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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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배경
2.1. 오스만 제국의 후퇴와 러•오의 신성동맹
2.2. 19세기 -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발칸 반도의 격동
3.1. 발칸 전쟁
4. 정말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이 1차 대전을 불러온 것인가?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된 발칸 반도19세기사(에 더한 그 이전 역사)와 그에 대한 유럽 열강의 변화를 다룬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키겠지.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어.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대전쟁은 19세기 초반부터 전 유럽에 퍼지던 민족주의 의식의 발로로 인한 범슬라브주의(러시아 제국-세르비아 왕국)와 범게르만주의(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충돌이 도화선이 되었다. 기존 제국주의 국가(대영제국-프랑스 공화국)와 신흥 제국주의 국가(독일-이탈리아 왕국) 간의 갈등은 또한 분쟁을 확대시킨 요소였다. 여기에 좋은 시비거리가 되어준 게 발칸 반도다.

19세기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서로 다투듯이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 난립한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민족, 종교가 달랐기에 서로 동질감이 약했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과거의 슈퍼파워의 쇠퇴로 인한 힘의 진공상태에 놓여있게 되다 보니 서로 상대방의 영토를 침략해 자국의 세력확장을 꾀하려 하는 그야말로 전국시대난세가 펼쳐지게 된다.

이 지역은 오헝제국에게도 제국의 "유럽 앞마당"이자, 해외 식민지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서쪽은 통일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에, 동쪽은 러시아에 가로막힌 가운데 제국이 팽창 가능한 유일한 지역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처하는 완충지대로 전략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었다. 또 비록 지금은 600년 전통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로 지배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수십 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오헝제국의 특성상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언제 제국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제국을 안정화시키고 국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적극적으로 팽창정책을 추구해야 했다. 결국 오헝제국은 자잘한 신생 독립국들이 서로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이 지역에 숟가락을 걸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여러 독립국의 발흥을 부추기면서, 특히 보스니아를 집어삼키고 알바니아 독립을 편들어준 게 좋은 예.

한편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도 발칸 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국의 경쟁자인 오헝제국의 배후지역이기도 하거니와, 슬라브족도 많이 살아서 만약 이 지역에 러시아 제국에 우호적인 국가가 성립된다면 오헝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발칸 반도의 친러시아 국가 사이에 껴서 양면전쟁을 수행해야 하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발칸 반도 꼬꼬마 국가들의 자존심을 "슬라브" 드립으로 간질간질 충동질해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 친러 반오스트리아 세력이 형성되기를 시도하게 되며, 여기서 주된 역할을 맡은 국가가 같은 슬라브인 국가이자 팽창주의 전략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 왕국불가리아 왕국이었다.


2. 역사적 배경[편집]



2.1. 오스만 제국의 후퇴와 러•오의 신성동맹[편집]


슬라브계 국가인 러시아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여기에 더해 몬테네그로 공국들의 친분이 시작 된 건 이들에 대항했던 오스만 제국의 약 200년에 걸친 수축(쇠퇴 및 붕괴)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17세기 중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물리치기 시작한 대륙의 신흥 강자였다. 신흥 강자가 된 러시아는 크림 칸국 등의 방향으로 남하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에게 우세를 거두고 제2차 빈 공방전(1683)을 통해 다시 옛날의 세력을 떨치려 하는 오스만과 충돌하게 된다. 200년 이상에 걸친 긴 영토분쟁의 시작이었다. 18세기 내내 오스만과 러시아는 일진일퇴했다.

오스만이 결국 2차 빈 공방전에서 참패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긴 전쟁에 들어가게 되고, 러시아 역시 1686년의 대 튀르크 전쟁 이래 기독교 신성동맹에 가담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지속적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오스만을 두들겨 패며 팽창한 건 신성 로마 제국과 후신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 튀르크 전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에 카를로비츠 조약(1699)를 강요하여 헝가리(오늘날의 슬로바키아 포함)[1],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현재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북동부)를 얻어냈다. [2] 결국 이때 오스만에게서 이긴 것이 오스트리아 제국(나폴레옹 패전 후),

여하간 이 당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이해는 오스만을 때린다는 이해에 매우 충실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의 동맹 관계는 7년 전쟁나폴레옹 전쟁에서 보듯 비교적 끈끈한 편이었으며, 신성동맹 역시 여러 차례 조직되었다. 한 예로, 7년 전쟁이 그치자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 제국, 더해서 프로이센 왕국폴란드를 갈라먹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결국 폴란드는 3분 되고 만다.


