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결집

덤프버전 :



1. 개요
2. 상세
3. 결집 과정
4. 굴외결집: 상좌부와 대중부
5.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기원전 5세기 또는 6세기의 어느 해에 석가모니 부처(이하 석존)가 입멸한 뒤 돌아온 첫 번째 우기에 석존의 제자였던 마하가섭의 주도로 당시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Rajagrha)[1]의 삿사파니(Sattapanni)[2] 굴에 석가모니의 제자 500명이 모여서 그의 가르침(경장)과 계율(율장)을 함께 외워서 기억하는 형식으로 석존의 가르침과 승단의 계율을 정리했던[3] 사건을 말한다. 결집에 참여했던 사문의 숫자가 500명이었던 데서 '오백결집'이라고도 한다.

2. 상세[편집]


마하가섭이 주관하고, 아난다가 먼저 암송하면 모두 따라서 합송하는 형식으로 교리를 완성하였다. 특히 아난다는 교리 부분을 암송한 반면, 계율 부분은 우팔리가 선창을 담당하였다고 전한다.[4] 대당서역기는 이때가 안거의 첫 보름(즉 안거 시작 전날인 5월 15일)이었다고 적었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석가모니는 제자 아난다에게 '자등명법등명'으로 알려진 유명한 법어에서 내 입멸한 후에 교단의 지도자는 없다고 단언했다(석가모니/일생 항목 참조). 석가는 입멸하기까지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쉬임없이 노력하면서도 승단의 지도자를 자처하지 않고 오로지 유익한 조언을 해주는 것으로 만족했고, 특히 이곳저곳 떠돌면서 일상사의 이런 저런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불자가 아닌 사람들의 가혹한 비판을 감당해야 했던 승단의 수도승들에게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승단에서도 석가모니가 생존한 동안에는 불법이 건재하므로 우선 포교와 덕행으로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석가모니 생전에 승단은 급속히 팽창했지만 일원적 조직체계를 갖추지 않고, 오히려 규모가 서로 다른 여러 세력으로 구성된 편이었다. 이들은 같은 믿음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는 있었지만, 각 지역 문화의 개별적 영향 때문에 공통된 계획이나 공식적인 강령 등은 없었다. 더구나 석가 자신이 '내 입멸 뒤에 교단의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기에, 석존이 사망하자 각 세력은 더욱 중심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했다. 석가모니의 설법을 한 데 모아 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상을 한층 가속화했다. 게다가 어느 한 제자가 석가모니의 모든 가르침을 듣고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가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 세존의 언행을 한데 집결해야 하고
  2. 승단 내부의 분열[5]과 논쟁을 끝내기 위해

승단의 계율을 집대성,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이 필요함은 누구나 동의했다. 이제 중대한 과업을 수행할 적임자를 찾는 것이 문제로 떠올랐다.[6]


3. 결집 과정[편집]


7세기 의 승려 현장은 천축 즉 지금의 인도를 순례하면서 석가모니가 설법한 장소 중 죽림정사(竹林精舎)를 찾았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죽림정사 서남쪽으로 5~6리 가면 남북쪽 큰 대나무 숲 속에 커다란 석실이 있다고 언급하고, 이곳이 석존이 열반에 든 뒤 마하가섭이 대아라한 999명과 함께 삼장을 결집했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이 삿사파니 굴로, 현장의 언급에 따르면 그 앞에는 당시 마가다 왕국을 다스리던 아자타사트루 왕이 경전 결집을 위해 모인 대아라한들을 위해 세운 건물의 터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7]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무렵, 마하가섭은 쿠시나가라로 향하던 석존의 행렬에서 조금 뒤처져서 산림에서 좌선 중이었다. 대당서역기 및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이때 마하가섭은 문득 광명이 번뜩이더니 대지가 진동하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일로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천안통으로 보았더니 스승이 쿠시나가라의 두 그루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들려는 중이었다. 마하가섭은 서둘러 제자에게 명해 쿠시나가라 성으로 가게 했으나, 제자는 가던 도중에 손에 아름다운 천계의 꽃을 들고 오는 브라만들과 만났다. 브라만은 "대사문(석가)께서 입멸하시어 큰 공양을 벌였는데 이 꽃도 그때 공양된 꽃"이라고 대답했다. 이미 석가모니는 그 시점에서 열반에 든 것이었다.

