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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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3 무장봉기와 충돌
2.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 사건
3. 선거 보이콧과 무력충돌
4.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
5. 인민 유격대의 몰락과 사태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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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
시기
기간
설명
주요 사건
4.3
이전
인민위원회 주도기
1945.08.15 ~ 1947.02.28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가 전도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
8.15 해방
미군정
공세기
1947.03.01 ~ 1948.04.02
3.1 발포사건과 총파업을 기점으로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우익청년단체/경찰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시기
3.1 발포사건
제주도민 총파업
4.3
이후
무장대
공세기
1948.04.03 ~ 1948.05.11
무장대가 무장반란을 일으키고 공세의 주도권을 잡은 시기
4.3 무장반란
4.28 평화협상
오라리 방화사건
경비대 주도
토벌기
1948.05.12 ~ 1948.10.19
토벌의 주도권을 경비대가 장악하여 무장대 토벌에 나선 시기
9연대 집단입산
박진경 연대장 암살
8.25 지하선거
사태의
유혈기
1948.10.20 ~ 1948.12.31
토벌대의 무제한적인 초토화작전으로 전도에 걸쳐 무차별적인 학살이 발생한 시기
계엄령 선포
집단학살
육해공
합동토벌기
1949.01.01 ~ 1949.03.01
육해공 3군의 합동작전에 의한 토벌이 시행되며 무장대가 약화된 시기
2연대 진압작전
북촌리 학살사건
선무활동기
1949.03.02 ~ 1949.05.15
정부의 통치력이 회복되고 선무공작과 토벌이 병행되어 무장대가 궤멸에 이르는 시기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설치
이승만 대통령 방문
국회의원 재선거
소강상태기
1949.05.16 ~ 1950.06.24
대부분의 군대가 철수하고 일부만 남아 무장대 소탕작전에 나선 시기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해산
무장대장 이덕구 사살
대대적
예비검속기
1950.06.25 ~ 1950.10.09
6.25 전쟁으로 인해 4.3 수형자와 보도연맹 관련자들이 집단학살을 당한 시기

마지막
토벌기
1950.10.10 ~ 1954.09.21
무장대 세력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
한라산 금족지역
해제


1. 4.3 무장봉기와 충돌[편집]



대한민국 헌정사상 쿠데타·반란 (시도 포함)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tablebgcolor=#5589cd,#001256><rowbgcolor=#000><width=12%> 연도 ||<width=25%> 정부 ||<width=33%> 사건 ||<width=30%> 주동 세력 ||
||<|2><colbgcolor=#003478,#001123> 1948년 ||<|4><colbgcolor=#29166f> 대한민국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
|| 제주 남로당 무장반란 사건*
(제주 4.3 사건)
||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이덕구 등)
||
||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 남조선로동당
(지창수·김지회 등)
||
|| 1952년 || 1차 개헌
(발췌 개헌)
||<|2> 이승만 정권 ||
|| 1954년 || 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
|| 1961년 || 대한민국 제2공화국
장면 내각
|| 5.16 군사정변 || 군사혁명위원회
(박정희·김종필 등)
||
|| 1965년 ||<|2> 대한민국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
|| 원충연 반혁명 사건* || 원충연 대령 외 다수 ||
|| 1972년 || 10월 유신 || 박정희 정권 ||
||<|2> 1979년 || 대한민국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
|| 10.26 사건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외 다수 ||
||<|2> 대한민국 제4공화국
최규하 정부
||12.12 군사반란
||<|2> 하나회
(전두환·노태우신군부)
||
|| 1980년 || 5.17 내란 ||
|| 1990년 || 대한민국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 청명계획*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 국군보안사령부 ||
|| 2013년 ||<|1><bgcolor=#0047a0> 대한민국 제6공화국
박근혜 정부
||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이석기 내란선동 사건)
|| 통합진보당
(이석기 등)
||
||<-4><bgcolor=#000> *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 ||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경찰, 공무원, 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무장대의 경고문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무장대가 제주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제주 민관총파업까지만 해도 (비록 어느 정도는 남로당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각 진영의 온건파에게도 호응을 얻은 민중항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제주도에는 생지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자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당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1]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반란에서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 인사를 습격해 군경 일동은 긴장하였다.

4월 3일, 이 날 반란을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반란에 가담한 인원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본군이 결호작전을 위해 갖고 왔다 놓고 간 일제 99식 소총, 권총, 수류탄 등 소화기와 군도와 대검 등 칼, 죽창, 몽둥이뿐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경찰이 노획한 무장대의 무기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2] 그리고 이들은 빨치산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공격하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더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소극적인 경비대를 의심하고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보내려 했다.

2.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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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제주도의 메이데이.jpg
제9연대장 김익렬
무장대 총책 김달삼
오라리 방화 사건 현장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벌어지며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았다.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3]은 미군정에서 파견 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에 들어갔다.[4]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전단에서 김익렬은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면서 무장대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무장대는 연대장이 직접 올 것과 협상의 장소와 시기는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회담은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둘은 논의 끝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진행하여 귀순자들의 신병을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는 이러한 협상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정말 이렇게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2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에 대형사건이 터지고 만다.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오라리 방화 사건'이라고 한다.[5]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 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이게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6] 현재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 무장반란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원들이 마을로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는 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사건을 조사하러 오라리에 온 김익렬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미군정에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5월 3일에는 귀순을 하러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군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는 일이 터졌다. 총격을 가한 자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이것을 안 김익렬은 경찰들이 진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려 급급한다며 분노했다. 한편 미군정의 태도도 이 사건을 전후하여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다시 전투가 재발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셈이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에 나타났다. 이들 일행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을 만나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다시 재발한 무장반란과 충돌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경찰 측에서는 줄기차게 이 반란이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은 이 반란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물증까지 내놓자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고,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모함을 해 댔다.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다음 날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되고 말았다.[7] 그의 후임은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이던 박진경이었다.

