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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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6차
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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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병행하지 않고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에 의해 별도로 시행한 보궐선거이므로 편의상 보궐선거로 분류함.
**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독려 공익광고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

투표율
57.2%▼ 6.7%p
선거 결과
파일: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svg


한나라당 133석 (48.71%)


(42.12%) 115석 새천년민주당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총합
비율
[[한나라당|

한나라당
]]
112석
21석
133석
48.71%

96석
19석
12석
5석
[[민주국민당(2000년)|
민주국민당
]]
1석
1석
2석
0.73%
[[희망의한국신당|
희망의한국신당
]]
1석
0석
1석
0.36%
[[무소속|
무소속
]]
5석
-
5석
1.83%
1. 개요
2. 배경
2.1.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
3. 개표 결과
3.1. 지역별 결과 분석
3.2. 정당별 결과 분석
3.3. 문세표의 전설 - 초, 초, 초박빙선거
3.4. 아슬아슬한 여소야대 - 50:50 국회
4. 여담
4.1. 출구조사 大실패
4.2. 낙천 운동
5. 국회의원 목록
6.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KBS가 정리한 영상.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20세기 마지막 총선이다. 투표율은 57.2%였다.[1]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였으며, 비례대표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것의 합산으로 결정했다. 법률에 따른 공식명칭은 '비례대표'였지만, 실상은 15대 총선에서의 전국구를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2] 이 때문에, 이 시기의 비례대표를 그냥 전국구로 칭하는 일도 잦은 편이다. 참고로 본 선거는 민주당계 정당이 여당으로 치른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이기도 하다. 또한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2년 만에 치뤘졌다는 점에서 중간선거적 선거이기도 했다.

2. 배경[편집]


의원 정수는 273명[3]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해 26명이 줄었다. 비례(전국구) 의석 수를 동수로 유지한 채 지역구 의석 수만 26석 줄였다. 현재, 제6공화국 역사상 의원 정수가 줄어들었던 유일한 경우인데, 이는 1997년 외환 위기 여파로 전 국가적으로 고통 분담을 하는데 국회 역시 몸집을 줄이고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막아야한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출마 정당은 연립 여당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야당한나라당, 민주국민당, 민주노동당, 청년진보당(사회당의 전신), 희망의한국신당 등이 참여했다.

참고로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던 시기라, 여야의 승패를 분석해보려면 두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를 합산해서 봐야 한다. 다만, 이 선거에서는 양당 후보간 선거 연대는 없었다.

2.1.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편집]


선거 3일 전인 2000년 4월 10일에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발표돼 선거에 미칠 영향을 두고 정치권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박재규통일부장관은 총선 직전이니 신중해야 한다며 "총선 이후 발표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 실세였던 박지원문화관광부장관이 "이것으로 총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발표를 종용했다고 한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선 '총선용 신북풍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쏘아붙였다.

이 같은 정치권의 기대 또는 우려와 달리 정상회담 개최 발표가 총선 판세에 미친 영향은 없었다고 한다. ,

남북 정상회담 자체에 대한 여론은 압도적 찬성 또는 지지였던것 같다. 당시 KBS 여론조사에서 정상회담 개최가 바람직하다 81%, 남북관계 좋아질것 58%, 이산가족 상봉이 쉬워질것 80%, 경제교류 늘어날것 79%, 햇볕정책 찬성 61%, 회담으로 통일이 더 빨리 다가올것 53% 등이었다.

다만,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33%의 국민이 국내 정치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응답한 반면, 48%는 그렇지 않다고 답해 남북 정상회담을 국내 정치와는 별개로 생각하는 견해가 많았다.