마하가섭은 스승의 열반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면서 제자들에게 "밝은 해(석가모니)가 저물었도다. 세계는 어두워졌도다. 중생을 선도할 분께서 저 멀리 이 세상을 떠나 버리셨으니, 중생은 타락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함께 했던 비구들도 "세존께서는 너무 빨리 열반에 드셨구나. 눈을 가진 분이 너무도 급하게 세상에서 사라지셨도다."라며 통곡하고 슬퍼하거나 혹은 “모든 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헛되며, 거기에 나는 없다. 이런 무상한 모습을 가진 법들이 어찌 영원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모든 중생이 좋아하고 애착하는 것은 오래 보존할 수 없는 것들이니 모든 것이 나로부터 떠나가고 흩어지고 사라지게 되리라고 늘 말씀하시지 않았던가?"[8]라며 애써 담담함을 유지했는데, 문득 어느 비구가[9] 이런 말을 했다.

도반들이여, 이제 그만하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탄식하지 마십시오. 도반들이여, 우리는 이제 그러한 대사문으로부터 속시원하게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당하다.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당하지 않다.’라고 늘 간섭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한국어역 디가 니까야 중 마하빠리닛빠나 숫따(Mahāparinibbana Sutta)에서.


何爲復憂? 我曹從今已得自在. 彼老常言 ‘當應行是, 不應行是’ 今彼長逝, 不甚往耶?

어찌하여 근심만 하는가? 우리들은 이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 늙은이는 항상 '이렇게 행해야 된다, 이렇게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그가 아주 돌아가셨다니 매우 좋지 않은가?

-

『반니원경』 2권


長老, 且止. 莫大憂愁啼哭. 我等於彼摩訶羅邊, 得解脫, 彼在時, 數教我等, 是應是不應, 當作是不應作是, 我等今者, 便得自任, 欲作便作, 欲不作便不作.

스님들이시여, 그치시오. 너무 근심 걱정을 마시오. 우리들은 그 꼰대 같은 늙은이[10]

곁에서 해탈을 얻었는데, 그가 살아 있을 적에 여러 차례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이것은 옳고, 이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 하셨으니, 우리들은 이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소.

-

『사분율』 54권


彼長老, 常言 '應當行是, 不應行是', 我今快得自在. 所欲便作, 不欲便止.

그 장로가 늘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간섭하였는데, 내가 이제야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도 되겠구나. 이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둘 수 있겠구나.

-

『십송율』 60권


그 비구의 싸가지 없는 말을 들은[11] 마하가섭은 이 시점에서 석존의 가르침을 한 데 모으고 석존의 가르침에 준거해 승단 내에서 죄를 범한 자들을 단속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쿠시나가라로 가서 석가모니의 장례에 참석한[12] 마하가섭은 장례가 끝난 뒤에 수메르 산에 올라 큰 징을 치면서 "이제 라자그리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과를 중한 사람들은 곧장 집합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사람들을 모았는데,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마하가섭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我先在道行時, 聞跋難陁語諸比丘作如是言長老, '且止莫, 復愁憂, 啼哭我等, 今於彼摩, 訶羅邊, 得解脫彼, 在世時, 教呵我等. 是應爾是不應爾, 應作是不, 應作是今我等. 已得自在欲作便作, 不作便不作' 我等今可共論法毘尼, 勿令外道以致餘言譏嫌 '沙門瞿曇法律若煙, 其世尊在時, 皆共學戒, 而今滅後, 無學戒者' 諸長老, 今可料差比丘多聞智慧, 是阿羅漢者.

내가 아까 길을 걷다가 들으니, 발난타 비구가 다른 비구들에게 말하되, "스님들이시여, 울음을 그치시고 근심과 걱정을 마시오. 우리들은 지금까지 그 꼰대 같은 늙은이 곁에서 해탈을 얻었는데, 그가 살아 있을 적에 여러 차례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이것은 옳고, 이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 하셨으니, 우리들은 이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소." 하였으니, 우리들은 지금 한 자리에 모여서 계법을 모아 두어야 외도들이 딴 소리를 하거나 비방하되, '사문 고타마(瞿曇)의 법률은 연기와 같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제자들이 계율을 배우더니, 이제 죽고 없으니 계율을 배우는 이가 없구나'라고 하지 못하게 하겠소. 여러 비구여, 이제 잘 생각해서 들은 것이 많고 지혜롭고 아라한인 비구를 추천하시오.

