 12월에 애틀란타에서 키드가 브랙스턴을 만나자고 한게 아니라 11월에 팀 전체가 뉴욕 스튜디오에서 브랙스턴과 만나기로 했으며, 잭슨과 키드 둘 다 가지 않았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당시 감독인 딕 모타는 "키드와 잭슨이 여자를 두고 싸웠었다"고 했으나 그 여자는 브랙스턴이 아니었다. 즉, 실제로 여자를 두고 키드와 잭슨이 다툰 것, 실제로 매버릭스가 브랙스턴을 방문한 것이 기묘하게 조합되어 소문이 난 것이고, 당시에도 이들은 이를 계속 부인했으나 브랙스턴이 키드와 잭슨을 "알지도 모른다(maybe)"면서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호하게 답했기 때문에 소문이 퍼져 지금까지 정설이 된 것이다. 소문이 나온 1996년 당시 브랙스턴은 앨범이 출시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아 노이즈마케팅을 하는 것도 나쁠 것이 없었다.

사실 트리플 J의 해체는 삼각관계보다 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1992년 4순위로 드래프트된 슈팅가드 짐 잭슨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유망주로 기대받았으나, 계약 조건을 두고 협상이 난항을 겪어[9] 시즌 절반도 뛰지 않았고, 팀은 11승이란 처참한 성적에 그쳤다. 뒤이은 1993년에 매버릭스는 "몬스터 매쉬" 스몰포워드 자말 매쉬번을 같은 4순위로 지명하지만, 이 둘은 뛰어난 재능에도 공격욕심이 많아 조합이 나빴고, 신입 감독 퀸 버크너는 이들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며 둘이 풀시즌을 소화했음에도 13승에 그친다. 잭슨과 매쉬번은 감독과 서로를 비난하며 으르렁대기에 이르렀다.

반전이 온 것은 1994년에 포인트가드 키드가 지명되고 은퇴한 상태였던 노감독 딕 모타를 다시 선임한 뒤.[10] 키드는 특출난 리딩력으로 공격을 이끌었고, 전 시즌에 동일하게 19.2점씩 올렸던 잭슨과 매쉬번은 평균득점이 25.7점, 24.1점으로 크게 오르며 맹활약, 공동 신인왕을 거머쥔 키드와 함께 매버릭스를 무려 23승이 오른 36승으로 이끈다. 인기가 없어 전 시즌에 27개팀 중 25위, 그 전 시즌엔 21위에 그쳤던 관중동원율이 13위로 오른 것은 덤.

그러나 시즌 후반에 이들 조합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95시즌 후반에 짐 잭슨이 부상을 당해 빠지자 매쉬번에게 공격권이 집중되며 팀성적이 5할 이상으로 뛰었고, 이듬해에는 매쉬번이 부상을 당해 잭슨에게 공격권이 집중된다. 그러면서 둘의 자존심 싸움에 다시 불이 붙었는데, 이들의 공격욕심은 연속으로 득점을 성공한 키드가 모타 감독에게 "매쉬번과 잭슨의 눈치가 보이니 이제 내가 공격하는 작전은 하지 말아달라"라고 하기에 이른다.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는 둘에 지친 키드는 "왜 둘의 배에 타야하나. 차라리 내 배를 마련해서 모두를 태우고 말지"라고 둘을 에둘러 비판했고, 이 말을 들은 잭슨은 "배 사는 거 좋지. 20척 사. 요트를 사든지. 대신 닻하고 구명조끼는 넉넉히 챙기고"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결국 셋이 삐걱대던 매버릭스의 1995-96시즌 성적은 26승에 그쳤고, 매쉬번은 잭슨이나 자신을 트레이드해달라고 요청한다. 팀은 모타 감독을 해임하고 필 잭슨 밑에서 코치를 하던 짐 클레멘스를 감독으로 선임했으나, 셋의 불만을 잠재우긴 역부족이었고 클레멘스가 도입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결국 1996-97시즌 도중 셋 모두 트레이드되고, 클레멘스 감독이 해임되고 돈 넬슨 감독이 부임하며 판을 아예 새로 짜는 것으로 결말이 나게 된다.