2.2. 19세기 -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발칸 반도의 격동[편집]


나폴레옹 전쟁 이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의 빈 회의에 의해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문제는 전쟁의 두 승전국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구 신성 로마 제국)는 구 체제로의 복귀에는 이해가 일치했지만, 점점 다른 분쟁으로 이해가 갈렸다는 것.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차르가 제안한 평화를 위한 신성 동맹 체결에는 동의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내켜하지 않았다.[3] 아무튼 유럽 5대 열강에 의해 결성된 신성 동맹의 빈 체제는 초반 몇년 동안은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라는 설립 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스페인과 남이탈리아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소요를 열심히 때려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체제에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1821년 민족의식을 각성한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빈 체제의 수립 목적에 걸맞게 그리스 독립 전쟁을 관망하고만 있었는데, 정작 빈 체제의 주축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국내의 친그리스 열풍으로 그리스 독립군을 지원하는 빈 체제의 취지와 어긋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한 발 더 나아가 신성 동맹을 주도한 자칭 '빈 체제의 수호자' 러시아가 그리스 독립 전쟁을 오스만을 약화시켜 지중해로 남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영국과 프랑스에 동조해 그리스 독립군을 지원하는 골때리는 상황이 벌어져, 결국 그리스는 3개국 열강의 지원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한다는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해 공동의 취지를 깨뜨린 행태에 빈 체제의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러시아는 그리스에서 잠시 일탈(?)한 이후 다시 '빈 체제의 수호자' 자리에 복귀해 자유주의, 민족주의 세력을 열심히 때려잡았다. 빈 체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1848년 혁명 당시에도 러시아는 헝가리를 위시로 한 소수민족들의 독립 선언으로 와해 직전까지 내몰렸던 오스트리아를 도와 혁명을 진압하는데 크게 도움을 줬을 정도였다.

한편 반동주의적 행태와는 별개로 러시아는 계속해서 남진을 시도하며 오스만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오스만 내 정교회의 보호권을 내세우며 성지팔레스타인(예루살렘) 문제까지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등, 오스만에 대한 팽창 심리를 드러내자 영불은 오스만을 보호하겠다며(...) 크림 전쟁을 터뜨렸다. 러시아는 패전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힘은 영•불의 압력에 더욱 약해졌다.

문제는 러시아가 지난번의 도움도 있고 하니 자기들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던 오스트리아가 자기들 기대와 다르게 종전의 친러정책을 폐기하고 영프 연합군 편을 들면서 다뉴브 공국(몰다비아왈라키아)를 집어 삼키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불은 오스트리아의 야욕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오스트리아의 배신에 분개해 반오스트리아 기조로 전환했다. 그런 오스트리아 역시 러시아와의 관계 파탄으로 우호국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프랑스의 뒤통수로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등의 세력권도 토해내야 했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 왕국과 벌인 보오전쟁에서도 패해 통일 독일에서 배제되어 버렸다. 열강들의 협력을 통한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라는 빈 체제의 목적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열강들 서로가 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같은 독일계 국가이기도 하고 보오전쟁에서 졌음에도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서 관대한 협상을 얻어낸 덕분에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신나게 털릴 때에도 관망하고만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보오전쟁에서 한판 싸운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에 결합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한편 독일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한 비스마르크는 통일이 되면서 존재감이 너무 커져버린 독일에 대한 기존 열강들의 견제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보불전쟁의 굴욕과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완전한 적대국이 되어버린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비스마르크 체제를 주도하였다. 이 비스마르크 체제의 핵심은 바로 독일, 오스트리아가 대타협을 통해 이중제국으로 재편된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러시아, 세 나라가 동맹을 이루는 삼제동맹이었다. 이를 통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완벽하게 고립시키고 자국의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이 엇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이 유럽의 인정을 받은 자신들만의 완전한 독립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은 다른 피지배 민족들에게 우리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이는 열강들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 민족들이 많은 중동부 유럽 일대에서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에 경도된 수많은 민족들이 투쟁을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통일 국가인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기존의 열강들이 게임 중이던 게임판에 새로운 플레이어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 민족주의가 유럽 대륙에서 가장 들끓던 지역이 바로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오스만 제국이 다스리고 있던 발칸 반도였다.

비록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크게 깨졌지만, 그렇다고 남진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림 전쟁 이후 오스만이 쇠락하고 있다는 게 명백해지자 이번에는 민족주의를 살짝 변형시킨 범슬라브주의라는 새로운 무기로 오스만을 토막내려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이용한 남진 시도로 앞장세운 첨병이 바로 세르비아였다.