-

『사분율』 54권


여래께서 적멸하시어 세계가 공허하게 되었으므로 법장을 결집하여 불은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함에 있어서는 간이하게 하면서 또한 정숙하게 할 일입니다. 사람 수에 의지하게 될 때 이 성법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삼명을 갖추고 육신통을 지녔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알고 있고 변재에 막힘이 없는 상덕의 사람들만 결집에 참가했으면 합니다. 그 밖에 아라한과를 증한 사람이나 학습 중인 사람은 그대로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승려가 499명이었으니, 이들이 1차 불경 결집을 하였다.[13] 석존의 십대제자 가운데 마하가섭이 1차 경전 결집을 주도하였음은 그가 브라만 계급 출신으로 근엄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499명에 마지막 한 명으로 거론된 인물이 바로 아난다이다.

그런데 석존이 열반에 들기까지 25년이나 가까이 모시면서 석존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듣고 아는 아난다가 아직 학지[14]였다. 석존이 입멸하는 순간까지도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15]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남으라고 했는데 아라한과에 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난다를 배제하자니 그가 평소 석존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였기 때문에 뺄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마하가섭은 아난을 불러 "그대는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지 않았는가. 성과를 증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어서 나가도록 하라." 고 말했고, 아난 존자는 "저는 여래를 모시고서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만 교법에 관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함에 있어 제가 배척당한다고 하면, 부처님이 적멸해 버린 오늘날 저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하가섭은 "그런 것은 네가 걱정할 것 없고, 그대가 부처님 가까이에 있어 참으로 부처님 말씀을 많이 듣긴 했지만 애욕은 아직 남아 있고 번뇌의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고 말하며 기어이 아난을 쫓아냈다.[16]

아난은 할 말이 없게 되어 거기서 나와 조용한 곳으로 물러간 다음 무학(배울 것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려고 노력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피로에 지쳐 자리에 누우려는데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아라한과를 얻었다. 결집이 열리는 삿사파니 굴로 나가 문을 두드리며 도착을 알렸더니, 마하가섭은 "그대가 번뇌를 씻어냈다고? 그랬다면 신통력으로써 문을 통과하지 말고 들어와보라." 하고 대답했다. 아난은 이 말을 듣고 열쇠 구멍으로 들어와 다른 승려들에게 인사하며 자리에 참석했다. 이때 이미 다른 제자들과 함께 참석하여, 평소 율(律)에 관한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및 승가의 기존 판례들을 모두 결집해 놓은 상태였다.

이때 아난이 법을 암송하기 전에 다시, 장로들이 나서서 아난다의 잘못을 열거했다.[17] 그리고 이를 악작죄(惡作罪, 둑카타)에 해당한다고 책하였다.
  1. 소소계가 무엇인지에 대해[18] 석존께 여쭤보지 않은 것[19]
  2. 바느질을 하다가 석존의 우욕의를 밟은 것
  3. 석가모니께서 열반하신 뒤에 여인들이 먼저 그 시신을 뵙게 해서 그들의 눈물로 법체를 더럽히게 한 것[20]
  4. 석존께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러 주시라고 간청하지 않은 것[21]
  5. 석존께 여성의 출가를 간청해 석존께서 이를 허락하시게 한 것
아난다는 이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다섯 가지 잘못에 대한 비난을 듣고 조용히 항변했다.
  • 소소계 문제는 자신은 이제 곧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생각에 근심걱정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미처 묻지 않았을 뿐 율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 우욕의를 밟은 것은 옷 자체가 워낙 넓어서 발로 밟지 않으면 바느질이 어려워서였지 석존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 석존의 유신을 여인들에게 먼저 예배하게 한 것은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 석존께 1겁 동안 머물러주시라 원하지 않은 것은 그때 마라 때문에 마음이 가려져서였다.[22]
  • 석존께 여인으로서 처음으로 출가를 청하셨던 마하파자파티는 석존의 이모이자 의붓어머니[23]이시니 석가를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난다는 "네, 제가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존자님들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 이것이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인정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고백한 다음[24] 말석에 물러나 앉았다고 한다. 이에 마하가섭은 소리 높여 말했다.