3. 선거 보이콧과 무력충돌[편집]


파일:한라산으로 피신한 주민들.png
평화협상이 깨지자 무장대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5.10 총선거가 코앞이었기에 무장대는 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다. 반면 군경은 선거를 성사시키고자 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선거사무소와 선거관리위원들에 대한 무장대의 공격은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피살당했고, 선거 관련 문서들이 탈취되거나 소각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으로 제주도의 최종 선거인 등록률은 64.9%에 불과했다.[8] 선거위원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군경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군경은 무장대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선거를 지원하고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그와중에도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이어져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거 날인 5월 10일이 되자 무장대는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지도에 따라 한라산이나 오름에 올라가 생활하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 하산했다. 동시에 투표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니 마을에는 군경, 군경 가족, 우익 인사, 우익청년단원 등을 제외하고는 투표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투표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무장대의 습격으로 투표소가 불타거나 담당자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대대적인 선거 보이콧으로 인해 미군정과 군경의 투표 독려에도 불구하고 제주읍 중심을 제외하고는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재선거는 1년 이후에야 치뤄질 수 있었다.
북제주군
갑 구
을 구
등록인수
27,560 명
20,917 명
투표인수
11,912 명 (43%)
9,724 명 (46.5%)
총투표구 수
73개소
61개소
투표실시
투표구수
31개소 (42%)
42개소 미실시
32개소 (52%)
29개소 미실시
각 후보자
득표 상황
양귀진 3,647표
김시학 3,479표
김충희 2,147표
문대우 1,639표
양병직 3,474표
박장희 3,190표
김덕준 691표
결과
선거 무효화
선거 이후 군경과 무장대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제주도의 선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군경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무장대에 대한 진압을 가속화했다. 5월 20일 경, 미 20연대장인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진압을 천명했다. 또한 그는 제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확신했다.[9]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도 그러한 강경진압에 한몫했다. 마침 그가 부임한 직후 경비대 병사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출신 병사들을 소외시키고 육지에서 온 병사들을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펼쳤다.[10] 브라운과 박진경의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마을 전역에서 수천여 명의 주민들이 체포되었다.[11] 이런 무차별 체포작전으로 박진경은 두 달만에 대령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도 마찬가지로 무장대를 진압한다며 민간인들을 탄압했다. 무장대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좌익 혐의자에게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8년 6월 18일, 강경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은 끝내 부하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를 죽인 자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을 포함해 9명이었다. 재판에서 검찰은 이들이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라고 말하며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키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므로 죽였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은 대부분 중형을 받고, 문상길과 손선호는 총살당했다. 이후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과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박진경의 뒤를 이어 강경 진압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하여 계속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왔으나 최경록의 말처럼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 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48년 7월 경 들어 무장대도 적극적인 공격을 삼가고, 제주도민들의 여론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계속 요구하며 진압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7월 15일 경비대 제9연대가 부활하여 송요찬이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무장대에서는 '남조선 대의원' 선거를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실시했고[12] 총책 김달삼이 1948년 8월에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자 월북하면서 이덕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4.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편집]


파일: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jpg
파일:체포된 사람들.jpg
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토벌대에 체포된 사람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통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全島)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13]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발표한 포고문 中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현기영, 「순이삼촌」 中


"처녀 때. 가다 보면 일본군인들이 총 메고 말 타고 지그락지그락 다녀도 본 척도 않고 그냥 지나가지, 아무 말도 않더라고. 무섭지 않았지. 나는 4.3 사건 때야 사람 무서운 거 알았어요."

4.3 수형 생존자 송ㅇㅇ 씨 증언


송요찬의 포고령은 여순사건 직전에 발표됐고, 언론에 보도된 시점은 여순사건이 발발한 다음날이었다. 이에 따라 여순사건은 제주도 토벌을 부추기는 촉매제가 됐다. 제9연대는 제11연대의 '무행동 전략(do-nothing policies)'을 '무차별 테러통치(indiscriminate reign of terror)'로 대체했다. 송요찬이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위반자에 대해 총살하겠다는 것은 대게릴라전에서 나타나는 '자유발포지대(free fire zone)'의 설정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지역내 모든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생존수단까지도 파괴했다. 베트남전에서도 한 지역이 '자유발포지대'로 선언되면, 지상군이나 공군은 그곳에서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군으로 간주했다.