3. 개표 결과[편집]



3.1. 지역별 결과 분석[편집]


파일: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결과.svg}}}
제16대 총선의 지역구 결과 지도
당시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새천년민주당(청록)과 자유민주연합(녹색)이 색상이 비슷해, 초록색(여권)과 파란색(야권)의 대립구도가 펼쳐졌다. 군소 정당인 민주국민당희망의한국신당의 상징색이 거의 비슷한데, 강원도 춘천시가 민주국민당, 충청남도 서해안이 희망의한국신당이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민주국민당
희망의한국신당
무소속, 기타
합계
서울
17
28
0
0
0
0
45
인천
5
6
0
0
0
0
11
경기
18
22
1
0
0
0
41
강원
3
5
0
1
0
0
9
대전
1
2
3
0
0
0
6
충남
0
4
6
0
1
0
11
충북
3
2
2
0
0
0
7
광주
0
5
0
0
0
1
6
전남
0
11
0
0
0
2
13
전북
0
9
0
0
0
1
10
부산
17
0
0
0
0
0
17
대구
11
0
0
0
0
0
11
울산
4
0
0
0
0
1
5
경남
16
0
0
0
0
0
16
경북
16
0
0
0
0
0
16
제주
1
2
0
0
0
0
3
지역구
112
96
12
1
1
5
227
비례
21
19
5
1
0
-[4]
46
총합
133
115
17
2
1
5
273

비례대표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7,365,359
39.0%
21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0,625
35.9%
19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859,331
9.8%
5

[[민주국민당(2000년)|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글씨.svg
]]

695,423
3.7%
1

파일:희망의한국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77,498
0.4%
0

[[민주공화당(1997년)|
]]

3,950
0.02%
0

[[민주노동당|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

223,261
1.2%
0

파일:청년진보당 글자.svg

125,082
0.7%
0

[[무소속|
무소속
]]

1,774,221
9.4%
-
총합
18,904,740
100%
46

3.2. 정당별 결과 분석[편집]


무소속 당선인들의 복당이 가능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5]
여권 135석[6]
야권 138석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민주국민당
희망의한국신당
118석
17석
135석
2석
1석

  • 새천년민주당
여당인 새천년민주당피닉제이인제 선대위원장 체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제주, 호남에서 충청, 수도권을 거쳐 강원까지 이른바 "S자 노선" 전국 정당을 꿈꾸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전략이 어느 정도 들어맞으며 의석수가 늘어나 호남 석권과 함께 수도권과 강원, 제주에서 1당을 차지했고[7] 충청권에서도 상당수의 의석을 확보한다. 하지만 영남권을 공략하는 데 실패하고[8],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과의 선거 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20여개 선거구를 어부지리격으로 내주며 과반 확보에는 실패하고 만다.[9] 수도권도 제1당 달성에는 성공했지만 경기와 인천에선 경합 우세 정도 수준이라 당초 기대치보단 못한 결과였다.[10]

  • 자유민주연합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은 텃밭인 충청도에서 기대보다 부실한 성적을 낸다. TK와 강원도에서 크게 선전하고 충청을 석권하며 무려 50석을 기록한 15대 총선 의석의 1/3 토막난 결과였다. 세부 내용을 보면 반민주자유당민주당 정서를 자극하여 15대 총선 당시 TK 의석을 상당히 차지했지만 16대 들어선 DJP연합 등의 여파[11]로 TK를 비롯한 비충청권 보수 유권자들은 자민련 대신 한나라당에 다시 몰표를 던지게 되었고, 충청권도 당시 충청 출신인 이인제 선대위원장을 내세운 새천년민주당에 상당수 의석을 뺏기게 된다.[12] 특히 충청북도는 한나라당3, 민주당2, 자유민주연합2의 구도로 바뀌면서 이후 본격적인 캐스팅보터 지역으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애초에 충북 지역은 이주민이 많아 과거부터 충남보다 충청계 지역정당세가 약한 지역이었다.[13]

