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헤어베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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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헤르베르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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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헤르베르거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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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前 축구감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herberger.jpg

이름
제프 헤르베르거
Sepp Herberger
본명
요제프 헤르베르거
Josef Herberger[1]
출생
1897년 3월 28일
독일국 바덴대공국 만하임시
사망
1977년 4월 28일 (향년 80세) /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바인하임시
국적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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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미상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SV 발트호프 만하임 (1914~1921)
VfR 만하임 (1921~1926)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1926~1930)
감독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1930~1932)
독일 대표팀 (1932~1936 / 코치)
독일 대표팀 (1936~194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45~1946)
서독 대표팀 (1950~1964)

1. 개요
2. 생애[2]
3. 논란
4. 스타일 & 평가
4.1. 선수
4.2. 감독
5. 뒷이야기
6. 어록
7. 사생활
8. 수상
8.1. 선수
8.1.1. 클럽
8.2. 감독
8.2.1. 클럽
8.2.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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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이나 진행된다.
(Der Ball ist rund und ein Spiel dauert 90 Minuten.)


독일축구선수 출신 감독. 1950년부터 1964년까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 이후 실의에 빠져있던 서독 국민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다 준 베른의 기적을 이끈 감독으로 특히나 유명한 인물.


2. 생애[3][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제프 헤르베르거는 제2제국 시기였던 1897년 만하임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와 이름이 같은 요제프였으며 빈농이었다. 아버지는 2번 결혼을 했는데 첫 아내는 아이를 낳다 사망했고 제프는 2번째 아내인 린다의 소생이었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공장 노동도 병행했고 제프의 가족들 8명이 2개의 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던 헤르베르거였지만 그가 12살이 되던 1909년, 아버지가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면서 학비를 못 내 학교도 옮겨야했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헤르베르거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건설 현장과 산업체에서 일하다가 1914년부터 SV 발트호프 만하임에서 축구 선수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축구 선수 커리어 역시 중단되었고 1916년에는 독일 제국군에 징집이 되었다.[4] 헤르베르거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17년부터 전선에 배치되었지만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고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SV 발트호프 만하임[편집]


선수 시절 헤르베르거의 주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로 주로 고향이었던 만하임을 연고로 둔 팀들에서 주로 활동했다. 원래 헤르베르거는 체조 선수를 꿈꿨지만 축구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자 헤르베르거도 축구 선수로 진로를 바꿨고 카를스루에 대표였던 고트프리트 푹스[5]를 롤모델로 삼았다.

헤르베르거는 1914년 1월부터 SV 발트호프 만하임의 성인팀에 포함되었고 1915년 6월 20일에 선수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이 시기는 전쟁중이라 많은 경기를 치를 순 없었고 소속팀 발트호프 만하임의 라이벌 VfR 만하임과의 경기에선 오토 네르츠와 대결하기도 했다.

발트호프 만하임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시작된 좋은 성적을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유지했고 1919-20 시즌의 오덴발트 지역 리그[6]에서는 발트호프 만하임과 VfR 만하임의 승점이 동률이어서 중립 경기장에서 최종전을 치르게 되었다. 1만명 이상이 모여 당시로서는 엄청난 관중들이 운집했고 헤르베르거의 23번째 생일에 치러진 이 최종전에서 그는 해트 트릭을 작렬시키며 발트호프 만하임을 우승시켰다. 이때의 발트호프 만하임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은 제프 헤르베르거, 카를 회거(Karl Höger), 빌리 후터(Willi Hutter)가 이끄는 공격수 트리오로 그들의 이름 앞글자를 따서 3H로 불렸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고도의 기술 수준에서 펼치는 정확한 패스 게임에 "Waldhofschule(발트호프학교)"라는 별칭도 붙었다.


2.2.2. VfR 만하임[편집]


헤르베르거는 1921년 시즌 도중, 발트호프 만하임의 라이벌 VfR 만하임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헤르베르거는 원래 FC 푀닉스(FC Phönix)와 VfR의 관심 대상이었고 1921-22 시즌 첫경기는 독일 대표팀에 선발되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때의 헤르베르거와 회거는 푀닉스로의 이적이 성사되어 보너스를 대가로 받았지만 헤르베르거는 푀닉스의 관계자가 트레이너 교육에 대해 이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 후에 이미 돈을 반환해야 했다. 그렇게 헤르베르거는 푀닉스 대신 VfR에서 뛰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헤르베르거는 은행에서의 일자리와 임대료가 없으면서 새로운 주방 시설이 있는 아파트와 같은 물질적 혜택을 받았고 이에 만족을 보였다.

푀닉스는 이에 반발해 헤르베르거를 독일 축구 연맹에 고발, 연맹이 헤르베르거에게 영구 자격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내렸지만 이 징계는 1년으로 경감되어 그는 1922년부터 VfR에서 다시 뛸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적은 당시 만하임의 축구팬들에게도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친정팀 발트호프는 자기네 주축 선수를 최대 라이벌팀에 빼앗겼다고 분개했고 새로운 팀 VfR에선 헤르베르거가 발트호프 출신이라 그들의 격[7]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헤르베르거의 친형도 이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연락을 끊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 두팀의 경기는 더욱 격렬해졌다. 헤르베르거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할 경기에만 집중했다. VfR 팬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지도, 발트호퍼 팬들에게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1925년 남부 독일 챔피언십에서 VfR이 우승할 때, 헤르베르거는 8경기 8골을 기록, VfR의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VfR은 독일 전국 대회에서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하고 조기에 탈락했다.