허호준, 『4.3, 미국에 묻다』, 선인, 2021, p.212


1948년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인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하지 중장은 제주도 제59군정중대와 제주 CIC에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브라운 대령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서 제주도에 대한 무자비한 무력진압을 추구했다. 제주도 지부 지휘관이 된 브라운 대령은 이른바 '평정작전(Pacification Plan)'을 진행했다. 당시 미군정은 소위 6.23 재선거 실시를 위해 '중산간 지역 고립 및 검거작전'을 벌였는데, 이는 제주도민 대량 검거 사태를 불러왔다. 이처럼 제주도에서 미군정 수뇌부의 지휘와 관심에 따라 강력한 토벌전이 전개되 많은 제주도민이 체포되고 인명피해가 급증하기에 이른다.[14] 1948년 6월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집 앞 굴 속에 숨었다가 형제 주민들과 함께 붙잡힌 강서수씨는 이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밤에 숨었다가 날이 밝아갈 때 붙잡혔는데, 나와서 보니 경찰관들이 죽 포위를 했더라고. 모자를 보니까 졸병들이 아니고 높은 놈들 같았어. 미국놈들 하고. 굴에서 나오니까 우리에게 수갑을 채워가지고 동쪽을 향해 엎드리라고 해. 사복을 입은 미국사람들은 키가 큰 놈들이었는데 세명인가 네명인가 돼. 따로 한 차를 탔으니까. 미국놈들이 '빨갱이' '빨갱이'하고 한국말을 하면서 총을 갖고 쏘는 시늉을 하는거야. 미국놈이 지시하면서 경찰관들이 같이들 막 모여들어. 우리는 경찰차에 타고 미국인들은 자기네 차에 타서 같이 제주시로 넘어갔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15]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16]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으로부터 5km 바깥에 있는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허가 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중산간마을[17]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활터전 자체를 포기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써 놓았고 제헌헌법 제99조에는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계엄령 선포 당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8] 이에 대해 계엄령 선포가 적법했다는 측은 제헌헌법 이전의 법령인 일본의 계엄법이나 미군정 아래에서 계엄령이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점, 제헌헌법 제100조에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 점 등을 들어 계엄령이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양자가 소송을 건 일이 있었는데, 법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계엄령 선포는 제헌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에게 계엄령의 허점을 지적하며 위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했지만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얼버무렸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19]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내부의 불안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에서 경비대와 경찰을 이용해 소탕작전을 지속했다.

군경토벌대[20]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21] 그런가 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22],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 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 대신 죽여 버리는 '대살(代殺)'과[23]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24]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25]
파일:강요배 천명.jpg
<천명(天鳴)>, 강요배, 1991

작전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거개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러니 군경 쪽에서 찾던 소위 도피자들도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다니! 또 도피 생활을 하느라고 마침 마을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했던 남정네들이 군경을 피해 다녔으니까 도피자가 틀림없겠지만 그들도 공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비에게도 쫓기고 군경에게도 쫓겨 할 수 없이 이리저리 피해 도망다니는 도피자일 따름이었다... (중략)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 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 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현기영, 「순이삼촌」 中


무명천 할머니는 제주 4.3 사건 당시인

1949년 1월 12일 한경면 판포리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소실하였다.

그 후, 정상적으로 말을 하거나 먹지 못한 채

소화불량 및 관절염 등 후유장애를 앓다가

2004년 9월 8일 향년 나이 9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학살피해자 무명천 할머니(본명 진아영)의 생가에 있는 소개글


"저 한길을 대낮에 한번만 걸을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 생존자 김순애 씨의 증언 中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주민 10명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가 있는 함덕군주둔소를 찾아갔으나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9명을 무참히 살해한 후[26], 북촌리에 나타났다. 군인들은 북촌리 주민 1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주민 전체가 빨갱이라는 죄목을 씌우는 등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27]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옴팡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28]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너븐숭이'와 동쪽 '당팟' 등 2곳으로 나눠 이뤄졌고 이 일로 300~46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29],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였다고 한다.[30]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 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 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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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생 김경종은 이승만 각하께 편지를 올립니다. (중략) 경찰은 산골로 도피한 자들을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하여 한 장소에 모아놓고 눈을 감게 명령을 내리고는 한 번 순찰을 합니다. 눈을 감으라고 거듭한 연후에 매수한 사내를 시켜 지목하게 합니다. 매수한 사내의 가리킴이 많으면 얻은 것도 또한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저쪽을 가리키고 이쪽을 가리키고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는대로 모두 죽여버립니다.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중략) 어찌 그 칠팔십의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 아이들에게 이와 같이 참혹하게 할 수 있습니까? 군인들이 지나간 곳에는 옥석이 함께 불타지만 얼굴에는 혹여 괴이치도 않습니다. 이른바 지방치안의 책무로써 그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합니다.

제주지역 유학자 김경종[1]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


정방폭포 '소남머리'는 정보과에서 취조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이 희생당한 곳이다. 흔히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정방폭포 상당과 이어지는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소남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씨는 "그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노송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을 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 해가지고 살려줬어.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이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이라고 회고했다. 서귀리 및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 주민에 이르기까지, 정방폭포 희생자들은 삼남 지역 전체에 이른다.

정방폭포와 그 인근에서의 학살 사례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자 온가족이 인근 야산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 1949년 1월 9일 군인들에게 발각됐습니다. 군인들은 아버지를 현장에서 총살하고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학교에 가두었습니다. (중략) 군인들은 수감자를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원칙도 없이 20세부터 50세에 이르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너 나와!'하며 끌어냈습니다. 1월 11일에는 어머니가 지목됐습니다. 어머니는 피신중 딸을 날아 보름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머니를 포함해 10여 명이 함께 끌려 나갔는데 곧 총성이 울렸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우린 졸지에 고아가 됐습니다.

대정읍 하모리 주민 김명원의 증언


홍성강. 나이 45세. 민보단장. 학살집행자는 2연대 특별중대장 소위 김우희.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는다 해서 적개심을 품었고...'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공비 소탕용으로 사용 허가를 받았으나 전(前) 부대가 이동하였기에 그자는 군인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여 죄목을 붙였음. 수감년원일 48년 12월 29일. 학살년원일 49년 1월 2일 오후 4시경. 학살장소 성산포 우뭇개동산. 너무나 원통하니 원한을 풀어 주시오.

