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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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과정
4. 결과



1. 개요[편집]


석가모니 부처 입멸 백 년쯤 뒤인 기원전 383년경 인도의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진 결집으로 결집이 이루어진 장소를 따서 바이샬리 결집 또는 700결집, 700집법이라고도 한다.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샤 장로(耶舍長老, Yasa, Yaśas, Yaśoda, 야사존자)가 당시 바이샬리(毘舍離國, 웨살리)의 밧지뿟따까(Vajjiputtaka, Vṛjiputraka, 跋闍子) 출신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될 소지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열 가지 행위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7백 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로 소집해 그러한 열 가지에 대한 심의를 행하면서 이루어진 경전 결집이다.[1]

이를 계기로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교단 내에서 더욱더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지만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의 차이가 있다.[2] 또한 이 2차 결집을 촉발한 '야사 십사'에 대한 인정 여부를 놓고 상좌부 불교(Sthaviravādins)와 대중부 불교(Mahāsāṃghikas)가 분파되었으며[3], 불교사에서는 이를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부르며 불교의 역사를 다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4] 언급된다. 바이샬리는 인도 동부에 위치하며, 바이샬리의 이른바 '야사 십사'를 비법이라 비판했던 야사 비구 및 고승들은 인도 서부 출신자들이었다.


2. 전개[편집]


당의 승려 현장대당서역기에는 바이샬리에서 동남쪽으로 14~5리 가면 큰 수토파가 있는데, 7백 명의 이름난 승도들이 2차 결집을 행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바이샬리 결집을 촉발시킨 야사십사란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인도 동부 지역의 도시 바이샬리의 승단 및 재가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열 가지 행동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 염사정(鹽事淨, siṅgiloṇa). 그 전날 받은 소금을 비축해 두었다가 식사 때에 쓸 수 있다.[5]
  • 이지정(二指淨, dvaṅgula). 중식을 먹은 뒤에라도 해 그늘이 두 뼘 길이가 될 때까지 먹을 수 있다[6]
  • 수희정(隨喜淨, gāmantara).[7] 밥을 먹은 뒤에라도 다시 또 먹을 수 있다.[8]
  • 도행정(道行淨, āvāsa).[9] 이미 도량에서 식사를 했더라도 도량 즉 사원 밖에서라면 다시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10]
  • 낙장정(酪漿淨, amathita).[11] 소유(酥油)[12]나 꿀, 석밀(石蜜) 등을 우유에 타 두고, 밥을 먹지 않을 때 요구르트처럼 먹을 수 있다.
  • 치병정(治病淨, jalogipātum).[13]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사루가주[14]는 마실 수 있다.
  • 좌구정(坐具淨, adasakaṃ nisīdanam).[15] 비구의 체구에 따라 좌구, 즉 방석의 크기를 조정할 수 있다.
  • 구사정(舊事淨, āciṇṇa).[16] 그 이전 사람이 하던 일을 따라 하면 율에 위반되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일종의 관행 내지 관습법.
  • 고성정(高聲淨, anumati).[17] 따로 갈마법을 짓고 나중에 와서 억지로 다른 이의 용서를 구한다. [18]
  • 금보정(金寶淨, jātarūparajata).[19] 금, 은 및 돈(화폐) 등을 보시받을 수 있다.[20]

이들 열 가지 항목은 바이샬리에서는 정법(淨法)으로 통용되었다. 여기서 '정법'이란 법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행한다고 해서 특별히 비법(非法)으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 '관행'을 말한다.[21] 석가모니 부처는 이미 생전에 풍속이 다른 지역 사람들이 불문에 귀의하고자 할 경우 그들이 행해오던 전통과 관습을 특별히 불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거의 따라도 좋다고 했고, 수많은 관행들이 '정법'이란 이름으로 수용되었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석가모니 부처 당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변화상들이 두드러지고, 그것이 표면화된 것이다.

야사십사 가운데 여섯 가지가 음식과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불교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아무 거나 먹으면 되지 무슨 쓸데없는 거 가지고 불교도들은 말이 많냐"라고 비웃을 수 있지만, 자세히 들어가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음식과 관련한 문제가 논점이 되는 것은 그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중도'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에 가장 밀접하면서도 가장 까다롭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불교가 그만큼 현실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는 종교라는 반증이 되기 충분한데,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며 기본적인 욕구가 생존이고 그 생존에 직결되는 것이 바로 '먹는 문제'이다. [22][23]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도외시할 수 없고, 동시에 성욕처럼 지나치게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욕구인 식욕을 불교에서는 일단 1) 음식의 맛에 대해서는 맛이 있고 없고를 따지며 천착하지 말고, 2) 굳이 내가 먹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생명을 일부러 빼앗아서도 안 되고 3) 음식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되 그렇다고 음식을 지나치게 멀리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해칠 정도의 고행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집착을 지어서는[24] 안 된다는[25] 기본 지침을 세웠다.