  • 한나라당
한나라당영남 지역을 제외하곤 (충북을 충청도로 합칠시) 어느 지역에서도 제1당이 되지 못했지만, 여권 분열 등에 힘입은 수도권 접전 지역 선방과 인구수가 풍부한 영남 텃밭의 몰아주기로 의석을 쓸어담으며[14] 과반에서 4석 모자라는 133석으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영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 기반의 1당이란 점에서 전국적 지지세가 약했다는 한계점이 뚜렷했는데, 그도 그럴것이 영남에서는 사실상 전석을 모두 쓸어담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65석 중에서 64석을 쓸어담았는데 굳이 '사실상 전석'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그 나머지 1석이 울산 동구의 정몽준이었기 때문. 당시 울산과 현대가의 끈끈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 쪽은 거의 예외로 떼놓고 봐야 할 수준이었고, 한나라당은 아예 이 지역에 후보를 공천하지도 않았다. 즉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후보를 낸 지역에서는 100% 전석을 쓸어담았고, 울산 동구를 비율에 포함시켜도 의석확보율 98.5%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찍었다.[15]

  • 군소 정당
한나라당 낙천 현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국민당은 제법 거물들이 많아 기대를 모았으나, 막상 결과는 지역구전국구에서 1석씩 밖에 못건지며 대패하였다. 반면 한때 김종필의 가신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해 희망의한국신당을 만든 김용환 후보는 보령시-서천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김용환 후보가 허화평과 손을 잡았지만, 사실상 선거에 홀로 나와 홀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거물들이 대거 낙마한 민주국민당을 생각하면 저비용 고효율의 극치를 보여준 셈이었다. 이후 민국당은 한나라당 대신 여권에 협조하고, 김용환 전 의원은 당을 해체한 후 이듬해인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선거 직전인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당초에 창원과 울산에서 의석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되었고 실제 출구조사 결과에서도 2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막상 투표함을 까보니 두 곳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이기는 바람에 원내정당의 꿈이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청년진보당은 비례득표에선 마찬가지로 저조했지만 지역구 득표에선 서울 전 지역구에 출마한 젊은 후보를 중심으로 진보정당 치고는 만만찮은 2~5%의 득표를 올렸으나,[16] 이후 선거에서 진보 정당 포지션을 민주노동당에 빼앗겨 사실상 듣보잡화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정리하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기대치엔 못미친 선방[17], 한나라당의 약진, 자유민주연합교섭단체 달성 실패 정도로 요약되며, 선거는 백중세였지만[18] 그래도 당만으로 따지자면 제1당을 차지한 한나라당이 최대 승리자라고 간주되었다.
참고로 이때 노무현 후보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종로구 대신 부산광역시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다만 이런 그의 모습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되고, 이런저런 여파가 겹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보수 텃밭이 된 PK 지역은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TK 대비 보수세가 약화된다. 한편, 재미있게도 이때 영남에서 비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된 유일한 사람이 울산에서 당선된 정몽준 후보였다.

3.3. 문세표의 전설 - 초, 초, 초박빙선거[편집]


1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보여준 초접전의 본좌급을 보여준 총선이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0%E6%B1%E2_%B1%A4%C1%D6.png
- 경기도 광주군[19](한나라당 박혁규 vs 새천년민주당 문학진) 3표차(0.006%p차!)[20]

문학진 전 의원의 별명을 문세표가 되게 한 이 선거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길이 남았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Screenshot_2016-11-09-20-55-13-1.png
- 서울 동대문구 을 11표차(0.014%p차)(한나라당 김영구 34,796표 vs 새천년민주당 허인회 34,785표)

다만 동대문구 을은 위장 전입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줬다고 판단되어 선거 자체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양 후보가 모두 위장 전입을 한 것으로 밝혀져 그 숫자 차이가 표차보다 많다는 이유였다. 당선 무효가 아니라 선거 무효이므로, 재판부는 의원직을 상실한 김영구 의원의 재출마도 가능했었다고 해석했으나, # 김영구 전 의원은 나오지 못했고, 허인회 후보만 재도전 했다. 그 때 치러진 재보선에서의 당선자가 바로 한나라당의 홍준표다. 결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허인회 후보가 또 설욕전을 펼쳤으나, 홍준표가 1.5%p 차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된다.

