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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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투표 아이콘(흰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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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6차
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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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병행하지 않고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에 의해 별도로 시행한 보궐선거이므로 편의상 보궐선거로 분류함.
**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결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민주당
대동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기타 정당
무소속
55석
29석
12석
6석
13석
85석
27.50%
14.50%
6.00%
3.00%
6.50%
42.50%
제헌 국회의원
1. 개요
2. 배경
3. 결과
3.1. 투표율
3.2. 투표 결과
3.3. 선거구별 결과
4.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파일:오십선거포스터.jpg
당시 선거 포스터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5.10 총선거라고도 부른다. 투표율은 95.5%를 기록했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다당제를 정착한 사례, 한국사에서 최초로 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다. 원래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나 여기서 선출된 제헌 국회의원들에 한하여 2년 임기였다(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1]


2. 배경[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동시에 이는 냉전의 도래와 함께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개시하여 한반도 진공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진공 속도에 놀란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소련군의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하여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 소련에 통고하면서 한반도의 분할 점령이 결정되었다. 소련군은 동년 8월 21일 원산에 상륙, 평양에 소련군사령부와 소비에트 민정청을 설치하였고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서울에 진주하여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고 군정청을 설치하면서 군정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이 참석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3개국은 한반도 내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쟁점으로 논의하고 중국까지 포함한 4개국이 최장 5년 동안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결정에 합의하고 합의문인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를 공식 발표하였다.

여기서 국내에서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본질적 목적인 '통일 임시정부 수립' 내용을 쏙 빼놓고 '신탁통치'만을 강조해 사건이 터졌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의 오보를 접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에 남한내 좌, 우익 모두 한 목소리로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이듬해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이 평양에 갔다오고 나서는 좌익이 찬탁으로 선회. 이를 두고 남한에서는 좌, 우익이 서로 갈라져 이념대립이 심화되어갔다.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신탁통치 찬성을 밝혔고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한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들을 적으로 지목하여 숙청시켰다. 이후 1946년 2월 북한에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사실상의 정부'를 만들었고, 이와 동시에 남한에서도 1946년 2월에 미군정의 자문기관 역할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만들어 갈라져가고 있었다.

3국 외상회의에서의 합의 내용에 따라 1946년1월 신탁통치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 토의를 위해 미소군정의 대표자들이 모인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예비회의, 3월 20일 덕수궁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한반도 내 정당 및 사회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미소 양국이 대립하면서 진전 없이 5월 6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였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전국을 순회하던 도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했다. 이때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은 물론이거니와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이런 주장에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혔지만, 한민당만 '찬성'을 밝혔다. 이후 미국 국무부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 '극우파'와 '극좌파'를 배제하고 온건한 중도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지해 좌우합작운동에 간접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극우파인 한민당, 이승만과 극좌파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였고, 이듬해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영향으로 미 국무부는 '반공주의' 노선으로 선회,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철회하였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어 초창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하였으나, 결국 또다시 '통일임시정부 수립 내각 구성'을 비롯해 '찬반탁 인사 참여 여부'를 놓고 입장 차이로 8월 12일에 최종 결렬되었다. 이와 동시에 좌우합작운동 주도인물 가운데 핵심인물인 여운형이 7월 19일에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도 사실상 유명무실화되고 1947년 12월 10일에 해체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고 1947년 9월 23일 미국의 제의로 한반도 문제가 유엔 총회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미국은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유엔 감시 하에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한 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미소 양국군이 동시에 철수할 것, 그리고 남북 총선거 및 양국군 철수 등에 대한 감시협의체로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에 반대하면서 한국인들 스스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우선 미소 양국군이 동시에 철군하고 본 문제 논의에 참가할 남북한 대표 선정을 내용으로 하는 반대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였으며,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이 양 결의안을 놓고 토의한 결과 11월 14일 유엔 소총회에서 미국의 결의안이 <유엔 총회 결의안 제112호>의 이름으로 찬성 43표, 반대 6표, 기권 4표로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발족하였고 1948년 3월 31일 안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국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소련은 한국인 대표의 참가가 없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에 참가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우크라이나 역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불참하였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총회를 가지고 임무에 착수하였으나, 1월 24일 동 위원단의 북한 입국이 소련군정 당국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결국 소총회는 2월 26일 위원회의 활동이 가능한 남한 지역에 한해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정치세력이 선거 참여를 거부하고 불참했는데 좌파세력인 남로당은 폭력저지를 목적으로 불참했다. 중도진영 중 근민당 등의 좌파와 홍명회의 민독당 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단독선거 반대론자였던 김구김규식 역시 불참했고, 따라서 단독선거 지지자였던 이승만과 한민당만이 참여했다.[2] 김구와 김규식, 홍명희 등 선거에 불참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논의를 위해 평양으로 이동해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 등 북한 대표와 회의를 가졌으나 북측에 이용만 당했다는 평만 남긴 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남북협상파의 불참, 남조선로동당계의 훼방이라는 악재에도 95.5% 투표율(역대 최고 투표율)을 자랑하는 선거였다. 선거전의 악재에도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이유는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선출자를 뽑는 첫 번째 선거였다는 점이 중요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인의 참정권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나마도 지방선거만 치러졌다.[3] 해방 이후에는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선거가 치러지기는 했지만 간접선거였고 미군정의 기대와 다르게 우익이 압승하자 미군정이 선거 결과에 개입하는 등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 우리가 직접 제대로 된 선출자를 뽑아야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악재가 겹쳐졌음에도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문맹자가 많던 시절이었음에도 웬만한 문맹자들도 다 한 표씩은 행사했다.[4] 그 덕택에 남한 정부는 상당한 자유민주적 정통성을 갖게 되었다.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 100%로, 비례대표는 없었다. 정원은 남한 지역 200명이었고, 후보자수는 942명이었다. 6.25 전쟁 전이었으므로, 삼팔선 이남지역인 개성부 등지에선 선거가 열린 반면, 이북지역인 화천군 등지에선 선거하지 못했다.[5] 4.3 사건으로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6]는 무효가 되어 이듬해 선출했다. 선거권은 21세 이상, 피선거권은 25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었다. 예외가 하나 있다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하였거나 작위를 받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수혜를 입은 일부 고위급 공무원들에게는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본래 이 선거는 5월 9일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월 9일은 일요일이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견이 있었고[7], 하필이면 그날이 일식이 일어나는 날이어서[8] 5월 10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물론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덤이었는데 그 덕택에 현재까지도 한국에서 투표일이 공휴일로 지정된다는 장점이 생겨났다.


