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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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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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성
파일:제주 고씨 종문.svg
濟州 髙氏>
제주 고씨


관향
제주특별자치도
시조
고을나(髙乙那)
중시조
고말로(髙末老)
집성촌
제주특별자치도
전라남도 장흥군
충청남도 천안시
개성특별시
인구
310,542명 (2015년)
1. 개요
2. 역사
3. 분파
3.1. 성주공파/전서공파/영곡공파
3.2. 장흥백파 (장흥/장택 고씨)
3.3. 양경공파 (개성 고씨)
3.4. 문충공파 (옥구 고씨)
4. 제주 고씨 출신 인물



1. 개요[편집]


한국에 거주하는 고씨들은 모두 제주 고씨가 흔하며 시조는 고을나왕 어디에서는 '고을라'라고 쓰기도 한다.고씨는 양씨, 부씨와 함께 탐라의 지배씨족으로서 이들 세 성의 시조 탄생에 대한 삼성혈 전설이 널리 알려져 탐라국국성이라고도 한다.

어디까지나 신화지만 신화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현존하는 성씨들 중 가장 오래된 성씨이다.[1]

2. 역사[편집]


제주도에는 본래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들 삼신은 짐승을 사냥해서 살았는데 어느 날 동쪽에서 상자 하나가 바다로 떠내려 와서 열어 보니 그 속에는 미녀 세 명과 곡식의 씨앗,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이 미녀 세 명을 각각 배필로 맞아 목축과 농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그중 고을나가 제주 고씨(濟州高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이러한 내력 때문에 제주 고씨와 양씨, 부씨는 서로 먼 친척으로 간주하여 서로 통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해 김씨와 허씨 비슷한 경우. 물론 동성동본 금혼제도도 없어지고 사회적으로도 그리 터부시되지 않게 된 21세기에 와서는 옛날 이야기다.

고씨는 시조에서 45세손 자견왕까지 탐라 군주로 세습해 오다가 46세손인 말로가 고려에 입조하여 그가 곧 모든 탐라계 고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고말로의 증손자 고공익, 고말로의 증손자 고영신(개성), 고말로의 10세손 고중연(장흥), 고말로의 후손 고종필(연안), 고말로의 16세손 고응섭(안동)을 중시조로 하는 등 15개의 본관으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 고말로의 직계손만이 제주도에 남아 성주(탐라의 지배자) 자리를 세습하고 나머지 후손은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고려의 각지에 정착해서 새 본관의 중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본관이 다양하게 늘어났던 것이다.

최근에는 각 본관의 고씨들이 서로 같은 혈손이라며 다시 합본하여 고을나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제주로 하여 '제주 고씨 중앙종문회'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장흥을 본관으로 하는 장흥 고씨는 이제는 제주 고씨 장흥백파로 명명하고 있다. 이런 역사는 제주 고씨의 각 파의 인구분포에도 반영되었다. 제주도에 사는 고씨의 대부분은 조선시대까지 섬에 남은 자들의 후손인 성주공파, 전서공파, 영곡공파이다. 반면에 육지에 사는 고씨 중에서는 중시조가 고려나 조선에서 벼슬을 받은 경우인 장흥백파, 양경공파, 영곡공파의 비율이 높다.

탐라계 고씨는 국내에 2015년 기준으로 461,373명이 살고 있으며, 특히 제주도에서는 김씨와 이씨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많은 성이다. 단, 이 중 본관이 제주로 등록된 고씨는 67%뿐이며 25%는 본관이 제주로 등록되지 않은 제주 고씨 장흥백파이고 나머지 8%도 다양한 본관으로 등록된 제주 고씨이다. 국가에서 집계한 제주 고씨 중에서는 영곡공파가 20%로 가장 많은 수이며 탐라계 고씨 전체에서는 13%를 차지한다.

제주 고씨 종친회에서는 성씨를 라고 표기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위 한자는 인명용 한자가 아니라서 젊은 고씨들은 대개 를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주민등록등본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때때로 아버지와 자녀가 쓰는 한자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있다.

항렬상 이름으로는 장흥백파의 돌림자인 '고재○'[2], '고○석'[3], '고영○[4]', '고○현'[5]이 가장 제일 많이 보인다. 대동 항렬자(파 상관없이 지을 수 있는 항렬자)가 있되 각 파마다 돌림자가 다르다.




3. 분파[편집]



3.1. 성주공파/전서공파/영곡공파[편집]


성주공파, 전서공파, 영곡공파는 각각 중시조 고말로의 10세손 고인단, 13세손 고신걸, 15세손 고득종을 파조로 두고있다. 그러나 혈연관계로 보았을때 이들은 모두 중시조 13세손이자 16대 성주였던 고신걸의 후손이다. 당시에 이 집안은 다른 친척들이 일찍이 고려로 이주하는 동안 성주 자리를 세습하며 계속 제주도에 남아있었다.

족보상으로는 성주공파가 초대 성주 고말로의 장자직계이지만 이름과는 달리 성주공파의 고말로 15세손 고득남은 마지막 성주인 14세손 고봉례의 직계가 아니다. 족보상으로 고득남은 15대 성주 고명걸의 직계인데, 당시 시대는 원나라가 망하던 여말선초의 대혼란기였으며 심지어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 성주까지 죽이겠다고 날뛰자 고명걸은 성주 자리를 사촌동생 고신걸에게 넘기고 숲속에 은거하였다.

