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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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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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Jane Auste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ne_Austen_coloured_version.jpg

출생
1775년 12월 16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햄프셔 주 스티븐턴 교회
사망
1817년 7월 18일 (향년 41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햄프셔 주 윈체스터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직업
소설가
활동 기간
1787년 – 1811년
활동 시대
조지 시대 (리젠시 시대)
사조
리얼리즘
장르
로맨스, 고딕
서명
파일:제인 오스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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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잉글랜드 햄프셔 주 윈체스터 대성당
장례일
1817년 7월 24일
학력
레딩 수도원 여자기숙학교 (1785-1786[1])
종교
개신교 (성공회)
부모
아버지 조지 오스틴 (1731-1805)
어머니 커샌드라 오스틴 (1739-1827)
배우자
없음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작가 활동
2.3. 사망
2.4. 작가 연보
3. 작품
3.1. 장편 소설
3.2. 미완성 작품
4. 영향을 준 인물들
5. 평가와 문학사적 영향력
6. 제인에 대한 말들
7. 개인적인 이야기들
8. 문화적 기념들
9. 팬덤
10. 타국에서의 인기
10.1. 미국
10.2. 일본
10.3. 인도, 파키스탄
10.4. 대한민국
10.5. 중국
10.6. 터키
10.7. 호주
10.8. 이란
11. 정치/사회적 해석과 논란
12. 기타
13. 관련 인물
13.1. 형제자매들
13.2. 이웃과 친구들
14. 대중 매체에서
14.1. 영상화
14.1.1. 정리
14.2. 기타
1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파일:£10 back-4.jpg
10파운드 지폐 속 초상화
잉글랜드소설가. 서양 문학사에서 매우 영향력 있고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주로 당대 영국 중상류층 젠트리의 생활을 펜에 담았다.


2. 생애[편집]


  • 월일이 명확하지 않은 서술에서 제인의 나이는 한국식 나이 - 2세(만나이)로 통일하여 표기함



BBC의 제인 오스틴 다큐멘터리


1091 미디어의 제인 오스틴 다큐멘터리


2.1. 어린 시절[편집]


1775년 잉글랜드 햄프셔 주 스티븐슨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일곱째 딸로,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옥스퍼드 대학교를 나와서 지역 교구 사제(vicar)를 지냈다. 어머니 커샌드라 오스틴[1]의 결혼 전 성은 '리'였다. 방대하게 퍼져 나간 리 가문의 선조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의 런던 시장으로 리 가문의 많은 이들이 귀족 작위를 받았거나 귀족들과 결혼했다. 그러나 후손들까지 부유했던 것은 아니었다. 커샌드라 리의 아버지는 평범한 교구 사제였고, 친척으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아 부자가 된 오빠와는 달리 커샌드라는 작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이었다. 제인 오스틴은 사제의 자녀이므로 신분상 젠틀맨 계층이지만, 형제자매가 많고 교구가 크지 않아 가정형편은 넉넉하진 못했다. 따라서 아버지는 농장일을 부업으로 해야 했고, 제인도 어릴 때부터 일을 거들었던 듯하다.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가난한 사제였지만 500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했다. 옥스퍼드를 다녔던 오빠 제임스와 헨리는 함께 문예 잡지를 창간하고 시를 쓰며 연극을 했다.

어린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이웃 르프로이 부인의 서재에서도 책을 빌려볼 수 있었던 덕에 문학적 지식력을 키웠다. 제인 오스틴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읽고, 쓰고, 읽히기를 원했다. 제인 오스틴이 어릴 때 쓴 이야기들은 남자 아이들이 넘쳐나는 집의 활기찬 에너지를 반영하듯이 폭력과 거친 몸 싸움, 험한 말 장난 등으로 가득해 얌전한 목사관의 소녀가 수줍게 숨겨가며 썼다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이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소년 관객들을 의식하고 쓴 농담들이다.

제인은 부드러운 성격에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와 더 가까웠던 듯하다. 십대 시절 아버지 조지 오스틴이 관리했던 교회에 몰래 들어가 결혼 명부에 자신의 이름과 가상의 신랑 이름을 적어 놓거나, 가족끼리 돌려보기 위해 썼던 풍자적인 역사서에 가톨릭에 끌린다고 써 놓는 등 아버지를 겨냥한 장난을 종종 쳤다.[2] 이런 일화를 보면 아버지와 편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19살이 된 제인에게 생일 선물로 글 쓰기용 책상을 주고, 딸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가장 먼저 시도했을 정도로 딸의 재능을 믿고 지지했다. 어머니 커샌드라와는 관계가 좀 복잡했다. 제인은 어머니의 실용적인 성격과 의지를 높게 평가했고 풍자의 재능까지 물려 받았지만, 남아있는 편지들로 봐서는 늘 쉬운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언니 커샌드라 오스틴(Cassandra Austen)와 같이 수도원 기숙학교에서 2년간 교육을 받고 나머지는 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정도면 당대 젠트리 여성 중에서도 꽤 교육을 받은 편이었다. 또한 아버지가 엄하지 않아서 많은 시간을 독서에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도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던 것 같다. 18세기 영국 상류층 여성들은 당시 유럽 분위기가 그렇듯 교양을 쌓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미술, 음악 등 많은 분야를 골고루 적당히 (교양 수준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를 전문적으로 파는 것은 오히려 품위 없다고 여겼다.

제인은 11세 무렵부터 소설을 습작했는데, 자기가 쓴 글을 저녁식사 후에 가족들에게 들려주고 평가받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스무 살이 되기까지 희곡, 시, 단편소설, 에세이 등 여러 장르 글을 쓰며 습작기를 보냈다. 언니 커샌드라 오스틴(Cassandra Austen)과는 어릴 적부터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평생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젊을 때는 연애사업에도 꽤나 몰두했다고 한다. 오빠인 헨리가 "제인은 춤에 미쳤어요!"라고 쓴 기록이 있을 정도. 언니 커샌드라가 제인 오스틴의 가장 친한 친구로, 지금 남아있는 가장 유명한 초상도 커샌드라가 그린 것이다. 또 여느 소녀들처럼 평범했던 그녀에게 내재되었던 문학적 감수성이 일깨워진 데는 시와 연극을 좋아한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2.2. 작가 활동[편집]


1796년(20세)에 토마스 리프로이(Thomas Langlois Lefroy)라는 아일랜드 태생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갔고, 제인이 언니 커샌드라에게 내일이면 톰에게 청혼받을 것 같다고 보낸 편지[3]가 남아있다. 제인은 러프로이와 만난 것을 두고 커샌드라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아일랜드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못하겠네. 가장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모두 상상해보시길. 같이 춤추고 앉아있을 때 일어날 만한 걸로.

- 1796년 1월 -


편지에서도 제인이 토마스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대법관인 외삼촌에게 매였기 때문에 제인보다 더 부유한 집안의 여인을 선택해야 했고, 비교적 가난한 사제 집안의 딸인 제인 역시 톰보다 부유한 남편감을 만나야 했다. 결국 둘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고, 토마스가 아일랜드로 떠난 뒤 다시는 서로를 만나지 못했다. 이 결혼이 무산된 즈음해서 제인은 1795년,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의 바탕이 되는 <엘리너와 메리앤(Elinor And Marianne)>을, 1796년 남자 쪽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는 와중에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바탕이 되는 <첫인상(First Impressions)>을 쓰며 본격적인 프로 작가가 되었다. 첫인상을 완성했을 때 나이가 20살이었다.


파일:0802_304_3.jpg

오스틴의 오빠가 사준 스티븐턴의 저택. 여기서 제인의 명작들이 탄생했다.

<첫인상>을 집필하고 나서 제인은 아버지와 같이 소설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이곳저곳 찾아다녔지만 다 거절당했다. 나중에 <노생어 애비(Northanger Abbey)>로 개작된 <수잔(Susan)>도 1803년(27세)에 출판사가 판권을 샀지만, 제인이 나중에 유명세를 타서 판권을 되살 때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초기에는 문전박대당하는 신생 작가였다.

아버지가 지역 교구 사제직을 은퇴하고 바스(Bath)[4]로 이사한 뒤, 제인 오스틴의 작품활동은 한동안 뜸해졌다.

1802년(26세)에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오고 지역에서 꽤나 명망 있는 집 자식으로 제인보다 6살 어린 해리스 비그위더(Harris Bigg-Wither)[5]라는 남자에게 청혼받고 수락했다. 주변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해리스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말더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꽤나 사는 집 자식이었기 때문에 제인이 결혼한다면, 역시 독신이던 언니 커샌드라의 경제적 문제나 오빠들의 진로에도 도움이 될 수 있었고, 가족 대 가족으로 본다면 제인네 집안에 큰 이득이 되었다. 하지만 제인은 청혼을 받아들인 다음날 결정을 번복하고, 이후에도 쭉 독신으로 살다 독신으로 죽었다. 1805년(29세)에는 제인의 아버지가 바스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809년(33세) 바스에서 햄프셔(Hampshire)주 초튼(Chawton)으로 이사한 후 정력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해 소설 4개를 출판했다. 주로 오빠 헨리가 출판사와 연락하고, 제인 자신은 익명으로 발표를 했다. 1811년(35세)에 출판한 <이성과 감성>은 출판과 동시에 꽤나 호평을 받았고, 제인이 독립적으로 먹고살 만한 경제적인 자산을 주었다.[6]

1813년(37세)에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만과 편견>을, 1814년(38세)에는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를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익명으로 발표되어 친한 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 즈음, 익명으로 활동하던 제인의 정체가 대중에게 조금씩 알려졌다. 런던 상류층 사회에서 제인의 소설은 꽤나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영국의 섭정이던 왕세자(조지 4세)도 좋아해서 궁으로 초청했다고 한다. 이 초청 때문에 제인은 1815년(39세)에 <엠마>를 출판하며 반강제적으로 왕세자에게 헌정해야만 했다.


2.3. 사망[편집]



제인 오스틴의 묘지

제가 살아남아 나이가 든다면, 지금 죽었어야 했다고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무도 혹은 아무 애정도 남지 않은 그때가 아니라, 이렇게 가족이 보살펴 줄 때 축복받으며 지금 죽었어야 했다고.

- 제인 오스틴의 편지, 1817년 5월 -


1816년(40세)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다.[7] 1817년에 몸상태가 크게 나빠지자 인근에 있는 윈체스터(Winchester)시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해 7월 18일, 언니 커샌드라의 무릎을 베고 사망했다. 향년 41세. 시신은 윈체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오빠 헨리는 사무적인 연줄을 통해 여동생이 윈체스터 대성당 북쪽 통로에 묻힐 수 있도록 주선했다. 오빠 제임스가 지은 비문은 제인의 개인적인 자질과 재능을 칭찬하고 구원의 희망을 염원했지만, 작가로서 이룬 업적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사인을 두고는 논란이 분분하다. 부신피질의 기능이 떨어지는 애디슨병, 티푸스의 재발형인 브릴-진저병, 림프종의 일종인 호지킨 림프종, 우유를 멸균처리하지 않고 먹을 때 생기는 소결핵균 감염증 등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사인이 한 가지 질병은 아니리란 것이 현재의 통론. 하여튼 왕성하게 활동할 적에 사망해서 많은 작품들이 사후에야 출판되었다.


2.4. 작가 연보[편집]


년도
사건
1775년
12월 16일, 제인 오스틴이 영국 잉글랜드 햄프셔(Hampshir) 주 스티븐턴 마을의 교회에서 교구 목사인 아버지 조지 오스틴과 어머니 커샌드라 리 오스틴 사이에서 8남매 중 일곱째이자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85년-1786년
언니 커샌드라와 함께 리딩 수도원 여자기숙학교에서 간헐적인 기숙학교 생활을 한다.
1787년 - 1793년
<습작생활>(사후 3권으로 출판).
1793년-1795년
소설 <레이디 수전>을 집필.
1795년 (19세)
소설 <엘리너와 메리앤>을 집필.
1795년-1796년
소설 <첫인상>을 집필. 런던의 한 출판사에 가져갔으나 거절당함.
1797년-1798년
소설 <엘리너와 메리앤>을 <이성과 감성>으로 개작.
1798년-1799년
소설 <레이디 수전>을 집필.
1799년-1800년
1791-1792년 시작했다고 추정하는 희곡 <찰스 그랜디슨 경>을 완성.
1801년
아버지가 은퇴하고 장남인 제임스가 교구를 물려받은 뒤 어머니, 언니와 함께 서머싯바스시로 이사함.
1802년
해리스 비그위더의 청혼을 수락했다가 번복.
1803년-1804년
소설 '왓슨 가족'을 집필한다.
1805년
아버지 조지 오스틴이 사망한다.
1806년-1809년
바스를 떠나 약 3년 동안 형제, 친척, 친구 집을 전전한다.
1809년
나이트 집안의 상속자인 그녀의 오빠 에드워드가 마련해 준 햄프셔 주 초튼(Chawton)의 작은 집으로 이사. <레이디 수잔>의 판권만 사놓고 출판이 지연되자 크로스비 출판사에 항의 편지를 보냄.
1811년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 출판, 수익은 140파운드. 소설 <맨스필드 파크> 집필을 시작.
1811년-1812년
소설 <첫인상>을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
1813년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출판. 수익은 110파운드. 소설 <맨스필드 파크> 완성.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이 매진되어 재판인쇄.
1814년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가 출판되자마자 매진. 수익은 310-350파운드.
1814년-1815년
소설 <엠마>를 집필.
1815년
소설 <엠마(Emma)>를 출판. <엠마>는 다음 해 매진되었고 수익은 221파운드. 소설 <설득> 집필을 시작.
1816년
소설 <레이디 수전>의 판권을 되삼. <맨스필드 파크> 재판인쇄. 소설 <설득> 완성.
1817년
<샌디턴>(당시 가제 [형제들]) 집필을 시작했으나 병으로 중단. 7월 18일 새벽 4시 30분 사망. 향년 41세. 동월 24일 윈체스터 대성당에 묻힘. 12월 <노생거 수도원(Northanger Abbey)>. <레이디 수전>을 개제한 것과 소설 <설득(Persuasion)>이 출판됨. 오만과 편견의 재판도 매진된다. <레이디 수전>, <왓슨 가족>, <설득>의 교정 전 원고가 출판.
1884년
<제인 오스틴의 편지>가 두 권으로 출판.
1922년
<사랑과 우정>(제인 오스틴의 습작 중 제2권)이 출판.
1923년
채프먼[8]이 편집한 <제인 오스틴 소설 전집>이 5권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출판된다.
1925년
채프먼이 편집한 소설 <샌디턴>과 <레이디 수전>이 출판.
1926년
채프먼이 편집한 <설득>의 마지막 두 장과 다양한 기록에서 추정되는 소설 계획서가 출판.
1932년
채프먼이 편집한 <제인 오스틴이 언니 컨샌드라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두 권으로 출판됨.
1933년
채프먼이 편집한 <습작> 제 1권 출판.
1940년
제인의 <세 편의 저녁 기도> 출판.
1951년
채프먼이 편집한 <습작> 제 2권 출판.
1954년
전집에서 제외된 작품들을 모아 옥스퍼드 전집의 제6권으로 출판.
1975년
소설 <샌디턴(Sanditon)>의 원고 출판.
1980년
<찰스 그랜더스 경>이 출판된다.
1995년
<제인 오스틴의 편지> 3판.
1996년
<제인 오스틴: 시 전집과 오스틴 가족의 시> 출판.
2017년
서거 200주년. 제인 오스틴이 10파운드 지폐 도안인물로 선정됨.