2.2.2. 피닉스 선즈 시절[편집]


1996년 12월 26일 제이슨 키드는 샘 카셀, 마이클 핀리, AC그린과의 3:3 트레이드로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1997-98 시즌에 82게임 전경기를 38분의 시간 동안 활약하여 평균 11.6점, 9.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98-99 시즌에는 평균 41.2분을 뛰면서 16.9점, 10.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으로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하고 어시스트 왕에 오른다. 이후 2000-01시즌까지 피닉스 선즈에서 세 차례나 평균 어시스트 부문 1위에 오르는데 이는 각 시대의 전설적인 가드들인 밥 쿠지, 오스카 로버트슨, 존 스탁턴에 이은 네 번째 기록에 해당된다. 그러나 서부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의 강팀들 속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드림팀 4기 주장으로서 금메달을 따냈으나, 2001년 1월에 아내 주마나에게 가정폭력을 행사한 게 언론에 알려져 파문이 일었고, 인터넷 토론방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기자들조차 "선수로서의 키드에 매력을 못 느낀다"고 보도할 정도로 이미지는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심지어 플옵에서도 신흥강호 새크라멘토 킹스에게 스윕당한 후 제리 콜란젤로 구단주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스테판 마버리와 맞바꿔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시켰다.


2.2.3. 백투백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 뉴저지 네츠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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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올 당시 팀에는 전체 1번 출신의 넘버원 속공 피니셔 케년 마틴과 다재다능한 공격수 리처드 제퍼슨, 경험이 많은 케리 키틀즈 등의 선수가 포진되어 있있으나, 팀은 1990년대 초반 잠깐 반짝한 걸 빼곤 줄곧 중하위권이었으며 동부 컨퍼런스의 대표적인 부상병동이었다.

키드는 팀 선수들을 다독여 건강을 되찾게 해 줬고, 그는 평균 14.7점, 7.3리바운드, 9.9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MVP 투표에서 팀 던컨에 밀려 아쉽게 MVP에 선정되지 못했지만 52승 30패의 성적으로 약체였던 뉴저지를 동부지구 1위에 올려 놓는다.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인디애나, 샬럿, 보스턴을 내리 격파하고 NBA 진출한 후의 네츠 역사상 처음으로 NBA 파이널에 진출했지만...상대는 NBA의 지배자였던 샤킬 오닐과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로 발돋움하던 코비 브라이언트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결국 코비-샤크의 벽에 막혀 4:0으로 깔끔하게 스윕당하며 아쉬운 준우승에 그친다.

다음해 2002-03 시즌에 키드는 평균 18.7점, 8.9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하였다. 득점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어시스트왕의 자리를 재탈환하였다. 뉴저지의 성적은 49승 33패로 당시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밀워키, 보스턴, 디트로이트를 물리치고 2년 연속 파이널에 진출하지만, 이번에 만난 상대는 팀 던컨샌안토니오 스퍼스 였다. 4차전까지 2승 2패로 선전했으나, 이후 내리 2연패하며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파이널 평균 19.6점을 기록했으나 빛이 바랬다.[11]

한편 2004년에 뉴저지로 이적한 빈스 카터와 함께 키드는 새로운 삼각편대를 형성하며 백코트 오펜스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골밑 불안으로 팀 성적은 마틴이 있을 때 만큼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당시 팀 리바운드 1위를 키드가 할 정도로 이 당시 키드는 혼자서 리바운드를 잡고 속공 패스를 뿌리는 괴물같은 모습을 선보이곤 했다.[12] 당시 카터, 제퍼슨과 함께 수많은 앨리웁 영상을 찍어내던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그러나 2005-2006-2007 플레이오프에서의 계속되는 탈락으로 한계가 보이자, 키드는 2008년 2월 19일에 자신의 신인 시절을 함께 했던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한다.


2.2.4. 댈러스 매버릭스 2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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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적할 당시, 그의 나이는 35살로 예전의 스피드를 보일 수 없는 상태였고, 득점력도 이전만큼 못하였다. 그러나 키드의 패싱 센스와 코트비전은 여전하였다. 서부컨퍼런스는 우승을 노리기엔 경쟁자들이 치열한 곳이지만, 그 중 댈러스 매버릭스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함께 2000년대 들어 우승 후보로 꼽히는 팀 중 하나였다. 그리고 2010-11시즌에 그들에게 기회는 찾아온다. 이 시즌에 키드는 디르크 노비츠키, 숀 매리언, 타이슨 챈들러, 캐런 버틀러, 제이슨 테리 등의 선수들과 함께 플레이를 하였는데, 짧은 출전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리더로서 노비츠키와 함께 팀을 이끌었다. 57승 25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 플레이오프에 진출. 첫 상대인 포틀랜드를 4승2패로 꺾고, 전 시즌 우승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4승으로 스윕했다[13]. 서부 파이널에서 케빈 듀란트의 오클라호마를 4승 1패로 꺾고 만난 최종 상대는 마이애미 히트. 오프 시즌에서 'The Decision'이라는 쇼를 벌이며 합류한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시가 건재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키드는 르브론이나 웨이드와의 매치업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중요한 순간마다 3점슛을 꽂아넣으며 데뷔한지 17년 만에 첫 우승에 성공했다.