이 시기에 헤르베르거는 오토 네르츠[8]의 초대로 독일 축구 연맹에서 주최하던 4주 코스의 축구 코치 연수를 받으러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러나 네르츠는 코치 연수 프로그램 시작 직전에 복막염으로 자리를 비웠고 대신 독일 축구 연맹의 당시 회장이었던 펠릭스 린네만(Felix Linnemann)이 헤르베르거의 면접을 봤다. 헤르베르거는 이 자리에서 체육 교사가 되려는 자신의 포부를 솔직히 말했고 린네만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하며 헤르베르거의 코치 자격을 승인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보던 독일 체육대학의 카를 딤(Carl Diem) 총장은 헤르베르거에게 고등학교 졸업장 없이 수강할 수 있는 과정을 그에게 제안했고 헤르베르거는 이에 응했다.


2.2.3.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편집]


이렇게 헤르베르거는 1926년부터 1930년까지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에서 뛰게 되었다.

헤르베르거가 테니스에 들어갈 때 라이벌 클럽 헤르타 BSC 역시 회장이 직접 헤르베르거의 영입전에 뛰어들었지만 오토 네르츠의 설득으로 헤르베르거는 테니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 헤르베르거는 이전 소속팀인 VfR 만하임 서포터들로부터 돈 때문에 팀을 옮겼다는 비난도 들었지만 실상은 테니스 클럽에서 VfR로부터 헤르베르거가 받던 조건을 비슷하게 맞춰준 것에 불과했다.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은 헤르타의 타도를 목표로 시즌을 치렀지만 테니스에 그것은 쉽지 않았고 1930년 여름, 헤르베르거는 마침내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감했다. 33세의 그는 체육 및 체육 교육학위로 학업을 마쳤고 이제 감독으로 일하고 싶어했다.


2.2.4. 선수 시절 총평[편집]


선수시절 통산 기록은 236경기 출전, 186골을 넣어 꽤 괜찮은 스탯을 올렸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됐지만 선수 시절 국가 대표 경력은 딱 3경기 출전이 전부.[9] 그런데 이 3경기에서도 골은 2골이나 넣었다. 골냄새 하나는 잘 맡았던 듯


2.3. 감독[편집]



2.3.1. 초기 감독 생활[편집]


1930년 선수 생활을 마감한 헤르베르거는 자신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던 클럽,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에서 2년 계약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헤르베르거 본인이 선수 시절에 테니스에서 못 이뤘던 꿈인 베를린 컵 우승을 감독이 되어서 이뤄냈다.

1932년, 헤르베르거는 오토 네르츠가 이끄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때의 헤르베르거는 테니스와의 감독 계약이 남아있었지만 거의 만료되어가던 시점이었고 시즌이 끝나고 계약이 만료되자 테니스 클럽의 감독직 연임과 1932년 봄에 제안이 들어온 대표팀 코치 자리를 놓고 고민했다. 결국 헤르베르거는 8월 1일부터 독일 대표팀 코치로 들어갔고 서독 지방의 선수 선발과 젊은 재능들의 관찰을 담당했다.

1933년 10월 22일에 있었던 벨기에전에서 독일은 헤르베르거의 안목을 거친 선수들로만 팀을 구성해서 벨기에를 8대1로 대파, 헤르베르거의 훌륭한 안목을 증명했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한 후, 나치는 지역 축구 협회를 통합시켰지만 큰 틀은 바꾸지 않았는데 이는 FIFA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펠릭스 린네만은 1934년부터 전문 사무국장이 되었고 네르츠의 감독직도 유지되었다.


2.3.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부[편집]


1936년, 헤르베르거는 오토 네르츠의 뒤를 이어 독일의 2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네르츠의 해임 이유는 1936년 올림픽에서의 부진이었다. 이때 독일 국가대표 자체가 1934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있는 팀이었기에 자국 올림픽에서의 부진은 히틀러의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네르츠는 이 조치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한동안 헤르베르거의 상급자로 남아있었다. 1938년 5월에 네르츠가 직에서 사임할 때까지 그들은 상당한 권력 투쟁을 펼쳤다.

1938년 월드컵을 앞두고 독일은 이전 대회보다 더욱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프리츠 스체판, 파울 야네스, 에른스트 레너, 오토 지플링 등 이전 대회의 핵심 선수들이 건재했고 알빈 키칭거, 루트비히 골트브루너, 요제프 가우헬, 안드레아스 쿠퍼 등 새로운 얼굴들의 가세도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의 조화로 독일은 1937년에 치렀던 11경기에서 10승을 거뒀고 3월, 브레슬라우에서 덴마크에 거둔 8대0 대승은 말 그대로 그들의 높은 경기력을 선보인 한판이었다. 독일은 그저 뛰고 저돌적인 축구만 한다는 편견을 독일도 기술적인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새로운 면으로 바꿔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통해 마찬가지로 한 실력을 자랑하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흡수하면서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윗선이 개입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일 대표팀에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비율을 6대5나 5대6으로 비슷하게 맞추길 원했는데 이유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외부적으로 화합한 것처럼 보여야한다는 것이었다. 양국 선수들간의 플레이 스타일 차이도 컸고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독일에 감정이 좋았을 리 없었는데다 그렇다고 독일 선수들도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포용하려 들지도 않았으니 그들의 갈등은 상상이상으로 컸다.[10]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리그도 진행[11]되는 두세달남짓. 이건 헤르베르거와 네르츠가 아니라 동서고금의 어떤 감독이 와도 불가능한 미션이었고 네르츠는 이런 되도 않는 미션에 스트레스를 받기 싫었는지 5월 12일에 대표팀에서 탈출했다. 헤르베르거는 이 불가능한 미션에 저항도 해보고 변호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본선 경기에서도 이 6대5 미션을 지켜야했던 헤르베르거는 1938년 프랑스 월드컵 1라운드에서 졸전 끝에 스위스와 재경기까지 치렀지만 2대4로 패배하며 허무하게 대회 10등으로 탈락했다.[12]