3. 작품[편집]




제인 오스틴의 장점은 취향에 맞으면 모든 책들이 다 기본적인 재미, 작품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전집도 추천한다. 시공사에서 제인의 전 작품을 번역해 전집을 발매했다. 디자인이 상당히 고급스럽고 번역의 평도 나쁘지 않다. 민음사도 거의 모든 책을 번역했다.


파일:제인의 책 읽는 법.png

독서 마이너 갤러리에서 제인의 책 읽는 법을 만들었다. 참고용으로 보자.#


3.1. 장편 소설[편집]


제목
발간년도
이성과 감성
Sense and Sensibility
1811년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1813년
맨스필드 파크
Mansfield Park
1814년
엠마
Emma
1815년
노생거 사원
Northanger Abbey
1817년
설득
Persuasion
1818년
사랑과 우정 [9]
Love and Friendship
1871년


3.2. 미완성 작품[편집]


제목
집필년도
왓슨 가족[10]
The Watsons
1803년
샌디턴
Sanditon
1817년


4. 영향을 준 인물들[편집]


제인 오스틴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첫번째로 가족이다. 다른 모든 형제자매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제인이 훌륭한 작가들과 친해지도록 격려해 주었다. 부모의 도서관에서 알렉산더 포프셰익스피어의 시, 조셉 애디슨과 새뮤얼 존슨의 수필, 헨리 필딩 , 로렌스 스턴, 패니 버니, 새뮤얼 리차드슨의 소설, 윌리엄 카우퍼의 작품을 읽었다. 프랜시스 레이섬(Francis Lathom)의 <Midnight Bell>과 같은 소설도 포함한다.

어머니 커샌드라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재치 넘치는 시를 쓰고 대화를 하여 '활기찬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제인의 '매우 생생한 상상력'과 에피그램(Epigram)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에서도 그런 편린이 나타났다. 가족모임에서 형제자매들과 대화하며 제인은 우스운 이야기를 하고 토론하는 경험을 쌓았다.

패니 버니도 제인 오스틴에게 영향을 주었다. 여성 서사, 피카레스크와 괴상한 것의 의미를 공유하고, 자유 간접적 연설의 가능성을 알렸다. <노생거 수도원>에서 제인은 페니 버니에게 경의를 표했다. 실제로 패니 버니의 소설 <Camilla>, <Evelina>, <Cecilia>, <The Walker> 등에서는 남성적 캐릭터들이 자기가 보호하기로 한 여성 캐릭터들을 억압한다. 제인이 <찰스 그랜디슨 경의 역사>를 다시 읽은 뒤, 새뮤얼 리차드슨도 영향을 끼쳤다. 역설적으로 제인 오스틴은 리차드슨의 감정에 대한 풍자에 관여하며 동시에 그를 끊임없이 언급했다. 사실 제인은 리차드슨의 미덕을 충분히 고맙게 여기며,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들도 그 단점을 다룬다.

새뮤얼 존슨은 제인 오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줬고 제인은 그를 굉장히 존경했다. 설득에서 묘사된 영국 해군 영웅들과 같은 그의 인물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은 존슨의 스토이시즘과 영혼의 힘으로 영향받았다. 게다가, 영국 지식 엘리트 전체에서 존경받던 존슨은 무의식적으로 초보작가인 제인에게 매력적인 모범이었을 것이다. 존슨의 끊임없는 게시된 조언과 윤리는 제인 오스틴의 평온하고 물린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존스의 영향으로 도덕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제인은 헨리 필딩에게서 영국 사회의 특정 유형의 인물들의 영향을 받았다. 톰 존스는 또한 오스틴에게 피카레스크 스타일의 영향을 줬다. 오스틴은 샬롯 레녹스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벌레스크의 의미, 특유의 유머는 제인이 레녹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1752년에 출판된 샬럿 레녹스와 그의 책인 'The Female Quixote'의 영향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808년 오스틴이 언니 커샌드라에게 쓴 편지에서 언급한 것이다.[11]

샬롯 레녹스가 묘사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여성적 묘사의 영향은 특히 공포와 공포의 감정이 불타는 그녀의 영웅들의 우스꽝스러운 감정과 대조되는 제인의 <노생거 수도원>에서 눈에 띈다. 제인의 캐릭터 이사벨라 소프는 샬럿 레녹스의 영웅인 아라벨라, 그리고 이사벨라의 지나치게 낭만적인 성격, 흥분과 판타지 경향을 연상시킨다. 아라벨라는 한 눈에 살인할 수 있고, 그녀를 위해 천명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꿈꾼다.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동안 책을 많이 읽었다.[12] 또한, 오스틴의 기술을 통해 작가들의 스타일적인 요소를 손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5. 평가와 문학사적 영향력[편집]







영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작가이다.

제인 오스틴의 리얼리즘, 유머, 사회적 논평과 함께 신랄한 아이러니를 사용한 문체는 현재까지 평론가, 학자,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높이 평가되었고, 현재는 세계 문학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작가 서머셋 몸이 뽑은 가장 위대한 작가 10명 중에도 들었고,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 또한 제인 오스틴을 서구 문학의 중심 중 하나로 보았다.

2007년 유명작가 126명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뽑았는데 제인의 작품 5개가 뽑혔다.[13] 제인의 작품이 6개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기록이다.[14] 가장 많은 포인트를 얻은 작가에서는 10위를 기록했다. 1위는 레프 톨스토이, 2위 윌리엄 셰익스피어, 3위 제임스 조이스, 4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5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6위 윌리엄 포크너, 7위 찰스 디킨스, 8위 안톤 체호프, 9위 귀스타브 플로베르[15]다.#

스탠퍼드 대학교 영문학 교수 알렉스 월로치(Alex Woloch)는 문학학자 대부분은 현대 소설을 논하면서 제인이 예술에 기여한 바를 믿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제인의 작품에 관심이 없었던 시절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설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전문가인 월로치는 소설의 주요 인물의 창조를 조사한 박사학위 논문의 상당 부분을 오스틴에 집중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그 후 그의 경력 내내 그녀의 작품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월로치 교수는 "오스틴은 영어에서 가장 큰 문학적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그녀는 셰익스피어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그녀의 중심성은 너무나 확립되어 있다." 하고 비평했다. 제인의 글은 코미디와 자각, 그리고 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사실적이고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돋보인다. 월로치는 "독자가 느끼는 지성의 수준이 작품 속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심리적 지각력, 그리고 그녀의 순수한 글솜씨와 관련이 있다.", "제인 오스틴을 읽을 때, 당신은 권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의 손에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하지만 그녀가 당신보다 한 발 앞서 있다는 느낌이 항상 있다."라고 평했다.

특히 문학학자들은 3인칭 서술의 한 스타일로 자유간접담론을 제인이 섬세하고 혁신적으로 사용했음을 지적한다. 등장인물의 관점과 생각이 이야기의 화자와 얽힌 이 양식은 현재 현대 소설에 널리 쓰이지만,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비로소 구체화되었다. 월로치 교수는 "오스틴이 정말 시대를 앞서갔다. 그녀는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성직적이다. 그녀의 작품은 과거 문학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아직 쓰여지지 않은 소설들과도 너무나 쉽게 대화에 빠져들게 된다."라고 말했다. 영국 문학 박사 엘리자베스 와일더는 "오스틴의 스타일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돼 레프 톨스토이, 조지 엘리엇, 찰스 디킨스 등 작가들이 참여한 문학 현실주의 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와일더는 "오스틴의 기고문은 다른 작가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고 각색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이 얼마나 획기적이었는지 쉽게 잊을 수 있다." 말했다.

제인은 주로 익명으로 작품을 출판했기 때문에 인기가 저평가되기도 했다. 지금의 명성은 문학학자들이 작품을 더욱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한 1940년대, 특히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업적에 눈을 들이댄 때부터 확고해졌다. 영국 영문학 박사 매튜 레드몬드는 "아마도 오스틴보다 더 접근하기 쉬운 정통적인 작가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에 대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스틴은 그렇지 않죠."라고 말했다. 제인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오만과 편견>은 제인식 스토리텔링의 특징을 보여준다.

레드몬드 박사는 "오만과 편견은 소설 형식을 초월해 현대 신화가 됐다.", "오스틴이 그 작품만을 썼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녀가 영어 산문의 깊이와 해상도를 극적으로 증가시켰다고 말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제인 특유의 내레이션 스타일이 힘을 발휘하는 <엠마>를 제인의 가장 위대한 소설로 본다고 월로치 교수는 말했다. "엠마는 당신이 그것을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명하고 그것은 더 흥미로워지죠.", "모든 문학 작품이 시간을 버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따분해지기도 하죠." 하고 말하기도 했다.

제인 작품 연구로 논문을 쓴 와일더는 <설득>을 작가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스틴의 마지막 완결 소설이었던 이 책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일어났으며, 그녀의 다른 작품들보다 후회, 상실, 주도되지 않은 삶을 주제로 초점을 맞추었다. 와일더는 "나에게 설득은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소설 중 하나이며, 부분적으로는 그녀가 그 안에서 자신의 규칙을 많이 어기기 때문. 소설의 배경은 개인이나 국내와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오스틴을 전쟁 소설가로 생각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설득은 그녀의 비전이 얼마나 광범했던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라고 말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18세기 후반의 문학 감성을 비평하며 19세기 사실주의 기법과의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그녀의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코미디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사회경제적 지위의 안정을 위해서 여성이 결혼에 의존하는 면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제인은 대체로 재산상속을 못 받고, 일을 못하며 희망이라고는 오직 결혼한 남자에게 의지하는 것밖에 없는 여성들의 고된 삶을 다뤘다.

제인는 당시 여성의 어려움뿐 아니라 남성이기에 요구되는 모습, 즉 그들이 만들어가야만 하는 경력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제인은 위트와 유머를 곁들여서 이야기를 풀어내며 권선징악에 따라 결말을 맺는다. 생전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별로 못 얻었으나 1869년 조카가 <제인 오스틴 자서전>을 펴내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제인이 영문학의 위대한 작가 대열에 포함된 건 1948년에 와서였다. 당시 문학평론가 F R 레비스는 저서 ‘위대한 전통(The Great Tradition)’의 서두에서 “오스틴은 영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4명의 소설가 중 1명”이라고 썼다.

오스틴은 사후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는 보기 드문 고전 문학 작가 중 한 명이다.[16]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전 세계에서 영화, 드라마로 리메이크되며 시대를 뛰어넘는 메시지와 감동을 안겨주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의 유력 언론 '디 애틀랜틱'은 "셰익스피어[17]만큼 사랑받은 그녀는 아직도 철저하게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개인적인 번영의 비전을 형성했다"라고 평했다.#

사후의 인기만큼은 아니어도 생전에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작품이 인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풍족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익명으로 활동한 이유도 있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급작스럽게 사망한 이유도 있다. 당대에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대한 평론들은 주로 피상적으로 도덕적 교훈을 논했지만, 월터 스콧은 필체에 담긴 리얼리즘에도 주목했다. 대체로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조지 4세도 제인의 소설을 좋아해서 섭정 노릇을 하던 왕세자 시절에 제인을 궁으로 초대까지 한 것이다.

사후, 시간이 지날수록 제인의 작품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평론가들은 제인에게 부정적이었다. 1869년 조카가 이모에 대한 기억을 담은 책을 출간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더욱 올라갔는데, 이 때문에 비평 또한 무지하게 쏟아졌다. 조카들은 작가 지망생이었는데, 당대 빅토리아조 특유의 근엄한 도덕주의 기준에 맞춘 사실만을 모아 전기를 쓴 탓에, 사후 100여 년간 제인은 요절한 성녀로 알려졌다.

가장 친한 바로 손윗언니 커샌드라는 동생과 거의 매일 그날그날의 일을 편지로 주고받았고, 제인의 생활이나 견해를 잘 보여주는 편지가 상당히 있었지만 제인이 죽은 뒤 사적인 편지들이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이후 정본이 확립되고 누락된 편지와 습작, 미완성작들이 출간되며 제인은 재조명되어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제인은 요조숙녀나 성녀라기보다는 지적이고 활력이 넘치며 개성이 강한 인물로서, 풍자에 능한 작가답게 주변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속물주의에 대한 비판과 조소를 삼가지 않았다. 다만 그러한 비판은 제인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듯 듣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이끌어내는 장난스러운 것에 가까웠음을 언니와 나눈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18]

후대의 소설가, 드라마 작가들마저 부러워할 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제인 오스틴은 정말로 식상하고 진부할 수 있는 소재와 통속적인 구조 속에서도 주제의식과 재미 두 가지를 다 잡아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위와 같은 구조를 가진 작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범람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양질의 작품을 찾기란 매우 힘이 든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분명히 표지만 봐도, 발단, 전개, 결말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는 점, 그러면서도 그냥 잘 읽히는 말초적인 재미만이 아닌 진지한 주제를 녹여낸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오스틴의 천재성은 캐릭터 창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녀의 캐릭터들은 복잡 미묘하면서도 생생해서 독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쉰다. 플롯 구성과 연인이 될 것 같은 캐릭터들을 계속 떼어 놓는 기술의 측면에서 오스틴은 음유시인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코미디 주인공들이 비극의 주인공들과 달리 입체감과 깊이가 없어 보이는 반면, 오스틴의 캐릭터들은 결혼이라는 필연적인 결과를 향해 달려가면서 다양한 측면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결혼은 모든 마음의 고통을 달래주고 오해를 푸는 장치다.