1960년에 국회가 작성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적힌 성산면 오조리의 학살사례


사람들이 학살되어 묻힐 구덩이는 민보단원들에게 시켜 미리 파게 했어. 지금은 비행장이 들어서 버렸는데 마을 남쪽에 '궤동산'이라고 한 데가 있어. 실려온 사람들은 버스로 두 대, 한 80여명은 넘을거라. 그 사람들 옷을 전부 벗겨서 구덩이 가에 전부 세우더니만 민보단원들에게 죽창과 철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했어. 그후에 기관총으로 바드드드 하게 쏘아 죽여버렸어. 시체들은 그 웅덩이에 담아 묻혀 있다가 나중에 비행장이 확장될 때 그 속에 포함되어 버렸지. 지금도 그곳 활주로를 들추어 내면 수많은 시체들이 나타날 것이여.

도두리 주민 김예봉의 정뜨르 비행장(현재 제주국제공항) 학살사례 증언


포로들이 수송되어 온다. 자동차에 가득 실려 가는 젊은 사람들, 도보로 철덕거리며 끌려오는 노소에서 부녀까지 끼어 있는 일련, 비는 아직도 개지 않는다. 구부린 채 말 없이 이끌려 가는 그들의 안색은 그들의 의복과 같은 색깔이다. 감히 그들을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육십이 넘은 늙은이며 부녀자까지 무엇 때문에 폭도로 규정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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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송, 「유혈의 제주도」, 신천지 1948년 7월호


경찰은 먼저 아들을 패기 시작했습니다. 보다못한 부친은 "우리는 소개민이다. 아들은 4대 독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부친을 구타했고 그 노인은 매를 견디지 못해 금방 죽었습니다. 부친이 죽자 아들이 도망을 쳤지만 150미터 정도 도망치다 총에 맞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공포에 떨고 있는데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큰 괭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며 소리쳤습니다. 이어 경찰은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로 10살 난 동생은 풀려났지만 내게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중략)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바로 옆에 나란히 묶인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경찰들이 "총이 덜 맞은 놈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일일이 대검으로 찔렀으나 그때도 난 어머니 밑에 깔려 무사했습니다. (중략)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 날의 모습들을 똑같잉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애월면 하귀리 주민 안인행(당시 13세)의 증언


어느 날 군인들이 사람들을 무조건 끌어내고 집에 불을 붙였어. '이거 다 폭도 새끼다'하면서 젊은 남자 십여 명을 앞바다에 세워놓고 총을 쐈어. 나머지 나이든 남자들은 어디론가 끌고 갔지. 죄명은 공비와 내통하고 자식들이 산에 올라갔으니 사형을 시킨다는 거였어.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 말이야. 바닷물 위에 묶어놓은 시체는 물이 내려가면 내려가고 올라오면 올라왔어. 한 여자는 아이를 업고 남편 시체를 몰래 가마니로 덮어 놨어. 전쟁, 전쟁해도 그런 전쟁이 없어.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면 자살해 버리지.

곤을동 주민 문계생의 증언


토벌대는 산에서 작전을 끝내고 내려오면서 송태삼(당시 무장대원) 등 여러 명의 목을 끊어 왔습니다. 그 중엔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자루에 담았는데 유명한 무장대원의 목은 자루 밖으로 노출시켰습니다.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켜 이를 보도록 했지요. 그런데 생포돼 끌려온 사람 중엔 우리 마을 허아무개도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순한 사람이었는데 산으로 도망쳤다가 잡힌 모양입니다. 토벌대는 그에게 송태삼의 목을 가슴에 안고 내려가도록 했습니다.

서귀면 주민 변창호의 증언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주경찰청 고위 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 간부면 다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라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중문면 상예리의 학살사례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미터로 단일계통의 용암굴로는 세계 최장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돼 있다. 어음리 지경에 있는 빌레못굴은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던 목초지와 경작지 부근에 있었으나 4.3 때까지만 해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중략) 아무튼 1949년 1월 6일 굴이 발각됐고 진압군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총살했다. 특히 이 때 경찰이 서너살 난 어린이들의 다리를 잡아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이야기는 당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지금도 처절함의 상징으로 인근에 회자되고 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동굴인 빌레못굴의 학살사례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들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동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당시 특공대원 고치돈의 증언


난 계엄령 직전에 대거 투입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행위를 보고 '아! 이들이 무슨 밀명을 받고 왔구나'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중략) 그들은 우리와 상의도 없이 오자마자 총살극을 벌여 깜짝 놀랐습니다. 밀명이 없고서야 어떻게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개 순경조차도 마치 꿩 잡듯 총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엄령이 내려질 무렵에는 주민들의 성향이 확 돌아 토벌대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중략) 따라서 그때부터는 한 명도 희생되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 오히려 이때부터 집단 총살이 벌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1949년 1월 4일 희생된 김달소 노인은 그가 해방 직후 대포리 인민위원장을 지냈다는 죄로 처형됐습니다. 그러나 그때 인민위원장은 마치 마을 구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제 때 구장을 지낸 경력으로 '묵은 구장'이라 불리던 분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어른 정도면 마을 대표감'이라 하여 추대한 것인데 그게 후에 총살의 구실이 된 겁니다.