십사 중 가장 크게 문제시된 항목은 각염정(소금 쟁여두기)과 금은정(돈을 보시받기)이었다. 소금은 고대에는 화폐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했던 물건이므로[26][27] 각염정의 본질 역시 금보정과 같은 화폐의 문제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는데, 석가모니 부처 당시는 화폐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율장에 화폐에 대한 뚜렷한 언급이 없다는 게 논란거리가 된 것이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바이샬리는 인도에서도 일찍부터 화폐 경제가 활발하게 발달한 곳이었다. 석가모니 부처 입멸 후 100년이 지나면서 화폐경제가 발달하자 동쪽 교단에서는 소금을 쟁여두거나 금은 혹은 화폐를 보시받는 것을 정법, 즉 관행으로 수용한 것이다.#

야샤 장로가 바이샬리에서 본 것은 포살법회 날 비구들이 법회에 모인 대중들 한가운데 물을 가득 채운 바리때를 놓아 두고 “1까하빠나(Kahāpaṇa)[28]라도 좋고, 반(半) 까하빠나라도 좋아요. 혹은 1 빠다(pa?a)라도 좋고, 반 빠다라도 좋습니다. 승가에 보시해 주십시오. 승가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사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라고 요구하고 대중들이 거기에 돈을 던져넣는, 야샤 장로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모습이었다.[29] 이제까지 승단의 비구들은 신도들에게 옷이나 음식만을 공양으로 받아 왔다. 석가모니 부처 당시에는 활성화되지 않았던 화폐 즉 이 널리 사용되고 퍼지자 불교 승단이 이를 수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지 이견이 생긴 것이다.[30]

보수적인 관점을 견지한 야사 장로는 당연히 "이건 계율 위반이다! 부처님께서 어디 금은을 받으라고 하셨냐! 출가한 사문이 재물을 손에 쥐다니?" 하고 주장했고, 더 이상 돈을 주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외쳤다. 이에 동방 교단은 "부처님이 금은을 받지 말라고 하셨지, 돈을 받지 말라고 하신 건 아니었잖아? 그리고 우리가 해오던 대로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잘 해왔는데, 당신이 왜 이래라 저래라야?" 하고 반박했다. 나아가 동쪽 교단의 승려들은 이를 정법(관행)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야사 장로에게 하의갈마(下意羯磨, paṭisāraṇiyakamma)[31]를 하라고 요구했다.

야샤 장로는 하의갈마를 하기는 했는데, 대상은 동방교단 비구들이 아니라 신도들에 대해서였다. 야샤 장로는 신도들을 모욕한 것을 사과하면서도 여전히 '비구는 어떠한 구실로서도 금이나 은을 받을 수 없다.'는 관점을 고수했다. 야사의 말에 설득된 신도들이 바이샬리 비구들을 나쁜 비구로 취급하자, 바이샬리 비구들은 야샤가 위임장도 없이 설법한 것이 계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에게 성직정지(聖職停止, ukkhepamiyakamma)의 벌을 내렸다.[32] 서로가 서로에게 한 대씩 주고 받은 셈.

야사 장로는 까우샴비로 피신해 서방교단인 빠테야(Pāṭheyya, 서인도), 아반띠(Avanti), 데칸(Deccan) 지방 비구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옹호해 줄 것과 동방교단 비구들이 10사, 즉 열 가지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함으로써 정율(正律)이 위협당하고 있으니 이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문제는 동쪽과 서쪽 교단의 갈등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33]

3. 과정[편집]


바이샬리에서 열 가지 관행들을 보고 기겁해 교단에 알리고 문제를 제기한 비구 야사는 당시 나이가 백 살이 넘었고,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아난다의 제자로서(생전의 부처를 직접 접견한 적이 있다고도 한다) 원래는 브라만이었다가 불문에 귀의한 사람이었다.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지는 열 가지 일들은 '정법'으로 통용될 수 없고 '비법'이라고 여겨 야사 비구는 곧장 서방 교단에 알려 고승들을 바이샬리로 모았다.[34] 바이샬리 비구들 이외에 최근에 불교를 받아들인 지역[35] 출신의 고승을 포함하여 전통적 계율을 지키는 다른 지역의 고승들도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때 모인 고승의 수가 7백 명이었다.[36] 삼보가는 대중 속에서 가사의 오른쪽 어깨를 벗고[37] 장체[38]한 다음 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러분, 떠드는 것을 삼갑시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봅시다. 옛날 적멸하신 이래 세월은 흘렀습니다만 그 말씀은 지금 오히려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이샬리 성의 태만한 비크슈는 계율을 어겨 범하고 십사의 비법[39]