세르비아가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오스만 치하 발칸 반도 전역에서 소수민족들의 소요가 잇다르자 소수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을 강력하게 탄압한 오스만을 두고 187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오스만에게 선빵을 날린 것으로, 곧이어 이들을 지원한 러시아가 오스만에게 선전포고를 해서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를 거두면서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드디어 러시아는 발칸 반도를 세력권에 넣고 남진의 숙원을 이룰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러시아가 잘 되는 꼴을 못 본 다른 열강들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나섰으니, 그 결과가 1878년의 베를린 회의다. 특히 산 스테파노 조약 결과에 기겁한 영국[4]이 가장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나섰고, 중립을 표방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시 러시아의 남진에 태클을 걸고 나서 독일 제국의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동맹국의 일원들인 양국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중재는 독일이 맡게 되었다.(회의장소가 비스마르크의 집무실이었다)

중재의 댓가로 영국에는 키프로스가 할양되었고,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할권에 두기로 결정했다.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에게 돌아가는 영토도 줄어들었으며, 불가리아는 사실상 독립을 이룬 친 러시아 국가에서 다시 튀르크의 보호국(즉, 반자치)으로 돌아가며 영토가 거의 1/3로 축소되었다. 한편 마케도니아와 동루멜리아(오늘날 불가리아 동남부)가 오스만 제국의 관할로 돌아갔다. 그리스 역시 테살리아를 얻으며 이득을 챙겼다. 막대한 이득을 눈 앞에서 놓쳐버린 러시아는 중재랍시고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만 들어준 독일에 분노하여 3제 동맹에서 탈퇴했지만 오히려 자기가 고립되어 버린 현실을 깨닫고 다시 3제 동맹을 복구시켰다.

이후 세르비아는 1882년 왕국을 선포하며 완벽하게 독립했고, 1885년 불가리아는 베를린 회의에서 초기 영토에 맞먹는 크기의 동루멜리아를 합병하는 등 오스만의 세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당분간은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다.


3. 삼국 동맹삼국 협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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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러시아 제국이 만든 삼국 협상 포스터
1896년 1월 25일 ,프랑스 언론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이 만든 삼국 동맹 삽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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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유럽의 군사 동맹 관계[6]

그런데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로 유럽 전역의 어그로를 끈 상태에서 더 이상 팽창을 추구하면 독일의 국체가 위험해진다고 판단하여 주변 열강들과 친선을 유지하면서 현상 유지를 선호한 것과 달리, 새로 황제로 즉위한 빌헬름 2세지금의 독일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면서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했다. 때문에 러시아와 최대한의 친선을 유지하려 했던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러시아와 손을 끊으며 비스마르크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린 후 새로운 파트너로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삼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고립된 러시아는 원래 비스마르크가 보불전쟁 이래 고립시켜두려 했던 프랑스와 손을 잡게 된다(1887년 러불동맹). 러시아와 프랑스가 손을 잡으면서 양면전쟁이라는 현실이 독일에 닥치게 되었지만 빌헬름 2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확충하고 제국주의의 첨병인 해군을 대규모로 육성하는 등 당시 해군 최강국이자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자리를 넘보려고 하였다. 이는 영국의 입장에서는 도발로 받아들여져, 영국은 점차 독일을 중립국이 아닌 잠재적 적국으로 보게 되었다. 1904년, 영국프랑스의 해묵은 감정을 잊고 영불협상이 맺어졌다. 이어서 러일전쟁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몰락하면서, 영국의 관심은 러시아보다 독일 견제에 집중되게 된다. 그래서 뒤늦었지만, 영-러의 영러협상1907년 체결되면서 삼국 동맹에 맞선 열강의 또다른 축인 삼국 협상이 결성되었다.


3.1. 발칸 전쟁[편집]


한편 한동안 잠잠했던 발칸 반도에서 다시 위기가 터지게 되는데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틈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를 1908년 러시아 제국의 사전양해를 얻어 완전 합병한 것이었다.[7] 그러자(세계1차대전쟁) 발칸 반도에서 남(유고)슬라브족 통합운동을 주도하던 세르비아 왕국은 이 안건이 확정되자 격렬하게 반발했다. 또 같은해에 불가리아 역시 오스만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히 독립을 선언했으며, 여기에 더해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위해 알바니아 지역을 노리던 세르비아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헝제국이 알바니아 왕국의 독립을 지원하자(1911년 이후 - 알바니아 독립전쟁) 세르비아의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뚜껑이 열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원으로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서로 접촉하였고, 여기에 세르비아 2중대였던 몬테네그로 왕국그리스 왕국이 가담한 발칸 동맹이 성립했다. 그러나 발칸 동맹 국가들은 러시아 제국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는 데 더 몰두하게 된다. 발칸 동맹의 주도국가인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모두 팽창정책을 추구했지만, 오헝제국으로부터 땅을 뜯어내기에는 아직 오스트리아가 강력했으니 그나마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오스만 제국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 이것이 제1차 발칸 전쟁(1912년 가을 ~1913년 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썩어도 준치라고 약소국들의 모임인 발칸 동맹보다 체급이 훨씬 더 큰 오스만이 승리를 거둘 거라는 열강들의 예상을 깨고 발칸 동맹이 압승을 거둬 에노스-미디아 선 서쪽의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

일은 여기서 더 커진다. 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떡실신시킨 발칸 동맹 국가들이었지만, 이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뜯어낸 영토를 어떻게 나눠 가질지 싸우게 되었다.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 지역을 점령한 세르비아였으나 세르비아의 아드리아 해 진출을 두고볼 수 없었던 오헝제국과 이탈리아의 개입으로 알바니아가 독립하면서 그나마 먹은 북마케도니아의 절반을 원래 주기로 되어 있었던 불가리아한테 주는 것을 거부하고, 불가리아 왕국은 불가리아 왕국대로 자신의 몫(산 스테파노 조약 당시의 마케도니아)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과하게 요구하면서 나머지 발칸 동맹 국가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이다.