파일:청원군2000.jpg
- 충북 청원군 16표차(0.03%p차)(한나라당 신경식 vs 민주당 정종택[21] vs 자민련 오효진)[22]

15대 총선에서도 신경식 vs 오효진 두 후보가 맞붙어 375표(0.66%p)차로 신경식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16대에는 이보다 더한 접전이 벌어졌다. 출구조사에서는 정종택 후보가 경합우세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실제로는 3위에 그쳤고, 불과 16표 차이로 신경식 후보가 4선에 성공했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0%E6%BA%CF_%BA%C0%C8%AD%3F%BF%EF%C1%F8.png
- 경북 봉화군울진군 19표차(0.03%차)(한나라당 김광원 vs 민주당 김중권[23])

여기는 표차도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한나라당의 텃밭 중 텃밭이던 TK 지역이라 더욱 주목을 많이 받았다. 만약 김중권이 20표만 더 받았다면,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타이틀로 당선된 안동시 갑 권오을에 이어 민주당계 정당이 TK에서 의석을 배출할 수 있었다. 또한 영남권에서 승리한 유일한 민주당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다. 김중권의 낙선 이후 TK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당선자는 아래 등장하는 김부겸의 2016년 당선까지 없었다.[24]

김중권 후보는 고향울진군을 중심으로 강한 표몰이를 했지만, 김광원 후보도 동향이었을 뿐더러, 삼척시 산불로 인해 많은 울진군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해 낙선했다는 말이 지역 정가에 오르내렸다. 울진 원자력 발전소를 반대했다가 낙선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 전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BF%EF_%BF%EB%BB%EA.png
- 서울 용산구 113표차(0.12%p차)(설송웅[25] vs 진영[26])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Screenshot_2016-11-09-20-56-00-1.png
- 경남 진해시 115표차(0.18%p차)(한나라당 김학송 vs 무소속 김우석)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BF%EF_%B5%BF%C0%DB%B0%A9.png
- 서울 동작구 갑 146표차(0.16%p차)(서청원 vs 이승엽)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C0%CE%C3%B5_%C1%DF%3F%B5%BF%3F%BF%CB%C1%F8.png
- 인천광역시 중구동구옹진군 193표차(0.27%p차)(한나라당 서상섭 vs 민주당 서정화 vs 자민련 이세영)[27]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0%E6%B1%E2_%B1%BA%C6%F7.png
- 경기 군포시 260표차(0.25%p차)(한나라당 김부겸[28] vs 민주당 유선호) 등이 있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양당 초접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당 초접전 선거구가 제법 나왔다지만, 이 16대 총선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29]

여튼 이 초접전 격돌의 승자는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이 되었다.[30] 결국 선거에는 운도 필요하다. 처음 출구조사에서 불리하게 나올 때만 해도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라는 반응이 나왔지만, 끝까지 가 본 결과 도리어 한나라당에 유리했다. 서울에서만 6곳(상술한 동대문구 을, 동작구 갑, 서대문구 갑, 마포구 갑/[31], 구로구 갑)에서 한나라당이 2% 이하의 격차로 승리했다. 경기도에선 광주군, 안양시 동안구, 광명시, 남양주시, 파주시 6개 지역에서 2%p 미만의 격차로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그러므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이야말로 여야의 승패가 갈린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3.4. 아슬아슬한 여소야대 - 50:50 국회[편집]


16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1당을 차지했으나 새천년민주당이 의석을 불리면서 어느 당도 과반(137석)을 점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호남 지역 무소속을 더하면 민주당은 119석에, 자민련이나 정몽준같은 반 한나라당계 보수가 20석을 구성했으니 그야말로 절묘했다. 이런 배경 속에 전반기 국회는 국민신당 출신의 이만섭새천년민주당(여당) 의원[32]이, 후반기 국회는 야당 한나라당의 박관용 전 의원이 의장직을 맡았다.