이렇게 첫 월드컵을 타의로 인해 말아먹은 헤르베르거는 6대5 원칙을 폐기시키고 한동안 선수들의 화합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30대 노장들을 대체할 헬무트 쇤같은 새로운 선수들의 중용에 힘쓰며 1940년 도쿄 올림픽독일 개최를 목표로 한 다음 월드컵에 대비했다. 그렇게 1939년 이탈리아에 2대3으로 패했지만 1938년 월드컵때보다 독일 대표팀은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프랑스,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은 독일과 시합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독일은 동유럽권 국가들과 주로 경기를 가졌는데 1939년 9월 24일엔 헝가리에 1대5로 대패하기도 했다.

헤르베르거는 1933년 이후 나치당원이 되었고 나름 국가의 정책에 타협했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없었다. 전쟁 발발 후에도 나치는 A매치를 계속 열라는 명령을 보냈지만 헤르베르거는 선수 대부분이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었고 연락이 다 끊어졌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나치는 축구 선수들을 조금씩 최전방에서 떨어뜨렸고 헤르베르거는 축덕이자 에이스 파일럿 헤르만 그라프에게 전방에 축구 선수들을 보내지 말라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1942년 11월, 슬로바키아를 상대로 독일은 마지막 시합을 치렀고 이 시합은 독일이 5대2로 승리를 챙겼다. 그리고 이 시합에서 뛴 선수들은 이 경기를 끝으로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되었다.

대표팀 경기는 중단되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리그는 진행되었기 때문에 심사를 돕고 추가 교육 과정을 조직하기 위해 전국의 클럽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는 점령된 노르웨이에서 부대 감독관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1944년 1월 29일 베를린쇤베르크에 있는 헤르베르거의 아파트가 폭격을 당했을 때도 그는 오슬로에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에바는 베를린에 대한 폭격이 증가하기 전에 바인하임에 있는 부모에게 오래 전에 피신했고 그도 예방 차원에서 허가를 받아 이사를 했다. 1944년 6월이 되어서야 그는 다시 오슬로로 소환되었다. 1944년 9월 25일, 47세의 헤르베르거는 군인으로 징집되었지만 복무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제대했다.


2.3.3.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2부[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 서독은 전범 국가로 찍혀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당함은 물론, FIFA에서도 한동안 쫓겨났다. 이러다보니 1950년 월드컵은 서독에게 남의 나라 잔치이자 그림의 떡이었고 서독은 1950년 9월에서야 FIFA에 재가입해서 경기를 다시 치를 수 있었다. 헤르베르거는 이 시기에 선수들을 관찰하며 보냈고 잠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지도하기도 했다. 몇몇 클럽들로부터 감독 제의도 들어왔지만 헤르베르거는 1950년에서야 서독 대표팀의 감독으로 재부임했다.

1950년 11월, 다시 서독 대표팀이 전쟁 이후 첫 A매치를 치렀고 8년 전의 멤버들 중 안드레아스 쿠퍼프리츠 발터를 제외하면 토니 투레크, 오트마어 발터[13], 막스 모를로크 등의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서독은 스위스를 상대로 1대0 승리를 챙기며 새 출발을 자축할 수 있었다.

헤르베르거는 발터를 축으로 다시 서독을 강팀으로 끌어올릴 방안을 찾아내기 시작했고 발터가 1951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이적 제안을 받자 이를 말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1951년에는 베르너 콜마이어, 베르너 리브리히, 요제프 포시팔, 헬무트 란, 1952년에는 호르스트 에켈, 한스 샤퍼 등의 선수들을 대표팀에 발탁시켰다. 헤르베르거는 계속 서독의 인재들을 탐색하면서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프리츠 발터에 의해 전해진 대표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클럽의 다른 사람들이 화요일과 목요일에 훈련한다면 거기에 여러분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을 더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즐거움을 생각할 때 당신은 당신의 컨디션을 생각하십시오. 스포츠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모든 삶의 방식이 스포츠에 기반해야 합니다. 흡연, 음주, 불합리한 식사가 선수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위기도 있었다. 1951년 6월 17일 베를린에서 터키에, 같은 해 10월 17일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에 패배했을 때 큰 비판은 없었지만, 1952년 10월 5일 파리에서 프랑스에 1:3으로 패한 이후엔 여론이 험악해졌다. 키커의 표현에 의하면 프랑스에 당한 패배는 거의 국가적 재앙에 비견되었고 헤르베르거와 발터 모두 대표팀에서 나가라는 여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음달에 스위스를 상대로 5대1 대승을 이뤄 비판 여론은 약간 수그러들었다.


2.3.3.1.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편집]

종전 이후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진출한 국제 대회인 스위스 월드컵. 서독은 지역 예선에서 노르웨이, 자를란트와 한 조가 되었고 4전 3승 1무로 손쉽게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1953년 11월 21일 함부르크에서 서독이 노르웨이를 상대로 한 5대1 승리만이 팬들과 비평가들을 만족시켰고 1954년 3월 28일 자르브뤼켄에서 헬무트 쇤이 감독하던 자를란트를 상대로 3대1 승리를 거둬 스위스행 티켓을 따냈음에도 불구하고 해설자들의 비판은 이어졌다.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이 1954년 5월 23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한 수 아래로 취급되던 하노버 96을 상대로 1대5로 대패했는데 이것도 서독 대표팀과 헤르베르거에 악재로 작용했다. 당시 카이저슬라우테른엔 프리츠 발터를 필두로 헤르베르거와 함께 스위스에 가서 월드컵을 출전할 것으로 예상되는 서독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이 5명이나 포함되었는데 이런 팀이 1대5로 패배하자 난리가 난것이었다.