결국 불가리아가 용감하게 세르비아에게 선빵을 치면서 다시 1913년 여름에 전쟁이 터지는데 이를 제2차 발칸 전쟁이라 한다. 그러나 발칸 동맹 소속이었던 그리스 왕국몬테네그로 왕국이 세르비아 편을 들며 참전했고, 여기에 루마니아 왕국도 불가리아와 영토 분쟁을 벌이던 남도브루자를 노리고 참전하였으며,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일부나마 회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까지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1:5 다굴을 맞으면 제아무리 '발칸의 프로이센'이라도 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 상당수[8]를 토해내게 된다.

물론 불가리아는 잡았으나, 발칸 반도의 친 러시아 통합 세력을 탄생 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배후를 위협하려 했던 러시아 제국의 대전략은 그야말로 엿 먹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것들이 힘 합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견제하랬더니 자기들끼리 피 터지게 싸운 뒤 서로 원수 지간이 됐으니...

이 분위기 속에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세르비아로의 통합을 열망하였고, 자국의 안정을 위하여 작게는 통합 정책, 크게는 제국 내 소수민족 전체가 동등한 주권을 가지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그리고 있었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독립을 실패하도록 유화 정책을 내세운 적의 수괴나 다름 없었다. 결국 발칸 전쟁이 끝난지 한해가 채 못 되어 보스니아 시찰에 나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물론 사라예보의 암살 자체가 기막힌 우연이었고, 그 이후 전 유럽 적 전면전으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우연이 많이 작용했지만, 결국 "유럽의 화약고" 발칸에서 비롯된 세계 대전은 이미 2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셈이다.

하지만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라예보 사건으로 문제가 촉발된 것과 그렇지 않은것은 분명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발언권이 매우 높았던 오스트리아 황위 후계자였는데 그는 지나친 친독 정책 및 러불에 대한 적대정책을 반대하고 발칸 반도 문제를 전쟁보다는 협상으로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하였다. 만일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사망하지 않고 다른 문제로 열강들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였다면 발언권이 높았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지킬수도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현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오래 존속했다면 역시 똑같이 동유럽으로부터 촉발된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대로 보더라도 2022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사실 역사적 배경까지 깊게 파면 중부-동유럽과 발칸 반도를 장악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빼놓고 얘기할수가 없다.


4. 정말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이 1차 대전을 불러온 것인가?[편집]


7월 위기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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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합스부르크는 헝가리의 야노시 왕가를 혼인 동맹으로 흡수한 뒤로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일부였던 슬로바키아(상헝가리, 상마자르 Upper Hungary) 공국은 일종의 완충지대였는데, 합스부르크 군주국령이었다가 2차 빈 공방전 당시 빼앗긴 상태였다. 이걸 1699년 회복한 것. 이 당시 헝가리는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를 수도로 하는 합스부르크 휘하의 헝가리 왕국과 구 수도 부다(오늘날의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그리고 왈라키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공국 등의 오스만 제국의 속국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91px-Central_europe_1683.png 1526년 러요시 2세의 전사로 오스만에게 반독립국으로 망했었던 구 헝가리-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 왕국 지역은 이로써 다시 단일 지배자 아래에 놓이게 된다.[2] 베네치아 공화국크레타를 잃은 대신 달마티아 등을 얻어냈다.[3] 되려 메테르니히의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무너진 베네치아 공화국을 접수했고, 프랑스의 탈레랑을 끌여들여 러시아/프로이센의 팽창에 뒤통수만 때렸다. 빈 회의 항목 참조. 하긴 뭐 러시아도 스위스를 조각내자는 오스트리아의 발상에 반대했다지만.[4] 영국은 크림 전쟁 이래 러시아의 전방향의 남하를 경계하고 있었고, 전 세계 곳곳에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일종의 냉전을 치루며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거문도 사건과 뒤이은 영일동맹이 있다.[5] 출처[6] 초록색이 3국 협상, 연한 갈색이 3국 동맹, 연한 초록색이 러시아의 동맹국[7] 보스니아는 관할권 기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일한 "아시아"라며 천대받았다. 일종의 외곽 영토였던 셈.[8] 특히 이스탄불 코앞의 동트라키아(오늘날의 "유럽 터키"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