15대 국회의 캐스팅보터였던 자민련의 의석이 줄어들면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할 제3당 없이 여야 양당의 협의정치로 대부분의 법안이 처리되었다. 여기에는 '날치기 절대불가'를 역설한 이만섭국회의장의 역할도 컸다. 한 예로 민주당은 개원 이후 자민련 도와주려고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을 법사위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적이 있지만,[33]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거부로 말미암아 무산된 바 있다.

DJP의 사이가 서먹해지면서 무산된 선거공조로 인해 벌어진 충남 진검 승부에서 자민련은 텃밭 의석을 대거 내주며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민주당도 자력으론 과반이 안되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두 당은 다시 화해하며 손을 잡았고, 자민련 총재권한대행 이한동이 전격적으로 국무총리에 지명되면서 DJP공조는 사실상 복원되었다. 그리고 16대 국회 개원 이후에는 민주당과 자민련, 민국당이 모두 힘을 합쳐 이만섭 전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당선시키고, 이한동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참고로 두 건의 표결은 모두 찬성 140(민주당 119석+자민련 17석+민국당 2석+한국신당 1석+정몽준) : 반대 132(한나라당 133석 중 1명 이탈)로 여권의 아슬아슬한 승리로 끝났다.

이런 협력무드의 연장선상에서 급기야 2000년 12월 말엔 민주당에서 자민련에 의원을 꿔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즉, 민주당 의원 중 3명(송석찬, 배기선, 송영진)을 자민련으로 이적시켜 교섭단체 조건인 의원수 20명을 맞추도록 한 것. 그런데 또 자민련 의원 한 명이 이런 꿔주기에 반발해 탈당[34]하면서 교섭단체 조건에서 1석이 미달하게 되자 한명(장재식)을 더 꿔주었다. "꿔줬다"는 표현이 참으로 정확하게도, 2001년 통일부장관 파동으로 양당의 공조가 붕괴되자 이들 네 명의 의원은 민주당으로 다시 복당한다. 어찌되었든 당시 여권은 당분간만이라도 민주당(115석) + 간신히 교섭단체를 구성한 자민련(20석) + 사실상 와해된 민주국민당(2석) + 정몽준 등으로 아슬아슬하게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었다.

그러다 2001년 9월 3일 통일부장관 파동으로 공조가 붕괴되고, 한나라당의 재보궐 선거 승리와 일부 의원들의[35] 한나라당 이적으로 16대 국회 2기(2002년 6월부터)가 시작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 말기에는 한나라당이 140석이 넘는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16대 국회의 마지막 해인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따른 정치적 갈등으로 새천년민주당에서 분당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면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13, 14, 15대 총선에 이어 16대 총선까지 선거 직후 결과는 아슬아슬한 여소야대로 끝났고, 이후로는 반대로 17대(열린우리당)-18대(한나라당)-19대(새누리당)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다. 때문에 16년 뒤인 2016년 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이 총선이 마지막 여소야대를 만든 선거로 남게 된다.

4. 여담[편집]



4.1. 출구조사 大실패[편집]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
정당
파일:KBS 로고(1984-2023).svg - 파일:SBS 로고(1994-2000).svg
파일:MBC 로고(1986-2005).svg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15(K: 104~126/S: 113~119)
120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32(K: 119~138/S: 126~133)
127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7
17

[[민주국민당(2000년)|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글씨.svg
]]