그 후 고신걸은 성주 자리를 자신의 셋째 아들인 고봉례에게 물려주었으며 심지어 고명걸의 아들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고말로의 장자계통의 대가 끊긴 셈이 되었다. 그래서 고신걸의 손자인 고득남을 고명걸의 손자로 입양시켜서 대를 잇게 하였고 그 후손이 성주공파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고득남의 출계 처리는 고득남의 세대나 그보다 훨씬 후대에에서야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씨의 계보를 최초로 문서화한 '성주고씨가전'이나 '장흥고씨가전'은 고득남과 같은 세대인 고득종이 관여해서 작성되었으며, 그 이전까지 고씨 집안은 '가문의 계보'라는 유교적인 개념을 접하지 못한 듯하다. 애초에 조상을 공경하기 위해 매장하여 봉분을 만드는 유교식 장법을 제주도에 최초로 도입한 것도 고득종이었고 당시의 다른 탐라인들은 고유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고득남 이외의 나머지 고신걸의 손자들은 전서공파로 분파되었다. 이전세대까지 탐라의 성주는 탐라를 다스리면서도 고려나 조선의 수도에서 자주 지내면서 본토의 권력층과 교류해왔는데, 당시에 마지막 성주 고봉례가 성주직을 조정에 반납하고 탐라가 조선의 통치체제에 편입되면서 고신걸의 손자 세대는 더이상 지방 토호로서는 중앙 정계와 연이 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성주공파와 전서공파는 제주도의 토호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신걸의 손자 고득종은 다시 전서공파에서 갈라져나와 영곡공파의 파조가 된다. 고득종은 유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문과에 급제해서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 이질적인 성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명의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자식농사 대박을 터트리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에 기반을 둔 영곡공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현대에는 제주도에서 성주공파와 전서공파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영곡공파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3.2. 장흥백파 (장흥/장택 고씨)[편집]


제주 고씨에서 가장 메이저한 파인 장흥백파는 제주 고씨 1세조 고말로(高末老)의 10세손 고중연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말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고려 공민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진 데 그 기원이 있다. 장흥 고씨, 장택 고씨, 창평 고씨로 본관을 써왔으며 현대에 제주 고씨 장흥백파로 합본되었으나 2015년까지도 장흥/장택 본관을 사용하는 인구가 탐라계 고씨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유명한 장흥백파 출신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이 있다.


3.3. 양경공파 (개성 고씨)[편집]


양경공파는 중시조 고말로의 증손 고영신을 시조로 하는 개성 고씨가 제주 고씨로 합본한 파이다. 아직 개성 본관을 유지하는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탐라계 고씨의 4%를 차지한다. 양경공파는 조선시대에 학자와 문신을 많이 배출하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 고영(高瑛)의 아들인 고사경(高士褧)은 고려 말에 상서(尙書), 조선 초기에 보문각직제학을 지내고, 김지(金祗) 등과 함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이두(吏讀)로 편찬하였다.
이밖에 대사헌,각 조(曹)의 참의를 두루 지내고 충청도 ·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고약해(高若海), 울산 판관을 지내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작가로 알려진 고상안(高尙顔), 영조 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선정을 베풀어 ‘고창녕’이란 별명을 듣고 성리학(性理學)에도 조예가 깊은 고유(高裕), 2품의 벼슬을 지내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으로 서민시집 《소대풍요(昭代風謠)》를 엮어낸 고시언(高時彦) 등이 빼어났다.


3.4. 문충공파 (옥구 고씨)[편집]


문충공파(文忠公派)는 문충공(文忠公) 고경(高慶)의 고조부(高祖父)인 고돈겸(高惇謙)이래로 세거해온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전북ㆍ경기ㆍ강원도 ㆍ충청도ㆍ경상도 일원에 많이 살았으며, 그중 일부는 19세 고종필(高宗弼) ㆍ 고몽필(高夢弼)의 대를 전후하여 황해도 연백(延白)으로 옮겨가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성에 있던 고돈겸(高惇謙)은 12세기 중엽에 중앙의 관리로 있다가 모함을 받고 옥구현(현 전라북도 군산시 오식도동)으로 유배되어 거주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옥구에 터를 잡고 세거하였다. 후손 문충공이 고려의 명망 높은 학자로 명문가를 이루게 되었는데 ‘문충공’은 고돈겸의 현손 문충공 고경(高慶)이다. 곧, 고돈겸은 옥구에 세거한 제주 고씨 문충공파의 입향조이다. 문충공파는 고돈겸 이래로 고려 조에서만 9상서 12한림의 명현을 배출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영성군 고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지낸 영원군 고홍건 등의 무신들이 나왔다.


4. 제주 고씨 출신 인물[편집]


[1] 오해하지 말야할 것은 어디까지나 신화 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제주 신화에 따르면 고을나왕은 기원전 2337년부터 탐라의 왕으로서 탐라를 다스렸다고하니 이를 곧이 곧대로 믿을경우 그 뒤인 기원전 2333년부터 고조선의 왕이 되는 단군왕검과 동시대 인물이 된다. 현재 단군왕검을 시조로 여기는 성씨가 없고 한참뒤인 기원전 1세기 시대의 인물 동명성왕이나 혁거세거서간을 시조로 여기는 성씨인 횡성 고씨와 밀양 박씨 등이 현존하지만 기원전 24세기를 기원으로 하는 제주 고씨와는 그 간격이 크다.[2] 파조 22세손[3] 파조 23세손[4] 파조 24세손[5] 파조 28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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