을 행하며 십력(여래의 가르침)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이제 현자 여러분은 계를 지키는 것과 범하는 바에 대해 명찰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대덕 아난의 지수를 받은 분들입니다. 아무쪼록 불은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거듭 부처님의 성시를 펴 나가시기 바랍니다.[40]


바이샬리의 열 가지 관행은 정법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결코 야사 비구의 말대로 용납할 수 없고 불법을 저해하는 계율 위반인가,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동쪽 교단과 서쪽 교단은 각기 자파 출신의 장로를 네 명씩 추천해서 여덟 명을 대표로 선임했다. 이들은 바이샬리에서 8개월에 걸쳐 승려 7백 명들과 함께 경전 편찬 회의에 들어갔는데[41] 이들은 만장일치로 '야사가 제기한 바이샬리의 열 가지 일들은 계율(프라티목사)에 어긋나고, 정법이 아닌 비법 즉 잘못된 행위'라고 결정했으며[42] 이를 실행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43]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당시 법랍이 120년에 이르던 최고장로 사르바카마라는 비구는 아홉 가지는 비법인데 구사정 즉 '이전 사람이 하던 일을 따라 하면 그것이 율에 위반되더라도 꼭 죄라고는 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 한다.

4. 결과[편집]


십사 논쟁은 서쪽 교단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미 관행에 익숙해진 승려들은 서쪽 교단의 엄격주의를 두고 '시대를 역행하는 판단'이라고 하며 수용을 거부했다.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비구들이 따로 모여 대중부라는 파를 형성함으로써 승가는 보수 상좌부와 진보 대중부로 분열되었는데, 이 사건을 이후의 여러 분열과 구분하기 위해 '근본분열'이라고 부른다.[44]

서쪽 교단은 본래의 전통 즉 '정통성'을 유지했다고 해서 '상좌부'[45]라고 불렀고, 동쪽 교단은 '보편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중부'라고 하였다. [46]

자현 비구는 근본분열을 설명하며 단순히 계율에 대한 관점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인도라는 광활한 땅에서 '불교'라는 하나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한 데에서 원인을 찾는다. 즉 불교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기후와 민족이 다양하게 분포된 인도를 하나의 원칙으로 유지하기는 불가능해졌으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엄격함을 고수할지 아니면 시대에 맞춰 유연함하게 대응할지 입장차가 생김은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것.[47]

비구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고 또 1, 2차 결집이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불법은 포교 지역이나 포교 대상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재가신자들 위주로 펴 나가야 한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일이다. 승단은 설립 초기부터 승가, 즉 수도승(비구)과 그보다 숫자가 더 많은 재가신자(우바새)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구가 불법의 전파와 정신적 완성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라면 우바새는 가정과 사회를 불교와 연결시키는 사람들로 비구 못지 않은 역할을 한다. 구족계라는 227계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비구와 달리, 재가신자들은 비구 앞에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재가오계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면 그것으로 불자가 되었다. 살생하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은 갖지 말고, 삿된 음행을 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술(혹은 마약)을 마시지 말고, 만약 재가오계를 잘 지키고 삼보에 귀의한다면 그 불자는 팔정도를 따르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 신자들이 특정의식이나 의례를 일상적으로 치르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의 특기사항이다. 그러나 불심이 돈독하고 불교의 전통을 잘 따르는 불자들은 특정 행사일, 유골의 경배식, 불교 성지 순례 때에는 축하행사를 연다.

장식적 효과가 빼어난 돌기둥의 부조는 장식 기능뿐만 아니라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이 부조의 구성, 붓다의 발자국에서 시작하여 삼보와 왕의 일산으로 장식된 법륜으로 마감하는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붓다의 본질과 그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세기부터 나오기 시작한 붓다의 인간적인 이미지보다는 훨씬 먼저 유행한 이런 상징적 표현방식은 대승불교가 처음부터 급속히 교세를 얻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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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8~120쪽