헤르베르거는 하노버에 천벌을 받은 카이저슬라우테른 출신의 몇몇 바보같은 노장들과 사랑에 빠졌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의 가톨릭 신앙때문일 것이다.

다스 슈피겔지


하지만 이때의 헤르베르거는 이런 악재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념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고수했고 패배한 선수들이 기량과 성격에서 월드컵 스쿼드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을 비평가들에게 보여주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헤르베르거는 만족감에 안주하기보다는 최근에 타격을 입은 명성을 재건하기 위해 좌절, 분노 및 성가심 등을 기폭제 삼아 의지를 불태우는 선수들을 곁에 두길 원했다. 독일 축구대회 결승전이 끝난 지 불과 사흘 뒤인 5월 26일부터 뮌헨의 그룬발트 스포츠학교에서 2주간의 월드컵 준비 과정이 시작됐다. 여기에서 헤르베르거는 정교한 훈련 계획을 통해 선수들의 레벨을 높이는 것에 주력했다.

처음 며칠간 우리는 너무 힘들었고 항상 죽을 것같은 몸상태로 침대에 쓰러졌지만 일주일 후 우리는 많은 것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정이 끝날 무렵 우리는 가볍고 자유를 느꼈습니다. 몸이 최상의 성능을 발휘하도록 설정된 거죠. 이론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의 상대팀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칠판과 영화 상영을 통해 친숙해졌습니다. 헤르베르거는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지적했습니다. 그가 그들을 미리 철저히 연구한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프리츠 발터


헤르베르거와 서독 선수들의 철저한 준비가 알려지지 않아서였을까? 16개국 본선에서 독일의 선전을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첫번째 경기에서 서독은 터키를 4대1로 눌렀지만 두번째 경기의 상대는 당대를 넘어 역대급 최강의 팀이었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 서독은 헝가리에 3대8이라는 떡실신에 가까운 스코어로 참패했다. 이 참패의 결과가 알려진 서독 국민들의 반응은 "도 진 국가인데 축구를 이길 리가 있냐. 우린 안 될 거야 아마"의 체념적 반응과 더 이상 나라 망신 시키지 말고 빨리 서독으로 돌아오라는 날선 반응이었다.[14]

서독은 헝가리에 밀려 터키와의 조 2위 결정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했지만 터키에 7대2 대승을 거두고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8강 상대는 유고슬라비아. 라이코 미티치, 스체판 보베크 등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진은 헝가리에 비견될 만큼 강력했기에 헤르베르거는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꺼내들었다. 그는 팀의 우수한 신체 조건과 선수들이 훈련된 방식으로 그가 준비한 빠른 역습 전술을 기꺼이 수행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전술이 맞아떨어져 서독은 유고슬라비아를 2대0으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이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한 쾌거였다.

서독의 4강 상대팀은 오스트리아로 결정되었다. 오스트리아도 당시 유럽 최고급 하프백 에른스트 오크비르크가 버티는 강팀이었다. 헤르베르거는 시합 전까지 동기 부여, 전술 인식과 함께 산만함을 최대한 배제하고 휴식을 위한 좋은 음식과 편안한 숙박 환경을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자유롭고 기술적인 플레이 성향에 서독 선수들이 제대로 카운터를 먹이며 서독은 6대1로 오스트리아를 크게 이겼다.

이렇게 서독은 결승까지 승승장구해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 상대는 당시 누구나 예측했던 헝가리. 서독이 헝가리에 비해 상당한 꿀대진[15]을 받고 결승에 올라온 반면 헝가리는 8강에서 전 대회 준우승팀이었던 브라질[16], 4강에서 우승팀이었던 우루과이와 연이어 대혈투를 벌이면서 힘을 상당히 뺀 채로 결승전에 올라왔다. 헝가리가 역대급 강팀이라도 서독은 기껏 결승까지 올라왔는데 시합도 안 해보고 헝가리에 우승컵을 넘겨준 채 서독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헤르베르거는 선수들과 독일 축구팬들에게 축구가 존재하는 한 불멸의 어록을 남겼다.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이나 진행된다.
(Der Ball ist rund und ein Spiel dauert 90 Minuten.)


헤르베르거는 헝가리의 전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을 2년여간 분석하며 결승에서 서독이 노릴 수 있는 약점을 계속 찾았고 결론이 나왔다. 헝가리의 수비, 그리고 히데그쿠티 난도르. 먼저 헤르베르거는 조별 예선에서 비록 8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서독도 3골을 넣었으니 그들의 수비진이 결코 무적이 아님을 선수들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그리고 헝가리는 당시 센터 포워드 히데그쿠티를 폴스 나인처럼 사용하며 변칙적인 전술로 상대팀들을 제압해왔다. 이에 헤르베르거는 호르스트 에켈에게 히데그쿠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가 주고받을 패스 줄기를 최대한 차단하도록 했다. 에이스 푸슈카시 페렌츠를 제어하는 역할은 베르너 리브리히에게 맡겼다. 또한 공격적인 하프백 보지크 요제프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비우면 그 틈을 노리도록 지시했다. 그 임무는 한스 샤퍼에게 1순위로 부여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결승전. 하지만 헤르베르거의 준비와 기대에 어긋나게 전반 10분 만에 서독은 헝가리에 2골을 내줬고 서독 국민들과 해외 축구팬들은 조별 예선에서 벌어진 3대8 패배를 넘어 더 큰 스코어차로 패배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서독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고 하프타임은 동점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후반전에 서독 선수들은 헝가리의 파상공세를 처절하게 버텨내다가 헬무트 란의 역전골로 기적과 같은 3-2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베른의 기적이다.[17]

