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나이티드 FC/유공과 SK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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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원년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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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독수리
[1] 現 부산 아이파크의 전신
[2] 現 제주 유나이티드의 舊 명칭
[3] 現 포항 스틸러스의 舊 명칭





1. 소개
2. 시기별
2.1. 유공 코끼리
2.1.1. 당시 주요 선수
2.2. 부천 유공 / 부천 SK
2.2.1. 당시 주요 선수
3.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제주 유나이티드 FC는 1982년 유공 코끼리 축구단으로 창단하여 그 후 부천 유공, 부천 SK 이렇게 구단명칭과 연고지가 바뀌어 오늘에 이르며 이 시절 K리그를 한차례(1989년) 우승하였다. 2006년 제주 유나이티드로 개명하면서 기업명을 구단명칭에서 완전히 배제했는데 이로 인해 축구팬이 아닌 사람들은 과거에 유공 코끼리와 부천 SK가 제주 유나이티드로 바뀐 줄 모르는 사람들도 종종 볼수 있다.


2. 시기별[편집]



2.1. 유공 코끼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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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원년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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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독수리
[1] 現 부산 아이파크의 전신
[2] 現 제주 유나이티드의 舊 명칭
[3] 現 포항 스틸러스의 舊 명칭




파일:유공 코끼리.png
유공 코끼리
1982시즌
1983 시즌
1984 시즌
1985 시즌
1986 시즌
1987 시즌
1988 시즌
1989 시즌
1990 시즌
1991 시즌
1992 시즌
1993 시즌
1994 시즌
1995 시즌

1982년 유공 코끼리 축구단이라는 명칭으로 대한민국 두번째 프로축구단으로 창단하였다. 1983년 슈퍼리그 참가시 서울/경기/인천 지역을 연고지로 참가하였고 1987년 인천·경기로 변경하였으며, 1990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창단 당시의 비화가 있었는데 1981년 4월 30일, 새마을 운동 관련된 성금기탁을 위해 가진 기업들과의 오찬이 청와대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때 축빠로 유명했던 전두환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에게 "최순영[1] 회장이 할렐루야 축구단을 만들었으니, 이번엔 선경에서 나무아미타불 팀을 만들면 되겠습니다."라는 농담을 던지게 되었다. 당연히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무시할수 없었던 선경은 불과 1달만인 1982년 5월 25일에 축구단 창단을 발표한다. 이게 바로 유공 코끼리. ##

김정남 감독이 이끌던 시절 호성적을 냈었고, 1989 시즌에 이 팀의 유일한 리그 우승을 일궈내며 현재까지도 유일한 우승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이 시기의 흑역사로는 브라질 용병 발두에게 1982 스페인 월드컵 대표 출신이라고 사기당해서 영입했는데 1경기 교체로 15분만 뛰고 말았던 먹튀의 전설을 쓴 일이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페리바우두 단타스 참조. 그리고 1992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홍명보를 지명하는 데 성공하고도 높으신 분들의 밀실합의에 의해 하루만에 트레이드로 포항 아톰즈에 트레이드로 보내는 일도 있었다.[2]

그러나 이 시기에 드래프트에서 상위순번을 받아 강철, 이임생, 이용발 등의 대어들을 싹쓸이했고, 1994년 10월에 발레리 니폼니시[3] 감독이 부임하면서 제 2의 리즈시절이 시작된다.

먼 시일이 흘러 2022년, 유공 코끼리 시절의 마스코트 코끼리 캐릭터가 '행코'라는 이름으로 SK이노베이션의 홍보 캐릭터가 되었다.#

2.1.1. 당시 주요 선수[편집]


  • 이강조 (1983-1985)
  • 신문선 (1983-1985)
  • 이장수 (1983-1986)
  • 박윤기 (1983-1986)
  • 오연교 (1983-1987)
  • 최기봉 (1983-1987)
  • 김용세 (1983-1988)
  • 구본석 (1985~1994)
  • 최윤겸[4] (1986-1992)
  • 노수진 (1986-1993)
  • 신동철 (1986-1993)
  • 박창선 (1987)
  • 조윤환[5] (1987-1990)
  • 하재훈[6] (1987-1994)
  • 송선호[7] (1988-1996)
  • 이광종 (1988-1995)
  • 김평석 (1989-1990)
  • 유대순 (1989-1994)
  • 김봉길 (1989-1994)
  • 황보관 (1989-1995)
  • 허기태 (1990-1995)
  • 최진한 (1991-1992)
  • 조정현 (1992-1998)
  • 강철 (1993-2000)
  • 조성환[8] (1993-2001)
  • 김기동 (1993-2002)
  • 이용발 (1994-2001)
  • 이임생 (1994-2002)
  • 윤정춘 (1994-2004)
  • 윤정환 (1995-1999)
  • 남기일[9] (1997-2003)
  • 이을용 (1998-2002)
  • 곽경근[10] (1998-2002)
  • 전경준 (1999-2001)