중문면 대포리 주민 이상봉(경찰 출신)의 증언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엎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조천읍 북촌리 주민 김석보의 증언


하루는 오후에 군인들이 오더니 '토벌 간다'며 마을 청년 전부를 집합시켰습니다. 우린 도시락까지 챙겨 나섰지요.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군 주둔지인 표선면 사무소였습니다. 거기서 밤새 갇혀 있는 동안 16명은 지서로 불려 갔습니다. 이튿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지서 후문 앞으로 끌려갔지요. 경찰은 무조건 '자백하라'며 뺨때리기를 시키며 구타했습니다.우린 무사히 풀려났지만 전날 호출된 청년 16명은 표선백사장에서 총살됐습니다. 어떤 근거로 이들이 학살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표선면 세화1리 주민 현용석의 증언


난 시집 식구들과 피신 생활을 했는데, 매일이다시피 토벌대가 올라와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총을 쏘았습니다. 먼저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가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한번은 토벌대가 점점 다가오는데 두 살 난 여조카가 계속 울어 대는 것이 아닙니까. 동서는 발각될까 봐 급히 딸의 입을 틀어막았지요. 그런데 토벌대가 지나간 뒤에 살펴보니 그만 조카가 질식해 죽어 버렸어요. 그즈음 한 초기밭(표고버섯 재배장)에서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난 친정 식구가 끌려갈 때 주변에 숨었던 남동생 셋도 결국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곳을 찾았습니다. 널찍한 곳에 3백여 명쯤이 숨져 있더군요. 한겨울이라 시신은 썩지 않았습니다. 어린애들도 엄마한테 업힌 채로 혹은 안긴 채로 여럿 쓰러져 있었습니다. 애들을 하나 하나 들춰 보았지만 동생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서귀포시 서귀동 주민 정갑선의 증언


하루에 두 번씩 마을 상황을 면사무소에 보고하는 역할이 맡겨졌기 대문에 성산포 앞바다 속칭 '터진목'에서 벌어진 학살을 전부 목격했습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일렬횡대로 세우고 자신들도 일렬횡대로 서서 한 사람씩 맡아 총살했습니다. 이미 혼이 나갔는지 울거나 사정하는 사람은 없었고, 너무 목이 말랐는지 죽기 전에 바닷물을 떠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백 구의 시신이 바닷물에 쓸려 가기도 하고 목만 남아 뒹굴기도 했습니다. 총살극이 연일 벌어졌는데, 나중엔 총소리만 들어도 '아! 오늘은 몇 명 정도 죽었겠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성산면 성산리 주민 조유삼의 증언


1949년 1월 3일 이른 아침 허름한 갈중의를 입고 총을 든 무리가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하며 악수를 청했고, 어떤 이는 인공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집안에 들이닥쳐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인공기를 들고 갈중의를 입은 이 무리는 무장대가 아니라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으로서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 주민들 중 일부는 그 무리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양경하는 "빨갱이면 맞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마을 유지인 김병해는 외도지서 주임 김영철에게 욕을 하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해 주민 70명 가량이 총살당했다. 한 증언자는 "환갑이 넘은 김성규라는 분은 학교운동장에서 지목 당하는 바람에 부인, 아들, 며느리, 어린 손자 등과 함께 6명이 몰살당했다"고 증언했다.

제주읍 도평리의 학살사례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중략)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 한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집에 들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중략)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텐데..."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애월면 용흥리 주민 김계순의 증언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되었을 때 한 증언자는 제주도를 찾은 국회의원에게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고 폭로했다.

김종민, 「제주 4.3 항쟁 - 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고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 채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녀 한 명과 총각 한 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짓을 강요하는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가자 주민 4명을 끌고 가 총을 쏘아버렸어.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사례」(오금숙)에 나오는 학살사례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그러나 설마 사람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난 집으로 들어와 불을 붙이는 군인들에게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손으로 막 빌었어요. 그러나 군인들은 나를 탁 밀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며 내게 달려들었어요.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발을 쏘았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때까지만 해도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다리는 손바닥만큼 뻥 뚫려 있었습니다.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다리까지 부숴 놓은 겁니다.

조천읍 교래리 주민 양복천의 증언


그날 새벽부터 마을 사람들이 우리집에 모여 조부모 장사 일을 거들고 있엇습니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전 8시경 막 발인하려는 차에 경찰관 서너 명이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우리를 인근 밭으로 끌고 가 죽 앉혀 놓더니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을 난사했습니다. 가족 모두가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총알이 모두 비켜 갔습니다. 난 어린 마음에도 죽은 척하고 있어야 산다는 생각에 경찰이 가버릴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중문면 회수리 주민 이상하(당시 13살)의 증언


1949년 1월 25일 제주도 오라리. 한국군 2연대의 미군고문관이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의 시체 97구를 발견했다. 각 시체는 5~6발의 총을 맞앗다. 빈 클립과 탄피로 볼 때 M-1 소총이 사용됐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경찰과 군은 그 사건에 관여했음을 부인했다. (중략) 1949년 2월 20일 도두리에서 76명의 반도들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사망자들 중에는 5명의 여인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많은 아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경찰과 군기대(한국군 헌병)이 그 작전을 감독했다.

논평 : 4명의 미군사고문단이 도착했을 때 38명은 이미 처형돼 있었고 38명의 처형은 우연히 목격됐다.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9년 기록 中


경찰은 도피자를 찾아내라며 주민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도피자의 부모나 아내, 또는 동생들까지 동원돼 나섰던 겁니다. 그런데 군인들 작전에 걸렸어요. 경찰이 주민들을 다그쳐 산으로 보냈으면 이 사실을 산악에서 작전 중인 군인에게 알려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경찰과 군인 간에 서로 정보 교환이 없었던 겁니다. 희생된 분들은 마을의 원로급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과 나이만 봐도 사정을 알 만할 텐데 군인들은 즉각 총살했습니다.