제인의 삶은 유럽 전역이 혁명의 질풍노도에 휘말려 있던 격변기와 정확하게 겹쳐진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14살 때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1817년 사망하기까지 혁명은 시대를 지배하던 정신이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 문화계에서는 낭만주의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또는 그녀의 소설)은 이 모든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가 혁명과 낭만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견해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비판론자[19]들은 제인이 일기 속에서조차 혁명을 언급한 적이 거의 없고 여행을 한 적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를 오로지 시골 중상류층의 협소한 세계 속에만 틀어박혀 남녀의 소소한 애정사에 관심을 집중했던 작가로 폄하했다.

하지만 제인은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했고, 당시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일말의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 매우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오스틴 소설이 다루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인 사랑과 결혼, 부에 대한 강박, 사회계층적 추락에 대한 두려움, 이성과 신중함의 미덕 등은 21세기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큰 관심사다. 감정의 거품을 거부하는 소설 속 캐릭터들이 19세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세계에 옮겨놓아도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시간을 초월하는 현대성을 갖고 있다는 점 역시, 자유로운 재해석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제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성격 때문에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지만, 계급과 자본의 벽에 부딪혀 고난을 겪는다. 애정이라는 모호한 감정이 결혼이라는 구체적 제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현대에도 여전하며,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되는 주제다. 오스틴의 인물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조건보다 사랑’이라는 진취적 결단을 내린다. 제인 자신도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자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떴다. 결혼을 통해 신분을 유지하던 당시의 영국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버니지아 울프도 “순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이 본 그대로의 사물을 고집하는 일은 대단한 재능과 성실성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등을 번역한 윤지관 교수(덕성여대)는 “보수적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제인 오스틴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신여성’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의 소설은 전통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아 성취와 성장 등 원형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며 “근대 초기에 드러난 이런 문제가 지금까지도 되풀이되고 있어 그의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다”고 분석했다. 오스틴의 전문가이자 프린스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클라우디아 L 존슨에 따르면, 오스틴은 로맨스 소설가가 아니라 강인한 냉소적인 사회 비평가로서 널리 간주된다고 평했다. 존슨 교수는 "아쉬워라, 오스틴은 전형적으로 (내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에 의해) 그녀의 사랑 이야기로 사랑받고 있다. 이건 정말 손해인 것 같소."라고 말했다.

수많은 문학적 연구에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다루었다. 대중적 인기도 대단해서 1940년대부터 영상화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숫자는 엄청 많다. BBC에서 <오만과 편견>을 드라마화한 것만 해도 수차례가 넘는다. 현재는 서양 문학계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6. 제인에 대한 말들[편집]


이 젊은 여성만큼 일상생활의 갖가지 곡절과 감정과 성격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를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건과 인물들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저 놀라운 필치에는 도저히 따르지 못한다.

― 월터 스콧 경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이 구사하는 재현의 기술은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만하다.

해럴드 블룸#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논할 때, 단편이나 시보다는 장편소설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소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사회 개혁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제인 오스틴을 능가할 작가는 없다.

해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中#


영국 소설의 위대한 전통은 제인 오스틴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 프랭크 레이먼드 리비스 (문학 비평가)#


오스틴은 영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4명의 소설가 중 1명이다.[20]

― 프랭크 레이먼드 리비스 (문학 비평가)#


그녀는 산문계의 셰익스피어다.

― 토마스 매콜리 (사학자)#


그녀를 만드신 주님을 찬미하고

그녀가 만든 모든 것에 대해 그녀를 찬양하라

윈체스터 거리에 돌멩이가 남아 있는 한

잉글랜드의 제인에게 영광과 사랑과 명예가 있으라.

러디어드 키플링#


제인 오스틴은 풍자의 회초리를 들어 사정없이 인물들을 매질하는데, 이러한 풍자에는 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그녀의 완벽하고 예리한 감각이 실려 있다.

버지니아 울프#


그 어떤 소설가도 인간의 가치에 대한 완벽한 의미를 제인 오스틴보다 더 잘 살리지 못할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증오·고통·두려움도 없이 항의·설교하는 법도 없이 글 쓰던 한 여자가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


얼핏 보면 제인 오스틴의 방식과 소재는 낡고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나쁜 독자들이 범하는 착각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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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제인 오스틴에 대한 평가다.[22]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소설들, 그리고 그 소설들에 대한 골치 아픈 질문들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와 그 작품들은 정직했기 때문에 그녀는 위대했고 그 작품들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거의 100년 전 자연은 사실주의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주의는 물질에 대한 진실된 대우에 지나지 않으며, 제인 오스틴은 영국 소설가들 중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완전한 진실성을 가지고 물질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 일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영국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예술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으며, 홀로 위대한 스칸디나비아슬라브라틴의 예술가들과 어울릴 만한 가치가 있다.

― 윌리엄 딘 하우얼스 (미국 소설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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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품에서 파생된 기쁨은 평범한 인물들에 대한 우리의 동정, 유머의 향유, 그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지적 즐거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녀가 결코 더 깊은 감정을 동요시키지 않으며, 고귀한 포부로 영혼을 채우지 않으며, 훌륭한 아이디어로 그것을 밝게 하지 않는다고 인정될 때, 그러나 기껏해야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실패에 대한 자선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이고, 그들의 선함에 대한 동정심만을 가르칠 때, 우리는 그녀의 주장을 그들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반대를 인정하게 되었다.이 인종의 큰 후원자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모든 우수성과 함께 왜 그녀의 이름이 가정적인 단어가 되지 않았는지 충분히 설명해준다. 그녀의 명성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견뎌야 한다. 그녀의 예술은 결코 늙을 수 없고, 대체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미니어처는 프레스코화가 아니며, 그녀의 작품은 미니어처다. 그녀의 자리는 불멸자 가운데 하나지만, 대좌는 큰 절의 조용한 틈새에 세워져 있다.

― 조지 헨리 류스 (영국 철학자)[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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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소설을 쓰는 셰익스피어다.

― 조지 헨리 류스 (영국 철학자)#


셰익스피어는 대등한 자도, 2등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한 바로는, 위대한 거장의 태도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작가들 가운데, 우리는 영국이 당연히 자랑스러워하는 제인 오스틴을 배치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녀는 우리에게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주었는데,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하고, 우리가 매일 만나는 것과 같은 모든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 중에서 가장 괴팍한 인간인 것처럼 완전히 차별받고 있다…… 그리고 이 거의 모든 것은 너무나 섬세한 손길로 인해 분석을 회피하고, 설명의 힘을 거스르며, 우리는 그들이 기여한 일반적인 효과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토머스 매콜리 (영국 사학자)[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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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오스틴은 확실히 위대한 소설가였다. 그녀가 한 일은 완벽하게 해냈어 그녀의 일은 어디까지나 흠잡을 데가 없다. 그녀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 그녀가 연상했던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교육받은 숙녀로서 그녀에게 늘 있는 언어에 대해 썼다. 로맨스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로맨스에 대해 말할 때, 그녀는 아무런 기미도 없었다. 멋진 모험을 하는 영웅과 영웅들은 그녀의 소설에는 없다. 위대한 범죄자와 숨겨진 범죄에 대해 그녀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를 신사 숙녀들로 이루어진 동그라미 속에 배치하고, 남성이 여성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여성이 남성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의식적인 정확성으로 말해주는 동안 우리를 매혹시킨다.

― 앤서니 트롤럽 (영국 소설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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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을 감상할 수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리얼리즘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제인 오스틴은 모든 작가들이 꿈꾸는 별과 같은 존재다.

J. K. 롤링[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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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자존감은 제인 오스틴의 발명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디언지#


제인 오스틴은 문학의 로제타 석이다.

― 안나 퀸들렌 (퓰리쳐상 수상 기자) #


오스틴은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던, 자기 자신을 응시할 수 없었던 18세기 소설을 다시 고안해 안정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근대적인 형태로 만들어 냈다.

― 조이스 캐롤 오츠 (미국 작가)#


역시 제인 오스틴이야! 인생의 만병통치약이지!

― 영화 ‘제인 오스틴 북 클럽’ 中[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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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삶은 그녀를 작가가 되게 했다.

그녀의 말은 그녀를 전설이 되게 했다.

― 비커밍 제인#



7. 개인적인 이야기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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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의 오빠가 사준 스티븐턴의 저택. 이곳에서 그녀의 명작들이 탄생했다.
현재 제인의 흔적은 <설득>의 배경이 된 바스(Bath)와 1809년 오빠가 마련해 준 초튼(Chawton)의 살림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두 곳 모두 오스틴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이 중에서 로마 시대 때 온천장으로 잘 알려진 바스는, 20대 중반의 오스틴이 가족과 함께 이주한 도시이다.

사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바스로 이사한다는 말을 듣고 기절할 정도로 바스를 싫어했다고 한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8남매가 오순도순 살았던 고향을 훨씬 좋아했기 때문이다. 5세기 이후 귀족들이 온천욕을 즐기러 오면서 세련된 살롱 문화가 자연스럽게 전해진 바스는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시골 소녀 오스틴에게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신세계였다. 사치스러운 귀족들의 모습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오스틴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이런 생각들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도도한 태도로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이 동경의 대상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오스틴은 귀족문화가 발달한 바스에서의 경험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다. 바스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초턴은 오스틴의 문학적 세계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아담한 시골 마을이다. 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스민 초턴의 집은 셋째 오빠 에드워드가 마련해준 것으로, 오스틴이 8년간의 바스 생활을 접고 병든 어머니와 친언니 커샌드라와 함께 머물렀던 곳이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얕은 바람이 일 년 내내 살랑거리는 초턴은, 화려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의 바스와는 정반대되는 마을로 오스틴이 글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을 것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풍금 한 대와 악보가 눈에 들어온다. 오스틴이 사용한 풍금은 아니지만,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오스틴은 글뿐만 아니라 풍금을 치며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 한다.

제인의 가족은 아마추어 가족극단을 만들어 목사관에서 종종 노래하며 춤을 추었는데, 이런 가풍 덕분에 오스틴은 연주와 창작에 모두 뛰어난 소질을 갖추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좁은 통로 벽면에 1894년 출간된 <오만과 편견>의 삽화들이 액자 형태로 장식되었다. 중세 시대의 옷을 입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그리고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스케치가 오스틴의 감성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2층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제인의 작품 세계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집필실이다. 중세 시대의 여성 옷가지와 책상, 그리고 친언니 커샌드라가 그린 제인의 초상화 몇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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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이 사용한 보석함이다.
제인 오스틴의 침실이다.
오전에 그녀는 주로 이 책상에서 소설을 썼다. 잉크병과 펜대도 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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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이 런던이나 바스[29]로 외출할 때 사용했던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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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뿐 아니라 음악에 소질이 있던 오스틴이 즐겨 치던 피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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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의 방 내부에는 그녀의 초상화와 의자, 재봉틀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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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의 책이 출판될 때마다 도서 평이 났던 당시 신문들이다.

가계족보 추적 전문 웹사이트인 '앤세스트리 닷컴(Ancestry.com)'은 제인 오스틴과 케이트 미들턴이 약 30 촌지간의 먼 친척이라고 말했다. 영국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두 사람의 공통 조상이다.

연애·결혼 소설의 대가지만, 자신은 미혼으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비커밍 제인>에서는 제인 오스틴이 스무살 무렵에 톰 르프로이를 만나 비밀리에 약혼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 청혼을 받고 수락한 것은 26살 때였다. 상당한 재력가이자 6살 연하였던 남자의 청혼을 받고 수락했지만, 바로 다음 날 취소해 버렸다. 당시 기준으로는 청혼을 받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나이였다고. 미혼이 아닌 '비혼'을 적극적으로 택한 것 같다.[30] 그런 제인이 두 번이나 가짜 결혼을 발표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자신의 아버지가 교구장으로 있던 스티븐턴 교구의 결혼등록부에 자필로 결혼 발표 2건을 적어둔 것이 발견됐다. 10대 때 친 장난인 듯하다. 재미있는 점은 결혼 상대의 이름은 피츠윌리엄과 에드먼드라는 것. 나중에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인 오스틴의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스티븐톤 교구의 교구장이었으므로 교구 결혼등록부의 관리 책임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당연히 아버지가 관리하는 문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가상의 결혼 발표문도 장난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햄프셔 카운티의 평의회의 문화, 오락 집행위원인 앤드류 깁슨은 "아마도 제인 오스틴은 이 가짜 결혼 발표문을 작성할 때 십대였을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를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유머로 가득한 제인의 소설들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성격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제인 오스틴은 어린 조카딸 프레니 나이트가 결혼을 염두에 둔 남자에 대해 조언을 구했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가 그를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 언질도 주지 말고, 그를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도 안 했으면 싶다. 애정 없이 결혼하느니 다른 것들이 더 낫거나 더 견딜 만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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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의 언니 커샌드라가 수채화로 그린 초상화다. 오늘날 제인 오스틴의 얼굴을 그린 인물화들은 이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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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오스틴의 형제 중 한 명의 직계 후손인 라이스 가문의 소유물이다. 라이스 부부는 이 그림이 제인의 모습인데, 오자스 험프리로부터 1788년 12살 제인과 언니 커샌드라가 켄트에 있는 큰삼촌 프란시스를 방문하기 위해 갔을 때 의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그림의 정체는 수십 년 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이 사진이 제인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해외 판매 허가를 내준 국립 초상화 갤러리를 포함한 전문가들은 이 드레스의 스타일은 한참 후인 1800년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한 의심은 2007년 크리스티가 그린 라이스 초상화를 경매에 부쳤을 때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2011년 학자 폴라 번이 오스틴의 잃어버린 초상화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오스틴의 초상화는 둘 다 그녀의 여동생 커샌드라에 의해 스케치된 두 장뿐이다. 라이스 가족은 자신들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어준다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다. 르프로이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명되지 않은 노트는 가족 연계를 통해 리스에게 전달됐다. 이 그림의 주인 앤 라이스의 아들 존 네틀폴드는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 역사'라고 표기된 작은 갈색 봉투가 현재 주인이 발견하기 전까지 오스틴의 글쓰기 책상에 보관되어 있어 간과되어 왔다"고 말했다. 레프로이는 오스틴이 죽은 지 3년 후에 태어났지만 소설가의 동생 제임스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오스틴을 잘 알았다.#

2013년 제잇 오스틴의 초상화가 경매에서 16만 4500파운드(2억 8400만 원)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오스틴 초상화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데다가, 2017년부터 영국 10파운드 지폐에 새겨진 그림이다. 수채화인 이 그림은 1869년 제인의 조카가 의뢰하여 그린 것으로, 제임스 앤드류스라는 화가가 그렸다. 이 작품은 이후 매각되면서 오스틴 가문의 손을 떠났으나 일반에 공개된 적은 거의 없다. 소더비 경매장 관계자는 "공개 시장에 나올 것으로 보이는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이 초상화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이 작품이 개인 수집가에게 팔렸다고 전했으나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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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새겨진 제인 오스틴의 이름.
묘지는 그녀의 고향인 햄프셔 주 윈체스터 대성당에 있다. 1967년에는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웨스트민스터 사원 남쪽 익랑에 그녀의 이름이 등재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편지가 사후에 언니와 친구에 의해 거의 다 없어졌다. 남은 편지를 원문과 함께 볼 수 있는 번역 편집본이 있는데 2019년 9월에 마음산책판의 제인 오스틴의 말들이라는 책이다.