2.2. 부천 유공 / 부천 SK [편집]


파일:부천 SK 로고(1997~2001).svg
파일:부천 SK 로고.svg
파일:부천 SK 로고(2005).svg
로마자 표기 개정 이전
로마자 표기 개정 이후
2005년 말~연고이전까지
사용하던 엠블럼.

부천 SK
1996 시즌
1997 시즌
1998 시즌
1999 시즌
2000 시즌
2001 시즌
2002 시즌
2003 시즌
2004 시즌
2005 시즌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 부임 첫 해인 1995년 준우승이란 성과를 거둔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 따라 부천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11] 서울 연고지의 유공 코끼리 축구단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1996년부터는 부천 유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명목상이지만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 후 부천시의 시조였던 보라매를 마스코트로 정한다는 움직임이 있어서 잠깐이지만 부천 유공 보라매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부천시에는 프로경기를 치를 경기장이 없었기 때문에 부천종합운동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계속 서울에 머물며 목동운동장에서 홈경기를 치루었다.[12]

1996년 리그컵을 우승하였으며 1997년 10월 부천 유공에서 부천 SK로 구단 명칭을 변경하면서 엠블럼도 바꾸었다.

파일:external/www.ilbe.com/f164c0eaafc1d6e781a857b8fdec8fa9.jpg

엠블렘의 빨간색은 SK주식회사(현 SK에너지), 파란색은 SK텔레콤[13]을 상징. 단, 이것은 기업 이미지를 갖고 한 비공식적인 해석이고 당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밝힌 의미는 검은색은 힘, 청색은 정직, 적색은 정열이다.[14]
파일:external/www.newsbucheon.net/1159_1733_330.jpg

1995년부터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지도자로 칭송받는 발레리 니폼니시의 지휘 아래 뻥축구에서 벗어난 패싱 위주의 '니포 축구'는 한국 프로축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부천 SK 시절을 상징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 세련된 축구로 인기를 얻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안양 LG 치타스와 수도권 라이벌리를 이끌어 K리그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었는데, 당시 축구팬들은 '부천 SK는 표값이 아깝지 않은 축구를 한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부천 SK는 인기가 있었던 구단이었다. 물론 니폼니시 시절에는 우승과는 인연이 멀었으나[15], 최강의 플레이메이커 윤정환을 주축으로 김기동, 이을용, 윤정춘의 최강 허리 라인에 이임생, 조성환, 강철 등의 수비진, 부천 FC 1995의 흑역사 타깃맨 곽경근, 염색 머리로 유명했던 조커 이성재, 특이한 모자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골키퍼 이용발 등 실력과 개성 넘치는 선수들이 많았던 팀으로 기억된다. 그밖에 김한윤, 남기일 등도 이 시절의 주요 선수.

그러나 니폼니시 감독과 후임인 조윤환 감독 사임 이후 영광의 주역이 하나둘 팀을 떠나면서 부천 SK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부천 시절부터 계속된 모기업의 투자 부재는 연고 이전 이후로도 한동안 개선되지 않아 상위권 도약이 요원한 상태였다.

이렇게 1990년대 말 K리그의 인기 구단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성적도 어느 정도 내던 부천 SK였지만, 모기업의 투자 감소로 점점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야기되기 시작한 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SK그룹에서 운영하던 스포츠단을 줄줄이 해체했다.[16]