2
3

파일:희망의한국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1
1

[[무소속|
무소속
]]
/기타
6
5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80여곳의 경합 지역구에 한하여 출구조사를 했는데[36][37] 출구조사에서는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대략 120석대 중후반~130석대 초반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연립여당과 합해서 과반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었다.(KBS-SBS 예측: 민주당 132석, 한나라당 115석, 자민련 17석./MBC 예측: 민주당 127석, 한나라당 120석, 자민련 17석.) 다만 여기서도 자민련은 실제 개표결과와 비슷하게 참패하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막상 개표가 중반에 이르면서 새천년민주당 경합우세로 예측되었던 곳이 상당수 뒤집혀지는 바람에 개표 결과는 반대로 한나라당의 원내 1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전체 득표율 예측은 한나라당이 약간 우세한 수준으로 오차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KBS-SBS: 한나라당 38% VS 새천년민주당 37%) 어차피 지역단위에서 많이 빗나간 건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방송사들은 1996년 총선에 이어 또다시 사과방송을 해야했다. 선거 다음 날 뉴스데스크 도중 사과방송.[38]

16대 총선에서 KBS-SBS 예측조사와 실제 당선인이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예측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자) 총 21개 지역. 그 중 14석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39] 굵은 글씨는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뒤집힌 지역이다.


  • 인천광역시
    • 중구·동구·옹진군 : 서정화(새천년민주당)[예측조사]서상섭(한나라당)



  • 충청북도
    • 청원군 : 정종택(새천년민주당)[예측조사]신경식(한나라당)





예측 민주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5곳, 예측 민주 승리/실제 무소속 승리가 2곳, 예측 민노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2곳, 예측 무소속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곳, 예측 한나라 승리/실제 민주 승리가 1곳이다.

16대 총선에서 MBC 예측조사와 실제 당선인이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예측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인) 총 23개 지역. 역시 이 중 13곳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예측 민주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4곳, 예측 한나라 승리/실제 민주 승리가 4곳, 예측 민주 승리/실제 자민련 승리가 1곳, 예측 자민련 승리/실제 민주 승리가 1곳, 예측 민주 승리/실제 무소속 승리가 1곳, 예측 민국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곳, 예측 민노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곳이다.

4.2. 낙천 운동[편집]


'함량 미달 정치인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을 벌인 광범위한 시민단체연합인 '2000년 총선 시민연대'가 처음으로 등장해 힘을 발휘한 선거였다.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안티 조선일보" 운동으로 대표되는 언론개혁 운동과 "깨끗한 정치"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시기의 산물이지만,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이들을 지원해 선거에서 유리하게 활용하게 했다는 식의 비판이 일기도 했으며 게다가 이들 시민단체가 김종필정몽준에게 명예로운 은퇴를 권유한 것도 치명타였다. 결국 이래저래 DJP 공조는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선관위에 의해서 낙천 운동은 불허되었으나, 선거법 개정으로 낙선 운동은 허가되면서 이런 특정 후보 떨어뜨리기 열풍은 4년 뒤인 2004년 17대 총선까지 계속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당신들이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가? 우린 그런 위임을 한 적이 없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反) 총선 시민연대'가 활동하기도 했다.

5. 국회의원 목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6대 국회의원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관련 항목[편집]


