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남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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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작 전쟁
영어: Second Barons' War
파일:Civil_War_in_England.jpg
기간
서기 1263년 ~ 1267년
장소
잉글랜드
원인
헨리 3세의 옥스포드 조례 무효화.
교전국 및 교전세력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의회파 귀족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 3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1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먼드[1]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리처드[2]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3]
파일:800px-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4]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
파일:300px-Arms_of_John_de_Warenne,_6th_Earl_of_Surrey_(d.1304).svg.png 존 드 워렌
파일:Blason_Guillaume_de_Valence.svg.png 윌리엄 드 발랑스
파일:330px-Arms_of_the_House_of_Mortimer.svg.png 로저 모티머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시몽 드 몽포르
파일:800px-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5]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앙리 드 몽포르†[6]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7]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기 드 몽포르[8]
파일:135px-Arms_of_Mountford_(of_Beaudesert,_Warwickshire).png 피에르 드 몽포르†[9]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 주니어[10]
파일:300px-Arms_of_John_Segrave,_2nd_Baron_Segrave_(d.1325).svg.png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파일:330px-Blason_Thomas_Le_Despencer.svg.png 위그 르 데스펜서†
결과
의회민주주의의 초석, 에드워드 1세의 왕권강화.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1. 개요[편집]


제2차 남작 전쟁(1263-1267)은 처음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자신이 이끌고 나중에는 그의 아들인 미래의 왕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왕실 세력에 대항하여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의회파 귀족군 간의 영국 내전이다. 남작들은 왕이 측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작 평의회로 통치하도록 강요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남작 정권의 초기 성공을 강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의회의 사회적 기반을 넓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년 남짓한 통치 끝에 시몽 드 몽포르는 왕당파 군대에 의해 패사되었다.


2. 배경[편집]


헨리 3세대공위시대로 혼란에 빠진 시칠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차지하려 많은 돈을 쏟아붓고도 실패했다. 자세하게는 차남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삼게 하려는 공작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했고[11] 동생 콘월 공[12] 리처드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에도 올리려 했으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의 대립을 이기지 못하고 독일왕으로만 머물렀다.

한편 헨리 3세는 귀족들의 마그나 카르타의 강요와 섭정기간[13]동안 강해진 귀족들의 권세를 꺾으려고 로마 교황에게 신종하고 교회를 이용해 귀족들을 견제하여 아버지 존 왕 때 잃은 절대권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내부의 불만이 커지는 건 막지 못했다.

특히 헨리 3세의 매제였던 시몽 드 몽포르[14]가 앞장서서 귀족들의 요구서인 옥스포드 조례를 왕에게 전달하였으나 왕은 지킨다고 말만 할 뿐 실제론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강력한 통치를 이어나갔다. 이에 귀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그리하여 1264년 시몽 드 몽포르를 지도자로 결집한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란이 터졌다.


3. 전개[편집]


반란에 놀란 헨리 3세는 동생 콘월 공, 장남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친정에 나서며 몽포르의 반란군에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루이스 전투에서 국왕군이 크게 패하여 셋 다 포로로 잡히고 최초의 의회를 여는 데 동의하였으며 이로써 잉글랜드 왕가는 의회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듬해 맏아들 왕세자 에드워드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왕을 따르는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15]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시몽 드 몽포르를 이브샴 전투에서 패사시킴으로써 권력을 회복하였다. 그렇지만 헨리 3세는 이미 고령인 데다가 위신이 많이 깎였고 건강도 좋지못해 장남인 왕세자 에드워드 1세에 국사를 맡겼다.


4. 결과[편집]


시몽 드 몽포르가 왕을 포로로 잡고 귀족들의 의회를 최초로 연 것을 영국 민주주의사의 중요한 발전으로 보기도 한다.

잉글랜드는 원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였지만 이후로는 국왕끼리의 주종 관계만 유지할 뿐 완전히 별개의 역사를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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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리 3세의 차남[2]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공작, 독일왕[3] 리처드의 아들[4] 1265~1267[5] 1263~1265[6] 시몽 드 몽포르의 장남[7]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8] 시몽 드 몽포르의 사남[9] 시몽 드 몽포르의 몽포르 가문과는 별개의 가문이다. 레스터를 영지로 둔 몽포르 가문과 달리 이 몽포르 가문은 워릭셔 근처의 보데저트 성을 영지로 두었다.[10] 험프리 드 보훈의 장남[11] 시칠리아 섭정 만프레디가 왕위를 찬탈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헨리 3세와 프랑스왕 루이 9세에 접근해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는데 헨리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와 루이 9세의 동생 앙주-프로방스 백작 샤를이 경쟁하여 최종적으로 샤를이 시칠리아 왕위를 가질 명분을 받게 되었다.[12] 당시 잉글랜드에는 Duke라는 작위가 없었고 대신 그 역할을 현재의 백작을 지칭하는 Earl이 수행했다.[13] 아버지 존 왕이 급서하자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20세에 친정하기까지 윌리엄 마셜 등이 섭정을 맡았다.[14] 헨리 3세의 여동생인 앨리너 공주가 몽포르의 아내이다.[15] 몽포르가 권력을 독점하며 독선적인 일처리를 하는 바람에 귀족들의 반발을 크게 산다. 특히 몽포르의 정적인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앞장섰다.