홍차를 굉장히 좋아했다. 오스틴 전문가들이 제인 오스틴의 작품과 그녀가 남긴 편지들을 통해 유추한 결과 제인 오스틴이 즐겼던 아침은 홍차와 토스트였다. 전통적인 아침식사는 맥주와 에일(맥주의 일종으로 알코올 도수 6~8도 내외), 고기가 포함된 푸짐한 음식이었다. 따라서 제인이 즐긴 아침식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홍차에 대한 사랑은 '그와 차를 마시다'라는 책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이 책에는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일상에서 차가 어느정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집안에서 홍차를 직접 구매하고 관리하는 티 소믈리에였다. 당시 차는 매우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차를 보관하는 서랍의 열쇠를 제인 자신이 보관할 정도로 비쌌다. 가끔 하인들이 차를 몰래 내다팔기도 했으므로 차에 대한 감시가 엄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차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제인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없다.

'제인 오스틴은 구입한 차를 아무나 꺼낼 수 없도록 차 보관함에 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식사 때나 손님이 방문했을 때 그녀는 직접 차를 준비했다. 조카 캐럴라인 오스틴은 <나의 고모 제인 오스틴>에서 "아홉시면 고모는 아침식사를 만들었다. 이것은 고모가 맡은 집안 일이다. 차와 설탕은 고모의 감독 아래 있었다"고 기억했다.'(<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중)

그가 자주 갔던 찻집은 트와이닝스며 좋아하는 도자기 브랜드는 웨지우드였다. 트와이닝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 홍차 브랜드다.

여름휴가지로도 유명한 라임 레지스는 실제 제인 오스틴이 가족과 함께 1803년과 1804년에 두 차례 방문했던 곳이다. 제인 오스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설득>에 진기하고 매력적인 해안 마을, 라임 레지스가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책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제인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산책을 매우 좋아한다.

오스틴의 마지막 작문은 그녀가 죽기 3일 전에 언니 커샌드라에게 받아쓰도록 한 시였다. 그 시는 영국의 비오는 날씨에 대한 유머러스한 짤막한 시였다.

추정 키는 5'2''(feet & inches), 157.4 cm이다.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큰 키다.


8. 문화적 기념들[편집]


셰익스피어와 함께 시대를 초월한 영국의 문화 아이콘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제인 오스틴의 브랜드 가치가 날로 증가한다. 영화, 드라마, 연극과 같은 대중문화 부문 외에도 패션, 관광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인 오스틴 시대인 1790-1850년의 의상과 액세서리를 2011년 7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전시하고 있는 리버풀의 서들리 하우스에는 18세기 엠파이어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으려는 패션디자이너들과 관람객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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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찰스 로버트 다윈 대신 10파운드의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다.[31] 현재까지 영국 지폐에 새겨진 여성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외하고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엘리자베스 프라이, 제인 오스틴 이 셋이다. 작가로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32], 찰스 디킨스[33]에 이어 세 번째로 지폐의 인물이 되었다. 마크 카니 영국중앙은행 총재는 잉글랜드 남부 윈체스터 성당에서 신권을 발표하며 “오스틴의 소설은 첫 출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강한 목소리를 가진다.”, “이는 보편적 매력을 가진 오스틴 작가의 작품을 기념하기 위한 새 지폐”라고 소개했다.

새 지폐에는 오스틴의 초상화와 함께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독서만한 즐거움은 없어!"[34]라는 글귀를 담았다. 이 글귀는 오스틴 작품의 팬들에 의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 문구에 대해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해당 대사의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독서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 같아 보이는 해당 대사의 주인공 캐롤라인 빙리는 사실 독서를 즐기지 않으면서도 남자 주인공 디아시에게 매력을 표하려 독서가 취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카니 총재는 윈체스터 성당에서 열린 신권 발표식에서 "이 문구는 오스틴의 정신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 모두 동의하듯 '독서와 같은 즐거움이 없다.'는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녀의 작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대사의 아이러니를 음미할 수 있을 것", "사회를 향한 풍자를 담고 있기도 하고 여러 측면에서 작용한다."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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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탄생 235주년을 맞아 2010년 12월 16일 구글 두들이 나왔다.#
영국 왕립 조폐국에서 제인의 사망 200주년을 맞아 기념 화폐를 발매했다.#

2010년 7월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미완성 원고 ‘왓슨 가문(The Watsons)’이 무려 99만 파운드(한화 약 17억)가 넘는 금액에 낙찰됐다. 경매 전 소더비측은 30만 파운드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감정했으나, 무려 3배 이상의 금액에 옥스포드 대학의 보들리 도서관에 낙찰되었다. 완성이 되었다면 1/4 권 정도의 분량으로 추정되는 68 쪽 원고의 첫 부분 12쪽은 현재 뉴욕의 모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1차 대전 당시 적십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 팔았기 때문이다. 경매에서 최대의 경쟁자는 예상대로 모건 도서관이었으나, 국가유산기념기금[35]의 89만 파운드의 지원에 힘입어 보들리 도서관이 승자가 되었다. 도서관 관계자는 “소중한 문학유산을 지켜내서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하면서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원고는 영국에 머물 것이며, 이번 가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인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되는 해, 영국항공이 제인 오스틴 소설 속 명소 4곳을 선정하고 여행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나섰다. 그 덕분에 고향 햄프셔와 5년간 머물렀던 바스, 남부 해안의 여름 휴양지 라임 레지스, 소설 속 다아시의 저택이 있는 셰필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9. 팬덤[편집]


제인의 소설을 좋아하는 광팬들을 'Janeite(제인아이트)'라고 부른다. 뜻은 제인추종자. 이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2013년 ‘어몽 더 제인아이트’라는 극단적인 오스틴 중독증의 핵심을 파헤치는 책이 출간됐다. 일부 독자가 오스틴 소설 속 캐릭터와 섭정시대 영국 풍속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답을 얻기 위해 “제인 오스틴의 소수 광팬”들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깊이 파고든다. 이 책에서 오스틴 큰오빠의 직계 후손이 소개된다. 길이 9m의 쌍동선 엘리자베스 베넷호를 소유한 그는 배타적인 영국 제인 오스틴 협회에 반기를 들어 북아메리카 제인 오스틴 협회(JASNA)를 설립했다. 그밖에도 오스틴의 작품을 독서요법 그룹의 치료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직 암 전문 간호사와 오스틴 소설의 숨겨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빈치 코드’ 스타일의 음모론을 쓴 전직 부동산 전문 변호사 등이 등장한다. 오스틴을 자신의 ‘마약’이라고 부르는 샌디 러너[36]는 오스틴의 오빠가 살았고 그녀가 말년의 걸작을 쓸 때 방문했던 초튼 하우스를 1000만 달러의 거금을 들여 복원했다.

열성 팬들의 세계에서는 ‘맨스필드 파크’를 주제로 한 토론 모임에서 학자들이 첫눈에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미스터 다시 결혼하다(Mr. Darcy Takes a Wife)’ ‘의무와 욕망(Duty and Desire)’ 등 오스틴의 팬픽션이 수십 만권씩 팔려나간다. 또 현실 세계의 미스터 다시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온라인에서 만나고, 텍사스주의 평범한 주부가 정교한 조지 왕조 시대의 의상으로 유명인사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JASNA의 행사 때면 엠파이어 웨이스트(허리선이 가슴 바로 아랫 부분에 있는) 평상복 드레스와 보넷, 모피를 댄 여성용 외투, 멋진 실크 이브닝 드레스들로 눈길을 모은다. 제인 (오스틴) 애호가라는 뜻의 제인아이트(Janeites)는 1894년 문학비평가 조지세인스베리가 만든 용어다. 당시 빅토리안 르네상스로 오스틴의 인기가 치솟았고 젊은 귀족들은 오스틴을 ‘신성한 제인’이라고 불렀다. 제인아이트들은 “탐닉에 가까운 열의”와 “다방면에 걸친 강렬한 열정”을 지녔다. 박사학위를 받은 종신직 교수, 고교 중퇴자, 텍사스주의 농부, 도시 상류층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JASNA나 영국 제인 오스틴 협회에 소속돼 연례회의에 참석해 동료 추종자들과 교류한다.
2014년 제인 오스틴 팬들이 모인 축제가 열렸는데 '리젠시 시대[37](1795년-1837년)'의 의상을 입고 모이는 기네스 세계기록을 갱신했다. 바스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가을 1년에 한 번 제인 오스틴 축제가 열린다. 오스틴의 팬들은 18세기 초 복장을 입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속 인물이 되어보는 체험을 한다. 축제 참가자들은 댄스, 하프, 예절교육, 콘서트, 연극, 가면무도회 등 다양한 체험을 한다. 오스틴의 팬이 아닌 사람들도 어떤 축제인지 궁금해서 구경하기도 한다. 첫째 토요일에 18세기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 행진을 펼치며 축제가 시작된다. 극장 공연, 콘서트, 야간 문화 행사, 음식, 댄스, 워킹 투어 등 다채로운 행사들도 이어진다. 이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광객의 참여다. 관광객들은 18세기 의상을 유료로 빌려 거리 행진 등에 참가할 수 있다. 행사가 예약제로 진행되기 때문에 티켓이 매진되면 이벤트에 참가할 수 없다. 예약은 필수이며 10일간 진행된 축제 기간에는 행사 티켓의 98%가 팔릴정도로 인기가 많다.

인구 8만 5000여 명인 소도시 바스는 2000여 년 전 고대 로마군이 세운 온천 휴양도시다. 하지만 최근에는 온천보다 제인 오스틴 관련 축제로 더 유명하다. 2001년부터 도시가 가진 역사, 문화, 사회적 자산에 제인 오스틴의 콘텐츠를 입히는 차별화 전략을 하고 있다. 도시가 가진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자산에 ‘제인 오스틴’이라는 예술가의 혼을 입혀 도시 경쟁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곳에는 '제인 오스틴 센터'도 있다. 제인 오스틴 센터는바스 Gay street 40번지에 있다.[38] 제인 오스틴 센터는 가이드와 함께 구경을 하도록 되어 있다. 18세기 영국 리젠시 시대 의상을 입은 가이드들이 제인 오스틴의 삶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센터 안내를 해 준다. 센터를 모두 둘러 보는데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10대~20대 여성과 중년의 백인 여성[39]이 주를 이루는 제인아이트들은 영화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팬들처럼 함께 모여 관객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오만과 편견’[40]을 감상한다. 또 대영도서관에 가서 오스틴의 휴대용 책상을 관람하고 그녀의 머리카락[41]을 보러 초튼 코티지를 찾아간다. 이들은 해마다 돌아가며 그녀의 소설 한편, 또는 전편을 읽는다. 또 오스틴에게서 영감을 받아 스스로 글을 쓴다. 오스틴에 관한 역사적 안내서와 비평부터 제인 오스틴 뱀파이어 소설 [42]까지. 사실 오스틴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에든 호들갑을 떨며 열광하는 이들의 경향은 토머스 하디나 조지 엘리엇 같은 18세기 영국의 다른 소설가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보다 ‘해리 포터 시리즈팬덤’나 '톨키니스트’, '트레키' 같은 대중문화 열성 팬들과 더 닮았다.