잘 생각하고 분명히 듣기 바랍니다. 아난다가 부처님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었음은 여래께서도 칭찬하셨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수트람의 장(경장)을 결집하고 우팔리[25]

는 율을 극명하게 연구하고 있음을 증인이 아는 일이므로 그가 비나야의 장(율장)을 결집하고, 나 카샤파는 아비다르마의 장(논장)을 결집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계의 석 달 동안, 즉 5월 16일에 시작되어 8월 16일에 끝나는 3개월 우안거 동안에 삼장을 결집시켰으니, 이것이 1차 결집이며, 1차 경전 결집을 주도한 마하가섭이 당시 모든 승도 중의 상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 결집을 '상좌부 결집'이라고 한다.[26]

결집된 경전을 보면 석존은 그 당시 귀족층이 쓰던 고급 언어였던 고전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베다 산스크리트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설법을 할 때는 주로 속어였던 마가다어[27]를 사용했으리라 추정하고, 1차 결집 때에도 마찬가지로 마가다어를 썼으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근거가 없다. 초기 경전 언어로 기록이 남은 팔리어[28] 속에 몇몇 잔영이 남아있을 뿐이다.[29]

1차 결집이 끝나자 마하가섭은 석가모니가 했던 대로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불법을 전파했고[30] 아난다는 승단의 지도자가 되었다.[31] 그리고 이렇게 편찬된 제1차 결집의 내용은 후대 불교사의 지침이 되는 근본경전으로서 지금도 매우 중요하다.

아난다가 가르친 제자 중에는 야사란 사람이 있었는데, 야사는 석가를 직접 보고 알았기 때문에 제2차 결집이 소집되었을 때, 비록 고령이었지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32]

4. 굴외결집: 상좌부와 대중부[편집]


제1차 결집은 흔히 마하가섭이 주도하고 아난이 '이같음을 내 듣자오니'로 경전을 읊고, 우팔리가 율장을 외는 식으로 이루어졌던 결집을 말하지만, 다른 결집이 있었다. 칠엽굴에서 이루어졌다 하여 '굴내결집'이라고 부르는 마하가섭 등의 결집과 대비되어 '굴외결집'이라고 불린다.

상좌부 율장인 비나야삐따까 및 한역 율장 사분율 제54에 따르면 마하가섭이 주도한 제1차 경전 결집이 막 끝났을 때에 뒤늦게 석가모니 부처의 다른 제자인 뿌라나(Purāna)[33] 존자가 비구 500명과 함께 다끼나기리(Dakkhi-ṇāgiri)로부터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이미 결집이 끝난 상황이어서 마하가섭 주도의 결집을 수용하라고 제의했지만, 뿌라나는 "나에게는 붓다로부터 직접 들은 가르침이 있다.", "나는 내가 붓다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 하며 결집의 수용을 거부했다고 한다.

대덕이여, 나는 이 일을 다 인증하겠으나 오직 여덟 가지 일만은 제외하겠습니다. 대덕이여, 나는 친히 부처님께 들어서 잊지 않고 기억하는데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시기를, 절 안에서 묵은 음식과 절 안에서 끊인 음식과 자기가 얻어 온 음식과 일찍 일어나서 받은 음식과 저 쪽에서 가지고 온 음식과 과일과 물속에서 나는 것으로서 먹을 만한 것은 모두 밥 남기는 법을 하지 않고서도 먹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

『사분율』 54권


이때 부루나 존자가 마하가섭에게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라고 한 가르침은 '검개칠사(儉開七事)'[34]라고 해서 마하가섭의 주도로 결집한 경장이나 율장에는 들어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크게 일곱 가지로 정리된 그 가르침의 핵심은 음식의 저장 및 만드는 것에 관한 계율,그러니까 절에서 승려가 음식을 해 먹어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 우선 음식물을 비구의 처소에 저장해도 좋다.
  • 사찰 안에서 음식을 요리해도 좋다.
  • 비구 자신이 음식을 만들어도 좋다.
  • 시주나 정인(淨人)[35]이 없는 경우 비구가 스스로 음식을 구하거나 정인을 구해서 그 사람에게 받아도 된다.
  • 스스로 열매를 딸 때 나무라 생각하든가 정인을 구해 그 사람에게 받도록 한다.
  • 물속의 연뿌리 같은 음식은 연못 물을 정인이라 생각하고 물에서 취한다.
  • 과일 등은 정인이 없으면 씨앗을 제거하고 먹으면 된다.