3. 결과[편집]


파일:Screenshot 2020-07-29 at 22.42.46.png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9]

정당 득표율
정당
득표수
득표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662,294
24.43%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828,195
12.17%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
]]

536,043
7.88%

[[조선민족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

144,791
2.13%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

71,062
1.04%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

59,145
0.87%

조선불교중앙총무원

28,166
0.41%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
]]

22,994
0.34%

[[교육협회|
교육협회
]]

20,937
0.31%

[[대성회|
대성회
]]

18,368
0.27%

조선공화당

17,455
0.26%

[[부산15구락부|
부산15구락부
]]

17,014
0.25%

애국부인동지회

16,413
0.24%

[[단민당|
단민당
]]

16,380
0.24%

대한독립청년단

14,800
0.22%

기독교연맹

14,298
0.21%

민족통일본부

13,049
0.19%

파일:대한청년단 글자.png

12,792
0.19%

12,283
0.18%

11,974
0.18%

11,804
0.17%

10,763
0.16%

10,007
0.15%

9,803
0.14%

8,760
0.13%

8,325
0.12%
[10]
7,769
0.11%

7,664
0.11%

7,493
0.11%

7,142
0.10%

6,844
0.10%

6,461
0.09%

5,938
0.09%

5,909
0.09%

5,539
0.08%

5,535
0.08%

5,097
0.07%

4,495
0.07%

4,320
0.06%

4,253
0.06%

2,618
0.04%

1,568
0.02%

1,510
0.02%

1,463
0.02%

1,283
0.02%

767
0.01%

3,103,320
45.61%
총합
6,803,586
100.0%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결과
제1당

55석
제2당

29석
제3당

12석
제4당

6석
제5당

2석
제6당

1석[11]
제7당

1석
제8당

1석
제9당

1석
제10당

1석
제11당

1석
제12당

1석
제13당

1석
제14당

1석
제15당

1석
제16당

1석
-

85석


3.1. 투표율[편집]


지금처럼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다수의 주처럼 투표인으로 등록해야 투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채택했다. 전체 선거 등록인 7,840,871명 중 7,487,649명이 참여했다. (95.5%)


3.2. 투표 결과[편집]


제주도를 제외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명을 당선시켰고 한국민주당은 무소속 출마를 포함해 30여 명을 당선시켰다. 이외에도 다양한 정당들이 의원을 당선시켰는데, 특이하게도 무소속이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이때는 아직 정당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고 개인의 인기가 표를 좌우했기 때문이다.[12]


3.3. 선거구별 결과[편집]


제헌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항목 참조.