2012년 시즌에는 만 39세의 나이로 활동했는데 그와 드래프트 동기중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키드 바로 다음에 뽑힌 그랜트 힐(現 애틀랜타 호크스 공동 구단주)과 전체 5순위로 뽑힌 주완 하워드(現 미시간 대학교 감독) 둘 뿐이며[14] 드래프트 동기인 몬티 윌리엄스는 지금 뉴올리언스 호네츠의 감독이다. 나이로 구분할 경우 위의 2명보다 생일이 늦어서 NBA 전체에서 네 번째 최고령이다. 그랜트 힐이 1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센터 커트 토마스가 2위, 주완 하워드가 3위, 키드가 4위이다.

디펜딩 챔피언 댈러스는 우승의 주역이었던 타이슨 챈들러와 J.J. 바레아를 보내고 라마 오돔빈스 카터를 영입하면서 다시금 패권에 도전하였지만, 오돔이 핵돔, 독돔이 되면서 씹망... 그래도 간신히 서부 7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상대는 득점왕 케빈 듀란트가 버티는 오클라호마 시티. 4:0으로 손쉽게 스윕당하면서 시즌을 마친다.[15]


2.2.5. 뉴욕 닉스 시절[편집]


2012년 7월 6일, FA자격이었던 키드는 뉴욕 닉스에게 3년간 9m의 금액을 받고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배런 데이비스나 마이크 비비보다 훨씬 나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뉴욕 팬들은 기대하고 있다. 카멜로 앤서니아마레 스타더마이어, 타이슨 챈들러와의 호흡이 기대된다. 제레미 린만 남는다면, 그의 좋은 멘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허나 제레미 린은 떠나버리고 레이먼드 펠튼이 대신 자리를 차지한 상황.

2012-13 시즌 올스타전 이전까지만 해도 뉴욕의 상승세를 이끄는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체력이나 피지컬은 많이 약해졌지만 특유의 농구센스와 스틸감각, 3점슛은 살아있었다. 허나 올스타전을 전후로 펠튼, 캠비, 쉬드, 멜로, 아마레, 챈들러 등 팀의 주요선수들이 부상으로 골골대며 승패를 반복하고 있는 실정.

2013년 2월 19일부로 통산 12000 어시스트를 돌파하였다. 닉스는 이 시즌 동부컨퍼런스에서 2위를 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 1라운드 상대로 보스턴 셀틱스를 만나게 되었다. 닉스는 1차전 접전상황에서 키드의 번뜩이는 플레이에 힘입어 낙승을 거둘 수 있었고 여세를 몰아 4승 2패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러나 2라운드 상대인 인디애나 페이서스전에서는 시리즈 내내 무득점으로 부진하면서 팀도 2승 4패로 탈락했다.

2013년 5월 1일부로 NBA Sportsmanship Award[16]를 작년에 이어 2회 연속으로 수상하였다. NBA에서는 최초.

신인왕 동기 그랜트 힐 은퇴 이후 키드 역시 2012-13 시즌이 끝나고 은퇴. 그리고 은퇴하자마자 브루클린 네츠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뉴저지 네츠 시절 활약을 인정받아 브루클린 네츠에서 키드의 번호인 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2013년 10월 17일 마이애미 히트와의 프리시즌 경기에서 결번식을 하였다.

3. 지도자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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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3일 부로 브라이언 쇼와의 경쟁 끝에 결국 브루클린 네츠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선수를 바로 감독으로 선임한 예는 거의 손꼽을 정도라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이긴 하다. 과연 선수 시절 네츠를 잘 이끌었던 것처럼 감독으로서도 잘 이끌지...?