마하가섭의 주도로 결집한 율장에서는 당연히 '출가자는 철저하게 무소유를 지켜야 하고 유리걸식해야 한다. 무소유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시주자나 정인을 찾아 그에게 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 금지하는 이들 일곱 가지는, 부루나 존자 자신의 말에 따른다면 '석가모니 부처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해도 된다고 허락한 바'였다. 부루나 존자 본인이 석가모니에게 그렇게 들은 것이었고 부루나 존자는 석가모니 부처의 그 말을 따라 자신의 제자들을 이끌고 전도하는 와중에 자신의 상가 안에서 그렇게 해왔다는 것이다.

마하가섭은 부루나 존자가 제시한 이 칠사에 대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맞는다." 하면서도 그 일곱 가지는 가뭄이 들어서 음식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36] 한시적으로 말하신 것이었고, 가뭄이 그친 뒤에는 해지되었다고 했지만, 부라나는 이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들은 적이 없다." 하고 맞받았다.

제1차 결집에서 마하가섭과 부루나 사이 검개칠사 논쟁, 특히 절에서 밥을 해 먹느냐 마느냐 하는 논점은 길게는 불교에서의 주요 논점 가운데 하나인 육식 허용 여부와도 연관된다. 일단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에 보살천자라 불릴 정도로 불교를 숭상해 결국 나라까지 기울게 했던 중국의 황제 양무제의 이른바 단주육문(斷酒肉文)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지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육식은 지양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탁발의 취지가 집착하지 않는 것 즉 음식을 가리지 않고 그것이 맛이 있든 없든 주어지는 대로 달게 먹는다는 것이기에 탁발에서 고기를 받으면 그건 먹어야 했다. 불교에서는 고기 먹는 것에 대해서 삼정육(삼종정육)이라 하여

  • 나(또는 승려)를 위해 죽인 것
  • 나를 위해 죽였다는 소리를 들은 것
  • 내가 죽인 것

세 가지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 그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허용하였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승려들이 고기를 잘만 먹는다.

고기를 먹는 것은 지양해야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음식의 맛에 탐착하지도 말아야 한다. 탁발에서 금지된 음식을 먹으라고 줘도 달게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절에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다면, 승려가 자신이 먹을 음식을 자신이 직접 조리해 먹을 수 있음을 의미하고, 승려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먹을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고기 먹는 문제에 있어서 '먹으면 안 되는데 탁발로 받은 것이라 버릴 수도 없고 해서'라고 더는 탁발 핑계를 댈 수 없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이때의 결집에 대한 다른 전승도 있다. 아난 증과 수토파에서 서쪽으로 20여 리 가면 수토파가 있는데, 아소카 대왕이 세운 것으로 대중부가 결집한 곳이라는 전승을 전했다. 학습 중인 자, 증과를 얻은 자 등 수백~수천 명은 마하가섭이 주도한 1차 결집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똑같이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왔건만, 법왕(여래)께서 입멸하시고 우리는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불은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해야 할 것이다.


라고 서로들 말했다. 그리하여 범승·성승이 모두 회합하고 어리석은 자·지혜로운 자 모두가 출석하여 여기서도 수트람 장·비나야 장·아비다르마 장·잡집장·금주장을 집대성하여 별도로 오장이라 했다. 그리고 이 결집은 범성양중이 했기 때문에 이를 '대중부 결집'이라고 한다.[37] 물론 상좌부와 대중부가 서로 갈라지는 이른바 '근본분열'은 2차 결집 때 사건으로 본다.