4. 이후[편집]


  • 1948년 6월 12일 국회는 결의문을 통해, 북한 지역에서도 유엔총회의 결의에 준하여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 거기에서 선출된 대표들을 서울의 국회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북한은 9월 9일 정부를 수립한다.

  • 유엔 총회대한민국 정부한반도내에서 선출된 합법 정부이자 대다수 한국인의 자유 의사로 선출된 유일한 정부(the only, lawful government in Korea)라고 결의했다.[13]

  • 이를 기념하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2012년부터 매년 5월 10일을 '유권자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절묘하게도 5년 뒤인 2017년부터 유권자의 날이 대통령 취임식날이 되었다.

  • 소련북한 김일성은 총선거를 거부하였으며 북한이 대한민국 지역에서 독재를 하려는 시도가 불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북쪽 지역에서 모든 면으로 독재에 성공하기 시작해, 주체사상이라는 독재 위의 독재를 시작하게된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정당 설립을 금지하거나 방해하는 독재 정당, 일국일당제 정당을 걸러내기 시작한다.


5. 여담[편집]


  • 위에서 서술했듯이 이때는 아직 정당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아 정당이 난립했다. 그 지역의 유력자들이 창당하거나, 무소속 개인 출마자가 창당하거나 한 고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이 많았다. 당명을 밥 먹듯이 갈아치우는 현재 한국의 정당들이 저 당명들 중 하나를 갖다 써도 될 정도였다.

  • 제헌 의원중 가장 이른 나이에 당선된 이는 배중혁 으로 26년 3개월의 나이로 당선되었다.
반면 가장 늦은 나이에 당선된 이는 이승만 으로 73년 2개월의 나이로 당선되었다.

  • 2008년 2월 25일[14] 제헌 국회의원의 마지막 생존자인[15] 김인식[16]씨가 죽으며 제헌 국회의원들은 모두 별세하였다.

  • 당시 문맹자가 하도 많다보니 후보들이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기호 1번, 기호 2번 찍으세요라고 하지 않고 작대기 하나(기호 1번), 작대기 2개(기호 2번) 찍어 주세요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 북한에서 스스로 선거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비밀투표가 아닌 거수기를 위한 찬반위주의 공개투표이며, 100%에 육박하는 수치를 자랑한다. 이러한 행위로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국민을 서로 감시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그래서 흑백투표는 북한의 투표방식(흑백투표함)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 북한에서는 이 선거를 망국단선(亡國單選)이라고 부르며 '미제가 함대와 전투기, 총으로 무장한 군인과 경찰들을 배치하고 국민들의 통행을 사실상 금지하여 남조선 전체를 '한 개의 큰 감옥'으로 만들고는 선거날에는 경찰과 '향보단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투표를 강요하고는 이를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구타, 살해해 선거 기간 동안 416명이 살해되고 558명이 다쳤다' '4.3 사건은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망국단선'의 입후보자들을 '처단'했다' '선거날의 서울을 목격한 미 UP통신 기자까지도 "이날 서울에서 웃는 사람은 어린아이들 뿐이였다"고 개탄했다'는 등의 황당한 역사왜곡을 했다.[17] #

  • 4.3 사태의 여파로 제주도 선거구 세 곳의 선거 관련 기록이 소실되었다. 그나마 북제주군 갑, 을의 두 선거구는 1948년에 투표율이 50%에 미달하면서 무효가 되어 1949년에 치른 재선거의 자료는 남아있지만, 1948년에 선거를 정상적으로 치른 남제주군 선거구에서는 모든 자료가 사라지고 확인되는 정보는 언론사의 보도로 남아있는 후보자 세 명의 이름과 1948년 5월 19일 경향신문 2면 기사를 통해 확인되는 당선자 오용국의 득표수 16,540표 뿐이다.