서귀포시 토평동 주민 오인건의 증언


1949년 1월 10일 또 한 차례 집단 총살극이 벌어졌다. 희생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특공대원이었다. 당시 토벌대는 마을을 경비하는 민보단 외에 토벌작전에 동원키 위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특공대'를 조직케 했다. 그러자 특공대장 이원하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을 해야 한다며 군대에 무기를 요청했다. 그런데 군에서는 이원하를 총살하고 사흘 후인 1월 10일에는 나머지 특공대원들을 호출해 모슬봉 기슭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하였다.

대정면 하모리에서의 학살사례


나는 대한청년단 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 주임(서북청년단 출신 경찰)은 웬일인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엇습니다. 정 주임은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 주임은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있던 상태흙이 들썩들썩 했습니다. 정 주임 그놈은 오래 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제주읍 삼양리 주민 고봉수의 증언


토벌대는 학교 옆 '버리왓'이라는 곳에서 총살을 할 때 우리를 모두 학교 밖으로 나오게 해 구경시켰습니다. 토벌대는 또 산에서 사람을 잡아오면 효수전주 위에 매달았습니다. 워낙 난리통이라 그런 걸 봐도 무덤덤했습니다.

중문면 중문리 주민 원응두[2]

(당시 중문국민학교 학생)의 증언


군인들은 두 사람(김무길, 송해옥)을 M-1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다가 총살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상은커녕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순박한 농부들이었습니다. 김무길 씨는 부인도 없이 어린 자식을 혼자 키우던 사람인데 총살 직전 거의 실신 상태에서도 어린 자식이 걱정됐는지 "내 새끼야, 나 죽엄쩌!"하며 막 울부짖으며 고함치던 게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대정면 신평리 주민 고달순의 증언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31]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 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모슬포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군경의 강압으로 인해 100여 명이 자수하여 학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 이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또 성산포경찰서 서장으로 일하면서 6.25 전쟁 당시의 4.3 관련 예비검속자 학살을 부당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의 구장인 김성홍은 군경의 물음에도 자신은 "모른다"고 일관하여 혹시 모를 마을 주민들의 학살 피해를 막아주어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미리 출신 순경이었던 강계봉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썼고,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고희준도 성산포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경찰이었던 장성순은 귀순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북 출신이었던 방 씨(본명은 미확인)는 상관의 학살 명령에 총기가 미작동한다며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32][33]#

물론 이 끔찍한 학살 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외치며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 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수는 4.3 사건 총 희생자의 약 10~20%로 추정된다.[34][35] 쉽게 말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낮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빙자한 학살을 하고 이들이 저녁에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한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다음은 무장대에 의한 학살의 증언들이다.

세화리 민보단은 제주도에서 가장 강했다. 그 날 제주도 남로당 놈들이 전부 습격에 가담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은 밤 9시 30분경 세 발의 총성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했는데 길가로 내려오면서부터 불을 질렀다. 그리고 "너 남로당원이냐, 민보단원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죽였다. 그리고 식량과 옷을 도둑질해갔다. 당시 지서엔 응원대도 있었고 지서원들도 있었는데 갑자기 기습받은 것이라 경찰들은 정문 밖으로 나와 보질 못했다.

무장대의 구좌면 세화리 마을 습격 사례


표선면 성읍리는 중산간마을이면서도 불에 타지 않은 마을이다. 토벌대가 성읍지서 소재지인 성읍리는 제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성읍리는 소개령도 내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토벌대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949년 1월 13일, 군경토벌대가 수색을 위해 나간 사이에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마을에 남아 있던 경찰이 입산자의 처자식을 살해하는 일이 터졌다. 이후 오후 5시 경 무장대가 마을을 공격했다. 무장대는 보초를 서는 주민을 살해하고 2시간 동안 음식을 약탈하고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협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장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이 날의 충돌로 38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무장대의 표선면 성읍리 습격 사례


5. 인민 유격대의 몰락과 사태 평정[편집]


파일:귀순자 중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장면.jpg
파일:이덕구 사살.jpg
귀순자 중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장면
사살되어 십자가에 내걸린 이덕구의 시신[36]

토벌대의 강경한 진압은 1949년 3월, 유재흥, 함병선이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37] 유재흥은 무력 진압으로 일관하던 진압 방식을 무력과 선무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대책이 마련되었고, 산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자진해서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하산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4월부터 하산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5월까지 수천여 명이 하산했고 여자, 어린이, 노약자 등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검색되어 따로 수용되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직접 돌을 쌓아 격리 구역을 만든 뒤 그 안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유재흥은 재선거가 있던 5월 초까지 부임했고,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에게 임무를 위임하고 폐지되었다. 서북청년회 일색이었던 제2연대 제3대대와 서청 출신 경찰들도 같이 철수했다. 하지만 하산자 중 1,600여 명은 전국의 교도소에 분산되어 수용되고 말았다. 이후 육군 수색학교의 후신인 독립대대와 해병대가 순서대로 제주도에 들어와 치안을 담당했다.