헤르베르거는 후에 1954년 월드컵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스위스에 갔을 때 대부분 프로 선수였던 모든 국가의 참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 선수들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어떤 팀이나 선수도 우리보다 앞으로의 과제에 더 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서독 대표팀은 열광적인 환영 인파들속에서 금의환향했다. 서독 정부는 대표팀에 당시 가장 우아한 모델의 열차인 VT 08 디젤 복합 열차를 제공했고 빨간색 특별 열차는 긴 대형 문자로 장식되어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태웠다. 열차는 독일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더 많은 서독 국민들에게 드러냈고 각지에서 축하연과 시상이 계속되었다.


2.3.3.2.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이후[편집]

영광스러운 월드컵이 끝나고 서독은 1954년 하반기에 벨기에, 프랑스, 잉글랜드, 포르투갈FIFA 월드컵 챔피언 자격으로 경기를 가졌다. 지금도 월드컵 우승팀을 상대하는 팀들이 모두 그렇지만 당시 서독을 상대하는 팀들은 월드컵 챔피언을 꺾었다는 자부심을 갖기 위해 더 힘을 내서 서독 선수들과 맞부딪혔고 서독 역시 챔피언으로서의 자존심과 영광을 유지하려면 최고의 컨디션과 태도로 앞으로 4년 동안 국제 경기에 임해야 타이틀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었다. 선견지명이 있던 국가대표 감독 헤르베르거 역시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선수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대로 1954년 9월 26일, 월드컵 이후의 첫 A매치에서 서독은 벨기에에 0대2로 패했고 헤르베르거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벨기에는 우리 팀의 영광의 페이지가 되지 않았다. 모두 제자리를 벗어났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이 잊혀진 것 같았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10월 16일, 하노버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월드컵의 주축 선수들은 회복이 덜 되었고 서독은 프랑스에 1대3으로 패했다. 그나마 우베 젤러가 데뷔전을 치른 것이 소득이었다. 12월 1일, 런던에서 서독이 잉글랜드에 1대3으로 또 패하고 1956년까지 17번의 A매치에서 단 4번밖에 이기지 못하자 서독 내 여론은 다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수렁은 1956년 11월에 스위스에 1대3, 아일랜드에 0대3으로 2연패에 빠지며 절정에 다다랐다.

그나마 12월 23일에 쾰른에서 벨기에에 4대1 승리를 거두며 서독은 복수와 함께 체면치레를 했고 1957년 봄에 오스트리아네덜란드를 상대로 연승을 따냈다. 이 연승 행진은 스코틀랜드에 패하며 중단되었지만 스웨덴, 헝가리, 스페인을 상대로 다시 연승을 따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스페인전에서 스페인에는 디스테파노, 쿠발라, 수아레스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나왔음에도 2대0 승리를 거둬 1958년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2.3.3.3.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편집]

헤르베르거는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1958년 5월 12일부터 24일까지 뮌헨그륀발트 스포츠 학교에서 스웨덴 월드컵 대비 코스를 진행했다. 지난 대회에 이어 다시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는 프리츠 발터, 헬무트 란, 호르스트 에켈 등 5명이었고 여기에 우베 젤러, 카를하인츠 슈넬링어, 호르스트 시마니아크 등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헤르베르거는 스웨덴으로 출발했다.

1조에 속한 서독은 아르헨티나, 북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와 한 조가 되었다. 서독은 아르헨티나에 3대1로 승리한 덕분에 북아일랜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2대2로 무승부를 거뒀음에도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이때 서독의 강점은 수비였고 프리츠 발터의 지원을 받아 우베 젤러와 헬무트 란은 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서독은 4강에서 호스트 스웨덴에 1대3으로 패배, 결국 4위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래도 1958년 월드컵은 1954년의 우승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던 대회였다. 헤르베르거는 1955년과 1956년의 암울한 결과 이후 기대보다 훨씬 나은 결과인 4위를 기록함으로써 기민한 전술가로 명성을 굳혔다.

많은 일이 우리에게 불리했고 확실히 스포티하지 않은 일도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축구장에서 졌다. 약간의 운이 있었다면 우리는 다시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제프 헤르베르거. 1958년 월드컵을 회상하며



2.3.3.4.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이후[편집]

서독은 1954년의 월드컵 우승 시점보다 경기력은 떨어졌지만 헤르베르거는 안정적으로 대표팀을 통솔했다.

1958년 9월 24일, 코펜하겐에서 열린 덴마크와의 월드컵 이후 첫 경기에서 뛰어난 공격 재능을 지닌 헬무트 할러가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리고 1959년 10월 21일, 쾰른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7대0 대승을 거둔 후 헤르베르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경기는 독일 축구의 주요 축하 행사로 국제 경기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는 이 결과에 모든 사람을 칭찬하고 자신에게 만족했다. 헤르베르거가 1961년 10월 8일,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25주년을 기념했을 때 독일 축구 연맹바르샤바에서 열린 폴란드와의 A매치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헤르베르거의 서독 대표팀 장기 집권은 서서히 삐그덕대고 있었다. 권력 구조가 느슨해졌고 선수들은 여전히 헤르베르거에게 적응하고 우호적이었지만 그들에게 순종은 더 이상 최고의 덕목이 아니었다. 선수들의 삶의 방식 또한 더 편안해졌고 요구 사항이 더 까다로워졌으며 클럽과 연맹의 권력 구조에 더 비판적으로 바뀌어갔다. 실제로 헤르베르거를 존경했던 선수들조차 그의 엄격하고 도덕적인 스타일에 동의를 거둬들여갔다.