[1]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52.7%)에 이어 연속으로 50%대 투표율이 나와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실제 2000년대 치러진 일부 선거들은 투표율이 40%대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등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지만, 그래도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조금씩 회복되었다.[2] 1인 2표제에 따른 비례대표제는 다음 총선인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실시되었다.[3] 지역구 227명, 비례 46명.[4] 1인 1표제이므로 무소속은 비례대표에서 사표가 됨.[5] 무소속의 경우 민주계 3석, 보수계 2석.[6] 당시 자유민주연합은 새천년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꾸렸다.[7] 참고로 이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획득한 강원도 의석 수(5석/9석)는 현재까지도 민주당계 정당의 총선 최고 기록이다. 이후엔 한나라-무-새누리-통합-국힘이 계속 강원도 1당을 차지하고 있다.[8] 현재 부울경이 대경권보다 민주당세가 다소 강했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대경권이나 부울경 모두 험지 중 험지였다. 그나마 이중에서 선방을 한 후보가 TK권에서 고작 19표(!) 차이로 진 김중권북구·강서구 을에 출마해서 35.7%를 받고 낙선한 노무현 정도가 있다, 참고로 후자는 2년 뒤 대통령이 되고, 대한민국의 정치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9] 단순 산술적 계산만 따져보면 선거 공조 무산으로 서울 6석, 인천 3석, 경기 11석, 충북 3석, 경북 2석, 강원 1석해서 무려 26석을 날렸다. 물론 선거 공조를 한다고 무조건 시너지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선거 공조에 성공했으면 공동 여당이 아무리 못해도 과반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실제로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득표율을 합하면 45.7%로 한나라당을 6.7% 정도 따돌리는 수준인데 이 정도면 상당한 의석 격차를 벌려나갈 수 있는 수치다.[10] 경기도 41석 출구조사 중 빗나간 의석이 8석이나 되었다.[11] 15대 총선 당시 TK 지역에서 상당수의 의석을 자민련에게 내준 한나라당(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은 15대 대선을 앞두고 TK지역의 보수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박정희의 둘째 딸인 박근혜를 영입했다. 비록 15대 대선에서는 패했으나, TK 지역의 보수층은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후 부터 TK 지역은 완전히 한나라당 지지로 굳어졌다. 반면, 자유민주연합은 15대 총선 당시 TK 지역에서 보수층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DJP연합 체결 직후부터 TK 지역 보수층들은 자민련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게다가, TK 지역 일부 의원들이 아예 자유민주연합에서 탈당하여 한나라당으로 넘어갔고, 이 사건은 TK지역 보수층에서 DJP연합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는걸 보여준 증표였다. # 그리고, 이후 부터 TK지역에서는 자민련이라는 간판의 메리트가 사라지게 되었다.[12] 1999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전부터 주장해온 내각제 개헌에 대해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유민주연합의 충청권 정세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총선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13] 당장 멀리갈 것 없이, 13대 대선 때 김종필은 충청북도에서 2위도 아닌 3위로 고배를 마셨고, 당시 1-2위를 차지한 후보는 보수 정당의 노태우-김영삼이었다.[14] 당시만 해도 TK권과 PK권 모두 정치성향이 비슷했다. 실제로 112석 중 자그마치 64석이 영남권 의석이였다.[15]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선거때마다 민주당에 90% 이상의 득표를 몰아주던 전라도 지역을 싸잡아 북괴 공산당이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경우가 잦았는데, 정작 영남쪽 총선 결과가 저렇게 나온 이후로는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니들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란 식으로 역공을 당하는 웃픈 일도 있었다.[16] 일부 지역은 자유민주연합을 달고 나온 군소후보나 민주노동당 후보를 앞서기도 했다.[17] 의석수를 늘렸고 전국정당화도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과반과 제1당 달성은 실패했다.[18]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친여권 성향 무소속까지 합치면 범여권 의석이 과반을 간신히 넘겼다. 그래서 후술되어있듯 전반기 국회의장도 새천년민주당이 가져갔다.[19] 2001년에 로 승격되었다.