제주 주민들은 2연대의 공적을 높이 찬양했고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하고, 1949년 7월 7일에는 도민 전체의 이름으로 한라산에 ‘평정비’를 건립했다.[38]

이런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과 선무공작 등 일련의 정책들은 무장대를 거의 끝장냈다. 무장대 대원들도 하산 행렬에 따르거나 초토화 작전 도중 사살당했으며, 간부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6월 7일에는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덕구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나무 십자가에 묶여져 제주경찰서[39] 정문 앞에 하루 동안 전시되고 태워졌다. 그의 죽음은 무장대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다. 이후 무장대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지속적인 진압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무장대는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지원이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방송국, 파출소를 습걱하는 게릴라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끝내 군경의 무력 진압과 선무공작으로 인해 '잔비’(殘匪)로 불리며 한라산 일대와 오름을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1952년 군 정보국은 무장대의 수를 무장인원 35명, 비무장 동조자 30여명 등 총 65명으로 예측하였으나 이런저런 내분 끝에 4.3사건 7주기를 맞은 1954년에는 제주 경찰의 브리핑에서는 무장대의 수가 6명(남성 2명, 여성 2명)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밝혔으며 그 중 여성 한 명이 투항하면서 1955년에는 다시 5명으로 숫자가 줄었다. 1956년에는 이들 중 다시 2명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1957년에는 다시 2명이 또 사살되었다. 그렇게 9주기를 하루 앞둔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이 검거되면서 무장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40]

무장대의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4.3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4.3 사건의 여파가 간신히 가라앉던 즈음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전국에서는 좌익 정치범이나 좌익 혐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국에 있던 교도소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이 때 그곳의 4.3 구속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그리고 유족들에 대한 연좌제 적용으로 인해 제주도민들 중 적잖은 민간인이 해병대 등 국군에 자원 입대하는 일도 적잖게 있었다. 자원입대로 충성심을 증명해야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무장대가 궤멸당한 1950년대 중반에야 제주도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1954년 9월 21일 제주 경찰은 경찰국장 신상묵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해 한라산에 내려졌던 금족령을 해제하였으며, 1957년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며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총성은 멎었다.