하지만 제인아이트 그룹 내에서도 갈등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헌신적인 오스틴 학자들은 모슬린 드레스를 차려입고 콜린 퍼스의 ‘젖은 셔츠 신’에 탄성을 지르는 경박한 팬들이 “논의의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경멸한다. 또 오랫동안 오스틴을 숭배해온 열성 팬들은 엠마 톰슨의 ‘센스 앤 센리티’나 귀네스 팰트로의 ‘엠마’등 영화 한 편에 혹해 오스틴 추종자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을 우습게 여긴다. 예피의 말을 들어보자. “영화는 제인 오스틴을 과거 어느 때보다 대중과 가깝게 만들었다. 팬층의 기반을 확장하고 오스틴의 매력을 다각화했다. 하지만 난 고교 시절 자신이 속한 그룹에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며 심통을 부리던 못된 여자애가 된 듯한 기분이다.” 할리우드에 오스틴 열풍이 절정에 달했던 1998년 당시 JASNA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제인 열병은 즉흥적인 제인 전문가들을 생산했다. 오스틴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영화 한두 편을 보거나 소설 한 편을 읽은 게 전부다. 이런 부류를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부류가 “제대로 된 제인아이트”인지에 관한 논쟁은 오스틴의 생애와 그녀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의 진정한 내적 본성에 관한 논쟁에 비하면 약과다. 오스틴이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자신감 있고 삶에 만족하는” 여자였다고 생각하는 쪽과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분노에 차고 반항적인” 인물이었다고 보는 쪽이 팽팽하게 맞선다. 또 오스틴이 체제전복적인 사고를 지닌 여권주의자이자 “불안정한 아이러니”의 대가라고 생각하거나 “영국적 가치관”의 수호자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의 오스틴의 열성 팬들은 혼자 조용히 작품과 캐릭터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기껏해야 몇몇이 모여 각자가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하며 공감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1995년 BBC 미니시리즈에서 체격 좋고 섹시한 콜린 퍼스가 다시 역을 맡으면서 제인아이트의 규모는 급증하기 시작했다[43] 그러나 제인 열병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은 인터넷 덕분이다. 리스트서브 ‘오스틴-L’[44]과 웹사이트 ‘리퍼블릭 오브 펨벌리’[45]을 시작으로 인터넷 열기가 확산됐다. 동시에 그들은 소설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오래된 충동에 빠진다. 1799년 오스틴이 23세가 된 지 한 달 뒤 에든 버러 매거진에 실린 글에 나와 있듯이 “우리는 똑같이 반복되는 현실에서부터 소설이라는 구도 속으로 도망친다.” 예피의 책에 등장하는 제인아이트 중 다수가 오스틴을 상상 속의 대안적 세계로 통하는 관문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경기침체와 실업, 학대 받는 결혼생활, 암으로 죽어가는 배우자, 자살한 부모, 외롭고 사랑없는 삶에서 도망칠 수 있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19세기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제인의 소설을 좋아했다.# 다윈은 제인 오스틴의 책을 즐겨 봤는데, 이 사실은 1840년 다윈의 1840년 독서목록 소설 중 오스틴의 책이 세 권 <노생거 수도원>,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가 포함되어 알려졌다.[46] 소설가 피터 그레이엄은 경험주의자로서의 제인과 다윈을 심도 있게 비교하기도 했다.#영국 총리 테레사 메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오스틴의 열렬한 팬인 켈리 클락슨은 2012년 영화판 ‘오만과 편견’(2005)의 촬영지인 잉글랜드 중부 더비셔를 방문한 데 이어 소더비 경매에 나온 오스틴의 작품 ‘설득’(1818) 초판과 함께 이 반지를 낙찰받았다.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5만여 파운드(약 2억 5천만 원)에 낙찰받은 오스틴의 반지를 미국으로 가져가려 하자 영국 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켈리 클락슨은 언론 인터뷰에서 영국 정부의 결정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정부 권장가인 15만 2450파운드를 지불할 구매자가 나타나면 판매한다는데 동의한 상태다. 영국 문화부는 국보급 가치를 지닌 이 반지의 국외 반출을 한시적으로 금한다고 밝혔다. 금과 터키석으로 장식된 이 반지는 오스틴의 여동생 후손들이 보관해오다 작년 경매에 내놨다. 제인이 소장한 보석 중에는 이 반지를 포함 3점만 남았다. 에드 베이지 문화부 차관은 "41세에 요절한 제인 오스틴의 검소한 생활상을 고려하면 그녀와 관련된 물건은 무엇이든 진귀하다.", "영국인 구매자가 나타나 나라를 위해 이 반지를 지켜주길 고대한다." 촉구했다.


10. 타국에서의 인기[편집]



10.1. 미국[편집]


컬트라고 묘사할 정도로 제인 오스틴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팬들이 미국에 많다. 이 팬들을 BBC에서 분석하기도 했다.# 그들은 리젠시 의상을 입기도 하고 오스틴의 소설에 팬픽션을 쓰기도 한다. 이들은 스타 트렉이나 해리포터 팬덤과 비교되기도 한다. 어떤 팬은 자기 자신을 리젠시 시대의 투영하며 다아시 부부와의 부부간의 대화를 상상하며 그들만의 소설을 쓴다. 다른 사람들은 정교한 시대 의상을 입고 제인 오스틴을 테마로 한 티 파티와 공을 던진다. 제인 오스틴 소사이어티 오브 북미(Jasna)는 유료회원 1만여 명에 65개 지부도 있다. 2012년 10월, 많은 사람들이 보넷과 19세기 초 스타일 드레스를 입은 제인인 7백 명 이상이 3일간 강의, 댄스 워크샵, 골동품 전시회, 연회, 무도회, 무도회 등을 통합한 자스나 행사를 위해 뉴욕 브루클린에 모였다. 오스틴이 1817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6편의 소설을 남긴 채 무려 20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면 기이한 현상이다. 그녀가 영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만, 찰스 디킨스레프 톨스토이 같은 대소설가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수준의 팬덤이 생겨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많은 제인 오스틴 팬덤들이 오스틴의 소설을 끌어들였다고 말하는 것은 오스틴 세계의 로맨스다. 오스틴의 대표적인 팬 사이트인 펨벌리 공화국을 운영하는 미레타 로벤스는 "당시의 우아함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말했다." 앤드류 데이비스의 1995년 BBC 각색 오만과 편견 - 콜린 퍼스가 젖은 바지를 입은 다아시 역을 맡은 것으로 유명한 영화 - 그리고 키이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 베넷 역을 맡은 2005년 영화와 같은 스크린 버전은 제인의 모든 것에 관심이 높아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그렇게 많은 제인 오스틴팬들이 그 시대의 유행에 맞춰 옷을 차려입거나 그들만의 리젠시 소설을 쓰거나 그들이 좋아하는 작가의 세계에 살고 싶어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오스틴프로스 블로그를 운영하며 저자가 영감을 준 단편집 제인 오스틴 메이드 미도 잇을 편집한 로렐 앤 나트레스는 "우리가 6편의 소설만을 소장하고 있고 그녀가 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단지 그녀의 캐릭터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10.2.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1867년 메이지 유신이 일본을 서양의 영향권에 들게 할 때까지 오스틴은 일본에서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당시에도 오스틴은 대체로 무시되었다. 일본에서는 20세기 초부터 주목받았는데, 그녀를 최초로 높게 평가한 인물은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다. 그는 비평가로도 활동했는데 소세키의 1907년 저서 『문학론』에서 "오스틴을 감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현실주의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소세키는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런던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소쿠텐 교시의 이상(문학적으로 "하늘을 따르라, 자아를 버리다"- 작가는 본능을 따르고 그 속에 자기 개성의 흔적이 없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을 처음 발견하였다. 1916년, 소세키는 일본 다이쇼 시대에 오만과 편견을 리셋한 소설 메이안(빛과 어둠)을 쓰고 있었다.

일본 작가 쿠라하시 유미코[47](倉橋 由美子)가 오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0.3. 인도, 파키스탄[편집]


아시아지만 역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파키스탄에서도 그녀의 책이 인기가 많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족의 중요성, 결혼 협상의 요인으로 결혼 지참금,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 모두에 관련된 모든 이슈를 다루는 상속법 등이 그것이다. 거기서 오스틴의 소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듯 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파키스탄 모두 오스틴 협회가 있으며 "제이니티" 행사를 주최하는 등 오스틴을 굉장히 좋아하는 팬들이 많이 있다.


10.4.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에서도 인지도와 인기가 있는 고전문학 작가라고 볼 수 있다. YES24가 진행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해외 고전 작가' 투표에서 제인 오스틴은 7위를 기록했다.# 또 2008년 BBC판 <오만과 편견>은 DVD로도 발매되어 국내에서 인기를 누렸다.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설득> <센스 앤 센서빌리티> DVD를 발매한 KBS 미디어의 윤호중 PD는 “<오만과 편견>은 약 1만3천 세트가 팔렸다. 웬만한 할리우드 빅 히트작보다 더 많은 판매량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판매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도 2천 세트 이상이 판매되는 평균 이상의 판매 성과를 거두었다”라고 말했다.#

박완서오만과 편견의 영향을 받은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오만과 몽상'을 쓰기도 했다.


10.5. 중국[편집]


중국에서 제인 오스틴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영어권 작가들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중국에서 오스틴은 1935년에는 베이징대학 출판부에서, 상하이 상업 출판사에서 각각 2편의 중국판 '오만와 편견'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다른 서양 작가들과 함께 금지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공식적으로 오스틴이 지지를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오스틴의 번역이 허용되었다. 인민공화국에서 최초로 오스틴을 호의적으로 쓴 중국학자는 주홍으로, 1986년 에세이 「제인 오스틴에 대한 자부심과 편견」에서 일반인들이 오스틴을 충분히 좋아한다고 불평했지만, 학계는 당론 때문에 그녀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그는 예술적인 이유로 책을 심사해 달라고 요구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오스틴에 대한 공산당의 비난은 중단되었고[48], 많은 중국 학생들이 오스틴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오스틴은 여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2011년 한 중국학자인 장헬룽은 현대 중국에서의 오스틴의 "대인기"에 대해 썼다. 2017년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에서 오스틴의 인기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오스틴은 조지 시대의 영국처럼 '남성'이 중요한 중국 문화와 각별한 친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0.6. 터키[편집]


터키에서 오스틴은 오스만 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소위 "외국 학교"에서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 학교에서는 19세기 후반에 터키인들도 입학이 허용되었다. 초기 터키인들은 영어 원문으로만 오스틴을 읽었고, 터키어로 번역된 최초의 소설은 1946년과 1948년 두 권의 책으로 《사두유 베 두야를르》(Sa sensibilityduyu Ve Duyarl ask)로 번역된 이성과 감성이었다. 오스틴은 1960년대 후반 니할 예이노발로가 처음으로 오스틴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터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예이노발로의 오스틴 번역은 원작의 아이러니를 상당 부분 없애고, 자유로운 간접 담론을 등장인물에 의한 연설로 대체하고,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변경하여 오스틴이 인기 있는 터키 로맨스의 스타일에 맞게 만들었다. 좋게 말하면 잘 창작했지만 나쁘게 말하면 원작 파괴다. 예이노발로의 번역본은 오스틴이 터키에서 가장 잘 알려진 번역본이다. 터키의 학자 라나 테크칸은 예이노발레스가 오스틴에 특별히 충실한 것은 아니지만, 터키어처럼 영어소설을 터키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 술어가 항상 문장 끝에 나오는 것처럼 영어소설을 번역하는 것은 영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현재 오스틴의 나머지 소설을 터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함디 코스에 의해 오만과 편견이 구루르 베 외야르그로 번역되고 있다 오스틴이 처음으로 터키어로 제대로 번역된 것은 2006년이 아니었다. 구루르 베 외냐르그가는 첫해에 품절되었고, 2007년에 제2판이 발행되었는데, 테크칸은 이를 이용하여 많은 터키인들이 자국어로 적절한 버전의 오스틴을 원한다고 주장하였다.


10.7. 호주[편집]


역시 영국 문화권인 호주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많다. 오스틴의 팬클럽인 다운 언더는 매년 캔버라에서 리젠시 잉글랜드를 재현하기 위해 모인다. Aylwen Gardin과 그녀의 남편 John은 매년 제인 오스틴 축제를 10년 동안 운영해왔다. 이 행사는 리젠시 댄스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현재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산책, 그랜드볼, 토크, 댄스 워크샵을 위해 호주와 뉴질랜드 전역에서 온다. 그녀는 "제인 오스틴은 호주에서 매우 인기가 있다. 특히 1990년대에 BBC 시리즈가 방영된 이후 - 콜린 퍼스는 단지 모두를 위해 그것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세대적인 것이다 - 키이라 나이틀리 영화 이후 완전히 새로운 팬들이 또 있었다," 라고 그녀가 설명했다. "나는 그것이 옛 나라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낭만적이고 현실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디킨스처럼 영국의 지저분한 면이 아니다. 축제에서 여자들은 정장을 하고 여성스럽고 우아함을 느낄 수 있고, 남자들은 신사다. 10대들은 댄스 플로어에서 하룻밤 자란다. 그들의 매너는 환상적이다. 의상, 책, 춤에 대해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야. 그것은 사람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 위해 그것을 계속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10.8. 이란[편집]


다른 나라들과 달리 오히려 이란에서 이슬람 종교의 영향으로 오스틴을 '사악한 서양 작가'로 간주했고 금서로 금지했다. 이란 작가 아자르 나피시는 90년대 이란에서 오스틴을 비밀리에 가르쳤다고 말했다.

11. 정치/사회적 해석과 논란[편집]


페미니스트도 아니었고 오스틴의 작품은 직접적으로 사회혁명을 다루지는 않지만 독립적인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고 여성 작가에 대한 장벽과 싸우면서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원조 페미니스트’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페미니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중심인물인 버지니아 울프는 제인 오스틴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제인 오스틴은 “여성들이 더 독립적인 삶을 원한다면 책, 특히 소설을 읽어야 한다.” 주장하기도 했다.[49] 노예제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글을 쓴 적도 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 왜곡도 많이 당한다. 대안 우파들이 ‘나치’를 연상시키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오스틴을 끌어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콜로라도 영문학 부교수인 니콜 라이트는 지난 12일 ‘고등교육 연대기’에 실린 ‘알트라이트 제인 오스틴’이라는 글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결혼을 옹호하는 ‘성적 순수’의 상징으로 오스틴을 끌어오고 있다고 밝혔다.기사 하지만 오스틴의 작품 속에서 행복한 결혼은 예외에 속한다.

특히 극우주의자들은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을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으로, ‘엠마’의 여주인공 엠마 우드하우스를 귀족적 특권에 대한 도전자로 보기보다는, 오스틴이 보수주의 스타일을 어떻게 개척해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들고 있다. 알트라이트 관련 사이트들에 올라온 오스틴 관련 게시물들은 결혼 전통주의와 명백한 인종차별주의를 연결시킨다. 예를 들어 ‘백인 민족주의에서 여성 문제’라는 게시물에선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관점이 서구 문명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인종 독재”에 들어맞는다고 논하고 있다. 한 네티즌은 “‘오만과 편견’ 풍의 전통적인 결혼이 단일민족국가(ethnostate)에서 다시 부과된다면 우리는 신사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적었다. 극우주의자들은 또한 오스틴을 “사라진 백인 전통 문화”와 “여성 열등성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의 주장차로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들은 엄밀한 검증을 거친 게 아니라고 라이트는 지적했다. 그는 “오스틴의 주인공들은 단일민족국가를 부추기는 포률리즘 선동과 민족적 유산에 대한 집착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라이트가 이 같은 분석 작업에 들어갔던 이유는 알트라이트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밀로 이아노풀로스가 지난 1월 한 연설에서 오스틴을 끌어다쓰는 걸 보고나서다. 당시 마일로 이아노풀로스는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가 말했듯이 ‘못생긴 여성이 섹시한 여성보다 페미니스트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건 보편적인 진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인용은 잘못된 것이다. 오스틴은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기 20년쯤 전에 사망했다. 게다가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보편적 진실”은 “재산이 많은 독신남이라면 분명 아내를 원할 것”이라는 문장으로, 이는 부드럽게 비꼰 문장이다.라이트는 극우 사이트들을 훑어본 결과, 오스틴의 이름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발견했다.