또한 불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이지만, 포교도 전도도 결국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교단의 성직자가 수적인 면에서 재가 신자보다 아무래도 열세일 수밖에 없다. 근본분열을 야기한 야사의 십사 제기는 종교 공동체라는 하나의 사회를 지키고 그들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 이해시킴에 있어서 가르침(법)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상대(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세파에 휩쓸리지 말고 교단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 엄격주의를 넘어선 근본주의에 빠졌다는 점도[48] '시대의 흐름을 읽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쪽도 결국 종교 자체의 세속화를 초래했다는[49] 단점 또한 명확했다.# 결국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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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1쪽[2]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3] 물론 근본분열은 야사십사 외에도 대천오사(大天五事)라는, 아라한의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이의 제기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4] 그리스도교동서대분열과 같은 파급력이다.[5] 붓다 당시에는 탁발에 의존했기 때문에 음식을 보관했다가 먹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탁발을 받은 음식을 먹고 남으면 그냥 버렸다(!)고. 하지만 소금은 상하는 게 아니다보니 다른 건 몰라도 소금만큼은 사실 버리기가 아까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6] 한 마디로 먹기 시작했으면 식사시간 끝났다고 땡 하고 먹던 숟가락 놓고 일어나 수행하러 갈 필요 없이 먹던 건 그냥 다 먹어도 된다는 것. 자현 비구는 이걸 농구버저 비터에 비유했다.[7] 취락간정(聚落間淨)이라고도 한다.[8] 계율상 공양은 정오가 되기 전까지 마쳐야 한다. 즉 시간만 허락된다면 공양을 두 번 해도 되느냐의 의미 [9] 주처정(住處淨)이라고도 한다.[10] 여기서 도량에서 식사를 했다는 말은 승려가 신도들을 모아 법회를 열고 음식 공양을 받았다는 의미로, 도량 바깥에서도 포살 등의 법회를 열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11] 생화합정(生和合淨)이라고도 한다.[12] 소젖이나 양젖을 끓여서 죽통 안에 넣고 표면에 지방이 한층 생기도록 굳힌 것. 버터랑 비슷하다.[13] 수정(水淨)이라고도 한다.[14] 술이 되기 직전 상태의 음료수.[15] 불익루니사단정(不益縷尼師檀淨)이라고도 한다.[16] 구주정(久住淨)이라고도 한다.[17] 수의정(隨意淨)이라고도 한다.[18] 승단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는 모임 등을 갈마(羯磨)라 하는데, 전원 참석을 원칙으로 한다. 즉,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의결한 내용의 유효하냐는 문제[19] 금은정(金銀淨)이라고도 한다.[20]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2쪽[21] 법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무죄라고 할 수 없듯 '비법'이 아닌 관행이라고 해서 올바른 법이라고 허용되고 권장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대중부 율장 <마하승기율>에서는 금은 수납 등을 비롯한 10가지 사항을 역시 비법으로 규정한다. 훗날 대중부로 분파된 이들 사이에서도 해당 10사에 대해 '이거 정말 이대로 해도 괜찮은가?'라는 의문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22] 석가모니 부처 당시나 초기 불교에서 불교의 라이벌적인 존재라고 할 자이나교의 경우는 불교를 두고 "먹을 거 다 먹고 수행은 무슨 수행이냐"라며 불교를 비웃기도 했고,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 본인도 "자발적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악업(까르마)가 쌓이는 것을 덜 수 있다"며 단식으로 순교했다.[23] 음식에 관한 금제를 종교 교리와 직결시키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도 비슷하다. 그리스도교의 칠죄종 가운데에는 폭식(Gluttony) 즉 과도하게 음식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죄악에 해당한다고 명기하고 있다.[24] 불교에서도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자살은 금기시되지만 그 이유는 조금 다른데, 그리스도교가 살인 혹은 자살을 "여호와께서 내려 주신 목숨을 어디 인간 주제에 멋대로 빼앗고 버리고 할 수 있느냐"로 '신에 대한 불경함'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불교는 '그 자신도 하나의 목숨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 역시도 살생의 범주에 든다'고 본다는 점이 다르다. 무언가 자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극복했는지, 그렇지 않고 집착이 남아있는데 현실의 고통을 못 이겨 단지 도피처로 택하는 자살이라면 그건 윤회의 원인이 될 뿐이라는 지적이다. 자발적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철로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았다고 해도 그것이 철로에 쓰러진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지금의 생이 너무 버겁고 괴로워서 죽기 위한 것이었는지 하는 동기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25] 이슬람의 경우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존재하고, 돼지고기가 하람으로 간주되어 무슬림에게는 금기시되지만, 돼지고기 입에 대면 닥치고 사형 이렇게 빡빡하게 적용하지도 않는다. 