이 같은 이야기는 교단의 위계적 주도권을 넘겨 달라는 데바닷타의 요구를 석가모니 부처가 거부한 사례나, 석가모니 부처 자신의 마지막 유훈으로 알려진 '자등명(自燈明) ·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으로 볼 때에도, 석가모니 부처의 교단은 위계적 차원의 단일한 교주나 후계자를 인정하지 않았던 상황에 연유하는 것, 즉 마하가섭이 주도한 결집 내용이 결코 석가모니의 가르침 전체를 대표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한 집단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같이 보기[편집]


  • 여시아문: 한국어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혹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번역되는, 결집에서 아난다가 자신이 암송하던 석존의 가르침을 말하기 앞서 서두로 삼았던 유명한 구절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13:17:56에 나무위키 제1차 결집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한자로 왕사성(王舍城)[2] 한자로 칠엽(七葉)[3] 곽철환, 〈초기불교와 그 자료〉 7쪽[4]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1~42쪽[5] 이런 현상은 석존 생전에도 이미 기미를 보였다. 데바닷타 항목 참조.[6]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4쪽[7] 현장 《대당서역기》 권9[8] 『십송율』 60권[9] 팔리어 열반경에는 수밧다라고 하고, 반니원경에는 단두(檀頭), 가섭부불반열반경에는 파혹(波惑)이라고 이름이 나온다. 율장 사분율에는 발란타(跋難陁)라고 되어 있고, 십송율에는 이름이 없다.[10] 과장이 아니라 실제 뜻이 이렇다. 원문에는 마하라(摩訶羅)라고 썼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마할랴카(mahāllaka)를 음역해 쓴 것으로, 모하라(莫訶羅) 또는 모할락가(莫喝洛迦), 또는 뜻을 의역해서 무지(無知) 또는 노(老)라고도 번역된다. 쉽게 말해 '꼰대 늙은이'라는 뜻이다. 선견율비바사에는 그 비구의 이름을 수발타라마하라(須跋陀羅摩訶羅)로 썼는데, 팔리어 열반경에서 '수밧다'라는 이름을 든 것과 함께 생각하면 '수발타라마하라'란 '수밧다 늙은이'라는 뜻으로도 풀이가 가능하다.[11] 가섭부불반열반경에는 그 비구에게 하늘이 바로 천벌을 내리려는 것을 마하가섭이 선수를 쳐서 "너 말을 그 따위로 하냐?"라고 버럭해서 그 비구가 듣고 뉘우쳐 하늘이 천벌을 거두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늘이란 창조주나 절대적 위격의 존재가 아니라 하늘이라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다. 십송율에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비구들은 듣지 못하고 마하가섭만 들었다고 한다. 이것도 '하늘' 즉 신들이 다른 비구들의 귀를 막아서 마하가섭만 듣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 마하가섭이 장례식장에 당도했을 때엔 이미 석가의 시신을 전륜성왕의 장례 예법에 따라 관에 넣은 뒤였는데, 갑자기 관에서 석가모니의 발이 나와 마하가섭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석존이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한자로 곽시쌍부(槨示雙趺: 관에서 두 발을 보임)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다만 이는 후대 중국 선종불교가 번성하며 나온 이야기로, 관련 문헌 자료를 추적해볼 때 아무리 높게 잡아도 당대 중기 이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13] 현장 《대당서역기》 권9[14]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학습 중인 상태.[15] 이 때문에 아난다는 석존이 입멸하기 전에 "아직 내 깨달음도 다 이루지 못했는데 벌써 여래께서 돌아가신다니." 하고 한탄하며 울었는데, 석가모니가 이를 듣고 아난다를 달래며 "너는 내가 열반에 들고 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과에 들 것이다." 하고 수기를 주었다고 한다.[16] 십송율에는 처음부터 마하가섭이 아난을 끼워 줘야겠다고 했다. 마하가섭이 아난을 명백하게 끼워 줘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는 대목은 팔리어 대반열반경 및 사분율에 나온다.[17] 팔리어 율장 오백건도에는 다섯 가지로 나오는데, 〈오분율〉이나 〈사분율〉, 〈십송율〉 및 〈마하승기율〉, 〈근본설일체유부잡사〉 등에는 여섯 가지, 일곱 가지, 여덟 가지로 조금씩 늘어난다.[18]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에 "내가 설법한 계율 가운데 자잘한 것은 굳이 지킬 필요 없고 바꿔서 행해도 좋다." 하고 아난에게 말했다는 것인데, 그 '자잘한 계율'이 대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던 것. 