서독은 196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스위스, 칠레와 함께 2조에 편성되었다. 서독은 이탈리아를 상대로 패배하지 않기 위해 경직된 맨투맨 전술을 들고 왔고 잔니 리베라, 오마르 시보리 등을 잘 막아내 0대0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스위스에 2대1, 칠레에 2대0으로 승리, 2승 1무의 성적으로 1위를 차지, 8강에 진출했다.

8강 유고슬라비아전에서 헤르베르거는 호르스트 시마니아크를 하프 포워드로 배치하는 기본적 전술에 우베 젤러, 한스 샤퍼, 헬무트 할러를 내세워 유고슬라비아의 골문을 열려 했지만 오히려 후반 41분에 결승골을 얻어맞고 탈락했다. 헤르베르거는 월드컵에서 수비적 전술을 펼치고 싶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누가 봐도 서독은 공격적 의지가 부족해보였다.

우리는 8강 진출로 무언가를 이뤘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룹 우승을 성공으로 간주한다.

제프 헤르베르거. 1962년 월드컵을 회상하며


그러나 서독에서는 수비를 앞세운 전술이 명백한 실패로 여겨져 대표팀이 조기 탈락했다는 통렬한 비판 여론이 거셌다.


2.3.3.5. 장기 집권의 마무리[편집]

1962년 6월 17일, 서독 대표팀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65세의 국가대표 감독은 칠레 월드컵에서의 8강 탈락이 서독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직면해야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야 했고 칠레에서의 실패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사임 의사에 대한 질문을 노골적으로 받았다. 기자들은 그에 대한 서독 내의 반발이 어떤 수준인지를 전하면서 서독 대표팀의 분위기가 어떤지 그리고 왜 그런 완고한 수비 전술로 경기를 지휘했는지 알고 싶어했다. 하루 아침에 "베른의 마법사"가 "산티아고의 돌감독"이 되었다. 이렇다 보니 헤르베르거는 전에 없던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칠레에서의 활약에 만족하는 인터뷰때문에 비난 수위는 더 심했다. 그가 예전의 활력을 되찾는 데에는 몇 주가 걸렸다. 그러나 그 모욕은 헤르베르거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몇 달이 되도록 계속 불편한 질문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나마 9월 30일에 서독이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열린 칠레 월드컵 이후 첫 경기에서 3대2로 승리해 상황은 조금 진정되었다. 그 이후 10월 24일엔 프랑스와의 2대2로 무승부, 12월 23일엔 스위스와의 5대1 승리했다. 하지만 1963년 5월 5일 함부르크에서 FIFA 월드컵 챔피언 브라질과의 만남은 1:2 패배로 끝났다. 이후 한동안 서독은 분데스리가 출범으로 A매치를 잡지 않았다.

사실 헤르베르거는 칠레 월드컵 전에 이미 독일 축구 연맹의 핵심 인사들과 그의 후계자에 대해 이야기했고 내부적으로 사임의 기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복귀 후 일부 언론의 비판적이고 때로는 상처를 주는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칠레에서 대중의 추측에 분노하여 반항적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느꼈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준비는 아직 제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임할 때 결정합니다. 연맹은 제 판단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방향을 엇갈리게 만들었다. 연맹의 관계자 야코프 쾨넨(Jacob Könen)은 기자회견에서 헤르베르거의 사임을 암시했다. 이를 알게 된 헤르베르거는 연맹 회장에게 즉각 사표를 던졌지만 회장은 쾨넨과 다르게 헤르베르거에게 1966년 월드컵까지는 서독 대표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헤르베르거는 자신의 사임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1964년까지 대표팀에 남아있겠다고 밝혔다.

1964년 5월과 6월에 각각 스코틀랜드핀란드를 상대로 열린 두 번의 시합이 헤르베르거의 대표팀 감독 은퇴 무대가 되었다. 이렇게 헤르베르거는 헬무트 쇤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주었고 27년 10개월에 걸친 대표팀 감독 생활을 마무리했다. 독일 대표팀과 선수로 처음 연을 맺은지 42년이었고 동시에 축구계에서도 은퇴했다.

헤르베르거가 대표팀에서 남긴 기록은 162전 92승 26무 44패였다.


2.4. 이후[편집]


은퇴 이후 헤르베르거는 아내 에바와 함께 호헨작센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사교적으로 지내며 여생을 보냈다. 대중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기꺼이 인터뷰에 응하고 인기를 누렸다.

헤르베르거는 1954년 월드컵 이후 이미 발표한 회고록과 분데스리가대표팀 역사에 관한 책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다. 늦어도 20주년이 되는 1974년 월드컵의 개최 시점에 그는 자신의 회고록을 완성하고 싶었지만 살아있을 때 과연 완성할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집필은 했지만 자료가 너무 많은 것이 이유였다. 그는 여러 권에 걸친 개인 전기를 생전에는 결국 완성할 수 없었지만 수백 개의 파일로 분류된 광범위한 초안, 메모, 편지 및 신문 스크랩 모음을 남겼다.

헤르베르거는 자신이 축구와 전술에 적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00여 권의 책이 있던 그의 서재에서 광범위한 연구를 했고 심리학, 철학 및 전략에 대한 지식을 꾸준히 습득했다. 데일 카네기,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그의 달변가적 면모는 다독가적 성향에서 찾을 수 있다.