그래도 축구단은 2000년엔 K리그 준우승으로 저력을 보여줬고 2001년에는 드디어 부천종합운동장으로 이전하면서 진정한 부천 연고팀으로 부천 시대를 열었지만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축구단은 큰 폭풍은 피하기는 하였지만 모기업 지원금이 줄어듬과 동시에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던 선수 연봉에 대해 경영효율화란 명분하에 새로운 고과평가제도가 실시되었다.[17] 또한 신임 금지어 강성길 단장은 축구단 운영에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18]이었는데 홍보 효과도 없는 축구단은 최소 비용으로 운영하겠다.가 이 양반의 축구 철학이었다. 이런 양반이 단장이 되었으니 축구단에 투자는 기대할 수 없었고, 쓸만한 선수는 다 팔아먹고, 있는 선수로 돌려막으면서 그냥그냥 운영하는 팀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이 당시 부천 SK 구단 홈페이지는 다른 구단들의 홈페이지와 비교했을 때 디자인과 구성 수준이 거의 개인 홈페이지를 연상시킬 만큼 좋지 않았다.

여기에 똥누는 놈 주저앉히는 계기가 된 결정적인 사건이 소버린 사태. 2003년 소버린 사태로 인해 그룹의 존망 위기에까지 내몰린 SK는 축구단 매각 매각이지 해체가 아니다! 을 검토했으며 실제로 부천시에 무상기부, 중국 스더그룹[19]에 매각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

그룹 사정이 나빴던만큼 축구단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다. 이미 그 전 시즌 2002년에 뜬금없이 최윤겸 감독을 사실상 경질하고 이을용의 터키 진출과 연관이 있었는지[20] 터키 출신의 트나즈 트르판 감독을 영입했는데, 당연히 멀쩡히 팀을 지휘하던 감독을 갑자기 경질하니 선수단에 동요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단에서는 언론을 통해 최윤겸 감독을 경질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축구팬들은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트나즈 트르판 감독을 터키 국가대표 감독과 페네르바체 SK 감독을 한 명장이라고 추켜세웠지만 터키 국가대표 감독으로는 1988년에서 1989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에서 오스트리아 동독을 상대로 선전하긴 했으나 결국 3위로 탈락했으며 페네르바체 감독으로는 1991년 잠깐 있었으며 그 외의 팀에선 길어야 3년을 넘기지 못하고 터키 국내에서도 저니맨 신세였다. 이런 사람이 당장 문화가 다른 곳에 오니 적응하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트나즈 감독 체제에서 첫승은 5경기만에 거뒀으며 2002 시즌 마지막 경기는 수원에게 5-0으로 완패당하며 2003년 시즌의 불안한 행보를 예고했다.

2003년에도 위에 언급된 운영방침과 모기업의 어려움의 영향으로 트나즈 감독의 강력한 잔류요구에도 이임생, 김기동이 이적했으며 곽경근까지 이적하며 팀의 구심점이 될 고참 선수들이 계속 나가 팀 분위기가 흉흉했으며 트나즈 감독의 영향으로 영입된 터키 리그 출신의 외국인 선수들은 적응 실패인지 여관방에서 라면 먹는데 잘 할 리가 좋은 기량을 보이지 못하며 개막전부터 내리 6연패를 당하며 결국 5월 트나즈 감독이 경질되고 하재훈 감독 대행으로 가서 7월 달에야 개막전의 상대였던 부산 아이파크를 상대로 원정에서 어렵게 2-1로 첫승을 거뒀다. 이 날 승리는 2002 시즌까지 포함해서 무려 22연속 무승[21] 끝에 거둔 승리였다. 결국 2003년 시즌은 단 3승만 거두는 등 최악의 한해를 보냈다.

어찌저찌 소버린 사태가 잘 수습된 이후 2004년부터는 축구단 정상화를 위해 정해성 감독을 영입하고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김정수, 조준호 등을 영입하는 등 본격적인 정상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2004 시즌에는 FA컵 준우승을 거뒀다.

다만 FA컵 준우승 축하연 겸 송년회에서 강성길 단장이 원정에서 이기면 SK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발언과 축구단 해체라는 발언을 하며 축구단에 비관적인 태도가 언론에 또 전해져 축구팬들 사이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일었다. 오히려 이 발언으로 축구팬들의 SK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부천SK, 준우승 선물은 축구단 해체?, 부천 해체 발언에 네티즌들 격분

그래서 인근 지역의 신생 시민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 안종복 단장의 운영 방식과 비교되기도 했다. 프로축구단 두 단장,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이듬해인 2005 시즌에는 단장이 바뀌고 팀이 더욱 정비되어 플레이오프 진출을 눈앞에 두고 탈락하기도 했으며[22] 평균 관중도 대폭 상승하였다.