정말 먹을 게 돼지고기밖에 없는 상황에서 율법 지킨답시고 굶어 죽는 것도 이슬람에서는 알라에게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자살로 간주하며, 차라리 돼지고기라도 먹고 나중에 알라 앞에서 회개하는 게 자살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간주할 정도의 융통성은 이슬람에도 있다. 2005년 10월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대지진으로 무려 7만여 명이 죽었을 때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고 낮에는 음식을 입에 대서는 안 된다며 약을 먹지 않는 환자들이 있었을 때 튀르키예 구조팀이 "당신 그러다가 죽으면 자살이 된다. 이슬람에서 가장 강력히 금지하는 게 자살 아닌가?"라고 달래어 약과 구호식품을 먹게 했다는 실화도 있다. # [26] 샐러리맨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로마 제국에서 소금(샐러리)으로 군인들 월급을 주었던 데서 유래했다는 민간어원설은 너무도 유명하다.[27] 또한 소금의 '맛을 조절할 수 있는 조미료'로써의 역할에 주목하면 "음식에 탐착하지 않는다" 즉 음식의 맛을 가리지 말고 내게 주어지는 대로 달게 먹는다는 탁발의 취지에도 자칫 저촉될 소지가 있다. 탁발받은 음식에 소금을 뿌려 맛을 자율적으로 조절한다는 행위 자체가 '음식의 맛을 가리는' 행위라, 음식의 맛에 탐착하는 행동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28] 고대 인도 화폐 단위.[29] 요즘으로 치면 절이나 교회 안에 ATM기 설치해놓고 공양 기도비나 헌금을 카드로 받는 것을 본 것과 같은 급의 충격이랄까.[30] 실제로 유럽에서는 상좌부 불교 승려가 '비구는 금은을 시주받을 수 없다.'는 계율에 따르느라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 현지 신도가 자기 돈으로 을 사 주고 그걸 빵집 앞에 서 있다가 받아서 갔다는 실화도 있다.[31] 모욕당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참회하는 일종의 회개 의식. 이 경우는 모욕당한 사람들이 바이샬리 신도들이다.[32] 에띠엔 라모뜨 지음, 호진 옮김 <인도불교사>[33]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4쪽[34] 대당서역기에는 야사 비구 외에도 라자그리하(왕사성) 출신 장자로 마투라 국에 살고 있던 삼보가, 한약 국에 살던 장로 레바타, 바이샬리에 살던 장로 살하(파라), 파탈리푸트라에 살고 있던 장로 쿠브자소비타(석가모니 열반 후 아난의 제자가 됨) 등 이름이 언급되는데, 이들은 야사와 마찬가지로 모두 아난 존자의 제자들이었다.[35] 가령 아반티국이나 데칸 고원 지역.[36] 처음에 7백 명 가운데 딱 한 사람이 모자랐으나 파탈리푸트라에 있던 쿠브자소비타가 천안으로써 여러 대현성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신족으로 법회에 참석해 7백 명이 맞춰졌다고 한다.[37] 한역불경에서는 '편단우견'이라고 표현되며, 상대에 대한 경외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석가모니 부처를 향해 이런 자세로 묻는 장면이 상당히 많다.[38] 양 무릎을 땅에 대고 허리를 든 자세[39] 종래에 비법이라 했던 10개조의 행위를 관행이라며 따르려 했던 바이샬리 승도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40] 현장 <대당서역기>권7 바이샬리국(비사리국)조[41] 스리랑카의 역사서 도사(디파밤사) 및 대사(마하밤사, 스리랑카의 왕통사)에 따르면 이 심의 직후에 다시 한 번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모으는 결집 작업을 했다고 한다.[42]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4쪽 및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8~119쪽[43] 다만 팔리 율장에는 십사를 심의하였다는 기록만 있다.[44]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8~119쪽. 이후의 여러 분열은 근본분열과 구분해 '지말분열'이라고 부른다.[45] 상좌부의 '상좌'란 첫째 자리에 앉는다는 의미로, 우리의 종갓집 종손과 같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즉 상좌부는 정통성을 부파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46] 불교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종교인 기독교도 교리의 해석 차이로 보편교회정통교회갈라진 것을 생각하면 흥미롭다.[47]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4~105쪽. 근본분열 이후 교단은 더욱더 다양하게 분열하여, 20부파 이상으로 분열되었다.[48] 하레디이슬람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라 불리는 이들이 왜 세계 사회에서 그렇게 비판받는가를 떠올려보면 쉽다. 석가모니 부처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이런 근본주의를 굉장히 배격한 인물이었고, 이 점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마르코 복음서 2:27)라고 발언했던 예수도 같았다.[49] 2차 결집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주의, 화폐경제가 일상화된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와 금전은 웬만하면 가까이하면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불교나 그리스도교나 금전 문제에 관한 비리는 성적인 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굉장히 큰 문제를 야기하고 해당 종교의 이미지를 저하시키는 해악으로 간주된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