라이트는 “자신들의 운동을 독일의 히틀러괴벨스와 비교하는 대신 한 세기에 걸쳐 열광적인 팬덤과 학문적 추종자를 가진 오스틴의 아늑한 영국과 비교함으로써 알트라이트는 자신들을 보통 사람들의 눈에 맞춰 평범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신화화한 과거를 지지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더 나은 과거의 브리튼’이라는 비전을 가진 브렉시터[50]의 향수에 영합하기 위해서도 활용된다고 라이트는 지적했다. 그러한 인용들을 통해 알트라이트 사이트를 우연히 들른 사람들이 이 백인 극우주의자들이 주류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발간한 ‘엠마’를 편집한 배럿 탠던은 오스틴의 팬을 자처하는 극우주의자들이 실제로 오스틴의 책을 읽었는지 의구심을 표한다. 탠던은 “오스틴 작품 속 인물들 중에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을 유일한 인물은 ‘맨스필드 파크’의 잔혹하고 속물적인 노리스 부인뿐일 것”이라고 했다. 제인 오스틴에 대한 전기에서 오스틴이 대중적인 이미지보다 더 급진적인 여성이었음을 밝혔던 클레어 토말린은 오스틴과 백인 극우주의자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오스틴은 윌리엄 코퍼의 시를 사랑했는데, 코퍼는 사냥과 사격을 반대했다”라고 말했다.

오스틴은 19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한 결혼 플롯 소설들을 썼다. 당시는 순결과 유리한 결혼이 중상 계층 여성들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래서 오스틴은 혼전 순결과 전통적 결혼의 가치화의 상징으로 차용되곤 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녀들은 원나잇스탠드를 하지 않고 정착한다. 자신의 길을 헤쳐나가지 않고 남편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한다. ‘엠마’나 ‘맨스필드 파크’ 같은 소설에서 등장인물은 거의 100% 백인이며, 그들의 사회적 만남은 명백한 계급, 공유하는 문화에 따른다. 문학 평론가들은 오스틴의 백인성, 소설에 드러나는 명백한 인습적 도덕을 비판할 수 있고 또한 비판해왔다. 하지만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전기 작가 폴라 번이 2014년에 주장했듯, ‘맨스필드 파크’가 식민지 노예제도와 흑인 차별을 간접적이지만 날카롭게 규탄했다는 증거가 본문에 상당히 등장한다. 미완성 소설 ‘샌디튼’에서는 ‘반 물라토’로 묘사되는 서인도 상속녀가 등장하지만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신부감으로 아주 훌륭한 처녀로 등장한다. 오스틴을 알트-라이트의 아이콘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오스틴의 책을 아예 읽지 않았거나 대충 읽은 게 분명하다. 오스틴의 작품을 순결한 청혼, 로맨틱한 결혼,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영국 사회와 연결짓는 우리의 문화에 의존해 오스틴이 이런 가치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스틴은 오랫동안 정치적 논쟁에서 인용돼온 작가다. ‘미국인의 오스틴 읽기’의 저자인 줄리엣 웰스 가우처대 부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셰익스피어와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일한 여성 작가인 오스틴은 이런 논쟁에 끌려들어오는 작가”라면서 “그것은 그녀의 막대한 국제적 명성의 이면”이라고 말했다. 웰스는 “학교에서 다문화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학자들은 불편한 진실들과 씨름해왔다”면서 “오스틴의 인물들은 백인이고, 그녀의 세계는 흰색이다. 그걸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덧붙였다.


12. 기타[편집]


  • 제인의 최고작은 사람들마다 많이 갈린다. 보통 <오만과 편견>, <엠마>, <설득>이 꼽힌다. 저명한 비평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제인의 작품 중 <설득>을 가장 완벽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책이 4권 포함되어 있다.[51]



  • 파운드 스털링 10파운드 지폐의 인물로 선정되었다.[52]


13. 관련 인물[편집]


출처


13.1. 형제자매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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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의 부모님 오스틴 부부에게는 독특한 양육 철학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면 몇 개월간은 커샌드라가 직접 모유 수유를 한 다음에 1년 정도 한 동네의 다른 가정에 맡겼다가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아직 부모와 아이간의 초기 애착 형성의 중요함 등과 같은 정교한 육아 이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인 만큼 오스틴 부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섯 아이를 모두 이런 방식으로 길렀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던 시기에 오스틴 아이들은 대부분 성인으로 건강하게 자랐고 서로 간의 애착도 깊었다. 유일한 예외는 둘째 아들인 조지였는데 그의 경우에는 선천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첫째인 제임스는 막내인 찰스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14살로 아버지의 모교였던 옥스퍼드의 세인트 칼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독서를 좋아하고 학문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세인트 칼리지의 창립자의 후손이었기에 (외가인 리 가문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학비를 내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시를 쓰기 시작했고 동생인 헨리와 함께 문예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아마추어 연극에도 흥미가 있어 동생들과 친구들 그리고 친한 이웃들을 모아 공연을 했던 세련되고 영향력 강한 오빠였다. 문예 잡지의 빠른 폐간 이후 전문 작가로의 꿈을 접고 목사가 된 그는 아버지로부터 스티븐턴 교구를 물려받았는데 갑작스럽게 바스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한 부모의 결정에 심한 충격을 받은 제인 오스틴은 후임자인 제임스와 그의 부인이 지나치게 기뻐할 뿐만 아니라 경매에 붙여진 가족의 물건들을 제대로 된 값을 내고 사서 보관해주지 않는 것을 두고 불평하기도 했다. 제인 오스틴은 제임스의 두 번째 부인인 메리를 싫어했으며(이는 양방향적 감정이었다) 첫째 오빠에게서 시인이자 문학가로서의 면모가 점차 사라짐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애나는 제인 오스틴과 가까운 조카들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많은 제인 오스틴에 대한 정보는 애나의 기록과 회상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 리는 제인 오스틴의 전기를 썼다.

  • 둘째인 조지 오스틴은 현대의 기준으로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제인 오스틴이 수화를 할 줄 알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조지 오스틴은 말을 못 했거나 귀가 들리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환자들을 잔인하게 대했던 당시의 정신병원에 갇히는 대신 대신 어릴 때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었던 외삼촌 토마스 리가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던 조용한 시골 마을로 보내졌고 거기서 평생을 살았다. 조지 오스틴을 보살피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처음에는 부모가, 후에는 형제들이 분담했다. (영화 [비커밍 제인]에는 조지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형제들과 스티븐턴에 함께 살았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 영화에는 이 외에도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 셋째인 에드워드는 아버지인 조지 오스틴이 교구와 농지 모두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부유한 사촌 토마스 나이트라는 사람이 결혼 후 부인과 스티븐턴을 방문했는데 12살이었던 온순한 소년 에드워드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해 신혼 여행에 데려갔다고 한다. 그 후로도 자주 이 부유한 친척의 거대한 영지에 자주 초대되었던 에드워드는 16세에 아이가 없었던 나이트 부부에게 정식으로 입양되었다. 이런 가족 내 입양은 당시 영국에서 흔한 일이었고 오스틴 가족들 역시 모두 에드워드의 운에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 나이트가 죽은 후 많은 재산과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에드워드는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집 없이 떠돌던 어머니와 커샌드라와 제인에게 남은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집을 제공했다. 죽기 얼마 전을 제외하고는 이 집에서 남은 일생을 보낸 제인 오스틴은 이곳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20대에 쓴 초고들을 수정하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들로 다듬어내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11명의 아이 중 맏이인 패니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좋아했던 조카로 어린 여동생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친밀한 사이었다. 패니 역시 고모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훌륭한 충고와 애정으로 가득한 편지들을 많이 받았으며 제인 오스틴 살아 생전의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의 회상과 기록 역시 제인 오스틴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자료이다.

  • 넷째인 헨리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좋아했던 오빠이자 그의 작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형제이기도 하다. 오스틴들 중 가장 매력적이고 낙천적이며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으나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살기도 한 그는 형인 제임스와는 달리 교구를 물려받을 가망도 없었고 유산도 없었기에 옥스퍼드 세인트 칼리지를 졸업한 후 목사가 아닌 군인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민병대 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그는 군에 잘 적응했으나 그 당시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많은 젊은이들처럼 군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춤과 군부대가 주둔한 마을의 아가씨들과 연애를 하는 것에 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 당시 헨리 오스틴과 같은 본토 주둔 민병대 군인들의 삶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목사로의 길을 버리고 군인의 삶을 택한 매력적인 바람둥이 위컴의 모델을 헨리 오스틴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매혹적인 사촌 일라이자를 두고 형인 제임스와 경쟁을 벌이기도 했던 헨리는 결국 일라이자와 결혼 했고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은행을 개업해 빠르게 사업을 확장시키면서 런던에서의 화려한 삶을 즐겼으나 오래가지 못해 파업하고 말았다. 그는 그 후 결국 아버지와 형처럼 목사가 되었는데 아버지와는 달리 복음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헨리 오스틴과 그의 아내이자 사촌인 일라이자는 평생 제인 오스틴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그의 재능과 야심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특히 헨리는 작가인 여동생의 대리인으로서 출판업자들과 흥정하고 계약을 맺는 등 많은 일을 했다. 또한 그는 여동생이 죽은 후 커샌드라와 의논해 [노생거 애비]와 [설득]을 출판했는데 이때 그가 붙인 짧은 서문이 제인 오스틴에 대한 최초의 전기라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 노선을 걷게 된 목사가 된 후 헨리가 쓴 이 글은 독신으로 죽은 여동생의 독실함과 겸손함을 강조하고 있는 애정 어린 기록이지만 그의 조카인 제임스 에드워드 리의 전기와 더불어 전문 작가였던 제인 오스틴을 자신과 가족의 즐거움만을 위해 글을 쓴 아마추어로 비춰지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순종적인 여성상에 집착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던 이런 이미지는 후대의 수많은 제인 오스틴 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반박 되었다.

  • 다섯째인 커샌드라와 제인 오스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따로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이들은 어머니인 커샌드라 오스틴이 "커샌드라가 목이 잘릴 처지가 된다면 제인도 따라 목이 잘리고자 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매우 친밀한 사이었으며 제인 오스틴은 언니와 떨어지기 싫어 다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옥스퍼드의 여학교로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이 학교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두 사람은 다른 여학교로 옮겨 학업을 마쳤으며 그 짧은 교육이 자매의 유일한 공식적인 교육이었다. 수많은 조카들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방문하기 위한 잦은 여행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적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 때면 늘 한 방을 썼다. 함께 있지 않을 때면 자매는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제인 오스틴은 언니인 커샌드라에게 짓궂은 농담부터 집필 중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든 것을 믿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커샌드라는 20대에 먼 친척이자 아버지인 조지 오스틴의 학생이기도 했던 톰 파울과 약혼을 했으나 정착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그는 배를 탔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커샌드라가 톰 파울과 약혼했던 시기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활발하게 남편감을 물색했던 시기이기도 한데, 언니 없이 집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냈으며 오스틴 가족으로부터 두루 사랑 받았던 젊은 약혼자의 때 이른 죽음 이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으며 제인 오스틴이 41세의 나이로 커샌드라의 품에서 세상을 뜬 후 그는 동생의 유언 집행인이자 작품 판권의 소유자가 되었다. 커샌드라 오스틴은 동생의 유언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평생 두 사람이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편지들을 지나치게 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고 판단해 대부분 없애버렸으나 살아남은 편지들과 작품들, 원고들은 매우 좋은 상태로 잘 보관되었다. 이 자료들은 제인 오스틴이 아꼈던 조카들과 동생들이 물려 받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동생이 죽은 후 [설득]의 한 페이지 여백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제인! 이 말들은 금으로 쓰여질 자격이 있구나!"

  • 여섯째인 프랜시스 오스틴은 제인 오스틴과 나이 상으로 가장 가까운 오빠로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나폴레옹과 싸웠다. 그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는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성실한 사람이었다. 프랜시스의 첫 아들이 태어난 후 제인 오스틴은 육아실에서 함께 자던 어린아이 시절부터도 늘 용감하고 반항적이었던 오빠를 추억하며 태어난 조카 역시 그런 성격을 닮기를 바란다는 사랑스러운 축하 시를 보내기도 했다. 프랜시스는 가족들 중 가장 유머 감각이 없다는 평을 받았지만(그의 상관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동안 상어가 나타나자 프랜시스가 경고했지만 너무나 침착한 그의 태도에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상관이 믿지 않자 그는 저는 농담을 할 줄 모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동생이 [맨스필드 파크]에 넣어두었던 해군 내 동성애에 관한 짓궂은 농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실한 성격 답게 프랜시스 오스틴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어머니와 자매들을 늘 도우려고 애썼고 가장 부유했던 에드워드가 고정적인 주거 장소를 마련해주기 전까지 제인 오스틴이 싫어했던 바스에서 벗어나 자신의 부인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제인과 커샌드라는 프랜시스의 부인 메리 깁슨을 매우 좋아했으며 함께 살았던 집도 좋아했으나 안타깝게도 메리는 열 명의 아이를 낳은 후 열 한 번째 출산에서 죽고 말았다. 말년에 프랜시스는 자매들의 절친한 친구였던 마사 로이드와 다시 결혼을 한다.

  • 막내인 찰스 오스틴은 형인 프랜시스처럼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영국 해군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삶을 살았다. 유일한 동생이었던 찰스에게 늘 애정을 갖고 그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제인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와 [설득]에서 항구 도시 포츠머스와 물려 받은 재산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해군들의 삶을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맨스필드 파크]의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윌리엄 프라이스(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의 해군 오빠)는 프란시스와 찰리를 섞은 인물로 보이는데, 윌리엄이 변변한 장신구 하나 없는 여동생 패니를 위해 목걸이용 호박석 십자가를 선물한 것처럼 찰스는 누나들에게 토파즈 십자가와 금줄을 선물했다. 이 선물을 받고 제인 오스틴이 커샌드라에게 쓴 편지에는 굳이 돈을 써서 이런 선물을 사오다니 혼을 내야겠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자주 만날 수 없는 막내 동생의 애정 어린 선물에 감동한 누나로서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 난다. 제인 오스틴의 사후 프란시스 오스틴은 그가 [설득]의 주인공 프레데릭 웬트워스의 모델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자신은 다른 인물에게 영감을 준 것 같고(웬트워스의 친구인 하빌 대령) 동생인 찰스가 웬트워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답을 한 적이 있다. 찰스 오스틴은 성실한 성품과 해군으로서의 긴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13.2. 이웃과 친구들[편집]


  • 제인 오스틴은 이웃들을 '자발적인 스파이들' 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20대가 될 때까지 스티븐턴에 계속 살았던 제인 오스틴은 이 자발적인 스파이들과 좋든 싫든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들 속에서 제인 오스틴은 멘토와 평생의 친구, 댄스 파트너와 배우자 감을 찾았으며 때로는 적을 만들기도 했다.