  • 김구김규식, 그리고 남북 협상에 참가했던 모든 대표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고 5월 4일 평양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평양에서의 협상이 실패한 후에도 김구와 김규식은 이전과 같이 유엔 감시하에서 실시될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고, 추종자에 대해서는 이 선거를 보이콧하라고 요구하였다.[a]

    이러한 뉴스는 급속히 전해져서 언론은 이 보이콧이 5월 10일에 실시할 예정인 총선거를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남로당들도 이 선거를 보이콧 할 작정이라고 언명하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a]

아직도 총선거에 대하여 이해를 잘 못하는 동포들이 있는듯 한데 임군이 있는 시대에는 임군이 모든 국사를 다스려 왔으나,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는 민의대로 대표를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회를 구성하여 국법을 만들고 치국을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국권을 회복한다면 우리 일을 간섭할 리도 없고 간섭을 하려고 하더라도 간섭을 받을 한인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거를 간섭한다는 것은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자유를 구속하고 공산파에만 투표하도록 조작하려는 것을 감시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자기 정파에만 투표하라고 권하는 정당을 주의하시오.

우리는 정식적으로 법리적으로 또 대규모적으로 이 선거를 시행해야 한다. 지금 남들은 우리를 40년간 정치를 못해본 국민이라 능력이 없다는 욕스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차 선거를 모범적으로 실시하여 우리의 면목을 회복시켜야 하겠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 실정을 보면 한편에서는 독립을 찾겠다고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을 반대하고 있다. 이 때 또 중간파에는 독립을 안 해도 좋고 해도 좋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남북 통일 선거가 아니면 대의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구실로 금차 선거를 반대하나, 그러면 남한 선거만 원하는 사람은 누가 있단 말인가. 북한이 막혀 통일 선거를 할 수 없게 되었다해서 이것도 저것도 말고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이런 대의 명분은 공산화를 기도하는 방법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 이번 선거에 실패한다면 방해하려는 자들에게 언질을 주게 되며, 우리 국운은 실로 한심스럽게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보자 난립을 주의해 주시오.




[1] 헌법 제정 등의 특수한 목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선거가 치러지는 법적 근거가 대한민국 법이 아니라 미군정 하의 임시 특별법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후대의 국회와 구별된다.[2] 한국선거학회 “대한민국 60년 : 이론과 실제” (한국선거학회, 2010) p36[3]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납세액 5엔 이상을 내는 사람들만 유권자로 등록할 수 있었다.[4] 미군정 통계에 의하면 1945년 문맹률은 78%였고 사회 각계에서의 문맹퇴치 교육에도 1948년 문맹률은 40%를 웃돌았다. 때문에 이들을 위해 투표용지에 작대기를 그었다. 우습게도 이승만 정권에서 나중에 3.15 부정선거가 진행되었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선거가 치러져서 경험이 쌓였음에도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방법을 가르치겠다면서 3인조, 5인조 투표를 하는 웃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5] 화천 등 수복지구에서의 총선은 제4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열리게 된다.[6] 두 곳 모두 북제주군(현 제주시) 선거구이다.[7] 다만 기독교 국가라 해도 투표를 일요일에 하는 경우는 많다. 영국을 제외한(다만 영국도 지방선거는 일요일에 치러진다.) 나머지 유럽국가들과 중남미권 국가에서는 보통 일요일에 선거가 치러지는 것이 관례이며,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일본도 일요일에 선거가 치러진다. 이 경우에는 일요일에 사람들이 교회성당으로 가는 것이 신도들에게 반(半) 의무였던 시절인데다가 주5일제가 정착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일요일이 투표하기 용이한 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단이나 목회자들이 예배 때 투표를 독려하는 방식(혹은 그러면서 은근슬쩍 혹은 대놓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을 찍으라는 식으로)으로 정치적인 영향력 행사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굳이 일요일 투표에 반대할 이유가 적기도 했다.[8] 당시 이 일식은 한반도 중부에서는 금환일식으로 관측되었다.[9] 이 선거구는 삼팔선에 따른 것이므로 황해도 옹진반도에 선거구가 있다.[10]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11] 의석수가 동일한 경우는 비례대표 득표율로 정당 순서를 구별하는데,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비례대표제가 없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당득표율대로 순서를 구별하였다.기사[12] 그 지역의 유력자들도 출마했고, 무소속 개인 출마자가 창당하거나 한 고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이 많기도 했다.[13] UN 제195(III)호(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III);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Adopted on December 12, 1948)[14] 공교롭게도 이 날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날이다.[15] 북한에 있는 납북 의원까지 포함하면 최태규가 마지막이다.[16] 선거구는 옹진군 을이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현재는 연평도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북한 치하로 넘어갔다.[17] 이는 1957년에 북한이 발간한 '조선통사'라는 책에 나온 정보이다.[a] A B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p, p. 253-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