일단 11월 말 까지는 팀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슈퍼스타급으로 평가받던 선수들이 부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초보감독으로서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는 못했다는 평. 게다가 한국 기준 11월 28일 LA 레이커스와의 홈경기에서 브루클린 네츠의 타이슨 테일러에게 고의로 밀치게 해 음료를 쏟게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타이션 테일러가 가는 중 키드가 'Hit me'라고 말했기 때문에 사실상 고의로 한 것이라고 팬들과 언론 모두 짐작했다.[17] 결국 벌금 5만 달러를 냈다.

결국 시즌 중 감독급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로렌스 프랭크[18]를 해임하는 등 내홍이 있었는데, 그 뒤로 팀이 정신을 차렸는지 페이스를 회복하며 44승 38패로 동부지구 6번시드를 따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성공했다. 그리고 오프시즌, 1시즌밖에 경험하지 않은 초짜 감독 주제에 구단 운영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다 거부당하고, 이에 밀워키 벅스 감독자리로 이직하게 되었다. 밀워키의 구단주와 친분이 있는 사이라 으리로 얻어낸 감독직이 아닌가 하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밀워키 벅스에선 두꺼운 선수층을 바탕으로 칼같은 로테이션을 돌리면서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뒀다. 2017 시즌의 벅스는 2라운드 36순위에 득템한 가드 말콤 브록던, 수비 커맨더 크리스 미들턴과 루키 센터 쏜 메이커, 에이스 쿤보 등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긴팔 수비수 집단으로 운동능력과 지능적 협력수비를 구성해 젊으면서도 유니크한 팀을 구성해 미래가 기대되는 팀을 만들었다.

그리스에서 온 괴인 야니스 아데토쿤보는 NBA에 처음 왔었을 때 자기를 벤치멤버로 보낸 키드 감독에게 화가 나서 '당신은 프로 때 얼마나 잘했나 보자!'라는 심산으로 키드의 기록을 봤다가 데꿀멍했다고 한다(…). 키드의 지도 아래 크게 쿤보는 크게 성장하여 이제는 NBA를 대표하는 선수가 됐다.

현지시간으로 2018년 1월 22일에 제자리걸음인 성적과 선수 혹사를 이유로 전격 경질됐다. 키드 본인도 제자리걸음인 성적 때문에 압박을 받았는지 로테이션을 칼같이 돌리던 부임 초기와 달리 2017-18 시즌은 주전 선수들을 혹사시켰다.

결국 감독 커리어를 내려놓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영입되었다. 감독으로서 뚜렷한 커리어가 없고 특별한 강점을 보여주지도 못했던것이 감독 키드의 실패 요인으로 보인다.[19][20]

2021년 6월 25일 댈러스 매버릭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시즌 초에 부진하며 우려를 샀지만 이후 그 공격몰빵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비적으로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였고, 루카 돈치치까지 부상을 씻고 호성적을 내며 순위가 올라갔다. 특히 2라운드에서 정규시즌 1위 피닉스전에서 크리스 폴을 적극 공략하는 전술을 선보이며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 시키며 동시에 키드 감독의 평가도 크게 올라가는 중.

4. 기록[편집]


키드의 통산 필드골 성공률은 딱 40.0%로 2000년대 포인트 가드 라이벌이라 불리는 스티브 내시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편. 커리어 하이 야투율이 .444로 4할 5푼이 안된다. 그래도 꾸준히 폼을 교정하며 노력한 끝에 3점슛 성공률은 통산 34.9%까지 올렸고 마찬가지로 세트슛으로 던지는 자유투 성공율 역시 .785로 나쁘지 않은 편. 커리어 후반 댈러스 시절부터는 2점슛 시도보다 3점슛 시도가 많다. 댈러스에서는 전문 3점슈터 수준인 4할 이상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21]

통산 어시스트는 12,091개로 존 스탁턴에 이어 2위. 통산 스틸 역시 2684개로 스탁턴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리바운드 역시 뛰어나서 평균 6.3개, 통산 8,725개로 통산 리바운드 순위 59위에 랭크돼 있다. 왠만한 파워포워드들과 통산 수치가 비슷하다.

트리플더블 분야에서도 통산 107개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해 동시대에선 단연 최강자였다. 오스카 로버트슨(181개)과 러셀 웨스트브룩, 매직 존슨(138개)에 이어 역대 4위에 위치하고 있다.