1977년 3월 28일, 자신의 80세 생일을 맞아 제프 헤르베르거 재단이 만하임 성 기사단에서 설립되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재단으로 헤르베르거의 아내 에바(1896-1989)가 사망한 후, 바인하임에 있는 헤르베르거의 주택 매각 수익금과 부동산의 유가 증권 140만 마르크가 유언에 따라 재단의 자산으로 유입되었다. 이 재단은 장애인을 위한 축구, 수감자의 재활, 학교와 클럽의 젊은 축구 선수 지원, 독일 축구 연맹의 사회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80세 생일과 재단 설립 한달 후인 1977년 4월 28일, 헤르베르거는 북아일랜드와 서독 국가대표 경기 중계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몇 시간 후 만하임 시립병원에서 숨졌다. 그의 무덤은 바인하임의 호헨작센 지역 공동묘지에 있다.


3. 논란[편집]


나치정권을 잡은 시기국가대표팀을 지휘하였으니 헤르베르거 역시 당연히 나치당원이었다. 본인이 얼마나 나치를 신봉했는지는 헤르베르거 본인만 알 수 있는 노릇이지만[18] 이 때문에 나중에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때 상당한 반발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4. 스타일 & 평가[편집]



4.1. 선수[편집]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일류 리더 스트라이커이며 기술적으로 매우 우수한 선수입니다. 그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두 배로 눈에 띄는데 이는 축구 선수에게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맹목적으로 플레이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지적인 유형의 선수입니다.

다스 푸스발지



4.2. 감독[편집]


일부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은 1954년 월드컵 우승 시점을 독일의 실제 건국일로 여기며, 독일 국민감정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간주한다. 2003년 영화 베른의 기적이 이 당시의 사회상을 그려냈고 그런 독일인들의 생각을 투영하는 작품이다. 1954년 월드컵 우승은 국가대표 선수들과 독일 축구 연맹의 주요 인물들과의 기존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던 헤르베르거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한편으로 그의 코치로서의 성공은 그의 주변에 순종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선수들을 모으는 데에 기반을 두었다. 헤르베르거는 꼼꼼한 일꾼이자 어떤 것도 운에 맡기지 않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다. 1947년 6월 1일부터 1950년 여름까지 쾰른의 스포츠 대학에서 축구 강사로 일하면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축구 코치를 위한 과정도 진행하면서 클럽 활동을 위한 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서독 전체에 걸쳐 관계 네트워크를 확장했으며 그가 개인적으로 이끈 쾰른의 헤르베르거 코스에 참석한 것을 대부분 자랑스러워하는 모든 축구 감독과 코치들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서독의 우승은 헤르베르거와 자타가 공인하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어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베른의 기적 이후 4강에 오르며 국제적 경쟁력을 유지한 것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의 뛰어난 기량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전 국가대표이자 국가대표 감독의 삶에는 다른 면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경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욕구에 종속시켰고, 이 경력은 축구에서 그만 가능했다. 필요하면 복종할 수 있고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헤르베르거는 축구와 축구 경력 추구를 위해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정치 체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탈나치화 과정에서 그는 "나는 항상 내 분야만 연습했고 내 전문 훈련만 염두에 두었으며 정치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그는 정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의 개인적인 경력에 대한 엄격한 견해는 그가 축구의 틀 밖에서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말의 부드러운 어조는 "그는 교활하고, 영리하고, 기회주의적이고, 독이 되었다"는 린네만의 성격 특성과 거의 조화될 수 없었다. 완고하고, 때로는 타오르고,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침묵을 유지하여 탈출하고, 미소를 지으며, 화를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모호하게 말했지만 그는 항상 목표를 잃지 않았다.

저서 Die Meistermacher(마스터메이커)에서 위르겐 비터(Jürgen Bitter)는 위르겐 리네만(Jürgen Leinemann)을 인용하여 국가 사회주의에서 헤르베르거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한편으로 그는 제국체육청의 당 지도자들과 부끄럽지 않은 협정을 맺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행동에서 분명히 당과 거리를 두었다." 하베만은 헤르베르거에 대해 "축구에 대한 집착에서 그는 자신이 국가 사회주의와 동맹을 맺었고 전문적인 발전 측면에서 그로부터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을 억누르고 있다."고 평했고 헤르베르거는 그렇게 이상을 구체화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부하에게 맡기고, 화를 내지 않고, 비정치적으로 행동하지만 성공을 위해 야심차고 부지런히 일한 다음 성공에 있어 겸손함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덕과 성격 특성은 "수백만 명의 다른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나치 국가에서 그들 자신의 기회주의를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5. 뒷이야기[편집]


  • 선수 시절 대표팀에서 2번째 경기의 상대는 이탈리아였는데 헤르베르거는 이 경기에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 1972년 올림픽 당시 헤르베르거는 자신이 어린 시절 존경하던 고트프리트 푹스를 협회가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 개막전의 귀빈으로 초대하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협회는 향후에도 상당한 부담을 수반할 수 있는 선례가 생길 것이라며 요청을 거부했다. 푹스는 1955년부터 헤르베르거와 펜팔로 지내왔다.


6. 어록[편집]


경기의 끝은 곧 경기의 시작이다.
(Nach dem Spiel ist vor dem Spiel.)