여담으로, 씁쓸하지만 학살이 끝난 뒤 몇 년 동안 연속으로 흉작에 시달리던 제주의 그 해 보리 농사[41]는 대풍이었으며 고등어 어획량도 상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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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편 박갑동은 '제주 4.3은 북한 공산당 주도 폭동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이른바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제주도 지역신문사인 제민일보에서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에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이 사람이 거주하는 일본 도쿄에 가서 취재, 인터뷰를 진행해 본 결과 박갑동 자신도 '나도 그 근거는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중앙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극우 세력에서는 박갑동의 첫 주장을 계속 유포하고 있다.[2] 일본군 한 명의 보병장비를 여럿이 나눠서 한 명은 소총, 한 명은 권총, 한 명은 군도, 한 명은 대검... 식으로 무장했다. 한편 수통이나 철모, 반합, 전투화등 비전투 장비는 민가로 넘어가 바가지, 물통, 솥, 신발 등 세간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다랑쉬 굴에서 그 일부가 유물로 발견되었다.[3] 6.25 전쟁 개전 당시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 김익렬 대령(4.3 당시 중령)으로, 이후 한국전쟁 내내 용감히 싸워 기량을 인정받은 우수한 장교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 내내 진급은 했으나 한직을 주로 거치다가 박정희 집권 이후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남긴 4.3 관련 회고록은 사후에 출판되었다.[4] 사실 미군정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프리시 딘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본격적인 진압 작전 이전에 무장대와의 교섭을 추진했다. 맨스필드 중령은 이 말을 듣고 제주도의 주요 유지(도지사, 경찰청장 등)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이들은 핑계를 대며 거부했고, 결국 김익렬에게 와서 그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한편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이러한 평화협상 제의와 진행을 마냥 지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지는 사태에 대해 서둘러 진압하라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협상 직전 이틀 동안 미군은 무장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첩보활동을 하기도 했다.[5] 이 사건을 촬영한 필름이 남아 있다. 여담 항목 참고.[6] 이 사건도 여명의 눈동자에 묘사된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가명으로 나오기는 하지만.[7] 김익렬의 수기에 따르면 난장판이 된 회의실에서 안재홍 민정장관이 자신을 말리며 이렇게 통곡했다고 한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 그런가하면 송호성은 "이놈! 이놈!"거렸지만 그 말을 하는 대상이 조병옥인 것 같았다고 한다. 나중에 김익렬이 송호성을 만났을 때 그는 "제주도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고 한탄했다.[8] 당시 전국 평균 등록률이 91.7%이었으니 턱없이 낮은 것이었다.[9] 그의 상관인 미 6사단장 워드는 제주도에서의 사태가 공산주의 선동의 문제만은 아님을 충고했지만, 브라운은 "경찰의 잔악성과 비효율적인 정부도 원인이었지만 본도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에 비하면 지엽적인 원인"이라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10] 제주 출신으로 당시 11연대 소속이었던 한 군인은 훗날 "우리는 서자 취급,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제주도 놈은 다 빨갱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슬포 대대(제주 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토벌도 시키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게 육지 사람들만으로 토벌대가 구축되다 보니 더욱 더 상황은 악화되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소통의 부재였는데, 10월 사건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진압하러 온 전라도 군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거기다 제주도 방언은 육지 사투리와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11] 다행히 이 때에는 집단학살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며 사람들을 연행하는 행위 자체가 무고한 피해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군경은 인식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러한 무차별 체포로 인해 일부 젊은이들은 자진하여 무장대에 들어가기도 했다.[12] 사실 이 선거는 공개적으로 치뤄지기에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무장대는 거의 강제적으로 주민들에게 '백지날인'을 요구해 받아냈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군경에 의해 살해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13] 즉, 섬 바닷가에서 산으로 5km만 들어가면 무조건 초토화라는 소리였다. 당시 제주도는 섬이긴 했어도 조선시대부터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해서 어업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산 중간층에서 밭을 이루고 살아가는 소농들이 해안선에 몰려 사는 사람만큼이나 많았다. 이런 섬에서 해안선을 제외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킨다는 건 진압대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러나 해안마을 중에서도 곤을동처럼 피해를 입은 지역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탁상행정의 말로는 죄 없는 수만 명의 죽음이었다.[14] 허호준, 『4.3, 미국에 묻다』, 선인, 2021, p.180~185[15] 이것은 제주 4.3 사건에 있어서 미국의 책임 문제와 연결된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1949년 6월경에 이루어졌는데, 1948년 말부터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16]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소문은 완전히 근거 없는 낭설이었으며, 강경 진압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7] 제주도에는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이 있는데, '중산간마을'은 산 쪽에 위치하여 있는 마을을 말한다.[18] 계엄령과 관련된 법률인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된다.[19] 언론인도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경향신문 제주지사장이었던 현인하는 헌병대의 경향신문사 조사를 거부했다가 처형당했다.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인 이상희도 비슷한 이유로 살해됐다. 1948년 11월에는 군경이 대놓고 검열을 하며 언론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했다.[20] 이 때 파견된 경찰 중에서 경무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작전과장 최치환 총경이 작전참모로 파견되었다. 참고로 최치환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최고위원의 장인이다.[21]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안공림(58) 씨는 8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는데,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증언했다.[22] 토벌대였던 제2연대 특공대 장병들이 무장대로 변장한 사진이 남아 있다. 실제 사진 그 사진에는 "폭도(暴徒)로 가장(假裝)코"란 글이 선명하게 적혀져 있다.[23] 대살은 중산간지대뿐만 아니라 해안지대에 대피한 사람일지라도 처형 대상이 되었다.[24] 이 말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 눈에 띄었다간 공연히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어 자신도 끌려가 죽을 수 있을 테니 조심하라"는 뜻이다.[25] 얼마나 잔혹했냐면 같은 우익들마저도 그들을 외면했다. 실제로 그들이 민간인이라 할지언정 6.25 전쟁, 혹은 그 후에 벌인 짓들을 보면 전쟁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26] 1명은 경찰 가족이라 제외되었다.[27] 목격자에 증언에 따르면 아기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열심히 빨았는데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28]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으로 근무하다 운전요원으로 차출되었던 한 경찰관은 이 사건에 대해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으니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 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되었다고 한다.[29] 세계사적으로도 한 마을이 학살로 인한 희생자 수가 이렇게 많은 것은 드물다고 할 정도다.[30]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언론이 북촌리에서의 학살을 보도했는데, 당시 이 마을의 남녀 유권자 비율이 3대 1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이 희소했다고 전할 정도였다.[31]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몰려사는 이유는 흔히 해안가에 물이 존재해서 그렇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중산간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중산간 일대에 나름의 반촌 성격의 집성촌이 많았다. 하지만 4.3 사건을 겪으면서 죄다 초토화되었고 완전히 폐허가 된 채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많다.[32] 이렇게 서북청년단 중에도 의인이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배우지 못했거나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북청년단의 전신격인 단체들의 대부분이 북한에서 조금 잘 살거나 주민들에게 밉보여 김일성에게 땅, 집 등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친목단체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38선 이북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증오, 남한마저 공산화당하면 말 그대로 조국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면서 공산주의를 극도로 배척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도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들이자 이데올로기로 인해 고통받은 또 다른 역사의 피해자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점들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33] 이 의로운 사람들은 현재 제주 4.3 평화기념관 내에 위치한 '의인관'에서 그 행적이 알려지고 있다.[34] 대략 3,000~6,000명선[35]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 지대의 마을들에서는 돌로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세워 방어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36] 4.3 사건의 피해자인 작가 현기영 쓴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따르면 이덕구의 셔츠 주머니에는 숟가락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토벌대가 빈정거리듯 꽂은 것 같다고.[37] 1949년 3월 2일에 제주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유재흥이 사령관에, 함병선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재흥은 3월 마지막 주에 제주도에 왔으므로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앞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중간산마을과 무장대는 모두 궤멸 상태에 직면해 있었으니 선무공작을 펼쳐도 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유재흥은 피난민 20,000여 명과 무장대 250여 명이 한라산 산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민들을 하산시킬 작전을 짰다. 그 이전은 함병선이 전투사령부를 이끌었다. 함병선은 "온건 완화 작전을 취하여 오던 국군은 최후적 결의를 갖고 제3단계인 무력소탕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3월 1일부터 동월 말일까지의 일대 섬멸전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38] 정작 이 비석은 4.19 혁명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39] 현재의 제주 관덕정과 제주관아 앞.[40] 이들은 남녀 각 1명으로 남성대원은 오원권(농민), 여성대원은 한순애였다. 붙잡힌 직후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이미 4.3 사건의 진압 방식도 유재흥이 부임한 후에는 학살보다는 귀순공작 위주로 진행되었고, 경찰 내부에서 4.3에 대한 감정도 누그러졌으며 시간이 흐르며 군사분계선 이남 일대를 통치하는 세력으로 대한민국의 지배가 확고해진 상황에서 4.3 사건이 6.25, 이승만의 정치공작 등 심각하게 여기고 있던 사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묻혔기에 열성 남로당원이 아닌 평범한 양민 출신이었음이 감안되어 전향서를 제출하고 사면되었다고 전해진다.[41] 제주는 특성상 쌀 농사가 힘들어 대부분은 보리로 주식을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