그런데 엄청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파일:부천 SK 연고이전.jpg[23]
2006년 2월 2일 오전. 공식 홈페이지에 제주도 서귀포시연고이전을 한다는 발표를 한다. 연고이전의 이유는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클럽하우스 문제였다. 당시 부천SK는 인천광역시 용현동에 위치한 SK저유소 부지내에 위치한 클럽하우스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 부지가 재개발이 됨에 따라 새로운 클럽하우스를 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부천시측에 새로운 클럽하우스 건설을 위한 부지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부천시에서는 단칼에 거절, 전국 최고의 인구밀도와 도시화를 자랑하는 부천시에 클럽하우스 건설 부지를 구입하는 것은 비용이 한두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무리 대기업인 SK라도 굉장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24] 이 문제를 고심하던 SK는 축구단을 부천시에 유지, 제주도로 연고이전, 제3지역으로 연고이전의 세가지 방안을 놓고 외주용역조사를 하였으나 결국은 클럽하우스 부지 무상제공을 떡밥으로 던진 서귀포시로 연고이전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현재의 제주 유나이티드가 되었다.[25][26]

파일:attachment/부천은_영원합니다.jpg
지금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부천 SK가 영원하다고는 안그랬다.


2.2.1. 당시 주요 선수[편집]


  • 조정현 (1992-1998)
  • 강철 (1993-2000)
  • 조성환[27] (1993-2001)
  • 김기동 (1993-2002)
  • 이용발 (1994-2001)
  • 이임생 (1994-2002)
  • 윤정춘 (1994-2004)
  • 윤정환 (1995-1999)
  • 이원식 (1996-2003)
  • 남기일[28] (1997-2003)
  • 이을용 (1998-2002)
  • 곽경근[29] (1998-2002)
  • 전경준 (1999-2001)
  • 김한윤 (1997-1999, 2001-2005)
  • 이성재 (1999-2003)[30]
  • 조진호 (2000)
  • 이상윤 (2001)
  • 최문식 (2002)
  • 셰이크 오마르 다보 (2002~2004)
  • 한동진 (2002-2004)
  • 변재섭 (2004~2006)[31]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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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었고 신동아그룹 회장이기도 했다.[2] 다만 이 때 트레이드로 받아온 올림픽대표 출신 신인 김진형과 조정현은 각각 주전 센터백과 슈퍼서브로 성장하면서 니폼니시~조윤환 시대의 일익을 담당했다. 문제는 이들이 국가대표와는 좀처럼 인연이 없다 보니까 대중들에게는 듣보잡 취급받았다는 것(...)[3]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카메룬을 8강까지 이끌었던 명장이었다.[4] 구단 6대, 15대 감독.[5] 구단 최초 선수 출신 감독, 5대 감독.[6] 구단 8대 감독.[7] 부천 FC 1995 4대, 6대 감독.[8] 구단 12대, 14대 감독.[9] 구단 16대 감독.[10] 부천 FC 1995 2대 감독.[11] 당시 동대문운동장을 같이 썼던 LG 치타스경기도 안양시로, 일화 천마충청남도 천안시로 연고지를 옮기게 된다. 이후 연맹이 서울 연고지를 재개방하자 LG가 2004년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해 FC 서울이 됐고 일화는 경기도 성남시로 연고지를 다시 옮긴 후 시민구단으로 전환해 성남 FC가 된다.[12] 비슷한 시기에 인천광역시를 홈으로 삼던 인천 신세기 빅스도 인천 시내에 안전하고 접근성 좋은 체육관이 없다는 이유로 부천실내체육관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13] 당시 SK텔레콤의 CI 컬러는 파란색이었다.[14] 초창기엔 당시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라 'Bucheon'이 아닌 'Puchon'으로 썼다. 푸촌?! 그리고 연고지명 표기와 함께 엠블렘도 덩달아 바뀌었다. 