스포츠에서의 높은 성과와 인생을 즐기는 것은 불과 물과 같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 하나 또는 둘 중 하나! 둘은 사이가 좋지 않다!
(Höchstleistung im Sport und vergnügliches Leben sind wie Feuer und Wasser. Man kann nicht zwei Herren gleichermaßen dienen. Entweder – oder! Entweder das eine oder das andere. Beide zusammen vertragen sich nicht!)



7. 사생활[편집]


헤르베르거는 1921년 4월 30일 바인하임(Weinheim)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에바 뮐러(Eva Müller)와 결혼했다. 신혼 여행은 스위스로 갔지만 커플이 아니라 팀과 함께했다. 팀이 그곳에서 두 번의 친선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헤르베르거는 이전에도 축구 스케줄 때문에 결혼을 두 번 연기해야 했다. 자녀가 없었던 결혼 생활은 헤르베르거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부부는 1951년부터 건축을 시작한 바인하임 근처의 호헨작센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8. 수상[편집]



8.1. 선수[편집]



8.1.1. 클럽[편집]


  • 남부 독일 챔피언십 우승 1회: 1925(VfR 만하임)
  • 오덴발트 주 리그 우승 2회: 1920, 1921(SV 발트호프 만하임)
  • 라인 주 리그 우승 2회: 1925, 1926(VfR 만하임)


8.2. 감독[편집]



8.2.1. 클럽[편집]




8.2.2. 국가대표[편집]




9. 둘러보기[편집]









[1] 독일어 발음으로는 "헤어베어거"에 더 가깝지만,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r는 '르'라고 적는다. 흔히 '쉬얼레'라고 부르는 선수의 원칙적인 표기가 안드레 쉬를레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사투리가 심한 독일어 특성상 지역에 따른 편차가 커서 r을 모음에 가깝게 발음하는 지역과 자음에 가깝게 발음하는 지역이 모두 있기 때문에 헤어베어거가 무조건 맞다고 말하기는 어렵다.[2] 출처: 위키백과, 11v11[3] 출처: 위키백과, 11v11[4] 1차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의 군인들은 자원해서 온 사람들이 더 많았고 헤르베르거처럼 징집돼서 온 케이스가 드물었다.[5] 1912년 올림픽에서 제정 러시아를 상대로 10골을 넣어 독일 대표팀 역사상 1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이다.[6] 이 당시 독일에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축구 리그는 없었고 지역 리그의 챔피언을 모아 전국대회를 열었다. 이 시기 헤르베르거의 소속팀들은 그 지역 리그에서 우승권에 근접해있던 나름 실력있던 팀이었다.[7] 발트호프는 초창기에 노동자, VfR은 부르주아 계층의 팬들이 많았다.[8] 당시 네르츠는 선수 생활을 그만둔지 얼마 안되어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의 감독과 독일 체육대학 교수로 있었다.[9] 상술한 푀닉스와의 분쟁과 징계가 그의 실력에 비해 적은 A매치 출전 횟수에 영향을 주었다. 징계는 풀렸어도 독일 축구 연맹은 한동안 헤르베르거의 대표팀 발탁에 부정적이었다. 지금 시대로 치면 A매치 3경기는 적은 출전 횟수지만 헤르베르거의 현역 시절이던 20세기 초반의 3경기 출전과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동시대의 레전드 골키퍼 하인리히 슈툴파우트가 A매치에는 21경기를 출전했고 당시 독일에선 A매치 최다 출전기록이었다.[10] 1974년 월드컵네덜란드에도 이때의 독일보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감독 리뉘스 미헐스는 자신의 페르소나 요한 크라위프에 선택과 집중을 택했고 크라위프와 불편한 관계였던 빌리 판데르카윌런얀 판베베른을 대표팀에 부르지 않는 것으로 해결했다.[11] 1938년 독일 전국 챔피언십은 1938년 3월말부터 진행되었고 4강까지 진행되고 나서 월드컵 휴식기를 가졌다.[12] 간혹 히틀러가 이 대회의 졸전에 분노해서 선수들을 다들 수용소로 보내버렸다란 루머가 도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게 사실이면 감독이었던 이 양반이 히틀러의 권력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1942년까지 국가대표팀을 지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13] 프리츠 발터의 친동생이다.[14] 헤르베르거는 이 경기때문에 고국에서 비난 편지도 한가득받았는데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헤르베르거 씨. 지금 당장 밧줄로 목을 매어 죽되 밧줄은 재활용해야하니 돌려주시길". 2003년에 독일에서 개봉한 영화 베른의 기적에도 이 편지가 소개되었다.[15] 그래서 헤르베르거가 이를 노리고 일부러 헝가리가 1등으로 올라가도록 조별 예선에서 고의로 졌다는 의혹도 지금까지 따라다닌다.[16] 브라질과의 준준결승전은 월드컵 역사에 남을 난투극이었고 경기가 끝나고 양팀의 패싸움까지 있었다.[17] 다만 훗날 서독 선수들이 하프타임에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했다는 정황이 밝혀졌으며, 비록 당시에는 합법이었다지만 당시 선수들도 당당히 메스암페타민인줄 알았다고 시인하지 않고 비타민인줄 알았다고 둘러댔을 정도로 결코 떳떳한 행위는 아니었다. 결국 이 비신사적인 행동은 현재에 와서도 과연 당시의 서독의 우승이 100% 정당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여지를 남겼다.[18]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 열성 나치당원들은 사회에서 축출되거나 타국으로 망명했지만 이 양반은 계속 독일에 남아 대표팀을 FIFA 월드컵 우승까지 이끌었으니 살기 위해 반강제로 들어간 Mitläufer(단순 가담자)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나치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처벌받지는 않았고 강제로 나치에 들어갔거나 내부 반대파들의 경우엔 큰 불이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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