저 선수들과 키드가 차별화되는 점을 꼽자면 키드는 NBA역사상 가장 페이스가 느리던 시절에 커리어를 보냈다는 것이다. NBA 평균 페이스 관련 기록은 73-74년부터 있는데 NBA 평균 페이스는 키드의 루키시즌인 94-95시즌에 처음으로 93 미만으로 떨어졌고 이후 2012-13까지 매년 93미만을 기록하게 된다. 즉, 94-95시즌부터 19년은 73년 이후 NBA 역사상 가장 페이스가 느린 시절이었는데, 이 기간은 키드의 커리어와 완벽히 겹친다. 페이스가 느리니 전반적인 기록도 저조해서 키드는 5번이나 어시스트왕을 차지한 선수임에도[22] 두자리수 어시스트를 넘긴 적이 두번에 불과하며, 한번은 8.9개로 1위를 찍기도 했다. 수치상으로 키드가 다방면에서 골고루 수치를 기록한 시즌은 2006-07시즌의 13점 9.2어시스트 8.2리바운드가 있는데, 이 시즌 뉴져지 네츠의 페이스는 91.4에 불과했다. 위에 언급된 선수들은 모두 NBA의 공겨 페이스가 빠르던 시기에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이다.[23]
물론 페이스만 높다고 무조건 스탯이 거기에 비례해 높게 나오는 것은 아니며, 저 선수들은 모두 MVP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들이었다. 당연히 '저 선수들과 키드의 차이가 페이스 뿐'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록이 전반적으로 낮게 나오는 로우페이스 시절에 뛴 키드가 저렇게 많은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다는 건 분명히 대단한 점이다.

결론적으로 통산 17000득점 - 12000어시 - 8500리바 - 2600스틸을 돌파한 NBA 역사상 유일한 선수이자 역대 3위에 위치한 트리플더블러이면서, 통산 1950개 이상의 3점슛을 성공하여 알렌과 밀러에 이어 역대 3위에 위치한 3점슈터.[24]


5.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pngNBA 챔피언 (2011)
파일:NBA-Allstar2021.pngNBA 올스타 10회 (1996, 1998, 2000-2004, 2007-2008, 2010)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5회 (1999-2002, 2004)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1회 (2003)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4회 (1999, 2001-2002, 2006)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5회 (2000, 2003-2005, 2007)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신인상 (1995)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5회 (1999-2001, 2003-2004)
파일:NBA 로고.svg NBA 스킬스 챌린지 챔피언 (2003)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5)
파일:오륜기(여백X).svg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파일:오륜기(여백X).svg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파일:HOF-Logo.png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8)



6. 플레이 스타일[편집]


퓨어 포인트 가드의 정석[25]이며 자신을 제외한 코트 위에 있는 4명의 선수들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데뷔 초반에는 화려한 패스를 많이 보여주었으나 그에 따라 실책도 많은 편이었고, 커리어가 쌓이면서 간결하고 실책이 없는 패스를 많이 했다. 데뷔 때부터 은퇴까지 야투율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해결하기보다는 선패스 마인드로 플레이했다.

하프코트 오펜스도 자유자재로 이끌 수 있지만 최대 장점은 뉴저지 네츠시절 극대화 되었던 속공 전개능력. 잘 달리는 포워드, 속공 피니셔가 있으면 그의 패스가 극대화 된다. 하위권에 머무르던 뉴저지 네츠가 제이슨 키드라는 선수 단 한명이 가세한 것만으로 바로 NBA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 것만 봐도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전술 이해도가 뛰어나고 농구를 영리하게 할 줄 알았던 선수이다. 전성기 시절에 게임당 앨리웁 패스를 몇 개씩 성공시킬 정도로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주로 돌파에 이은 득점보다는 패스를 선호하는 편이다. 초창기 매버릭스 시절과 전성기 시절엔 간간히 빠른 스피드로 드라이브인 득점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뛰어난 코트비전은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빛을 발하여 키드를 상대의 패스레인을 읽고 스틸하는 데 능한 선수로 만들어주었다.

특히 트리플 더블 머신이라는 별명답게 가드치곤 리바운드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이는 193cm 95kg이라는 포인트 가드치고 크고 묵직한 체격을 가진데다 낙하지점을 재빠르게 포착해 걷어내는 판단력과 부지런함을 갖췄기 때문이다. 뉴저지 시절 팀내 평균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한 바 있으며, 리바운드가 많은 덕분에 공격 속도가 타 가드보다 훨씬 빨랐다. 가드가 리바운드를 잡으면 공격 전개를 위해 리바운드를 잡은 같은 편 선수가 공을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