  • 앤 르프로이: 제인 오스틴이 어릴 때 멀지 않은 옆 마을에 자리를 잡은 교구 목사의 아내 앤 르프로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 어머니 대신 세련되고 다정한 멘토의 역할을 해주었다. 문학을 사랑했고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마담 르프로이'로 불리며 이웃들에게서 매우 사랑 받았는데, 어린 제인 오스틴을 특히 아껴 집으로 자주 초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재를 마음껏 드나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제인 오스틴 역시 어릴 때 장난스럽게 쓴 영국 역사서에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몇 안 되는 측근이자 친구로 앤 르프로이를 임명하는 등 큰 애착을 보였다. 동정심이 강해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가난한 교구민들을 돕고자 노력했던 앤 르프로이는 안타깝게도 55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떴다. 이 사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잃어 친구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었을 제인 오스틴은 후에 앤 르프로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썼다. 앤 르프로이는 남편의 조카 톰 르프로이와의 연관성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 [비커밍 제인] 덕분에 실제보다 다소 비극적으로 알려진 제인 오스틴과 톰 르프로이의 짧은 교제에서 앤 르프로이는 젊은 연인을 갈라 놓는 악역을 맡았지만 그의 개입은 제인 오스틴을 위한 조치로 보인다. 르프로이 쪽의 가족 기록에 따르면 돈 한 푼 없이 친척의 호의에 기대 살고 있었던 아일랜드 출신 법 학생 톰 르프로이는 결혼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며 젊은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시골 아가씨들을 갖고 놀다가 버리는 일이 잦음을 알고 있었던 앤 르프로이가 화를 내며 조카를 집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는 몇 년 후 결혼할 만한 안정성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신랑감을 제인 오스틴에게 다시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 현대의 중매와도 크게 다르지 않게 호감은커녕 서로 잘 알지도 못했던 두 젊은 남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빅(Bigg) 자매: 소년들을 위한 기숙 학교를 겸한 집에서 자라 늘 남자 아이들이 주변에 북적거렸던 제인 오스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가 10대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이웃에 함께 어울릴 만한 젊은 여성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었다. 친척이 물려준 유산 덕에 부유해진 빅-위더 가문의 캐서린, 엘리자베스, 알시아 세 명으로 이루어진 빅 자매들은(재미있게도 이 가문의 세 딸들은 남자들과는 달리 부유한 친척의 성인 위더를 붙여 자신들의 성을 좀 더 거창하게 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재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제인 오스틴의 친한 친구였다. 바스로 갑작스럽게 거처를 옮긴 후에도 제인 오스틴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들의 집에 머무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빅 자매는 제인 오스틴의 채 하루도 가지 못한 약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시나 영화 [비커밍 제인]에서 다소 부정확하게 묘사된 이 약혼은 사랑보다는 우정의 결과였다. 맏이가 일찍 죽은 빅 위더 가문의 재산은 막내 남동생인 해리스 빅-위더가 물려받을 예정이었는데 빅 자매는 스티븐턴을 떠나 바스에 정착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친구 제인과 그가 결혼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후에 제인 오스틴의 조카 캐롤라인은 해리스 빅-위더는 혼기 찬 여성이라면 누구나 사랑 없이도 받아들일 만한 신랑감이었지만 제인 오스틴은 사랑 없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어릴 적부터 빅 가문과 가까웠던 제인 오스틴에게는 친 남동생처럼 느껴졌을 연하의 해리스 빅-위더는 키가 큰 미남이었으나 말을 더듬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가정 교습을 받았으며 간질 발작을 자주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파혼으로 특별히 상처 받은 것 같지는 않았던 그는 후에 결혼을 했으며 다소 이른 나이에 죽었다. 제인 오스틴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임스 오스틴의 부인 메리의 기록에 따르면 오스틴 자매는 파혼을 한 날 아침 빅 자매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제임스의 집으로 돌아왔으며 모두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한다. 소녀 시절부터 굳건했던 빅 자매와 오스틴 자매, 특히 제인 오스틴과의 우정은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었으며 영화 [비커밍 제인]과는 달리 가난한 오스틴 자매를 모욕한 악역은 없었다. 제인 오스틴의 병이 악화되어 요양이 필요하게 되자 윈체스터의 칼리지 스트리트에 오스틴 자매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매일 방문한 사람도 빅 자매들 중 한 명이었던 엘리자베스였다. 제인 오스틴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 마사 로이드: 빅 자매와 비슷한 시기에 오스틴 자매와 이웃이 된 마사 로이드는 경제적인 면에서 오스틴 자매와 비슷한 처지였다. 로이드 가족에게는 제인 오스틴과 비슷한 또래의 여동생이 있었으나 제인 오스틴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대신 유머 감각이 있는 열 살 연상의 마사 로이드와 평생의 친구가 된다. 아버지가 죽은 후 독신 여성으로 살아가던 마사는 조지 오스틴의 죽음 이후 바스를 떠나 새로운 집에 정착한 오스틴 모녀와 합류한 후 제인 오스틴이 죽을 때까지 함께 살다가 60대의 나이에 상처한 프랜시스 오스틴과 결혼했다. 마사 로이드는 제인 오스틴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친구이자 또 다른 언니 같은 존재였으며 최초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다. 제인 오스틴의 편지에는 [오만과 편견]의 초고였던 [첫인상]을 마사가 여러 번 읽었고 너무 좋아해 훔쳐 갈까 봐 걱정된다는 농담들이 남아있다.

  • 앤 샤프: 가족들과 공유하지 않았던 오스틴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한 앤 샤프는 제인 오스틴의 가장 부유한 오빠였던 에드워드 오스틴의 가정교사였다. 다음 세대의 작가인 브론테 자매가 잘 보여 주었듯 당시 가정 교사의 삶은 혹독했다. 대체로 하인들보다는 더 나은 집안 출신이었고 어느 정도 지식도 갖고 있었으나 돈이 없어 고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소외되기 일쑤였고 고용주들의 부당한 변덕 앞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제인 오스틴이 켄트에서 자주 만났던 부유한 또래 아가씨들 중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앤 샤프에게만 애착을 느꼈다는 것은 그의 처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영민하고 글 재주가 있었던 앤 샤프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신뢰했던 독자였으며 제인 오스틴은 그가 고버샴을 떠난 후에도 우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직한 평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곤 했다. 커샌드라는 동생이 죽은 후 유언에 따라 그가 쓰던 바늘을 앤 샤프에게 보냈으며 얼마 전에는 친구인 앤 샤프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적힌 [엠마]의 오리지널 판본이 경매에 등장하기도 했다. 자립심이 강했던 앤 샤프는 리버풀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여학생들을 위한 작은 학교를 세워 운영하면서 지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여인으로 살다가 미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제인 오스틴이 죽기 얼마 전 거처를 옮기면서 보낸 편지를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

  • 나이트 부인: 제인 오스틴은 오빠 에드워드를 입양한 이 점잖은 부인을 두고 커샌드라와 짓궂은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으나 나이트 부인은 온화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친근한 이웃은 아니었고 친구나 멘토라고 볼 수도 없었지만 제인 오스틴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준 유일한 친척이었다. 그가 굳이 제인 오스틴에게만 매년 용돈을 준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책으로 돈을 벌기 전까지는 개인적인 수입이 전무 하다시피 했던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트 부인은 아마도 영리하지만 가난한 친척 아가씨가 가여워서 호의를 베풀었겠지만 그 작은 호의 덕분에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유일한 후원자가 된 셈이다.

  • 미스 벤: 메리 벤은 조지 오스틴의 죽음 이후 여기저기를 떠돌던 오스틴 모녀가 에드워드가 초튼에 마련해 준 집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후 만난 가난한 이웃이었다. 그는 [오만과 편견]이 출간된 직후 제인 오스틴의 낭독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운 좋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엘리자베스 베넷을 열광적으로 칭찬해 제인 오스틴을 흐뭇하게 했다. 이웃 마을 목사의 미혼 여동생으로 힘든 삶을 살았던 메리 벤에게 제인 오스틴은 늘 매우 친절했으며 [엠마]의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꿋꿋한 미스 베이츠를 그에게 바치는 헌사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메리 벤은 [엠마]가 출간되기 전 죽었다.

  • 오스틴의 친척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필라델피아 오스틴이다. 필라델피아는 15살에 런던에서 모자 가게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야 했다. 견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홀로 남편감을 찾아 동인도 회사와 군대가 많아 젊은 영국 남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식민지 인도로 떠났다. 이는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가족도, 돈도 없어 본토에서 결혼할 가망이 없었던 젊은 영국 여성들이 택하는 방법이었고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도박이었으나, 필라델피아 오스틴은 비슷한 처지였던 동인도 회사의 직원 워렌 해이스팅스와 결혼해 성공적으로 인도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부터 필라델피아의 인생은 더욱 흥미로워지는데, 해이스팅스 부부는 부를 찾아 인도로 온 타이소 핸콕과 친한 친구이자 동업자가 되었다. 핸콕의 부인이 죽은 후 인도 내 영국인 사회에는 40대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을 했던 필라델피아가 아직 20대였던 매력적인 핸콕과 깊은 사이가 되었고, 필라델피아가 낳은 딸 일라이자의 친부가 핸콕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 필라델피아의 딸인 일라이자는 어머니 못지 않게 흥미로운 삶은 산 인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에 출입했을 뿐만 아니라, 19살에 32세인 프랑스인 궁정 군인과 결혼하여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부인의 돈으로 헛된 농지개간에 매달리다 실패하고 혁명이 일어나자 왕족을 옹호하다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간 남편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둔 이 연상의 사촌은 제인 오스틴에게는 평생 좋은 친구이자 동업자가 되어주었고 그의 오빠들에게는 열정의 대상이 되어 몇 번의 거절 끝에 넷째인 헨리 오스틴과는 부부가 되어 런던에서 화려한 삶을 꾸렸다. 제인 오스틴은 런던의 오빠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출판업자를 만나 사업을 의논하기도 하고 도시의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므로 일라이자의 존재는 제인 오스틴이 도시의 삶이나 프랑스 대혁명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다른 친척들이 싫든 좋든 제인 오스틴의 삶에 큰 자리를 차지했다면, 사촌 일라이자는 혈연이기 이전에 친구였고 이들의 우정은 평생 지속되었다.


14. 대중 매체에서[편집]






14.1. 영상화[편집]


  • 그녀의 소설은 역사상 가장 많이 영상화 된 소설들 중 하나다. 그녀가 남긴 장편소설 6편은 모두 영화화, 드라마화됐다.[53] 그것도 각각 여러 번씩.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엠마 톰슨 주연, 이안 감독의 영화, 3번의 드라마로, <오만과 편견>은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작을 포함해 4번 영화화됐고, <엠마>는 기네스 펠트로 주연작과 에이미 해커링의 <클루리스>까지 합쳐서 영화로 6번, TV 드라마로 1번 만들어졌다. <설득>은 영화로 1번, TV 드라마로 2번 제작됐다. 오스틴 사후에 출간된 <맨스필드 파크>는 패트리샤 로제마 감독이 원작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오스틴의 실제 모습을 적극 투영해서 영화화했고, <노생거 수도원> 역시 한 차례 영화화된 적이 있다. 심지어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제인 오스틴이 십대 시절 쓴 희곡 <찰스 그랜디슨경>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맨하탄의 제인 오스틴>을 1980년 발표한 적이 있다.

  • 그녀의 작품은 현대적으로 각색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54], 클루리스[55]가 있다. 또 많은 영상물에 영향을 줬는데 대표적으로 어톤먼트는 오만과 편견의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어톤먼트의 원작자인 이언 매큐언이 초반부를 가리켜 “내가 쓴 제인 오스틴 소설”이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제인 오스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관객들도 “제인 오스틴의 소설 같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계속해서 영상화되는 이유는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는 보편적 감성으로 당대 여성들의 삶, 특히나 사랑과 연애라는 흥미로운 주제에 관해 매우 당당하고 재기 넘치는 방식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또 그녀가 들려주는 연애 이야기가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소설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에서 자주 보아온 것들이다. 현대의 대다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제인 오스틴표 연애담’의 변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로맨틱 코미디 작품의 등장인물에 제인 오스틴 작품의 주인공이 오버랩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대를 초월하는 그녀의 작품이 관통하고 있는 정서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오스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상물들은 영국의 시대극을 대표하는 영화와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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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들을 각색하는 걸로도 모자라 2007년에는 제인 오스틴 본인의 젊은 시절 톰 르프로이와의 사랑을 중점으로 그린 영화 《비커밍 제인》이 제작되었다. 제인 역은 앤 해서웨이, 톰 르프로이 역은 제임스 매커보이가 맡았다. ‘비커밍 제인’은 이렇게 보수적인 시대에 남들과는 확실히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했던 제인 오스틴을 조명한다. 영화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새벽에 ‘제인’(앤 해서웨이)이 글을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줄리언 재롤드 감독은 이 작품보다 2년 정도 앞서 나온 조 라이트 감독의 ‘오만과 편견’(2005)을 상당 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만과 편견’의 첫 장면은 눈부시게 밝아오는 시골의 아침을 배경으로 책을 읽으며 집으로 들어오는 엘리자베스를 담고 있다. 첫 장면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시골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주 비춰주는 것은 실제로 제인이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영감을 얻었다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여성의 독서’ 또한 제인 오스틴의 인생과 소설에서 꽤 의미심장한 테마다. 여성에게 독서가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던 시기, 제인은 책 읽기를 권장하며 잘못된 사회적 편견을 깨나갈 것을 독려한다. 사후 출간된 ‘노생거 사원’은 독서와 작문에 대한 제인 오스틴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때문에 ‘비커밍 제인’에서 제인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성공한 여성 작가를 찾아가는 장면은 흥미롭다. 훗날 결혼이 아닌 펜으로 독립하게 되는 그녀에게 선배 작가와의 만남은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하게 된다.
‘비커밍 제인’은 제인 오스틴과 톰 리프로이의 실제 로맨스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자존심이 센 제인은 런던에서 온 변호사, ‘톰 리프로이’(제임스 매커보이)가 자신의 글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자 처음에는 반감을 갖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문학에 조예가 깊고 남자다운 그에게 점차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고 만다. ‘비커밍 제인’은 제인의 이런 경험이 오랜 시간 후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소설, ‘첫사랑’에 반영됐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처럼 작가의 삶과 작품 속에서 따온 허구를 로맨틱하게 짜맞추어 만들어낸 이야기인 만큼 진지한 전기영화로 보면 좀 곤란하다.