결국 마하가섭은 석존께서 말하신 소소계가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석존께서 정하신 율장의 내용은 고치지도 바꾸지 않는다'는 불제불개변(佛制不改變) 원칙을 세웠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모든 불교에서는 율장을 바꾸거나 필요에 따라 특정 구절을 빼거나 넣는 것은 원칙적으로 절대 금지된다. 이것을 소소계 논쟁이라고 한다. ##[19] 아난다가 경장을 암송하기 전에 이미 우팔리를 중심으로 율에 관한 것을 모두 결집 다 해 놨는데, 아난다가 들어와서는 "석존께서 계율 중에 짜잘한 건 굳이 안 지켜도 된대요" 이러니 기껏 율장 결집해 놓은 것이 졸지에 도로아미타불 될 판이었다. 게다가 그 짜잘한 계율(소소계)이 뭔지 아난다가 제대로 물어보고 확실하게 무엇무엇이 소소계다 이렇게 설명을 들었다면 모르겠는데 설명까지 제대로 안 들었다고 하니, 마하가섭이나 모인 다른 승려들 입장에서는 뒷목 잡을 수밖에...[20] 전승에 따르면 석존의 장례에 찾아온 마하가섭 앞에서 석존의 관이 열려 부처의 발이 드러났을 때에 비구니들이 흘린 눈물 자국이 발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자현 비구는 장례를 위해서 시신을 염습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에 묻은 눈물 자국이 입관된 뒤까지 남아 있었다는 전승을 두고 '누군가가 오고 있기에 서둘러 장례를 치러야' 했던 모종의 상황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지적하였다.[21] 상좌부 불교에서 전승되는 대반열반경(디가 니까야 16경)에 따르면 "사신족을 닦은 자는 1겁 동안 세상에 머물 수 있다." 고 말했을 때 아난다는 석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럼 1겁 동안 세상에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석존은 열반에 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22] 또한 아난다는 석존이 생전에 누누히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석가 자신의 뒤를 이어 오게 될 미륵(마이트레야 붓다)의 존재에 대해 예언한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석가 이후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교화할 것이라고 석존께서 누누히 말씀하셨고 또 석가 본인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으니 매달리거나 구애되지 마라"고 하셨는데, 석가께 떠나지 말고 영원히 머물러 달라고 하면 석가가 설한 무상의 가르침은 어떻게 되고, 석가 이후로 오게 될 미륵불은 또 언제 오느냐는 것.[23] 실제로 마하파자파티는 석존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동생이다. 마야가 석가를 낳은 지 이레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정반왕은 처제와 재혼하였다.[24] 이렇게 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스스로 자백하는 절차는 승단의 기본 규정이 되었다.[25] 지계제일, 즉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십대제자였다. 석가족의 왕실 이발사 출신이라서 십대제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수드라 계급이었다.[26] 현장 〈대당서역기〉 권9[27] 인도 북동부에서 사용되던 속어[28] 언어학상으로는 피샤차어로 분류되며 마가다어와는 달리 인도 중서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속어[29]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1~42쪽[30] 이 사실은 팔리어 경전에 언급된다.[31] 부법장인연전에는 마하가섭을 초대, 아난을 2대 조사로 해서 마하가섭이 아난에게 조사를 부촉(양보)하고 열반에 든 듯 묘사했지만, 한국의 자현 비구는 실제로는 마하가섭 세력이 아난 세력에게 밀려난 것이 마하가섭이 아난에게 부촉한 것으로 각색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제1차 경전 결집 이후 약 100여 년 뒤에 이루어진 제2차 경전 결집 당시 상좌로 참여한 여덟 명 가운데 네 명은 아난의 상좌였으나, 마하가섭의 상좌를 자처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32]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6~118쪽[33] 사분율에는 부라나(富羅那)라는 이름으로 한역되었다.[34] 사분율에는 여덟 가지로 나온다.[35] 속인(俗人)으로 절에 살면서 승려의 시중을 드는 사람.[36] 불경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기 전에 가뭄이 들어서 안거 때에도 대중들이 모두 흩어져 마을로 들어갔고, 석가모니 부처도 유녀 암바팔리의 공양 이후로 신도들의 초대 공양을 받지 못하고 걸식을 나가서도 사람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말먹이로나 주는 밀기울을 받아 먹기도 했다고 나온다.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에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대장장이 춘다의 '수까라 맛다와' 공양도 이때의 일이다.[37] 현장 〈대당서역기〉 권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