공격에서는 상술한 피지컬을 살려 포스트업으로 상대 가드를 찍어누르며 득점할 수 있었고, 수비에서도 1번이 아닌 스윙맨 선수들 막는 데 피지컬적으로 문제가 없어 슈팅 가드를 막는 경우도 많았다. 더불어 스틸이나 턴오버 유도 기술도 수준급. 물론 게리 페이튼 같은 인외마경급의 수비력은 아니었지만 2,3번 수비까지도 단순히 무리없는 수준이 아니라 잘해냈다. 최전성기의 코비 브라이언트를 잘 막은 것으로도 유명하며 (아예 따로 칼럼이 쓰여질 정도), 말년 댈러스 시절에도 파이널에서 피지컬 끝판왕 르브론까지 수비해내며 능력을 보여줬다.

단점은 앞에서 주구장창 설명했듯이 슛. MVP 후보급 가드 중에선 이례적일 정도로 풀 업 슈팅 능력이 떨어져 슛을 만들어 던지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수 생활 초기에는 점프슛이 없다고 "Ason"이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 캐치 앤 슛은 의외로 아끼지 않는 타입이라 3점 슛을 낮은 성공률 대비 상당히 많이 시도하는 편이었고, 컨디션 좋을때 묻지마 3점을 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도 커리어 통산 자유투 성공률은 78%로 좋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수준.

풀 업 슈팅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캐치 앤 3점은 피나는 노력 끝에 장착해 나중에 가선 잘 써먹긴 했다. 키드의 가장 아쉬운 점으로 기량적 전성기와 3점 장착이 이루어진 시기가 따로 논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수비가 붙어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돌파해들어가 골밑에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던 선수라 3점이 좀 일찍 장착되었다면 전성기 구간의 득점력은 한층 더 좋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레전드 포인트 가드들을 보면 절대다수가 수준급의 공격능력을 지녔었다. 역사상 최초로 리그를 지배하는 수준의 포인트 가드였던 밥 쿠지는 최정상급의 어시스트능력(8연속 어시스트왕으로 스탁턴에 이어 역대 2위)과 더불어 통산 18.4점에 달하는 뛰어난 득점력을 지녔었고, 오스카 로버트슨은 아예 전성기에 30점을 넘길 정도로 트리플더블 머신, 월트 프레이저 역시 통산득점이 20점에 가까웠다. 마크 프라이스는 저질 운동능력을 커버하는 정밀한 슈팅력의 소유자였으며, 아이제아 토마스는 파이널 한 쿼터에 25점을 넣을 정도였고, 존 스탁턴은 패스 우선시인 본인 성향상 득점 수치는 낮지만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유타의 클러치 타임을 전담했으며 PG로선 당대 최고 수준의 공격스킬을 모두 갖고 있었다. 찰스 바클리와 함께 피닉스를 이끌었던 케빈 존슨 역시 20점-10어시스트를 넘긴 시즌이 여러번 있을 정도이며, 동시대 라이벌 스티브 내시도 볼륨은 낮지만 워낙 슈팅능력이 뛰어나서 전방위 득점력이 있었고, 실제로 플레이오프에서도 결정적인 순간 넣은 클러치 샷이 더러 있다.

레전드 PG 중에 키드에(통산 12.6점, 커리어하이 18.7) 비견될만한 빈약한 득점력을 가진 선수는 시애틀, 보스턴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니스 존슨 정도(통산 11.8, 커리어하이 19.5)인데 존슨은 무려 9차례나 올디펜스 팀에 오르는 수비 스페셜리스트에 가까웠다. 심지어 역대 PG중 최고의 수비수라고 할법한 게리 페이튼조차 커리어하이가 무려 24.2점에 7시즌이나 평균 20점을 넘겼다. 즉, 슛의 중요도가 커진 것은 현대농구에 들어서지만, 예나 지금이나 PG들이 수준급의 득점력은 필요했다는 것. 당연한게 PG가 아예 득점력이 없다면 수비를 몰고 다른 곳으로 패스를 해주는게 의미가 없다. 슛이 빈약하지만 그나마 포스트업을 득점을 해줄 수 있는 키드 (비슷한 케이스로 슛은 없지만 골밑돌파가 위력적이었던 라존 론도)였기에 평균 이상 득점력으로 위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키드가 그만큼의 득점력이라도 없었다면 아무리 패싱력과 게임조립 능력이 좋아도 반쪽짜리 선수로 전락했을 것이다.