  • 제인 오스틴 역에 올리비아 윌리엄스가 주연한 텔레비전 영화 <오스틴의 회한>(Miss Austen Regrets)은 비커밍 제인과 같은 해에 개봉되었다. 오스틴이 남긴 편지를 바탕으로 한 반인생을 그린 텔레비전 영화는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좋아하는 조카인 패니 나이트(이머진 푸츠)가 남편을 찾는 데 도움을 주면서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집중 조명했다.


14.1.1. 정리[편집]


현대적으로 완전히 각색된 영상물은 제외.[56]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TV 드라마
1971년
Sense and Sensibility
조안나 데이비스, 시아란 매든
데이빗 길스
2
TV 드라마
1981년
Sense and Sensibility
아이린 리차드, 트레이시 차일즈
로드니 베넷
3
영화
1995년
Sense and Sensibility[57]
엠마 톰슨[58], 케이트 윈슬렛
이안[59]
4
TV 드라마
2008년
Sense and Sensibility
해티 모라한, 채리티 웨이크필드
존 알렉산더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영화
1938년
Pride and Prejudice
커리건 루이스, 앤드류 오스본
없음
2
영화
1940년
Pride and Prejudice
그리어 가슨, 로런스 올리비에
로버트 제트 레오나르드
3
TV 드라마
1952년
Pride and Prejudice
다프네 슬레이터, 피터 쿠싱
캠벨 로건
4
TV 드라마
1957년
Orgoglio e pregiudizio[60]
비르나 리시, 프랑코 볼피
다니엘레 다안자
5
TV 드라마
1958년
Pride and Prejudice
제인 다운스, 알란 바델
바바라 번햄
6
TV 드라마
1961년
De vier dochters Bennet[61]
리스 프랭큰, 람세스 샤피
피터 홀랜드
7
TV 드라마
1966년
Orgullo y prejuicio[62]
엘레나 마리아 테헤이로, 페드로 베코
알베르토 곤살레스 베르겔
8
TV 드라마
1967년
Pride and Prejudice
셀리아 배너먼, 루이스 피안더
조앤 크래프트
9
TV 드라마
1980년
Pride and Prejudice
엘리자베스 가비, 데이빗 린톨
시릴 코크
10
TV 드라마
1995년
Pride and Prejudice[63]
제니퍼 일리, 콜린 퍼스
사이먼 랭튼
11
영화
2004년
Bride and Prejudice[64]
아이쉬와라 라이, 마틴 헨더슨
거린더 차다
12
영화
2005년
Pride and Prejudice[65]
키이라 나이틀리[66], 매튜 맥퍼딘
조 라이트

  • 맨스필드 파크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TV 드라마
1983년
Mansfield Park
실베스트라 르 토젤, 니콜라스 파렐
데이빗 길스
2
영화
1999년
프랜시스 오코너, 조니 리 밀러
패트리샤 로젬마
3
TV 영화
2007년
빌리 파이퍼, 블레이크 릿슨
이언 B. 맥도널드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영화
1948년
Emma
주디 캠벨, 랄프 마이클
마이클 베리
2
TV 드라마
1960년
다이아나 페어팩스, 폴 데인만
캠벨 로건
3
TV 드라마
1972년
도란 고드윈, 존 카슨
존 글레니스터
4
영화
1996년
귀네스 팰트로, 제러미 노섬
더글러스 맥그라스
5
TV 영화
케이트 베킨세일, 마크 스트롱
디아뮈드 로렌스
6
TV 드라마
2009년
로멀러 개리, 조니 리 밀러
짐 오 할란
7
영화
2020년
안야 테일러조이, 자니 플린
어텀 드 와일드[67]

  • 노생거 사원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TV 영화
1986년
Northanger Abbey
실베스트라 르 토젤, 피터 퍼스
자일스 포스터
2
TV 영화
2007년
Northanger Abbey[68]
펄리시티 존스, J. J. 필드
존 존스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TV 드라마
1960년
Persuasion
다피 슬레터, 폴 데인만
캠벨 로건
2
TV 드라마
1971년
Persuasion
앤 퍼뱅크, 브라이언 마샬
하워드 베이커
3
TV 영화
1995년
Persuasion
아만다 루트, 키어런 하인즈
로저 마이클
4
TV 영화
2007년
Persuasion[69]
샐리 호킨스, 루퍼트 펜리존스
에이드리언 셰어골드
5
TV 영화
2022년
Persuasion
다코타 존슨, 코스모 자비스


  • 샌디턴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TV 드라마
2019년
Sanditon
로즈 윌리엄스, 테오 제임스
앤드류 데이비스

  • 레이디 수전

*
유형
년도
제목
주연
감독
1
영화
2017년
Love & Friendship[70]
케이트 베킨세일, 클로이 세비니
위트 스틸만


14.2. 기타[편집]



  • 세인츠 로우 4에서 기타 인물로 나온다. 스토리 라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작품 전반에서 내레이터로 목소리가 나오며 그랜드 피날레 미션 이후 진자이에게서 세인츠가 진 제국에 대해 보고 받을 때 인류 문명과 그 문학에 감명받은 지냑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서 납치한 걸로 나온다. 마지막 미션에서 "그렇게 나는 세인츠를 만났다."라고 하면서 납치된 제인 오스틴의 모습이 나온다. 모든 단원들 각성해야지 제인 오스틴 모습 볼수있다. How the Saints Save Christmas DLC 프롤로그에서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도 이 분.

  • 닥터 후에서도 언급되었다. 뉴시즌8 6화에서 클라라 오스왈드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가르치다가 사다리를 타고 일하던 닥터에게 "그 작품 1797년이 아니라 1796년에 써졌거등?" 이라고 태클을 맞는다. 뉴시즌9 9화에서는 클라라가 오스틴에 대해 "놀라운 작가", "뛰어난 우주 관찰자"라고 말한다.


15.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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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샌드라 오스틴 역시 자신의 여러 아이들뿐만 아니라 집을 떠나 온 조지 오스틴의 학생들을 먹이고 돌보는 동시에 농작물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등 여러 역할을 맡았다. 커샌드라는 활발하고 재치 있는 성격 덕분에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어느날 한 학생이 돌아오지 않자 말장난과 라임에 능했던 그는 재미있는 시를 써서 오스틴 학교로 돌아오기를 권하기도 했다. 이 학생은 실제로 곧 돌아와 옥스퍼드에 진학했고, 이때 받은 시를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렇듯 밝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학교에서 즐거운 유년기를 보낸 학생들 중 상당수는 오스틴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형제와 같은 사이가 되었다. 커샌드라는 평생 열심히 일 했고 많은 아이를 낳은 탓에 만성적인 질환들에 시달려 다소 건강 염려증이 있었다. 그래서 때로 둘째 딸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기도 했지만 많은 손자 손녀들을 두고 장수하다가 80대에 죽었다.[2] 아버지는 성공회 사제다.[3] "다음 무도회에서 그이한테서 청혼을 받을 것 같아. 그렇지만 그 하얀색 코트를 다시는 안 입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거절할 거야." 농담조지만 청혼받으리라 확신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4] 18세기 바스는 결혼적령기가 된 딸을 둔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던 도시였다. 돈 많은 부유층이 모여 매일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고, 홍차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혼기가 찬 자식들의 혼담이 오갔다. 혼기가 찬 제인 오스틴 역시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바스에 살았는데, 사랑에 따른 결혼을 꿈꾸었기 때문에 바스를 좋아하지 않았다.[5]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친구의 남동생이었다.[6] 독립적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점이 있다. 제인의 소설 대부분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집안일을 돕거나 친척의 출산을 돕는 일을 하는 와중에 틈틈이 쓴 것들이다. 즉, 형제와 친척들에게 기대어 살았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대체로 당시 노처녀들이 하던 것으로, 제인의 삶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책을 팔아 번 돈도 대단할 정도는 아니었으니...[7] 제인의 몸이 좋지 않았지만, 신체가 보내는 경고를 무시했다.[8] 제인의 작품을 편집한 편집자. 이름은 R. W. 채프먼(R. W. Chapman)이다.[9] 오스틴의 초창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오스틴 생전에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았다. 2016년에 레이디 수잔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주연은 케이트 베킨세일.[10] 집필은 1803년부터 시작했다.[11] 참고로 헨리 필딩은 그의 Covent Garden Journal에서 이 소설을 칭찬했다.[12] 초튼에서 제인은 독서 동아리에 등록했다.[13] 제인의 작품 대부분이 수작 이상이란 뜻이기도 하다. 참고로 <엠마>가 가장 순위가 높다.[14] 참고로 1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 11개.[15] 보바리 부인의 작가.[16] 그녀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은 영미권 스테디셀러의 표본이다. 오만과 편견은 2004년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조사한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에서 2위출처를, 2018년 미국 공영방송 PBS가 조사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한 소설'에서는 4위출처를 기록했다.[17] 영국의 가장 유명한 남, 녀 고전 작가인만큼 셰익스피어와 오스틴의 비교는 사실 오래된 것으로, 1821년 학자와 신학자 리처드 와틀리에 의해 처음으로 진행되었고, 후에 테니슨과 키플링에 의해 반향되었다.[18] "그 사람들 아주 멋지게 사는 부자들인데, 특히 그 여자는 돈에 묻히는 걸 아주 즐기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다르다고 해줬더니 우리가 사귈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하는 것 같더라."[19] 대표적으로 마크 트웨인이 제인 오스틴을 굉장히 싫어했다.[20] 다른 3명은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 조지 엘리엇[21] 오스틴은 나보코프가 가장 좋아하던 작가 중의 하나다. 맨스필드 파크를 상당히 좋아했다.[22] 나보코프가 많은 작가들의 평가를 내렸는데 거기서 나온 발언이다.[23] Criticism and Fiction (1891), Chapter 15[24] The Novels of Jane Austen (1859)[25] 'Madame D'Arblay', Edinburgh Review (January 1843), reprinted in Critical and Miscellaneous Essays, Volume 5 (Carey and Hart, 1844), p. 68[26] 'Lecture (1870)[27] 제인 오스틴은 롤링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28] 여섯 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알레그라, 최근 반려견을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낸 조슬린, 25년을 함께 살았던 남편에게 배신당한 실비아, 자꾸만 어린 제자에게 눈길이 가는 유부녀 프루디는 우울한 일상에 변화를 주기 위해 북클럽을 만들기로 한다. 알레그라는 주립도서관에서 일하는 실비아에게 안 읽은 책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가 읽었던 책을 또 읽자고 제안한다. 프루디가 공통으로 읽었던 책이 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알레그라는 ‘오만과 편견’ ‘에마’ ‘설득’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 ‘이성과 감성’ 등의 소설을 열거하며 외친다. “역시 제인 오스틴이야! 인생의 만병통치약이지!”[29] 오스틴이 1801년부터 1806년까지 거주했던 곳.[30] 만약 이때 결혼했다면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탄생 못했을 수도 있다. 아이를 낳고 부인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31] 지폐 인물 선정 발표는 2013년에 발표했다.[32] 20파운드[33] 10파운드[34] 원문은 I declare after all there is no enjoyment like reading![35] National Heritage Memorial Fund[36] 글로벌 IT 업체 시스코의 공동설립자[37] 리젠시 시대는 영국 조지 3세가 정신병으로 왕위를 수행하기 어려웠을 때 그의 아들 훗날 조지 4세가 섭정을 했던 시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리젠시는 섭정이란 뜻이다.[38] 아버지가 죽고 잠시 동안 살았던 집이 Gay street 25번지라 구조가 비슷한 40번지에 센터를 오픈한 듯 보인다.[39] 여성이 주류지만 남성도 다수있다.[40] 주로 1995년 BBC 미니시리즈[41] 과거에 소더비 경매장에서 경매품으로 팔렸다[42] ‘제인 오스틴: 피의 설득(Jane Austen: Blood Persuasion)’[43] 이 시리즈가 방영된 뒤 1년 동안 초튼을 찾은 관광객 수는 두배로 늘어 5만7000명에 달했다.[44] 진지하고 보수적인 오스틴 팬들을 위한 모임[45] 퍼스의 젖은 셔츠 신”에 열광하는 팬들을 환영하며 방문객 15만 명이 매달 500만~1000만회 방문한다[46] Vorzimmer 125[47] 대표작은 성소녀.[48] 1996년 중국은 세계저작권협정에 가입했고, 제인 오스틴과 같은 고전 작가들과 근현대 작가들의 무단 추방은 중단되었다.[49] 여자와 책, 슈테판 볼만 지음[50]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지지자[51]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엠마.[52] 이전판의 홍일점이었던 5파운드권의 엘리자베스 프라이윈스턴 처칠로 교체되자, 이에 여성단체가 들고 나서서 도안을 결정시켰다고.[53] 심지어 미완성작품도 드라마화 됐다.[54] 오만과 편견을 모티브로 했다.[55] 엠마를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했다.[56] 예를 들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57] 국내 개봉명은 센스 앤 센서빌리티. 제작비 1,600만 달러. 전세계 수익 1억 3,500만 달러를 기록하며 대성공했다. 베를린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곰상 수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에도 지명됐다.[58] 각본도 엠마 톰슨이 담당했으며 제6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59] 이안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이다.[60] 이탈리아판[61] 프랑스판[62] 스페인판[63] BBC판. 모든 매체 중 원작을 가장 잘 살려낸 작품이며, 가장 평가가 좋은 작품이다. 더불어 흥행에서도 시청률 40%를 찍으며 초대박을 쳤다.[64] 오만과 편견을 현대 배경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한글 제목은 신부와 편견.[65] 제작비 2,800만 달러, 흥행수익 1억 2,16만 달러로 흥행에 대성공했다.[66] 나이틀리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의 노미네이트된다.[67]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68] 시청률은 26.6%를 기록했다.[69] 시청률 26.1%을 찍으며 대히트했다. 연기자들의 연기평도 좋았고 드라마의 퀄리티도 훌륭했다.[70] 총 제작비 300만 달러, 흥행 수익 2,140만 달러. 적은 제작비로 흥행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