[20] 중간 판결에선 2표차로도 나와서 "문두표"가 되었다가, 결국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3표로 바뀌었다(대신 전체 무효표가 늘어나게 판결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문세표가 맞다.[21] 원래 5공 인사였으나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어 출마했다.[22] 각각 16,795표(28.88%), 15,928표(27.39%), 16,779표(28.85%)를 득표해 신경식 후보가 승리했다.[23] 원래는 5공 유력인사였으나, 김대중의 사면으로 국민의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내고 당시 새천년민주당으로 출마했다.[24] 중간에 민주당으로 당적을 변경한 신국환이 있다.[25]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이자 역사강사 설민석의 부친. 4.19 혁명 당시 중동고등학교 재학생으로 이승만을 만난 시민(학생) 대표 5인 중 한 명. 새천년민주당 소속. 후단협 출신이 되나, 열린우리당에 갔다가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엔 새누리당에 입당해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26] 박근혜 의원 시절 비서실장과 박근혜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으나, 국민연금 문제로 박근혜와 마찰을 일으키고 사이가 멀어져 이후 보복성 공천 탈락까지 당하자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된다. 공교롭게도 앞 각주에 설명한대로 설송웅이 새누리당으로 옮겼으니 이 선거로부터 16년 만에 두 사람의 당적이 엇갈리게 된 셈이었다.[27] 각각 21,724표(30.43%), 20,351표(28.50%), 21,531표(30.16%)를 득표해 서상섭 후보가 승리했다.[28] 훗날 독수리 오형제로 열린우리당으로 옮기게 되며, 16년 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대구광역시 수성구 갑에서 당선되어서 민주화 이후 첫 대경권 소속 민주당계 정당 국회의원이 된다.[29] 참고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최소 표차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의 129표차이다. 정작 초접전이라던 19대 총선의 최소 표차는 고양시 덕양구 갑(現 고양시 갑)의 170표차로 18대보다도 큰 편이다. 20대 총선은 인천광역시 부평구 갑의 26표차, 전라북도 전주시 을의 111표차, 강원도 원주시 갑의 134표차 등이지만, 역시 16대 총선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30] 한나라당: 7승 1패, 새천년민주당: 1승 5패, 자민련: 0승 1패, 무소속(김우석): 0승 1패. 만약 민주당-자민련이 경합지를 얻었더라면 한나라당 126~127 : 138 민주당-자민련으로 과반을 확보했을 것이지만 고작 1석 차이로 한나라당에 밀렸고 5석 차이로 과반에 실패했기에 너무나도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31] 대표적인 접전 지역. 박주천 vs 황수관 박사의 대결 결과 691표차로 석패했는데, 2013년 시점에서는 두 맞수 모두 고인이 되었다.[32] 14대에서 한 번 국회의장을 맡은 적이 있다. 이때는 민주자유당 소속.[33] 이때 법사위 여당측 간사였던 천정배 전 의원이 날치기의 총대를 맸다.[34] 19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강창희 전 의원이다.[35] 강성구, 김윤식, 원유철, 이근진, 전용학, 김원길, 박상규 & 충남권의 김용환, 강창희.[36] MBC와 갤럽이 열흘 전부터 전화 여론조사를 통해 선정한 80여 개 경합 지역구를 선정해 유권자 22만명을 대상으로 출구조사를 실시했다. 나머지는 15대 총선과 동일하게 선거 당일 전화 여론조사로 했다. # 이것은 kbs도 마찬가지. 4개 여론조사기관이 그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모든 지역구 여론조사를 해오고 이중 경합이 치열한 77여개 경합 지역구는 선거 당일 출구조사(하나의 선거구 당 투표소 최대 6개)를 실시해서 신뢰성을 한층 높였다고 한다. # 이런 출구조사는 17대, 18대 총선에서도 경합 지역구에 한하여 출구조사를 했고 전국 모든 지역구를 대상으로 한 출구조사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시행하게 된다.[37] 4년 전인 15대 총선에서도 예측조사는 했지만 이는 출구조사가 아닌 전화조사로 예측한 것이였다. 더 정확하겐 15대 총선 당시 MBC에서 전국 67개 경합 지역구를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현장 출구조사를 했지만, 당시 기준으로 불법이라서 타 방송사의 훼방으로 실패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당일엔 발표되지 않았고, 선거 다음 날 MBC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사가 벌인 출구조사가 정확하다고 홍보할때 공개되었다.[38] 사실 각 지역구마다 출구조사를 하면 표본이 부족해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예 19대 총선의 경우 전국 246개 모든 지역구 단위로 하나의 지역구당 10여개의 투표소에서 출구조사를 했는데도 별 효과를 못봤다.[39] 신기하게도 다음 총선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예측조사] A B 1위였으나, 실제 개표에선 3위로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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