종합하자면 그야말로 육각형 올어라운드 포인트가드. 괜히 트리플 더블을 저만큼 기록한게 아니다. 슈팅자체는 상당히 큰 약점이지만 피지컬의 우위를 살린 공격이 가능했고 어시스트를 비롯한 공격전개 능력 자체는 최상급. 속공과 지공 모두에서 활약이 가능하고 특히 수비력도 수준급이었다. 워낙 (슈팅 빼고) 모든 방면에서 능력치가 골고루 높았기에 커리어 내내 상성을 타거나 특히 약했던 선수가 없다는 것도 높이 평가할만한 요소. 키드가 지워지는 경기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다.

7. 여담[편집]


  • 여자 관계에서 말이 많은 인물이기도 한데, 1994년 UC버클리 시절 프로 데뷔를 앞두고 한 여성으로부터 키드에게 폭행당했다고 고소를 당해 이미지가 깎였고, 댈러스 시절 전술한 토니 브랙스턴과의 삼각관계로 논란이 된 후 1997년에 주마나 메리 샤마하와 결혼해 1남 2녀를 뒀으나, 2001년에 말다툼을 하다 가정폭력을 행사해 이미지가 나빠져 벌금 200달러를 냈고, 이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2007년에 이혼했다.[26] 2011년 9월에 모델 출신 포르슐라 콜먼과 재혼했다.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3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8. 관련 문서[편집]




9. 참고 문헌[편집]