그리고 연고이전 직전인 2006년 초에는 SK그룹 CI 변경으로 엠블렘의 SK 또한 현재 SK의 CI로 변경되었다.[15] 그래도 1996년 리그컵 우승을 했다.[16] SK증권 여자 농구단SK케미칼 배구단이 대표적이었다. SK증권은 1998년 2월에 농구대잔치 우승을 한 다음 날에 해체라는 어이가 가출한 발표로 여자 농구단의 연쇄 해체를 이끈 시발점이었으며, 여자배구 역시 슈퍼리그 준우승을 기록한 준수한 팀이었으나 역시 1998년 4월에 해체가 됐다. 당시 양 구단에 각각 여자 농구와 여자 배구의 전설급 선수가 많았기 때문에 SK그룹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올드 스포츠팬들이 많다.[17] 기본급은 줄이고 출전수당을 대폭 늘리는 방식이었는데(즉, 먹튀를 막겠단 뜻) 주전급 고참 선수들은 이에 반발했으며 주장 강철을 비롯한 많은 고참급 선수들이 팀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18] 선수들이 전지훈련 갔을 때 열악한 숙소 문제로 하소연을 하자, "다음번엔 여관방으로 잡고 식사도 라면으로 때워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더구나 이 인간, "전국에 SK주유소가 몇 개인데 축구단 따위로 홍보하느냐?"...라는 소리까지 지껄였다.[19] 축구팬에게 익숙하고 안정환이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낸 중국 리그의 강팀 다롄 스더를 소유하던 그룹이었다. 그룹의 막대한 지원을 업은 축구단은 중국 슈퍼리그에서 무려 8번이나 우승하며 최다 우승 기록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룹의 회장이 보시라이와 너무 가까운 사이였던 탓에 보시라이의 실각과 함께 비리까지 까발려지며 그룹이 몰락하고 회장은 2015년 12월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축구단도 2012 시즌이 끝나고 다롄 아얼빈(이후 다롄 이팡으로 이름이 바뀜)과 합병되어 사라졌다. 이후 다롄 스더의 팬들과 시민들이 서명, 모금운동을 이어가면서 1년 만에 다롄 챠오유에란 이름으로 재창단하는데 성공. 2014년 을급 리그 참가 2년 만에 갑급 리그로 올라서며 다롄 이팡과 더비전을 벌이게 되었다.[20] SK그룹 이름이 터키 스포츠팀들에 많이 붙는 SK라는 이름과 어쩌다가 맞았고 2002 월드컵 터키 형제국가 드립붐을 타서 터키에 진출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2002 월드컵 당시 (원래 목적은 중국에 사업 진출 관련으로 그랬겠지만) SK 그룹 인사들이 중국과 터키 경기를 관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에선 터키 진출을 당장하지는 않았고 2005년부터 최태원 회장이 터키를 방문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며 2010년대 들어서 터키에 진출하며 성과를 보이고 있다. 1, 2 물론 터키 스포츠팀에서 사용하는 SK의 뜻은 스포츠 클럽의 터키식 표기 약자다.[21] 1997년 대전 시티즌과 2006년 부산 아이파크와 타이 기록이었다. 이 기록을 깬 건 2008년 23경기 연속 무승의 광주 상무였다.[22] 정규시즌 최종전 대전과의 홈경기에서 최철우의 헤딩 선제골로 앞서나가며 플옵 진출이 가시권에 들어왔으나 경기 종료 5분 전 대전 알리송이 각도가 없는 위치에서 지른 개사기스러운 아웃프런트 감아차기 슈팅에 일격을 당하며 고춧가루를 얻어맞았다. 알리송의 동점골은 시즌 종료 후 KBS 비바 K리그에 의해 해당 시즌 베스트골 반열에 이름을 올렸으며, 경기 자체도 선수들의 투혼이 빛났던 명승부로 회자된다.[23] 연고이전 사과문에 구장 사진을 쓰는 정신나간 짓을 했다.[24] 땅값 문제도 있지만 부천은 매우 좁은 곳에 많은 인구가 몰려살며 개발 포화로 몸살을 앓던 신도시로, FC 서울처럼 정부에서 통크게 개발제한구역을 풀어주거나 하지 않는 한 합리적인 가격에 충분한 면적의 부지를 구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25] 아이러니 하게도 연고지 용역조사 결과는 부천시 연고 유지가 최선이라고 결과가 나왔다.[26] 여담으로 연고 이전 당시 기자가 "제주 있다가 나중에 또 연고 이전 합니까?"...라는 질문에 구단 측이 "한국에서 안 되면 일본이나 중국으로 갈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식의 발언을 내뱉은 적도 있었다.[27] 구단 12대, 14대 감독.[28] 구단 16대 감독.[29] 부천 FC 1995 2대 감독.[30] 부천 구단 최초 신인상[31] 주장을 역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