  • I LOVE NBA - 손대범 저. 루키. 2004. p385~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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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발 신장 6' 3" = 191cm, 착화 신장 6' 4" = 193cm[2] 2008~2012[3] 1994~1996[4] 외모상으로 명백하게 백인이지만 본인의 정체성은 흑인이다. 타이거 우즈가 한때나마 자기를 전혀 흑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점과 정 반대.[5] 그는 케빈 존슨의 스승이기도 하다.[6] 키드 및 머레이 외에 샤리프 압둘라힘도 육성한 바 있다. 그러나 1996년에 젤라니 가드너 영입 과정에서 터진 부적절한 일들이 발각되어 1994-95 시즌 전체 및 1995-96 시즌 상당수(2경기 제외)의 기록이 각각 말소됐고, 8년간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퇴임 후 밴쿠버 그리즐리스, 토론토 랩터스 등지에서 스카우터로 근무하다가 화이자에서 영업직에 종사한 바 있고, 2006년부터 13년간 모건 주립대학교 감독을 지내다가 2021년부터 모교인 로드아일랜드 대학교의 코치로 근무 중이다.[7] 이때 전체 1순위는 Big Dog이란 별명을 가진 글렌 로빈슨이었다. 로빈슨은 훗날 올스타에 두 차례 뽑히는 등 준수한 커리어를 보내지만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건 데뷔도 안한 신인 주제에 94년 기준으로 전례가 없던 계약기간 13년, 총액 1억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경기도 안 뛴 새파란 애송이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인 마이클 조던, 샤킬 오닐, 하킴 올라주원도 못 받은 연봉을 달라고 한 것. 왠 근자감 결국 그는 10년 6천8백만달러에 계약을 하는데 이는 신인이 맺은 계약으로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후 NBA가 루키스케일(모든 신인들이 지명순위에 따라 고정된 액수에 계약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받는 1순위의 연봉이 3백만달러가 조금 넘는다. 1라운드 지명자는 최소 3년 계약에 팀 의향에 따라 동일한 조건으로 1년 연장 가능)을 도입함에 따라 당연히 로빈슨보다 큰 규모의 계약이 규정이 바뀌지 않는한 다시는 못 나오게 된다.[8] 말년에 다시 턴오버가 잦아졌다.[9] 현재 1라운드 지명선수들은 3년계약 보장+1년 팀 옵션 조건을 일괄적으로 적용받지만 이는 1998년 CBA 협상 결과로 이뤄진 것이고 당시엔 신인선수들의 계약 조건에 대한 조항이 없었다. 이 때문에 1라운드 지명되고도 계약에 실패하는 선수들이나, 글렌 로빈슨처럼 신인시절부터 초대형 계약을 맺는 선수들도 있었다.[10] 한국 팬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겠지만 모타 감독은 워싱턴 불리츠를 1978년 우승으로 이끌고 1970년대 불스의 1차 황금기를 이끈 명감독이다. 또한 1980년에 창단한 댈러스 매버릭스의 첫 감독으로 7년간 이끌며 탄탄한 중위권으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11] 2003년도 팀 던컨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득점, 리바, 어시, 블락 네 부분에 있어서 팀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그의 상대였던 키드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2승이라도 한게 기적. 특히 마지막 6번째 경기에 21점 20리바운드 10어시스트 8블락이라는 쿼드러플 더블에 가까운 스탯을 찍어버리니...[12] 팀에 있던 빅맨들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다. 한 때 모닝과 무톰보가 머무르던 시절도 있었지만 부상과 트레이드로 별 도움이 못되었고, 이후 샤리프 압둘라힘, 네나드 크리스티치, 미키 무어, 제이슨 콜린스 등 키드의 레벨을 받쳐줄 선수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건강한 브룩 로페즈만 이때 있었다면..[13] 사실 2011년 댈러스는 우승은 커녕 2라운드에서 레이커스에게 져서 탈락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예상이었기 때문에 스윕은 상당히 충격적인 결과였다. 심지어 댈러스를 응원하던 팬들에게도...[14] 그나마 주완 하워드는 거의 출장을 안(못)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키드와 힐 2명이라고 봐도 무방. 공동으로 신인왕 타더니 말년까지 비슷하게...[15] 1차전에서 케빈 듀란트의 마지막 역전 샷이 들어가면서 99:98로 패한게 컸다. 그 샷만 아니었으면 시리즈가 이렇게 쉽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16] 조 듀마스 트로피라고도 불린다. 스포츠맨십이 뛰어났던 조 듀마스를 기리면서, 한 시즌 동안 스포츠맨십이 뛰어난 선수를 동료 선수들의 투표를 통해 선발한다.[17] 이렇게 한 이유는 네츠가 타임아웃을 모두 썼기 때문이다. 음료를 쏟게 되면 바닥을 닦기 위해 경기가 잠시 중단될 테니 그 사이에 빠르게 작전지시를 한다는 기책이자 꼼수였다.[18] 뉴저지 네츠 시절 키드를 감독하기도 했다.[19] 게다가 키드가 물러나자마자 벅스는 정규시즌 1위에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20] 레이커스의 입장은 론조 볼을 보다 더 훈련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인 듯하다. 그러나 볼은 트레이드되어 팀을 나갔다.[21] 다만 말년의 키드는 무리한 슛을 절대 던지지 않을 정도로 신중한 슛셀력션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 수치엔 약간 거품이 있다. 실제로 매버릭스 시절에도 그를 다소 섀깅했을 때는 3점 성공률이 좋지 않은 경기도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 수준이지 4할 이상 성공률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긴 무리. 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브루스 보웬으로 보웬의 슈팅력은 외곽선수로서 평균 이하였지만, 지능적으로 NBA 원래 3점슛 거리보다 1미터 가까이 짧은 양 사이드에서만, 그것도 수비가 없을때만 노려서 쏴서 4할이 넘는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다. 게다가 키드나 보웬같은 선수들은 슛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수비가 약간 헐겁다는 점도 있다. 물론 자유투도 잘 못 넣는 보웬보다는 키드의 슈팅력이 훨씬 뛰어나긴 했다. 포인트는 3점슛 4할 슈터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22] 역대 존 스탁턴(9회), 밥 쿠지(8회), 오스카 로버트슨(6회)에 이어 공동 4위이다. 스티브 내시, 크리스폴과 타이.[23] 러셀 웨스트브룩은 아직 페이스가 느리던 2008년에 데뷔한 선수지만 그가 시즌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던 2016-17시즌부터 NBA는 리그 평균 페이스가 96.4에 달했으며 소속팀도 96,97 정도였다. 그 전까지 웨스트브룩은 가장 높은 리바운드가 7.8개에 불과(?)했다.[24] 2019년 현재는 스테판 커리에 의해 이 기록은 깨진 상태.[25] 득점보다 어시스트나 스틸등 포인트 가드 본연의 임무를 중시하는 포인트 가드. 현역 선수 중에서는 리키 루비오, 라존 론도 등이 대표적이다.[26] 위에 영구결번 헌액자로 소개되며 나온 키스를 날리는 사진은 이혼 전까지 그가 매번 자유투마다 하던 세러모니로 부인을 위해 한 것. 이혼 전에 나온 게임 중 NBA 라이브 2007같은 경우 이 루틴으로 나온다. 당연히 이혼 이후엔 그만두었다. 헌데 NBA 2K21에서는 제이슨 키드의 자유투 자세를 사용하면 이 키스를 날리는 루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